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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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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형제들
2.1.1. 형제의 자살
2.2. 아동·청소년기2.3. 청년기2.4. 중년기2.5. 노년기
3. 기타
3.1. 히틀러와의 인연3.2.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수치

1. 개요

오스트리아 출신 영국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생애를 서술하는 문서.

2. 상세

1889년 4월 2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에서 카를(1847~1913)과 레오폴디네(1850~1926) 비트겐슈타인의 여덟 자녀 중 막내[1]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은 오스트리아에서 철강 산업을 이끌던 세계에서 손꼽히던 철강재벌 중 하나[2]로, 영국과 프랑스 등의 신문에도 주기적으로 나올만큼 오스트리아를 넘어 유럽 전체에서 소문난 최고의 부자였다. 유대인이었으나 후에 개신교로 개종하였다.

아들 루트비히가 지금까지도 철학사나 논리학사에서 주요인물로 다뤄지듯, 아버지인 카를은 오스트리아 경제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인물이다. 그는 당시 모든 산업의 중심이던 철강재벌인 만큼 공업과 관련된 크고작은 회사를 엄청나게 여러개 가지고[3]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컸던 회사는 알프스 산맥에 있는 철광석 및 기타 광물 채굴회사인 Österreichisch-Alpine Montangesellschaft(오스트리아제국 알프스 광산회사)라는 대기업[4]이다. 이거는 나중에 아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회사에 팔아버렸고, 카를의 형제나 조카들이 엄청나게 욕[5]을 했다. 어머니 레오폴디네는 유대인과 오스트리아계의 혼혈로 가톨릭교도로 성장했으며 여덟 자녀 모두 가톨릭 세례를 받게 하였다.[6] 부부 금슬이 좋아서 부인이 막내 자녀인 루트비히를 낳자, 부친이 현재 체코의 지역이자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지역인 Kladno에 창업준비하던 제철 및 합금 회사를 만들며 부인 레오폴디네의 "폴디"를 따서, 1889년 회사이름을 Poldi Hütte(폴디 휫테, 폴디 제철)이라고 지었다. 이 회사 역시 루트비히가 훗날 팔아버렸는데, 지금도 남아있는 체코[7]의 유명한 기업이고, 소유주가 바뀐지 오래된 지금도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비트겐슈타인 가족은 대단히 큰 저택에서 살았고 레오폴디네의 음악에 대한 열정적 관심 덕택에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들이 저택에 초대받아 연주를 하곤 했다. 그중에는 클래식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브람스말러도 있었다.

2.1. 형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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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아기 시절(1891년경)
첫째 누나 헤르미네(1874~1950): 루트비히와 자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그의 고민을 함께하였다. 재능 있는 화가로 아버지 카를과 함께 클림트, 로댕의 그림을 수집하였다. 루트비히의 철학적 진로에 항상 관심을 가졌으며, 나중에 버트런드 러셀이 루트비히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을 때 가장 기뻐했던 사람도 그였다.

살아있었다면 둘째 누나가 됐을 도라(1876): 태어난 해에 사망하였다.

둘째 누나 헬레네(1879~1956): 어린 루트비히와 함께 "어리석은 장난"을 많이 쳤다. 나치 독일 시대 때와 루트비히가 암에 걸렸을 때 편지를 주고 받았다.

셋째 누나 마르가레테(1882~1958):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프로이트의 친한 친구로 그가 나치 독일을 탈출할 때 도와주었다. 루트비히의 어린 시절, 그에게 가장 큰 지적인 영향을 끼쳤다. 루트비히에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소개했다. 루트비히는 그녀를 위해 자그마치[8]을 지어주었다. 정작 그녀는 그 집이 "나같이 보잘것없는 인간보다 신들을 위한 숙소처럼 보였다."며 "그 집을 보고 아주 감탄하긴 했지만, 한시도 거기서 살고 싶지도 않고 또 살 수도 없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집은 현재 빈의 불가리아 대사관의 문화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넷째 형 파울(1887~1961): 피아니스트. 1차 대전 중에 오른팔을 잃었다. 볼레로로 유명한 모리스 라벨(1875~1937)이 그를 위해 1931년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작곡했다. 하지만 이 곡의 일부분을 파울은 고쳐 연주하기를 원했고 라벨은 이에 분노했다. 다만 라벨이 지나치게 어렵게 작곡해서 정상적으로는 연주가 불가능한 상황이긴 했다. [9]

