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마속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삼국지연의》가 아닌 《정사 삼국지》의 내용을 기초로 한다.2. 초기 생애
젊은 나이에 형주종사로 임용되어 유비를 따라 촉에 들어갔고 이후 성도현령, 월수태수직을 역임했다. 재주와 기량이 빼어났고 군략 논하기를 즐겨 제갈량은 그를 특출나게 여겨 아꼈으나, 유비는 그를 크게 써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 평했다. 특히 백제성에서 임종하기 직전 제갈량에게 "마속은 말이 그 실제를 과장하니, 크게 기용할 수 없소. 그대가 이를 살펴보시오."라고 일러두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런 유비의 말에도 크게 개의치 않고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삼아 가까이 두고 밤낮으로 대화를 나누며 신임하였다. 하지만 둘 중 누가 마속을 제대로 평했는지는 오래지 않아 드러나게 된다. 유비의 사람 보는 눈이 굉장함을 알려주는 대목.제갈량이 마속의 형 마량과 형제 같은 관계였던 만큼[1] 이릉대전에서 불행하게 전사한 그의 아우를 배려해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3. 남만 정벌
남만 평정전에서 제갈량에게 마음으로 공격하여 위무할 것을 건의하고, 제갈량은 이를 받아들여 남만인들의 마음을 공략해 복속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 이후 1차 북벌 이전까지 특별한 기록은 없다. 그 사이 군대를 지휘하거나 특정한 임무를 맡아 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제갈량 밑에서 참군이라는 벼슬까지 하면서 놀고 먹었을 리는 없으므로, 군사 행정이나 진언 등 참모 업무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제갈량은 별탈없이 제몫을 해낸 마속을 보고 '마속을 크게 쓰지 말라'는 유비의 말을 서서히 신경쓰지 않게 되었을 것이다.여기까지는 좋았으나, 이 다음부터 마속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다가 한 방에 무너지게 된다.
4. 가정의 패전
천수, 안정, 남안 3군을 점거하며 성공적으로 진행되던 1차 북벌 때 주위에서는 오의 혹은 위연 등의 경험 많은 장수를 가정 방어전에 투입하자고 추천했으나 제갈량은 마속에게 왕평, 장휴, 황습, 이성 등을 부장으로 딸려주고 상당 수의 군세와 함께[2] 가정에 배치한다.그런데 여기서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무시하고 길목에 세워야 할 방어진지를 산 꼭대기에 세우는, 전쟁사상 다시 없을 바보짓을 한다. 부장 왕평이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이마저도 무시해버린다. 결국 왕평은 1,000명의 병력을 따로 빼서 보조 진채를 세운다.
위의 명장 장합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고 산 위의 진채를 공격하는 대신 산을 통째로 에워싸 포위하고 보급을 끊어 촉군을 말려죽였다. 산 위의 마속군은 식수와 식량이 다 떨어져, 그 뒤 대부분은 말라죽고 나머지는 위군과의 전투에서 전멸한다. 생존자는 거의 없었고 마속은 몇몇 부관들과 함께 겨우 도망쳤다. 이때 가정을 지키던 촉군 중에서 따로 빠졌던 왕평의 부대만이 그나마 무사했던 정도였다.[3] 이로 인해 가정을 잃게 되면서 촉군은 한중으로 퇴각하였고, 이로써 3군의 호응에 힘입어 자신있게 막을 올린 촉한의 1차 북벌은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4.1. 마속의 실책
일단 전략, 전술적으로 고지대를 점거하는 이점은 크다.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쪽은 투사무기의 사거리와 위력이 비약적으로 늘고 적 부대에 대한 완벽한 감제가 가능하며 험난한 지형조건을 이용해 성채처럼 방어에 임하기 쉽기 때문이다. 곳곳에 매복 병력을 배치해 좁은 산길을 오르는 적병을 덮치기에도 용이하다. 전면전을 벌일 때도 상대는 등반으로 힘이 빠지는 반면 이쪽은 내리막이라 힘이 적게 들어 유리하다. 자동화기가 널리 보급된 현대전에서도 감제고지의 이점은 크고, 그래서 한국전과 월남전에서도 고지를 뺏기 위한 전투가 숱하게 치러졌다.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적이 공격해줄 때의 이야기다. 즉 이 곳을 지나지 않으면 더이상 진행이 불가능한 보급로거나 하는 식으로 적이 고지대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일 때나 먹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산과 이어져 있거나 해서 적의 포위에 대비할 수 있어야 하며, 전투를 위한 충분한 수자원과 물자의 확보는 기본이다.[4] 특히 중국 서북부는 기본적으로 건조한 지역이므로 식수의 확보가 중요한 요소인데 마속은 이러한 전장 환경을 전혀 살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건과 대책 없이 산 위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해놨으니 거의 말려죽여 주십쇼에 가까운 배치인지라 위나라 명장 장합이 그냥 포위하고 말라죽을 때까지 기다려 가뿐하게 격파한 것이다. 물론 마속도 이에 대비해 물을 운반하는 급도를 준비하긴 했지만, 베테랑 장수인 장합은 그것도 손쉽게 끊었다.
