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3 17:14:14

마이너 화이트

<colbgcolor=#000><colcolor=#fff> 마이너 화이트
Minor Martin White
파일:Minor_White.jpg
출생 1908년 7월 9일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
사망 1976년 6월 24일 (항년 67세)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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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사진가
활동 1937년 - 1976년
학력 미네소타 대학교 (식물학, 영문학 / 학사)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사진가로서의 경력 시작2.3. 중기 경력2.4. 후기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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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메라는 우선 자기 발견의 수단이자 자기 성장의 수단이다. 예술가는 할 말이 하나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 마이너 화이트
미국의 사진가이자 교육자. 풍경, 건축물, 남성을 세밀하게 흑백으로 인화한 사진들로 유명하고, 형이상학적이며 신비주의적인 사진을 다수 찍어내며 미국 모더니즘 사진의 시작에 큰 족적을 남겼다. 20세기 미국 최고의 사진가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다.

2. 생애

2.1. 초기

1908년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찰스 헨리 화이트와 플로렌스 메이 마틴 화이트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화이트는 외조부모와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들의 넓은 정원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으며, 이는 후에 대학에서 식물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하는 것에 영향을 미쳤다. 1915년 아마추어 사진가인 할아버지로부터 인생 첫 카메라를 선물받는다. 1922년부터는 부모가 별거를 하기 시작했고, 그 기간동안 화이트는 어머니와 외조부모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화이트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남자에 관한 감정을 일기장에 적었다. 그런데 1927년 그의 부모가 허락 없이 그 일기장을 읽어버렸고, 그는 여름 동안 집을 떠났다가 가을에 돌아와 미네소타 대학교에 입학해 식물학을 전공했다. 이후로 화이트의 부모가 그의 동성애에 대해 다시 언급하는 일은 없었다.

1931년 화이트는 대학 졸업요건을 채우지 못하고 1년 동안 학교를 떠났는데, 그는 이 기간 동안 글쓰기에 몰두했다. 이후 그는 1970년까지 거의 평생에 걸쳐 일기, , 사진에 대한 비평 등을 계속해서 기록했다.

1932년 화이트는 대학으로 다시 돌아가 식물학과 글쓰기를 공부하고 1934년에 졸업했다. 그 다음 학기부터 식물학 대학원 수업을 들어봤으나, 스스로 식물학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닫고, 이후 2년 동안 자신만의 작문 기술을 탐구했다.

2.2. 사진가로서의 경력 시작

1937년 후반, 화이트는 시애틀로 이사하기로 결정하고는 35mm 아르거스 C3 카메라를 구입한 채 버스에 탔다. 그러나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 들러보곤 그곳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이후 2년 반 동안 심도 있게 사진을 탐구하며, 소규모 청년들에게 사진을 가르치기도 했다.

1940년 화이트는 오리건 주 동부에 있는 라 그란데 아트센터에서 사진을 가르치기 위해 고용되었다. 그는 빠르게 자기 작업에 몰두했고, 일주일에 3일은 수업을 했다. 2년 후 그는 사진잡지 ‘American Photograhy’에 사진에 대한 자신의 첫 번째 기사를 실었다.

화이트는 1941년 말, 라 그란데 아트센터에서 나와 포틀랜드로 돌아가서 상업사진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MoMA에서 열린 ‘Image of Freedom’ 전시회에 그의 사진 3장이 걸렸고, 전시회가 끝날 무렵 MoMA는 그의 작품 3장을 모두 구입하여 공개 컬렉션에 추가했다. 이듬해 포틀랜드 미술관에서는 그의 첫 1인전이 열렸고, 그가 오리건 동부에서 찍은 4장의 사진이 전시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며 1942년 4월 화이트는 미군에 징집된다.