다섯 형제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루트비히는 헤르미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오형제는 서로에게 다정한 형제들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누나는 나나 그레틀 누나하고는 대화가 되지만 우리 셋이 다함께 대화하는 건 힘들지. 파울 형과 그레틀 누나가 서로 대화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고. 헬레네 누나는 누구하고도 잘 맞지만 헤르미네 누나하고는 절대로 맞지 않고, 나와는 같이 잘 어울려. 우리 모두는 딱딱하고 날카로운 블록처럼 서로 편안하게 맞기 어려운 사이 같아……. 친구들이 우리의 삭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려 줄 때에야 그나마 서로에게 조금 싹싹하게 대하지."[10]

2.1.1. 형제의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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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형제의 사진(1890년)[11]
첫째 형 한스(1877~1902):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이 있었으나 아버지 카를은 한스가 가업을 물려받길 원했고, 한스는 강압에 못 이겨 예전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미국으로 홀연히 떠난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으나 1902년 체사피크 만의 보트 위에서 실종되었고 자살로 결론이 났다.

둘째 형 쿠르트(1878~1918): 1차 세계 대전 말기에 자신이 지휘하던 부대의 병사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자 비관하여 총으로 자살하였다. 그의 자살과 아버지의 바람 사이에 연결고리는 없다. 쿠르트와 아버지 카를 사이에 한스의 것과 같은 장래 문제에 관한 마찰은 없었다.

셋째 형 루돌프(1881~1904): 배우로서 살기를 희망하였으나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집에서 나와 베를린에서 살고 있었다. 1904년, 베를린의 한 술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신청한 뒤 그것을 들으며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였다.

좋아하던 그 음악은 Thomas Koschat의 노래 「나는 버림받았네Verlassen, Verlassen, Verlassen bin ich」라고 한다.[12] 가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나는 버림받고, 버림받고 버림받았네!
거리에 놓인 돌멩이와도 같이, 날 사랑하는 처녀가 아무도 없으니!
나는 교회에 가리, 멀리 떨어진 교회에,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가슴이 터지도록 울어버리리!

숲속의 작은 언덕에는 꽃들이 만발한데,
내 가련한 처녀는 그곳에 잠이 들어,
그 어떤 사랑도 그녀를 소생시키지 못하리,
저기 저쪽에 나의 순례가, 저기 저쪽에 나의 욕망이,
그곳에서 나는 절절하게 느끼리, 내가 얼마나 버림받았는지.[13]

유서에는 '친구의 죽음'과 '자신의 타락한 성격'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다고 적혀 있다. 동성연애자 해방 운동을 하던 단체에 가 도움을 청한 것으로 보아 동성애자인 자신의 성적 성향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의 타락한 성격'은 그것과 연관 지어서 해석할 수 있고, 따라서 루돌프도 아버지의 강압에 적잖이 힘들어 했음에 분명하나 그것이 직접적인 자살의 이유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형제들의 자살에 대한 루트비히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바이닝거 본인조차 자살 직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자살은 용기의 표시가 아니라 비겁함의 표시다. 비겁한 행동 가운데 가장 덜 비겁하다 할지라도.' 루트비히는 때때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은 걸 부끄러워했지만, 그와 파울이 결코 그런 방식을 택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런 형태의 비겁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언제나 비열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파멸을 의지할 수 없으며, 실제로 그와 관계된 것을 상상한 사람이라면 자살이란 언제나 성급한 자기 방어임을 알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불시에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을까.'"[14]

2.2. 아동·청소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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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아동기(1898년경)
비트겐슈타인이 태어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은 '거대한 정신의 요람'[15]이자 '세계 파괴의 실험실'[16]이었다. 한쪽에서는 빈의 부르주아 계층이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생활을 즐겼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궁핍한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하에서 고된 일을 하고 있었다.[17] 빈의 예술가들은 그런 세상을 도피하듯이 탐미주의에 빠졌고, 프로이트는 역설적인 도시 빈에서 신경증을 진단하였다. 비평가 카를 크라우스는 거의 종말을 예견하는 예언자처럼 빈을 절망적으로 바라보았으며 대대적인 수술이 시급함을 역설하였다. 그곳은 말 그대로 '세기말'이었다.[18] 이런 '병적일 정도의 아름다운 공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탄생의 제비뽑기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고, 경제적인 것에 국한될지라도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아홉 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로울 때에도 사람들은 진실을 말해야 할까?" 첫 철학적 사유라는 것을 한다상당히 귀여운 생각 주변의 아홉 살배기들 중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애들이 있는지 찾아보자. 만족스러운 해답을 얻지 못한 채 결국 그런 경우에는 거짓말을 말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아무래도 '천재'라는 말이 따라붙다 보니 비트겐슈타인도 모차르트처럼 어렸을 적부터 탁월한 재능을 보였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따금 실 짜는 기계를 만들거나 종교 과목에서 A를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과목에서는 평균점을 기록하였고 심지어 화학에서는 낙제를 받기도 했다.[19]