인간은 3일 정도만 물을 마시지 못해도 생명에 지장이 생기며, 4일 정도면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고, 5일 이상 수분을 섭취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롭다. 특히 군인은 몸을 격렬히 움직이며 싸움을 하는 만큼 든든히 열량을 먹여주는 만큼 수분도 섭취를 해야 하니 하루이틀만 수분을 섭취하지 못해도 전투능력이 급감한다. 더군다나 인력으로 무거운 갑옷과 무기를 챙기고 이동하는 군대라면 더더욱 많은 물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5] 마속의 군대는 장합이 산 밑에서 급도를 끊고 포위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바로 물과 식량 문제로 전투력이 상실되었을 가능성이 높았으며, 이는 현실이 되었다.
가정의 산은 다른 산과도 이어져 있지 않고, 제대로 된 물줄기도 없으며, 옆에 멀쩡한 길이 있는지라 적이 그냥 무시하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위치였다. 감제의 이점이 있지만 전군을 거기다 배치시킬 필요는 없다. 그냥 대부분을 대로에 배치시키고, 관측소 정도만 세워 조기경보 효과를 노리거나 일부만 산등성이에 진채를 세우게 하고 기각지세를 이룬다면, 어느 한쪽이 공격받을 때, 다른 한쪽이 적의 취약점을 찌르는 식으로 수비 측에 굉장히 유리한 포지션을 점할 수 있다. 주변의 아군과 연계하고 있는 고지대에 위치한 병력은 소수일지라도 수배에 달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역사에 가정은 절대로 없는 것이지만, 이러했을 때는 말이 완전히 달라진다. 오자병법에도 나와 있듯이 한 명의 병사가 길목을 잘 지키면 천 명의 적을 떨게 할 수 있는 위치를 다 갖춘 지형이 바로 가정이다. 공명 역시 그 점을 염두에 두었을 테고.
만일 마속이 산 위에 전병력을 배치한 뒤 일부러 포위당하게 해서 죽을 각오로 싸우게 하는 배수진을 노렸다면 이는 그의 기본적인 자질을 의심해 보아야 할 정도의 중대한 판단착오다. 전술론에서 클라우제비츠가 말하듯 산은 패자를 위한 마지막 버팀목일 뿐이다. 산성 같은 진작에 갖춰진 방어 시설이 아닌 그냥 산 위에 포위당했는데 죽을 힘을 다해 싸워 이겼다는 역사적 예도 없고 반대로 정예군이 산 위에 포위당해 몰살당한 예는 역사에 무수히 나온다. 배수진으로 유명한 한신도 적군에게 약점을 보여서 적군이 진영에서 나와 공격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의도가 강했고, 실제 전황도 별동대가 적진을 점령해서 승리한 것이지 결코 배수진에 있는 군대가 죽을 각오로 싸워서 적군을 격파함으로써 승리한 것이 아니었다. 파부침주로 대변되는 거록대전 역시 전략적으로 후퇴라는 선택지를 제거하였을 뿐, 전술적으로 병사들을 사지에 내몬 게 아니었다. 게다가 병사들은 사지에 내몰린다고 자동으로 용기가 생기는 게 아니라 지휘관이 앞장서서 이끌어야 하며, 지휘관에 대한 복종, 신뢰가 있어야 한다. 거록대전에서 항우는 불세출의 용장인데다 병사들도 강동에서 항우를 따랐던 이들이었고, 계교 전투에서 원소도 모자를 벗어 던지며 저항 의지를 보였기 때문에 공손찬을 격퇴할 수 있었다. 새로 부임한 지휘관인 마속은 당연히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
왜 마속이 그런 중대한 착각을 했는지 정확한 심중은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병서에서 말하는 전력전술의 요지가 실전에서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고지대의 점거가 유용한 경우도 분명 있다. 한중 공방전 정군산 전투가 대표적이다. 법정의 계책으로 황충은 하후연보다 높은 곳을 장악하여 하후연의 진지를 훤히 내다보았고, 견디지 못하고 출진한 하후연은 황충의 군대에게 당했다. 그러나 정군산 전투는 가정 전투와 달리 산 위의 황충과 산 밑의 법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급과 식수를 충분히 받은 황충이 고지대를 점령해서 싸우는 계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주변의 아군 지원 없이 황충이 덜컥 고지를 점령해서 하후연을 공격했다면 그 또한 마속 못지않은 실책이 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전략을 치트키나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한데 마속은 그에 대한 비판적인 사고가 전혀 없었다. 