화이트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첫 2년을 하와이오스트레일리아에서 보냈고, 후에 필리핀 남부의 정보부 국장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거의 사진을 찍지 않았고 글쓰기에만 몰두했으며, 자신의 성 정체성을 완전히 숨겼다. 또한 고등학생 때부터 영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1943년 부활절 일요일에 군종 신부로부터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1]

종전 이후 화이트는 뉴욕으로 여행을 떠났고 컬럼비아 대학교에 등록했다. 그는 뉴욕에 있는 동안 MoMA에 새로 형성된 사진부서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던 버몬트 뉴홀과 낸시 뉴홀[2]을 만나 친분을 쌓았다.

2.3. 중기 경력

1946년 2월 화이트는 뉴욕에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를 처음으로 만나게 됐고, 스티글리츠와 대화하며 그의 사진이론을 이해하고 수용하게 됐다. 한 번은 화이트가 스티글리츠에게 ‘자신이 진지하게 사진가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지’에 대한 의심을 표명했는데, 이때 스티글리츠의 질문과 대답이 꽤나 흥미롭다.
스티글리츠: 당신은 사랑을 해본 적이 있나요?

화이트: 네, 해봤습니다.

스티글리츠: 그렇다면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화이트는 뉴욕에 머무는 동안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예술과 미학의 역사를 공부했으며, MoMA에서는 박물관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에드워드 스타이켄, 폴 스트랜드, 에드워드 웨스턴 등 당대의 주요 사진가들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당시 MoMA의 사진부서장이었던 스타이켄은 그에게 큐레이터 직책을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대신 캘리포니아 스쿨 오브 파인 아츠(CSFA)[3]에 새로이 만들어진 사진학과에 와달라는 안셀 아담스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는 7월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가 아담스와 같은 집에서 살았고, 아담스에게서 존 시스템(Zone System)과 네거티브 필름의 노출과 현상을 배웠다. 샌프란시스코에 머무는 동안 에드워드 웨스턴과는 더욱 친해지게 되었고, 웨스턴의 자연에 대한 애정은 화이트의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47년 중반까지 화이트는 CSFA의 주요 교사였고 개인적인 표현 사진을 강조하는 3년 과정을 개발해냈다. 그 후 6년 동안은 이모젠 커닝햄, 리제트 모델, 그리고 도로시아 랭을 포함한 당시 최고의 사진가들을 교사로 고용했다.

1949년 화이트는 작은 자이스 이콘타 B 카메라를 구입해 도심 속 거리 사진 시리즈를 시작했다. 그 후 4년 동안 월트 휘트먼의 시로부터 새로운 영감을 받아 약 6000장의 사진을 찍어냈다. 그가 'City of Surf'라고 불렀던 이 프로젝트는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 부두, 거리의 사람들, 다양한 퍼레이드와 박람회의 사진들을 포함했다.

1951년부터 52년은 화이트의 경력에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아스펜 연구소에서 열린 사진 학회에 참가했는데, 안셀 아담스, 도로시아 랭, 버몬트와 낸시 뉴홀, 프레데릭 좀머 등이 새로운 사진 저널을 만드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애퍼쳐 매거진(Aperture Magazine)[4]을 설립했고, 화이트는 자발해서 이 매거진의 편집장으로 승인받았다.[5]

1953년 화이트는 중국철학과 주역에 대해서 알게 됐고, 음양사상에 큰 관심을 가졌다. 같은 해 후반에는 CSFA 내에서 누군가가 화이트를 내쫓으려는 음모를 꾸몄고[6], 그는 이 음모를 알아차렸다. 점차 그의 강의시간은 줄어들었고, 그는 직장을 옮기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1955년 그는 CSFA가 정상화 되기를 기대하며 로체스터로 떠났고, 조지 이스트만 뮤지엄의 큐레이터로 일하던 버몬트 뉴홀의 조수로 취직했다. 로체스터 공과대학(RIT)에서는 시간강사로 일하며 일주일에 하루 학생들을 가르쳤다.