1903년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부르주아 계층의 자녀들과는 달리 김나지움(문법학교)에 가지 않고 린츠의 실업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이는 사업을 물려받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바람이 가미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린츠의 실업학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학우들과 가정 환경의 극명한 차이 때문에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실제로 비트겐슈타인 자신도 그 시절의 자신을 "불행했다"고 회상한다.[20] 이 시절 아돌프 히틀러와의 인연은 유명하지만(#히틀러와의 인연 참고.) 1904~1905년까지 같은 학교에 다녔다는 것 외에 실제로 둘이 접촉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21] 히틀러는 성적 불량이었고 루트비히와 나이가 같았으나 2학년 아래였으며 후에 린츠의 실업학교에서 쫓겨났다.

1903년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오토 바이닝거(1880~1903)가 「성과 성격」을 출판하고 그해 베토벤이 죽은 집에서 권총으로 자신의 심장을 쏴 자살하였다. "천재가 아니면 죽음을!"[22]이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교수인 파울 율리우스 뫼비우스가 바이닝거의 주저 「성과 성격」을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이의를 제기한 것과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에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바이닝거의 책을 탐독했으며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시신이 운구될 때 그 뒤를 따라갔고 평생 그의 추종자로 남았다.[23] 「성과 성격」의 내용은 비장하리만치 과장된 여성의 결함에 대한 강도 높은 비난과 금욕을 통한 인류의 멸종의 주장이다.[24] 여담이지만 바이닝거는 법실증주의를 만든 한스 켈젠의 친구이기도 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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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청소년기(1905년경)

1906년 과학철학에 흥미를 느낀 비트겐슈타인은 린츠의 실업학교를 떠나 루트비히 볼츠만에게 물리학을 배우기 위해 빈 대학으로 가려고 했지만 그해 9월에 볼츠만이 두이노에서 자신이 과학계에서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없음에 절망하여 자살하는 바람에 무산됐다.[26] 결국 이론과학을 공부하고 싶은 자신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아버지의 강요로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에 있는 기능 대학으로 기계공학을 공부하러 가게 된다. 그곳에서 1908년 학위를 취득하고 항공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맨체스터로 가게 된다. 1906년~1908년 사이 별다른 기록은 없다.
"……큰누나 헤르미네는 이렇게 말했다. '루트비히는 급우들이 보기에는 마치 낯선 나라에서 갑자기 찾아온 것 같았겠지요. 루트비히는 그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았어요. 예를 들면 급우에 대하여 Sie(경칭, 당신이라는 의미)라고 말을 건 것만으로도 장애가 되었지요. 아마 그들보다 몇 살 위인 데다가, 그들보다 성숙해서였을 거에요. 특히 그 아이는 정신적으로 이상하리만큼 감수성이 강했어요.'(「남동생 루트비히」)
루트비히 자신도 다른 급우들과 자신이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느끼고, 익숙해지지 못하는 학교 생활을 점점 게을리하게 되었다. 그 모습은 아버지 카를이 어머니 레오폴디네 앞으로 쓴 편지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루키(루트비히를 말함)가 방종한 생활을 반드시 그만둘 수 있도록 빈으로 바로 데려와야 하오. 루키가 집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해도 괜찮소. 그 아이가 다음 달에라도 어딘가 일을 하러 간다면 한 번쯤 해둘 필요가 있는 일이니 그것도 괜찮소. ……그 아이는 방종한 생활을 그만두고, 자고, 먹고, 땀 흘리고, 극장에 가야 하오. 루키가 내 지도를 오해하지 않기만을 바라오.'
그러나 이처럼 아버지 카를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루드비히는 린츠에 머무르다 1906년 졸업했다. 성적은 두드러지지 않았고 매우 평범했다."[27]

2.3. 청년기

1908년 맨체스터 대학에서 연을 만들어 대기를 관측하고, 비행기 엔진을 설계하는 등의 일을 하다가 버트런드 러셀과 알프레드 노스화이트헤드가 쓴 「수학 원리」[28]를 읽게 된다. 「수학 원리」에서 유형론의 난점을 발견한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몰두했고 수리철학과 기계공학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29] 그러나 1911년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까지 그는 항공학 연구를 멈추지 않았고, 그해 8월 '항공 기계에 응용할 수 있는 프로펠러의 개선'에 대한 임시 설계 명세서를 제출하며 그 특허가 받아들여지기까지 그의 공학도로서의 경력은 계속됐다.