아마 마속은 책으로 배운 건 많았으나 실전에서의 응용력과 지형 판단력이 떨어지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조괄을 비롯한 역사 속 수많은 똥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경험 없고 이론에 능통한 사람들 중에선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 외에도 마속은 장강 중류가 지나는 물이 풍부한 형주 출신이기 때문에 물이 부족한 중국 서북부의 상황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다.
4.2. 가정 전투의 중요성
위나라의 장안에서 출발한 군대가 천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3군데의 길을 택할수 있다. 첫째로 위수 타고 넘어가기가 있는데, 이 길의 경사 문제로 갈 수 없다. 그 다음이 농관고도로 넘어가기인데 또 산을 타야 하며 대군이 넘어오기에 적당치 않다. 따라서 위수 길과 유사한 이유로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세번째가 가정으로 가는 것인데 산을 아주 잠깐 넘어갈 뿐이고 위에서 설명했듯이 대군이 신속하게 넘어오려면 이 길을 선택해야 한다. 산길을 넘기엔 장합의 군세엔 기병들도 있어 곤란한 부분이 있다. 이제 장합군의 행군경로를 보자면 이들의 목적은 당연히 제갈량 북벌군 격파일텐데 장안에서 천수로 일직선상으로 가지 못하고 가정까지 곡선을 그리며 진군하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상황의 위급함을 볼 때 이 경로가 최단 경로임은 부정할수 없으며 동시에 가정 쪽에 위치한 긴 산맥을 대군을 이끌고 통과할 길 자체가 가정 말고는 있기가 힘든 것은 알 수 있다. 이미 가정까지 올라온 것이 꽤 우회한 것이기 때문이다.《자치통감》을 보면 마속에게 제군(여러 부대)을 감독하게 하여 선봉으로 가정에서 싸우라고 보냈다고 한다. 즉, 제갈량은 동쪽 가정을 통해 오는 위나라의 군세를 마속의 선봉대[6]와 처음부터 싸우게 할 작정이었고 실제로 장합은 다른 길이 아니라 가정길로 가는 것을 선택했으며 이는 제갈량의 판단이 들어 맞은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거의 모든 사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언이며 마속이 장합과 맞서는 선봉으로서, 진령산맥을 넘은 위군이 추가적인 진출을 시도할 때 결전의 장소로 촉한 수뇌부와 위나라 수뇌부 양측 모두 예측하고 있던 가정에 와서 성을 점거하지도 않고, 물을 버리고 산에 올라 부적절한 운용으로 패배했던 것도 모든 사료에서 교차 검증된다. 제갈량은 자신이 남긴 저술인 병요에서 "무릇 군대가 행군을 하고 진영을 구축할 때는 먼저 심복(지혜와 언변을 갖춘 간첩)이나 향도(그 마을 사람을 사용하는것)를 보내 전방의 상황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라고 신신당부 했다. 따라서 촉군의 선봉이 제갈량의 병요에 맞는 충분한 군 운용을 했다면 이런 정찰을 통해 제갈량이 보낸 목적지 가정이 적의 진출방향인 것을 알고 장합군이 넘어오려는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제갈량은 마속이라면 가정에서 충분히 싸울수 있으리라 봤던 것으로 보이는데, 주위에서 추천하던 인물이 위연이나 오의와 같은 촉군 최고위급 장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속에게 주어진 임무는 기본적인 전술적 우위를 토대로 기초적으로 주어진 절도를 준수하면서 적군의 움직임에 따라 자주적으로 판단하고 대응해야 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갈량이 따로 절도까지 마련해서 준 것도 이런 기본적인 논의에 바탕을 두고 마속이 그 일을 해주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해야할 마속의 역할은 아주 뚜렷했는데, 바로 처음 기곡에서 조운 / 등지가 했던 그 역할이다. 