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9:18:21

미힐 더라위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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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네덜란드 가톨릭 방송 KRO가 네덜란드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인 100명'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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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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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142B><colcolor=#fff> Michiel de Ruyter
파일:미힐 더라위터르.jpg
생몰년도 <colbgcolor=#fff,#1f2023>1607년 3월 24일 ~ 1676년 4월 29일
출생지 파일:네덜란드 공화국 국기.svg 네덜란드 공화국 제일란트주 플뤼싱[1]
사망지 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섬 동남부 시라쿠사
소속 네덜란드 해군
복무기간 1652년 ~ 1676년
최종계급 상급중장
주요참전 포르투갈 독립 전쟁
영란전쟁

1. 개요2. 생애3. 창작물에서
3.1. 네덜란드 영화 <제독: 미힐 드 로이테르>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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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활약한 네덜란드제독.

상인 출신이었지만 위기에 빠진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에 나간 인물로, 최후에는 그의 인기를 시기한 스타트허우더(빌럼 3세)로부터 사실상 죽음과 다름 없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따르다가 전쟁터에서 전사한 네덜란드의 영웅이다.[2]

특히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때 메드웨이 강 하구에 정박해 있었던 영국 함대를 기습하여 영국 해군을 초토화시키고, 템즈 강을 봉쇄하여 제2차 영란전쟁의 전황을 유리하게 이끈 것으로 유명하다.

2. 생애

플뤼싱(플리싱언)에서 맥주 운반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창기의 기록은 불분명하나 약 11살 무렵부터 해군 생활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본격적으로 그의 이름이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은 1622년으로, 마우리츠 판나사우스페인 군대와 싸운 것이 그의 첫번째 전투 기록이다. 그리고 1631년 잠시 상회에 근무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에 결혼도 해 딸을 낳기도 했다.[3]

1635년에 부유한 지역 유지의 딸과 재혼했고, 1637년에는 민간 상선의 선장이 되어 됭케르크 등에서 해적을 비롯한 침입자들을 막아 냈다. 그리고 1641년엔 네덜란드 해군의 소장 신분으로 포르투갈 독립 전쟁에 파견되어 포르투갈 해군을 지원했다. 그리고 1642년부터 1652년까지 10년 동안 직접 를 사들여 모로코서인도 제도 사이의 거래를 담당해 부를 축적했다. 이때 기독교 노예들의 경우, 몰래 해방시켜주기도 했다.

한편 1650년에 재혼한 아내도 사망하자 1653년, 미망인이었던 Anna van Gelder와 세번째 결혼을 하고, 자신의 고향인 플뤼싱에 집을 산 후 남은 여생을 그곳에서 편하게 지내려고 했다. 하지만 조국 네덜란드에 닥친 운명은 라위터르를 평범했던 상인 1로 남겨두지 않았다.

2.1. 영국-네덜란드 전쟁

2.1.1. 제1차 영란전쟁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의 무역로를 두고,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터지자 라위터르는 참전 요청을 받았다. 바다 생활에서의 은퇴를 선언했던 그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당시 네덜란드 해군은 라위터르를 중장으로 임명했고, 1652년부터 1654년까지 2년 동안 네덜란드 해군을 이끌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한편 네덜란드 해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마르턴 트롬프(Maarten Tromp)[4]가 지휘하던 네덜란드 함대는 잉글랜드 함대와의 해전에서 큰 공훈을 세웠으며 특히 1653년 7월 31일에 일어난 스헤베닝언(Scheveningen) 해전에서는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해전에서 마르턴 트롬프가 전사하면서 지휘부에 공백이 생기게 되었고, 마르턴 트롬프의 아들 코르넬리스 트롬프(Cornelis Tromp)를 지지하는 여론이 높아지게 되었는데, 당시 네덜란드 총리였던 요한 더빗(Johan de Witt)은 그의 친구 미힐 더라위터르를 네덜란드 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나중에는 상급중장(luitenant-admiraal-generaal)[5]의 계급을 주었다.

2.1.2. 제2차 영란전쟁

라위터르는 효과적인 신호체계를 만들어 네덜란드 해군의 전투력을 강화시켰다. 1667년 6월 1일에는 4일 전투(Four Days' Battle)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6월 9일에는 잉글랜드의 채텀 인근에서 일어난 메드웨이(Medway) 기습을 통해 영국 선박 13척을 불태워 버리고 템스강의 하구(河口)를 봉쇄했다. 특히 이 메드웨이의 기습은 '영국 해군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전투'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네덜란드 함대는 영국 함대를 전멸시켰다.
파일:메드웨이 기습.jpg
1667년 이전, Van Soest, Raid on the Medway(메드웨이 기습)
It was one of the worst defeats in the Royal Navy's history.
(메드웨이 기습은) 영국 해군 역사상 최악의 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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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R. 힉맨}}}
영국 해군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은 자신들의 앞마당(home water)에서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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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스 조지 프랭크(Horace George Franks)}}}

안개가 자욱히 낀 날에 이루어진 이 기습은 셰피 섬(Sheppey)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진행되었는데, 라위터르는 메드웨이에 위치한 영국 해군을 향해 돌격을 명령했다. 이후 라위터르가 이끄는 네덜란드 해군은 철저한 신호체계에 따라 영국 해군을 가지고 놀았으며, 그 결과 영국이 보유한 4척의 대형 전열함 중 무려 3척[6]을 아작내고, 영국군 기함이었던 로얄 찰스(Royal Charles) 호를 포획하는데 성공하여, 네덜란드로 복귀한 후 전시함으로 활용했다. 참고로 이때 로얄 찰스 호는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찰스 2세를 의미했다. 한마디로 영국에게 엄청난 한방을 먹인 데다가 치욕까지 안겨 준 것이었다.