1911년 여름 방학이 끝날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책을 쓰기 위해 예나 대학에 있는 프레게를 찾아가게 된다. 프레게는 시의적절하게도 비트겐슈타인에게 케임브리지에 있는 러셀에게 가 배우라고 권유한다.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선생이 필요했고, 러셀에게는 제자가 필요했다. 그해 10월 18일, 비트겐슈타인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러셀의 방에 갑자기 나타나서 불쑥 자신을 소개한다. 그 뒤 러셀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그의 강의에 참석하며 그를 괴롭힌다. 나중에 가서는 급기야 러셀의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이 확실한지에 관해서 논쟁하게 되는데,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방에 코뿔소가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30] 11월, 이제 그는 더 이상 맨체스터 대학의 공학도가 아니었다.

11월 말이 되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적 재능을 확신해 주기를 러셀에게 원했고, 러셀은 겨울 방학 동안 철학과 관련된 글을 비트겐슈타인더러 쓰게끔 해 1912년 1월 글을 받아보게 된다. 러셀은 그 글을 보고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적 재능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그를 격려해 주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에게 러셀의 격려는 '구원과 같았다'.[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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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성인기 초기(1910년경)

1912년 2월, 비트겐슈타인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생이 된다. 이 시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철학을 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며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며 철학에 대한 과도한 평가에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내비쳤다. 1912년 여름,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이 주최하는 스쿼시 모임에서 나중에 「논고」를 헌정하게 될 데이비드 핀센트와 사귀게 된다. 그는 수학과 2학년생으로 총명하였으나 두드러진 재능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33] 비트겐슈타인은 핀센트와 같이 아이슬란드 여행을 갈 만큼 돈독한 사이가 된다. 여행 경비를 모두 비트겐슈타인이 부담할 만큼 핀센트에게 친절히 대하려고 애썼다. 10월, 비트겐슈타인은 스스로 엘리트임을 자처하는 사도 클럽의 회원으로 선출된다. 그러나 이 기록은 보통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중요한 기록이 아닌데, 몇 달 지나지 않아 비트겐슈타인이 다른 사도 회원들과의 마찰 때문에 클럽을 탈퇴했기 때문이다.

1913년 1월 20일,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 카를이 사망했는데 편안한 모습으로 임종을 맞았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슬퍼하는 모습을 내비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기뻤다"고 말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는 축하하려고 했다. 부자였던 아버지의 유산의 1/3은 1914년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데 쓰이게 된다.[34]

1913년 비트겐슈타인은 러셀과 논리학 연구를 계속하지만 결국 스스로의 과민한 성격 탓에 대학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그해 10월, 노르웨이에서 몇 년간 혼자서 논리학 연구를 하겠다는 폭탄 선언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미쳤다"고 말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신이 자신을 정상인이 못 되도록 막고 있다"며 대꾸한다. 러셀은 "신은 확실히 그럴 것이다."라고 받아치면서 어련하시겠냐는듯 마지못해 비트겐슈타인의 돌발 선언을 받아들여준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모든 말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데에 착수한다. 겨울,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의 스키올덴에 있는 농장에 거처를 잡고 그곳에서 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35] 노르웨이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되었고(비록 정신적인 면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주민들도 그와의 관계에서 이렇다 할 커다란 문제는 없었다.[36]
"……나는 지식론에 대해 많은 것을 썼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을 더할 수 없이 혹독하게 비판했소. 비록 당신은 그때 알지 못했겠지만, 그의 비판은 내 인생에서 일등급의 중요성을 지닌 사건으로서, 그 후로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주었소. 나는 그가 옳았다는 것을 알았으며, 나는 이제 다시는 철학의 기초 작업을 못 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소. 방파제로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와 같이 나의 충동은 산산조각 나 버렸소. ……철학의 기초 작업은 모두 논리학이라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확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택했소. 내가 그렇게 한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이 나를 설득하여 논리학에 필요한 작업이 내게는 너무 어렵다고 믿게 만들었기 때문이오. ……토요일(1916년)"[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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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스키올덴의 별장(미상)[38]

1914년 7월, 예술가들에게 돈을 배분하는 문제와 휴가 문제로 비트겐슈타인은 잠시 오스트리아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탈장 때문에 징집에서 면제되었으나, '강렬하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에 의해 지원병으로 복무하게 된다.