조운이 조진군을 막아주고 있는 사이, 최대한 전면전을 피하고 요지를 점령해 끈질기게 버티면서 제갈량이 후방을 정리하고 구하러 올 때까지 가정부터 흥국까지 이중, 삼중으로 틀어막으면서 지연방어를 하든가, 대치 상황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혹시나 장합이 다른 길[7]로 가려 들면 등짝을 노리면서 견제하는 것. 즉, 가정성은 위군이 육반산맥을 넘는 것을 막는 위치가 아니라 육반산맥을 넘은 위군이 추가적인 진출을 시도할 때, 상황에 따라 적에 맞서 길을 막거나 병력을 이끌고 후방을 끊어 진출을 저지하기 알맞은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가정성 진수는 길을 막을때 제갈량의 절도를 따르면서도 자신도 끊임없이 정보를 취득하여 각 지역에 올 수 있는 위군 병력을 예상하고 능동적으로 막아야 하기 때문에 흔히 생각하듯 난이도가 무작정 쉬운 것은 아니었다. 보통 제갈량이 마속을 띄워주기 위해 일부러 가정의 날로 먹는 쉬운 일을 맡겼다는 말이 있는데, 가정이 핵심 방어 지역이며 최우선으로 적이 올 가능성이 높은 곳이어서 잘 해서 성공하기만 하면 영웅이 되는 곳이긴 했지만, 절대 날먹 수준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일손이 딸리는 촉군의 인재상황이나 병력 규모상, 정확히 시키는 대로만 하는 편장 하나를 보낸 것이 아니라 마속 휘하에 전투 경험이 풍부한 왕평부터 시작해서 역사에 이름이 남은 네임드 부장을 넷이나 딸려 보낸 게 날먹이 아니라는 증거로, 제갈량은 그 인물들이 다 활약해줘야 가정에서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장합은 육반산맥을 넘어선 후 넓은 윗길로 가지 않고 좁은 가정으로 진입했고 이는 애당초 마속을 천수로 통하는 길 중 방어하기 쉬운 가정으로 먼저 보낸 제갈량의 예상대로였을 것이다. 왜냐면 아무리 시급한 상황이라지만 빠른 기동중에 배후의 적을 두고 우회하다간 윗길, 아랫길(가정길) 두 길이 만나는 지점인 흥국이 가정, 악양에 주둔한 마속 쪽에 더 가까우므로 장합이 육반산맥을 나올 때부터 정찰병으로 경로를 파악하고 처음부터 그곳의 좁은 길을 막거나, 급히 빠져나가는 병력의 등짝을 털어버리거나, 후미를 끊고 보급 / 연락선을 털어버리거나 하는 위험한 상황에 빠지기 때문에, 애초에 마속을 잡지 않고 우회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갈량의 군대가 칭하길 총 20만의 군대였다는 사서의 기록이 있었고 가정에서 왕평이 말 그대로 대패를 당해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해 무사귀환했음에도 1천호 이상의 피해가 났다는 점을 보면 마속의 군대는 이것이 충분히 가능할 정도의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기한 이유로 인해 결국 위군의 진군 루트는 마속 정면 격파로 고정될 수 밖에 없었는데, 가정의 길은 다른 길과 달리 규모가 어찌되었던 성이라는 방어적 이점이 있었고 또 가정에서부터 윗길과 아랫길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교차점이자 좁은길의 끝부분인 후방의 흥국까지 연계해서 수비할 수 있다. 또 장합이 알았을지는 의문이지만 청수현 북쪽 열유성에선 고상이 백업을 하며 아랫쪽 길을 막고 있어 아래쪽으로 갈 수도 없다. 사실 이건 장합이 가정으로 가면 마속이 버티는 사이 열유성에서 고상이 나와서 뒤를 털고, 열유성으로 가면 고상이 버티는 사이 가정에서 마속이 나와 뒤를 터는 가불기에 가까웠다.[8] 그렇게 시간을 질질 끌리다가 제갈량이 오면 게임 오버. 그렇다고 병력을 나누어서 한쪽은 가정을 공격하고 한쪽이 빠져나가면 마속도 성의 이점을 살려 일부 병력은 가정성을 방어하러 남겨두고 추격하여 뒤를 끊거나 흥국에 방어 시설을 구축하고 방어하면 된다. 열유성에서 백업해 가정을 공격하는 병력의 뒤를 칠수도 있고. 이렇게 되면 오히려 관중 지원군이 일부는 가정에 묶이다가 격파되고 일부는 마속에게 막히거나 뒤를 끊기는 각개격파 상황이 왔을수도 있다. 장합이 5만 병력을 그대로 가정성으로 진군시킨것은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보고 결국 마속을 잡지 않으면 답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인데, 이것도 이미 촉군이 준비한 바였으므로 마속이 정상적인 대응만 했다면 제갈량의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 장합은 어어 하다가 시간제한 안에 마속을 뚫지 못하고 패전했을 것이다.