자신들의 수도 코앞에서 적들의 선박이 날뛰고 있음을 지켜본 영국은 충격을 받고, 결국 브레다에서 네덜란드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2.1.3. 제3차 영란전쟁

그러나 네덜란드 역사에서 재난의 시기(Rampjaar)라고 불리는 1672년 8월 21일 요한 더빗은 빌럼 3세와의 정쟁에서 패배해 죽임을 당했다.[7] 라위터르는 그의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를 잃었지만 빌럼 3세는 그를 밀어주었고, 외•내부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라위터르는 막중한 임무를 다시 맡게 되었다.

영국은 1672년 프랑스와 손을 잡고 다시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하여,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육지에서는 프랑스의 군대가 진출해 네덜란드 요새를 각개격파했고, 영국은 프랑스와의 연합함대를 이끌고 침공해왔다. 하지만 라위터르가 이끄는 네덜란드 해군은 육군과 달리 연전연승을 이어나갔다. 대표적인 전투로 1672년 5월 28일에 일어난 솔베이(Solebay) 해전[8]1673년 8월 21일에 일어난 텍설(Texel) 해전이 있으며, 네덜란드 해군이 잉글랜드-프랑스 연합함대를 연달아 물리치면서 제3차 영란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일조했다.

2.2. 전사

전쟁이 끝나면 인기 많은 전쟁 영웅은 정치인의 시기를 받게 된다. 영란전쟁은 결국 프랑스에게 유리한 쪽으로 협상이 진행되었고, 빌럼 3세는 자신보다 더 높은 인기를 받는 라위터르를 시기해 1675년, 스페인 해군을 도우라는 명령과 함께 지중해로 파견했다.


1676년 4월 22일 지중해에 위치한 시칠리아 섬의 아우구스타(Augusta)에서 일어난 해전에서 네덜란드-스페인 연합 해군 진영에 참전하여 전투를 벌이던 도중, 프랑스 해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마지막 전투였던 아우구스타 해전에서는 위 영상에도 묘사가 된 것처럼 포탄에 다리가 잘려나가 전사했다. 다만 영화에서는 즉사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 사망한 날짜는 1주일 후인 4월 29일로, 다리가 잘려나간 이후 치료를 받고 며칠 더 살다가 상처가 감염되며 사망했다.

그가 전사했다는 소식에 모든 네덜란드 국민들이 슬퍼했고, 그의 시신이 네덜란드로 돌아와 암스테르담에 안장되었을때는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현재 그의 고향인 블리싱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3. 창작물에서

3.1. 네덜란드 영화 <제독: 미힐 드 로이테르>

  • 2015년에 그의 전기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제목은 <The Admiral-Michiel de Ruyter>이다.[9] 네덜란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는 등 네덜란드 내에서는 흥행에 성공했다. 한국에서도 <제독: 미힐 드 로이테르>라는 이름으로 개봉했다. 위에 언급된 총리 요한 더빗 형제의 끔찍한 살해 장면도 자세히 나온다.

4. 여담


[1] 現 플리싱언[2] 무명이었다가 전란을 맞아 바다에서 나라를 구하고, 그를 시기한 국왕에 의해 핍박당하며 전사한 것이 이순신 장군과 비슷하다.[3] 이때 아내는 딸을 낳다가 사망했다.[4] 네덜란드 해군의 전설적인 제독들 중 한 명으로,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후반부에 스페인의 아르마다를 격파하여 네덜란드의 독립에 큰 기여를 한 명장이었다.[5] 더라위터르를 위해 만들어진 계급으로 다른 중장들의 상급자로서 행동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더라위터르 외에는 코르넬리스 트롬프만이 이 계급을 받았다. 이후에도 네덜란드 해군은 오로지 왕실 인사에게만 대장(Admiraal) 계급을 주었고, Admiraal 계급은 1956년 이후로 사실상 폐지했다. 현재 네덜란드 해군의 대장은 Luitenant Admiraal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6] 로얄 런던 호, 로얄 제임스 호, 로얄 오크 호였다. 포츠머스에서 정박중이었기에, 그 자리에 없었던 로얄 소버린(Royal Sovereign) 호만이 겨우 살아 남을 수 있었다.[7] 정확히 말하면 본인이 만든 홀란트 주의 스타트허우더 직위를 폐지한 조칙을 빌럼파의 압력으로 스스로 취소하고, 빌럼 3세를 해하려는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런데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알 수 없는 폭도들에 의해 거리에서 형 코르넬리스와 함께 린치를 당해 살해되었고, 폭도들은 형제의 시신을 거꾸로 매달아 얼굴 가죽을 벗기고 거세한 뒤 내장을 전부 들어내고 을 구워먹었다. 이들의 시신은 화가 얀 더반(Jan de Baen)이 그림으로 그렸는데# 이 그림과, 당시 폭도들이 도려낸 요한 더빗의 혀 및 손가락은 현재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보존하고 있다.[8] 당시 영국함대의 총사령관이었던 제임스 2세(당시는 요크 공작)는 네덜란드 함대의 맹공으로 여러번 기함을 옮겼고, 초대 샌드위치 백작 에드워드 몬태규는 네덜란드 함대의 화공으로 역시 기함을 포기한 뒤 다른 함선으로 피신하기 위해 보트에 탔다가 보트가 뒤집혀서 전사했다.[9] 여담으로 미힐 더라위터르와 비슷한 삶을 살다간 이순신을 다룬 영화 <명량>의 수출명이 <The Admiral: Roaring Current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