8월 7일, 비트겐슈타인은 동부 전선에 있는 폴란드 크라쿠프 주둔 제1사단 포병연대에 배치되어 비스와강가에 있는 고플라나 호에서 탐조등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가 처음 적군을 보고 생각한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이제 나에게 훌륭한 인간이 될 기회가 왔다. 왜냐하면 나는 죽음과 마주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적는다. 비트겐슈타인은 전쟁터에서 톨스토이의 「요약 복음서」에 특히 매료되었는데 그것을 항상 들고 다니며 동료들에게 읽기를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몇 년 전 연극 「십자가 원판」을 보면서 떠올렸던 생각 즉, "'외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것도 그에게는, 그의 가장 내적인 존재에게는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고수하였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신앙인(그것도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신앙인)에 가장 가까워졌다.[39][40]

9월, 비트겐슈타인은 한 잡지에서 파리에서 일어난 자동차 사고에 관한 재판 기사를 읽게 된다. 이것은 그의 전기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2.1.1.2 그림이론 참고). 그는 전쟁 기간 중 오히려 더 격렬하게 사유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12월, 그는 수학 교육을 받은 경력을 인정받아 포병 작업소로 이동하게 된다. 그곳에서 부사관으로 승진했고 차량의 목록을 작성하거나 용광로를 관장하는 등의 일을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동료들과 부하, 상급자들과 잦은 마찰이 있었고 이는 비트겐슈타인을 지치게 했다. 결국 그는 전선으로 가기를 바랐고, 1916년 3월, 루마니아 국경 근처에 있는 동부 전선 최남단 지점 오스트리아 제7군 소속 포병연대에 배치되게 된다.

최전방에서 가장 위험한 곳인 관측소에 배치되도록 비트겐슈타인은 요청했다. 그곳은 포격 대상이 될 것이 뻔한 위치였는데 그는 이곳에서 「논고」의 중후반을 차지하는 함수와 명제의 본성에 관한 문제와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는 윤리학과 미학 그리고 세계의 본성(삶과 죽음 등에 관한 문제도 간헐적으로 적었다)에 관한 질문에 관해서 쓴다.

1916년 7월, 비트겐슈타인은 드디어 계속되는 사격에 의해 '공포'를 호소하게 된다. 그는 오직 살기 위한 본능으로 점철된 자기를 바라보게 되고 동물적인 감각에 사로잡혀 온갖 윤리적 가치들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후퇴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진지를 고수하였고 곧 훈장 수여 대상자에 추천되게 된다. 그는 상사로 진급했으며 얼마가지 않아 곧바로 또다시 소위로 승진됐다. 8월, 그는 장교 훈련을 받기 위해 모리비아에 있는 올뮈츠의 연대 사령부로 보내진다.[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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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오스트리아-헝가리군(1918년경)
"신이여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신이여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신이여 나를 깨닫게 하소서, 신이여 나의 영혼을 깨닫게 하소서!"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면서 비트겐슈타인이 적었던 일기의 부분

1917년 1월, 비트겐슈타인은 카르파티아산맥 북쪽에 위치한 제3군 소속 포병 장교로 배치된다. 이때 러시아는 혁명 전야에 있었기 때문에 전선은 비교적 조용했다. 그러나 혁명을 수습한 러시아는 7월, 공격을 재개했고 비트겐슈타인은 르드지아니 지방을 수비한 공로를 인정받아 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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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군인 신분증(1918년경)

1918년 2월 1일 비트겐슈타인은 소위에서 중위로 승급했고 3월,볼셰비키 정부가 동맹국과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이탈리아 전선에 위치한 산악포병연대에 재배치되게 된다.

6월 6일, 데이비드 핀센트의 어머니가 비트겐슈타인에게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전하다. 핀센트는 5월 8일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는데 이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핀센트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최초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평전, 232)

6월 15일, 연합군을 공격하는 주요한 포대의 관측을 맡아 공로를 인정 금성무공훈장의 후보로 추천되지만 군봉사 메달을 받게 된다.

7월, 오스트리아 군은 퇴각을 결정하다. 8월, 「논리철학논문」을 완성하다(후에 1922년 무어의 권유에 따라 「논리철학논고」로 바꿨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책을 데이비드 핀센트에게 헌정했다.