5. 읍참마속
읍참마속의 고사의 근원. 전후사항이 어쨌든 마속의 실책으로 인한 가정에서의 참패로 인해, 순조로웠던 1차 북벌은 크게 실패해버렸고 결국 후퇴하여 촉으로 돌아온다. 이에 부장 왕평으로부터 당시 전후상황을 들은 제갈량은 마속에게 이번 패전의 모든 책임을 지게되어 처형을 당하게 된다.정사 상랑전을 보면 상랑이 마속과 친했기 때문에 마속이 도망가는 것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파면되었다가 제갈량이 죽은 후에야 회복되었다고 한다. 또한 가정 전선을 말아먹고 잘못을 시인하는 대신 도주했다가 잡혀왔다거나 나중에 가책을 느끼고 자수했다는 설도 있는데, 다만 배송지의 주석에서 인용된 양양기를 보면 마속은 제갈량에게 남기는 글에서 곤과 우의 고사를 들며 자기 자식을 부탁했는데, 굳이 말이 아닌 글로 남긴 것을 보면 처형당하는 시점에서 제갈량과 직접 대면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은 약속을 지켜 마속의 자식들을 챙겨 주었다. 왕평전에 따르면 마속이 처형당할 때 부하인 장휴, 이맹도 군법에 따라 처형했다고 한다.
마속이 사형당할 당시 촉한 군대의 장병들은 울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연의나 2차 매체에서 안하무인에 오만방자한 캐릭터로 묘사되는 마속이지만, 실제론 인망이 상당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장완도 굳이 죽여야했냐고 한 걸 보면 형을 낮춰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라의 대업의 단초를 책임지는 자이면서 탈영까지 한 극악의 패장을 살려뒀다간 향후 또 패전이 일어나면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기에 강행했을 수도 있다.
마속의 처형 과정은 분명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마속이 참수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정황으로 봐도 참수형이 자연스러운 상황이고 고사의 제목 자체가 읍참마속 내지는 휘루참마속이다. 하지만 참수는 삼국지연의에만 묘사된 부분이고, 명확하게 참수되었다는 자세한 기록은 없다. 왕평전에는 마속을 주살했다고 나오며, 마속전에는 옥에 갇혀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 기록이 달라 정확한 사정은 알 수가 없다.
5.1. 정치적 처형?
한가지 의아한 것은 정사에서 구체적으로 시기를 보여주진 않지만 마속의 죽음이 신속하게 결정됐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삼국지 강의>의 저자 이중톈은 형주, 익주, 동주병 계열로 나눠진 촉을 통일하던 법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그를 처형했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그 근거는 "마속을 죽여서 사람들에게 사죄하였다"는 기록이다. 단순히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처형한 것이라면 사람들에게 사죄하는 것과 관계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가령 이엄만 해도 제갈량이 그의 죄를 만방에 공언하자 출신성분 가리지 않고 핵심 관료들이 대거 참여해 탄핵시켰고, 북벌에 관해 반대하는 주장은 있었지만 출신 때문에 반대한 게 아니라 북벌을 하면 안되는 상황이라는 소신에 따라 반대한 거였다. 게다가 아무리 승패는 병가지상사라지만 마속의 행위는 너무나 초보적이고 명백한 자신의 잘못, 그것도 정상적인 정신 상태라면 당연히 이행해야 할 명령을 고의로 어긴 것으로 인해 국가의 대업인 북벌을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굉장히 큰 죄였다. 군대 지휘권을 줬는데 보통 막장짓도 아니고 사실상 항명에 가까운 행위를 한 것이라 제갈량이 그를 살려주고 싶어도 그럴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능력 부족이나 착각으로 벌어진 일이었으면 나중에 중용하지 않으면 않았지, 책임은 묻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북벌 과정에서 수많은 장수들이 실수를 저지르거나 능력이 부족해 일을 크게 그르쳤지만, 제갈량이 이들에게 군법을 적용해 처벌을 내린 사례는 없다.
