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8:18:27

밀린코 판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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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가 앰버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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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colbgcolor=#ffffff,#191919> 밀린코 판티치
Milinko Pantić
Милинко Пантић
출생 1966년 9월 5일 ([age(1966-09-05)]세)
유고슬라비아SFR 세르비아SR 로즈니카
국적
[[세르비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직업 축구 선수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FK 파르티잔 (1985~1991)
NK 올림피야 류블랴나 (1991)
파니오니오스 FC (1991~1995)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1995~1998)
르아브르 AC (1998~1999)
파니오니오스 FC (1999~2000)
감독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B (2011~2012)
FC 바쿠 (2013~2014)
다롄 이팡 (2016)
국가대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10px-Yugoslav_Football_Federation_1990.png 2경기 (유고슬라비아 / 1996)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
5. 여담

[clearfix]

1. 개요

세르비아(舊 유고슬라비아 SFR)축구 선수 출신 감독.

2. 선수 경력

1985년 프로 데뷔한 이래로 줄곧 자국 리그인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에서만 뛰었으나 1991년에 발발한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인해 조국을 떠나 그리스 알파 에스니키파니오니오스 FC로 이적했다. 그곳에서 4시즌간 팀의 강등을 막고 리그 득점 순위 3위에 오르는 등 수준급 활약을 펼쳤다. 1995-96시즌을 앞두고 FK 파르티잔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라도미르 안티치 감독으로부터 이적 제의를 받게 되는데, 당시 29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였고 자신이 지금껏 뛰었던 유고슬라비아 리그와 그리스 리그보다 수준 높은 스페인 리그였기 때문에 부담감에 잠시 고민하고 망설였지만 결국 빅리그 도전을 택하게 된다. 이적료는 €500K.

1995년 9월 3일에 치러진 라리가 1라운드 레알 소시에다드전에 선발로 출전하면서 데뷔전을 치렀고 그 경기에서 데뷔골까지 기록했다. 이후 별다른 적응기 없이 금세 리그 정상급 미드필더로 발돋움했고 키코, 디에고 시메오네, 류보슬라프 페네프, 호세 루이스 카미네로 등과 함께 맹활약하며 구단 사상 첫 리그와 코파 델 레이 더블에 크게 공헌했다. 특히 코파 델 레이에서 7골을 넣어 대회 득점왕을 차지했는데 7골 중 4골은 준결승 발렌시아 CF전에서의 3골, 결승 FC 바르셀로나전에서의 결승골로 아틀레티코가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골들이었다.

이 시기의 활약에 힘입어 생애 처음으로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A매치 2경기를 치렀으나 드라간 스토이코비치, 데얀 사비체비치와 같은 유고 역대급 선수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제치고 대표팀의 핵심이 되기엔 무리가 있었다.

1996-97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5골을 기록하는 활약으로 팀의 8강을 이끌었고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에 등극한 최초의 아틀레티코 선수가 되었다. 또한 코파 델 레이 8강 2차전 바르셀로나 캄 노우 원정 경기에서 혈혈단신으로 무려 4골이나 터뜨리며 캄 노우 원정에서 4골을 넣은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판티치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호나우두, 루이스 피구 등에게 연달아 실점하며 4:5로 역전패했고 결국 1, 2차전 합산 스코어 6:7로 8강에서 탈락하는 고배를 마셨다.

1997-98시즌에는 노쇠화로 인한 기량 하락과 잦은 부상, 그리고 주니뉴 파울리스타의 합류로 이전 두 시즌 만큼의 활약은 보여주지 못했으나 팀의 UEFA컵 4강에 기여했다. 1997-98시즌을 마지막으로 은사인 안티치 감독이 감독직에서 물러나자 판티치도 프랑스의 르아브르 AC로 이적했다. 그리고 이후 아틀레티코는 서서히 암흑기를 맞이하는데...

단 2~3시즌의 짧은 활약이었지만 워낙 임팩트가 강했고 뚜렷한 족적을 남긴 선수라 이후 한 동안 아틀레티코에서 등번호 10번을 단 선수들은 어김없이 판티치와 비교를 당해야만 했다.

1999-00시즌 종료 후 친정팀 파니오니오스 FC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주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지만 측면 미드필더와 윙어로도 많이 뛰었다. 양발잡이로 가장 큰 장점은 킥과 슈팅 능력. 아틀레티코의 프리킥과 코너킥 전담 키커였으며 중거리 슈팅으로도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또한 공격형 미드필더답게 볼을 다루는 능력이나 패서로서도 수준급이었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여담

  • 폴 램버트가 자신을 가장 힘들게 했던 선수 중 한 명으로 꼽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