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채만식이 1948~1949년 발표한 중편소설.2. 줄거리
광복이 된 어느 날 주인공은 친구 김 군이 경영하는 신문사를 방문했다 윤 군을 만난다. 윤 군은 주인공이 친일 행위를 한 것을 경멸하며 비난한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지만, 김 군이 대신 나서 윤 군의 말에 반박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농민들 대부분이 일제에 잘 보이기 위해 공물을 낸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강제와 협박에 못이겨 공물을 낸 것처럼, 자신과 같은 대다수의 글쟁이 또한 그런 일제의 등쌀에 못 이겨 그런 것이다. 그것이 죄는 죄이지만, 자발적으로 일제에 충성하려고 달려들었던 이들과는 다르게 봐야 할 것이며, 친일파를 처단하는 것에 있어서도 전후사정을 잘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3. 평가
3.1. 윤 군
친일 행위를 한 주인공을 비난하는 윤 군의 묘사가 독자들에게 좀 반감을 주는 면이 있다. 가령 윤 군은 친일을 안 해도 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다. 더러운 꼴 안 보고 거기 안 굽히고 살아도 될 정도의 상황이 된다는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는 걸 세상 좀 살아 본 사람들은 알기 때문에 윤 군의 모습이 마냥 좋게 보이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복에 겨운 줄도 모르고 하는 소리 아니냐는 것이다.그런데 그것 때문에 채만식이 이 글을 쓴 이유가 반성인지 변명인지가 더 모호해지는 문제도 있다.
3.2. 작가 본인과의 관계
자신의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의 과거를 반성하고 있는 최초의 소설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때문에 이 소설의 평가 역시 작가의 친일 행적과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채만식은 이 소설을 통하여 일제 치하에 활동했던 지식인들의 고뇌를 그렸고 자신 같은 지식인들이 어쩔 수 없이 일제에게 협력했다고 변명하였다. 하지만 친일 행위에 빠지게 되는 과정을 마치 수렁 같았다고 묘사하면서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 그런 행위를 하면서 심중에서 일어나는 자괴감을 작중에서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이광수처럼 반성을 빙자한 자기합리화나 한다고 비판받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잘못을 계속 의식하면서도 자신을 찾아온 조카에게 무관심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작중 화자의 모습을 보면 변명만은 아니라고 보는 평가가 많다.
사실 농민들이 어쩔 수 없이 공물을 낸 것처럼,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가벼운 친일을 한 것도 비난만 할 수는 없는 것은 맞다. 문제는 악질 친일파들이 자기합리화를 하려고 이런 논리를 끌어 써서 문제이다.
3.2.1. 다른 인물과 비교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대놓고 '나 친일했소 잘못했소'하고 공개적으로 나선 인물은 채만식이 거의 유일하다고 보면 된다. 반성조차 한 이가 드물다. 대부분의 친일파들이 자신들의 친일 행각을 숨기려고 했을 때, 채만식은 오히려 양심선언을 한 격이다. 그 이외의 사례라면 다음과 같은 인물이 있다.- 최린: 재판에서 친일파임을 인정하고 어떠한 벌도 달게 받겠다고 했다. 또한 자기 행위를 계속 변명하던 이광수에게 입 닥치라고 일갈했다.
- 김동환: 스스로 친일파임을 인정하고 반민특위에 자수했다.
- 이효석: 일제강점기에 세상을 떠나긴 했어도 병든 가족을 살리려는 생계형 목적이 있어 정말 어쩔 수 없었다는 면피 요소가 있다. 스스로도 매국노가 되었다고 부끄러워하고 살아생전 한탄했다.
- 현석호(1907~1988): 제2공화국 시절의 국방부 장관이다. 그는 해방 직전 충청남도 광업부장으로 있었는데 1945년 9월 중순 충남지사로 부임한 미군정 육군 대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그는 당시 지사에게 "나는 일제에 협력한, 고급 관리로서 일한 친일파이기 때문에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 이항녕(1915~2008): 제9대 문교부 차관을 지낸 전 홍익대학교 총장이자 법철학자이다. 이항녕은 1939년 고등문과시험에 합격해 1941년 하동군수,1942년 창녕군수를 지냈다. 해방 후 경상남도 사회과장으로 발령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표를 제출하고 이후 부산 청룡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부근에 있는 범어사에서 밤마다 수양을 했다고 한다. 1991년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사죄해 온 것으로 유명했다.
- 이종찬, 김석원: 스스로를 민족의 죄인으로 여겨 해방 후 창군 참여를 거부하고 자숙했다. 김석원은 다른 사람들의 권유를 이기지 못하고 속죄하는 심정으로 창군에 합류했고, 두 사람 다 독재 정권에는 협력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