그러나 정치적 문제 때문에 과도한 처벌을 하는 것 역시 법치를 바로 세운다고 보기는 어려운 정책이다.
마속의 처형이라는 이슈를 두고 당시 촉한 내에서 출신 지역별로 인사들의 의견이 갈렸다는 기록은 사서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외려 마속의 처형을 두고 제갈량에게 반론을 제기한 걸로 사서 상에서 확인되는 인물은 장완과 이막, 그리고 넓게 잡으면 마속의 도주를 묵인한 상랑 정도가 있는데, 장완은 형남 출신이고 상랑은 형북 출신, 이막은 익주 토박이이다.[9] 여기서 어떤 지역적 통일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당시 촉한 정계에서 마속의 처형을 두고 신하들의 견해가 지역적 구분을 통해 나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마속의 처형이 외부 세력으로서 익주를 지배하고 있던 유비-제갈량 중심의 인적 네트워크가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익주 세력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보인 정치적 타협의 일환이라는 이중텐의 견해는 개인적인 생각일 뿐, 그냥 근거가 미약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5.2. 탈영죄?
朗素與馬謖善 謖逃亡 朗知情不舉 亮恨之 免官還成都.
상랑은 원래 마속과 친하여 마속이 도망갔음에도, 상랑이 이 사정을 알면서도 알리지 않아 제갈량이 이를 한스러워하며 (상랑의) 관직을 면직시키고 성도로 돌려보냈다.
<상랑전>
상랑은 원래 마속과 친하여 마속이 도망갔음에도, 상랑이 이 사정을 알면서도 알리지 않아 제갈량이 이를 한스러워하며 (상랑의) 관직을 면직시키고 성도로 돌려보냈다.
<상랑전>
마속이 패전과 명령 위반의 문제보다는 몇몇 기록에 언급되는 탈영 이후 오 망명 시도를 해서 처형되었다는 관점이다. 상랑전에서 상랑이 마속의 도주를 눈감아주려 한 것이 근거로 제시되는데 마속이 정상적인 루트로 촉으로 퇴각한 거라면 이는 당연한 것이지 눈감아주고 말고 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촉한이 나치 독일이나 소련처럼 퇴각이 금지된 나라인 것도 아니고, 제갈량의 북벌은 늘 난항이었던 만큼 북벌 중에 패전한 장수는 있었지만 처형당한 사람은 매우 드물며[10] 이름있는 장수 중에서는 마속이 유일하므로 그만큼 심각한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청나라의 명사 홍량길은 마속은 명을 거역하고 죄를 피해 도망갔는데 주륙되는 게 마땅하다고 평했다.