10월 30일, 연합국은 승리하고 비트겐슈타인의 합스부르크는 체코,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의 민족국가로 분리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코모에 있는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고(후에 카시노에 있는 수용소로 옮겨지게 된다), 친척의 도움으로 포로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의사가 가짜로 그의 건강에 이상이 있다고 진단을 내릴 예정이었다) 완고하게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주장하며 거부했다. 포로 기간 중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를 프레게, 엥겔만, 러셀에게 보내지만 세 사람 모두 논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1919년 8월 21일, 석방

1919년 10월, 빈의 프라터 거리에서 동성애로 인해 곤경에 빠지다. "생명을 끊는 것을 계속 생각", 그는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지점까지 가라앉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매주 며칠 동안 그는 방을 빠져나와 빠른 걸음으로 프라터 공원에 갔다. 친구에게 말한 대로 거의 통제할 수 없는 악마에 홀린 채 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도심 부근의 바에 드나드는 세련된 외모의 청년들보다 프라터 공원의 산책길과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거칠고 솔직한 타입의 동성애 청년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빈에 사는 동안이나 빈을 방문했을 때마다 서둘러 찾아간 곳은 바로 이 특별한 장소였다. ……나중에 영국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그는 때때로 그의 처분에 자신들을 맡길 준비가 된 멋지고 지적인 청년들보다는 런던 술집의 거친 젊은이들을 선호했다."[42] 이 시기 젊은 이성애자인 자동차 기계공 아르비트 셰그렌과 가까운 친구가 되어 그의 집에서 하숙하게 되지만 셰그렌의 어머니가 비트겐슈타인을 사랑하게 되어 1920년 4월, 그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동성애에 빠진 이 기간을 일컬어 "쓸모없는 에피소드들로 가득찬 내 삶을 무너뜨리는 기간"이라고 하지만 이 기간이야말로 그가 오토 바이닝거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었던 해방구가 아니었나 바틀리는 조심스럽게 추측한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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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성인기 중기(1920년경)

전쟁에서 돌아온 뒤에 그는 몇 년간 군복을 입고 다녔을 정도로 회복되지 못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돌아가길 원치 않았으며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되기를 원해 사범학교에 다녔다. 전쟁 전 아버지가 전 재산을 미국으로 이전시킨 바람에 (예술가에게 나눠준 것 외에도)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막대한 재산이 있었는데 이를 모두 가족들에게 나눠주게 된다. 그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유럽에서 제일 가는 부자 중 한 사람이었다. 「논고」의 출판은 번번이 거절당했으며 사범학교에서의 피로 따위가 겹쳐져 비트겐슈타인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결국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게 「논고」를 영국에서 출판할 수 있도록 도와줘도 되겠냐고 묻고, 비트겐슈타인은 원하는 대로 하라며 답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교사가 되는 훈련을 마치고, 1920년 여름, 수도원에서 잠시 정원사로 일하다가 그해 가을 트라텐바흐라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때의 교사 경험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 영향을 미쳤다. [44]

1920년 가을, 트라텐바흐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의 교육은 지나치게 엄격했다. 그가 자주 아이들 뺨을 때린다거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는 기록은 이제는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말도 안 되게 어려운 질문을 했다거나 단지 잔인하기만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단지 지나치게 열정적이었고, 그 시절 어린 소녀가 대수를 하지 못하는 것쯤은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그는 재능있는 아이들이 집안 사정으로 배우기를 그만두는 것을 원치 않았고 다방면으로 배우기를 계속하도록 지원해 주었다. 어떤 아이는 첫째 누나 헤르미네의 집에 보내 기숙 생활을 하게끔 하려고 했다. 그 밖에 어린이를 위한 사전을 편찬하기도 하는 등 그의 교사 생활에 누는 적지 않았으나 결코 미달은 아니었다. 비트겐슈타인이 교사 생활 시기 아이를 때린 것은 사회에서 막대기로, 다리로, 주먹으로 때리는 것과 동급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비트겐슈타인이 단지 '잔인한 교사'가 아니었다는 점은 다음 기록에서 드러난다.
"……상점 주인인 요한 샤이벤바우어는 1920년에서 1922년 사이에 그의 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방금 바나나를 산 것이 기묘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독일 오스트리아가 굶주렸던 그 황량한 전후 기간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에게 처음으로 바나나를 -그리고 처음으로 오렌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먹이기 위해 비트겐슈타인은 과일 다발이 든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몇 킬로미터 산길을 오르내렸다. 그 시절에는 트라텐바흐와 오테르탈 사이에 대중교통이 없었다. 오테르탈에 가려는 사람들은 글로그니츠의 기차역에서부터 20km 숲을 지나 언덕을 하이킹했다.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그랬듯이."[45]

1921년, 독일 「자연철학연보」에 「논고」가 엉망진창으로 게재되다. 이는 저자와의 최소한의 상의도 없이 게재됐기 때문에 해적판으로 여겨지게 된다. 「자연철학연보」의 「논고」는 후에 1922년, 프랭크 램지와 찰스 오그던에 의해 영어판으로 개정되어 재출판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교사 생활은 평탄치 못했다. 비록 비트겐슈타인은 고장 난 기계를 고쳐주거나 하는 호의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을 '이상한 귀족'이나 '약간은 미쳐버린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인간이 아니라고 표현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를 좀처럼 끊지 못했다. 그 스스로가 교사 생활이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가르치는 일을 떠난다면 노동을 할 생각이었다. 가끔씩 옛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 받고(러셀과는 직접 만나기도 했다.[46]) 램지와 만나 그의 「논고」에 대한 설명을 하기도 했지만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의 문제는 「논고」에 의해 모두 해결된 것으로 보였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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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학생들(1923년경)

1922년 11월 트라텐바흐의 초등학교에서 푸흐베르크의 초등학교로 새로 부임하게 되다.