화이트의 사진 작업량은 강의와 편집 작업으로 인해 이 기간 동안 감소하게 됐다. 1955년 그는 완전히 교직에 몰두하게 됐고, 로체스터 공과대학의 새로운 4년제 사진전공 프로그램의 강사로 임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하이오 대학교인디애나 대학교에서도 수업과 워크샵을 진행했다. 그리고 동시에 동양종교와 철학 그리고 명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는 화이트의 남은 생애 동안 교육과 사진에 대한 접근 방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59년 화이트는 자신의 연작 'Sequence 13: Return to the Bud'의 사진 115장으로 조지 이스트만 뮤지엄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7] 이 전시회는 후에 오리건 주포틀랜드 미술관에서도 열리게 됐고, 그는 포틀랜드에서 10일간 모든 비용이 지불되는 워크샵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초대받았다. 그는 이 자금을 활용하여 풍경사진을 찍고 전국의 자연 연구를 했다. 포틀랜드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로체스터에서 학생들이 정규 세션, 집안일, 이른 아침운동과 같은 작업을 통해 학습할 수 있는 풀타임 주거 워크샵에 대한 아이디어를 개발해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이런 스타일의 주거 교육을 계속했고, 심지어 1960년대 초에는 최면을 연구해 최면이 사진을 경험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되도록 학생들을 가르쳤다.

화이트는 이후 몇 년 동안 로체스터 공과대학에서 학생들을 지속적으로 가르쳤고, 동시에 미국 전역을 여행하며 사진을 찍었다. 1962년에는 친구이자 동료인 마이클 호프만을 만나게 됐고, 후에 호프만은 애퍼쳐 매거진의 편집장이 되었다. 또한 그는 화이트의 유언 집행자로도 지목되었다.

2.4. 후기 경력

1965년 화이트는 보스턴 근처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서 시각예술의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계하는 데에 도움을 요청받았다. 건축학부 객원 교수로 임명된 후, 화이트는 보스턴 지역으로 이사하여 알링턴 교외에 방이 12개 있는 집을 구입해 그곳에 스튜디오와 암실 그리고 학생들이 살 수 있는 방을 마련했다. 이후 그는 사람들이 사진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을 계속해서 탐구했고, 게슈탈트 심리학의 기술을 그의 가르침에 통합하기 시작했다.

1966년부터 화이트는 주기적으로 가슴에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의 의사는 그가 협심증을 앓고 있는 것으로 진단했다. 그의 증상은 남은 생애 동안 계속되었고, 그것은 그가 영적인 문제와 명상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삶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점성술로 눈을 돌렸고, 그에 대한 그의 관심은 매우 중요해져서 그는 모든 학생들에게 그들만의 점성술을 완성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화이트의 비정통적인 교수법은 꽤나 잘 확립되었고, 그의 워크샵을 거친 학생들은 그 경험에 의해 신비화되고 계몽되었다.

화이트는 건강이 나빠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광범위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자신만의 사진을 만들었다. 그는 글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사진을 진정으로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상태의 의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다. 1971년 그는 그의 컬러 사진을 더 탐구하기 위해 푸에르토리코로 여행을 떠났고, 1974년과 1975년에는 페루로 가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75년 화이트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과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기 위해 영국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몇 주 동안 정신없이 바쁜 여행 일정을 계속했고, 그곳에서 심포지엄에 참가하기 위해 투손에 있는 애리조나 대학교로 직접 날아갔다. 거의 6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보스턴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심장마비를 겪었고 몇 주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이때부터 화이트는 자신의 내면에 더욱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고,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다.

1976년 6월 24일, 화이트는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중 두 번째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개인 기록 보관소와 서류들, 그리고 많은 사진 컬렉션을 프린스턴 대학교에 남겼다.


[1] 그러나 전쟁을 겪으며 인간의 에 대해 고뇌하게 되었고, 결국 믿음을 잃었다. 그럼에도 영적인 것에 계속해서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2] 버몬트 뉴홀의 아내[3] 현재의 SFAI[4] 미국 현대사진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저널이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진잡지 가운데 하나.[5] 화이트는 1975년까지 애퍼쳐 매거진의 편집장으로 남았고, 보수를 받지 않았다[6] 정확히 누가, 왜 그랬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7] 그때까지 열린 그의 전시 중 가장 큰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