사실 가정에서 오나라까지의 거리를 생각해 보면 콕 집어서 마속이 오나라로 도망가려 했을 가능성은 낮다. 하지만 어쨌든 부장 중 한명에 불과했던 왕평이 패전 처리를 도맡아 했다는 것은 마속이 참패 후 군사들을 수습하지 않고 도망가서 없었기 때문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가려 했느냐에 상관없이 충분히 사형감이다. 고대 중국과 비교할 수 없이 인권 의식이 발달한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군 지휘관이 참패 후 자기 하나 살겠다고 병사들을 버리고 전선을 이탈해 부하들이 대신 군을 수습했다면 군형법에 의거해 사형에 처한다.[11]
[1]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제갈량이 마량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굉장히 가까운 사이였음은 틀림없다. 마량이 제갈량을 형이라고 불렀다는 언급을 보아 절친한 선후배이자 형, 동생처럼 대하는 사이였던 모양이다.[2] 연의에는 30,000명으로 나와 있지만 애초에 연의의 군세 자체가 뻥튀기가 심하다. 진짜 30,000명이었다면 이릉전투에서 병력 대부분을 잃고 일부만 겨우 복구한 촉군은 철수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존망을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방어에 전념할 수 있었으므로, 마속의 참패로 공세역량을 완전히 상실했으나 촉을 지킬 가용병력은 남았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배송지 왈, 가정에서 잃은 병사들은 서현의 10,000여가(家)를 뽑아왔어도 회복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마속이 손실한 병력이 그보다 많음을 알 수 있으며 1가를 5명으로 보면 잃은 병사는 5,000명보다 많다. 이것은 마속이 잃은 병사들만 셈한 것으로 제갈량이 배치한 병력은 이보다 많았을 것이나 자세히는 알 수 없다.[3] 엄정하게 자리를 지키고 북을 울리며 평정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여 장합이 복병을 우려하여 공격하지 않았다. 훗날 4차 북벌 때도 제갈량과 사마의의 본대와 싸울 때 장합이 별동대로 왕평을 급습하나 왕평이 이를 막아내는 등 장합의 천적스러운 모습을 보였다.[4] 권율의 유명한 행주대첩 당시 앞으로는 왜군과 대치했고 뒤쪽으로는 강을 끼고 있어 목책에 불을 질러도 금방 진화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강을 통해 아주 약간이나마 보충병과 무기를 보급받기도 했다.[5] 미군에서는 훈련 및 행군 중인 훈련병들에게 하루 8L의 물을 강제로 마시게 한다. 현대의 군대가 비상식량 키트에 굳이 정수제를 넣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깨끗한 물의 상시 공급은 전투력 유지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6] 당장 기산과 기곡에서 위군보다 병력이 많았으며 제갈량이 촉군이 대군(大軍)이었다고 증언하고 있고 그곳의 여러부대를 통솔하게 했다는 점에서 결코 적은 병력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며 대군의 선봉인 만큼 병사들의 양과 질도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충 어느 정도 병력이 어느 루트로 오는지 훤히 알고 있는 제갈량이 가정에서 장합의 발을 묶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필요 최소한의 병력은 딸려줬을 게 당연하다.[7] 가정 북쪽의 있는 너른 도로라든가, 남쪽 청수현 북쪽 열유성 쪽 길. 단 위군이 확보할 식수나 말먹이로 쓸 식수와 마초까지 풍부한 건 역시 가정 뿐이다.[8] 뭐 장합 정도의 A급 장수쯤 되면 화공을 쓰던 어쩌던 해서 몸 비틀어가면서 근성으로 뚫을 수도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장합이라도 제갈량이 거는 가불기를 시간 제한 안에 뚫기란 매우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장합이 작전대로의 자리에 위치한 마속을 뚫는 것은 사실상 입스타에 가까운 영역이니 거의 고려되지 않는 가능성.[9] 애초에 이막은 성품이 오만하고 마속을 변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갈량을 까기 위해서 서융족이 용서라는 행위를 하는데 넌 왜 못하냐고 돌려 까는것에 가깝다. 용서라는것도 한도가 있는것을 감안하면 이막은 장완의 "인재가 없는데 굳이 죽여야 하겠습니까?"보다 비교할수 없는 이치에 맞지 않는 오로지 제갈량을 까기 위한 변호였다. 이막은 이 일로 제갈량에게 찍혀 촉으로 짱박히고 살았어야 했으며 제갈량을 원망한다, 이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자 슬퍼하는 황제 유선에게 '황제는 제갈량에게 눈치보고 살았는데 그 제갈량이 죽었으니 기뻐하시죠?'라고 표를 올렸다가 분노한 유선에게 처형당한다. 형주의 마씨 형제처럼 이막의 다른 세 형제들은 이씨삼룡이라 불렀으나 이막은 오만함과 맞지도 않은 제갈량에 대한 비방 때문에 이씨삼룡에서 제외시킬 정도로 개차반이이었다.[10] 촉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대 기준으로 촉한의 정치와 법 집행은 매우 관대한 편이었다. 법가적 원칙에 입각해 신상필벌에 철두철미했다는 제갈량 역시 진수의 평대로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에게는 무거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석방"해 "형법과 정치가 비록 엄격하였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11] 대한민국 군형법 제 4장, 지휘관의 항복과 도피의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