1923년 9월 17일 프랭크 램지가 푸흐베르크에 있는 비트겐슈타인을 방문

1924년 9월 푸흐베르크의 초등학교에서 오테르탈의 초등학교로 다시 부임하게 된다.

1926년 4월 하우트바우어 사건이 터졌다. 나중에 14살에 백혈병으로 죽게 될 요제프 하우트바우어(이때 당시 11세)라는 남자 아이가 비트겐슈타인에게 맞아 실신하게 된다. 자랑할 얘기는 물론 아니겠지만 이전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여러 번 다른 아이들을 때렸고 하우트바우어라는 아이는 그에 비하면 표현이 좀 그렇지만 때린 것조차도 아니었다. 하우트바우어의 어머니는 피리바우어라는 농부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했는데 이 소식을 듣고 피리바우어는 곧장 학교로 향했고 길에서 비트겐슈타인을 만나 온갖 욕설을 하게 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을 체포하기 위해 파출소로 가는데, 때마침 파출소에 경찰이 있지 않았고 다음 날 비트겐슈타인을 찾았을 때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1926년 4월 28일, 비트겐슈타인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일로 재판이 일어나게 됐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무죄로 판결받는다. 교사직을 그만두고 비트겐슈타인은 휘텔도르프에 있는 정원의 헛간에서 3개월 동안 야영을 하며 수도 애호사들과 정원사 일을 한다.

1926년 6월 3일, 레오폴디네 비트겐슈타인이 사망하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셋째 누나 그레틀의 집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주로 천장의 높이, 창문, 문, 자물쇠, 라디에이터, 벽의 디자인 등을 맡았다. 건축가 파울 엥겔만과 같이 만들었다.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은 마르그리트 레스핑거라는 여성과 만나 1931년까지 사귄다. 그러나 둘은 성격 차이가 있었고 어울리지 않았다. 다음의 기록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엄밀히 말해 게이가 아니라 양성애자였다는 점이 드러난다: "……지난밤에 자위를 했다. 양심의 가책. 그러나 또한 난 너무 약해서 그 충동과 유혹에 저항할 수 없다는 확신. 만일 그 충동과 유혹, 그리고 그것들을 수반하는 이미지들이, 내가 다른 것에서 피난처를 마련할 수 없을 때, 내게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러나 겨우 어제 저녁 나는 깨끗한 인생을 살아갈 필요에 대해서 숙고했다(마르그리트와 프랜시스를 생각하고 있었다). [1937년 12월 2일]" (평전, 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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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파울 엥겔만이 공동제작한 집. 비트겐슈타인이 제작한 청동 흉상[48]
"마르그리트는 이제 나를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매우 이상하다. 어떤 목소리는 내게 말한다. 그렇다면 다 끝났다고, 너는 가슴 아플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다른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낙심해서는 안 된다고. 너는 그것을 예상했어야 하며, 비록 열렬히 소망했다 하더라도 네 인생이 어떤 특정한 사건의 발생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고. 바로 이것이 옳은 목소리다. …신이 그녀와 함께하기를 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마침내 신의 손에 맡기지 못하고, 자기 수중에서 계속 만지작거리는 사람은 결국 그 사랑을 할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시련 또한 사랑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일기 1930-32, 1936-37』 79쪽, 1931.3.1."[49]

1927년 2월, 「논고」에 영향을 받은 빈 학파의 모리츠 슐리크가 비트겐슈타인을 찾아오다. 이후 여름 동안 빈 학파의 루돌프 카르납, 헤르베르트 파이글, 프리드리히 바이스만 같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정작 비트겐슈타인은 그들에게 실증주의자의 명민함보다는 타고르의 시를 읽어주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

빈 학파와의 접촉이 계기가 되어 1928년 3월, 직관주의 수학자 브라우어를 만나게 되고, 브라우어는 러셀을 비판하면서 수학이 논리학에 기반을 둘 수 없고, 일관성이 수학에 본질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자가 탐험가가 아니라 발명가라는 것, 사실들의 체계가 아니라 인간 정신이 구현해 낸 것이 수학이라는 것에 동의했고 「논고」 비판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1929년 1월 28일, 비트겐슈타인은 램지와 함께 철학을 다시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돌아오게 된다.

2.4. 중년기

1929년 6월 18일, 비트겐슈타인은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한 구두 시험을 치른다. 평가관은 버트런드 러셀조지 무어였다. 러셀은 이를 두고 "내 평생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는 처음이다"라고 말하며 시험을 진행했다.[50] 구두 시험을 마치고 비트겐슈타인은 평가관들의 어깨를 가볍게 치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들이 그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시험장을 나갔다.

1929년 크리스마스 휴가, 비트겐슈타인은 빈 학파에게 자신의 「논고」가 잘못되었음을 설명하였다. 그는 「논고」에서 원자명제들은 논리적으로 서로 독립적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견해를 폐기하고 내적 연결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51] 이 시기의 비트겐슈타인은 '검증주의적 단계'로 불리며 「논고」를 비판하기는 했으나 완전히 논리실증주의에서 발을 돌리지는 않았다. 빈 학파는 이 시기의 비트겐슈타인의 전환의 움직임을 그리 중요치 않게 생각했고 오히려 그의 검증주의적 단계를 도그마처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이 한 가지 유용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전부를 설명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면서 일축하기도 한다.
"한 마을에 경찰관이 있는데, 각 국민으로부터 가령 연령, 출생지, 직업 등의 정보를 알아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이 정보들은 기록되고 그 기록은 어떤 식으로건 이용된다. 때로 그 경찰이 한 주민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경찰은 이 사실을 기록한다. 왜냐하면 이것 역시 그 사람에 대한 쓸모있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초 검증주의에 대해 말하면서

1930년 1월 19일, 프랭크 램지가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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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중년기(1930년경)

1930년부터 1931년까지 도덕학 강의를 맡았다. 그의 강의는 완전히 형식에서 벗어나 노트 없이 수업을 하거나 혼자 중얼거리면서 격렬한 탄성을 내기도 했다. 수강자들은 접이식 의자에 앉아(오직 무어만이 예외로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의 얘기를 들었다. 이 시기 버트런드 러셀의 대중 강연과 사회 비평서를 혹독히 비난했다. 그는 「행복의 정복」을 구역질이 난다고 말하고 「결혼과 도덕」에 대해서는 러셀을 사기꾼과 서슴없이 비교하였다.

1932년부터 1933년, 순수수학의 지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공격이 시작되다. 이 시기 수학자 고드프리 하디가 수학을 일컬어 우리 마음의 창조물이 아니고 우리의 인식과 독립적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격노하면서 "수학자들의 말은 그들이 수학을 할 때 엉뚱한 말이 된다."고 말했다.[52] 이때 비트겐슈타인의 강의를 듣던 프랜시스 스키너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1933년부터 1934년, 자신의 강의에 학생들이 너무 몰리자 실망한다. 대신 몇 명의 학생들로하여금 자신의 구술을 기술하게 해 그것을 배포하는데 나중에 그것이 「청색책」으로 불리게 된다. 이 책은 후기 철학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며 '가족유사성' 개념이 처음 등장하기도 한다.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은 러시아 작가(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등)에 심취하여 소련에서 살 계획을 세운다. 그는 1930년대 중반의 정치적 혼란기에 노동자 계급과 실업자들에 공감하였고, 넓게 말해 그가 좌파에 속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평전, 490)

1934년부터 1935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프랜시스 스키너와 앨리스 앰브로즈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기록하게 했다. 이것이 나중에 「갈색 책」으로 불린다. 독자에게 읽히기 위한 글이 아니므로 읽기가 버겁다고 한다. 언어 게임을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 예시를 들어 설명했다. 1935년 여름, 소련에서 살 계획을 세운다.

1935년 9월 12일, 레닌그라드에 도착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소련에서 집단 농장의 노동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당국은 허락하지 않았고 대신 카잔 대학의 철학 과장직과 모스크바 대학의 철학 강사직을 제의한다. 결국 자신의 바람이 들어지지 않자 케임브리지로 돌아오게 된다. 소련에 대한 인상은 "군대에서 사병으로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1936년부터 1937년, 스키올덴의 별장에 머물다. 프랜시스 스키너와의 연애 기간편지로만. 둘은 1939년까지 사귀다 그 이후 서먹해지더니 이내 연락이 뜸해졌다. 프랜시스 스키너는 비트겐슈타인의 권고에 따라 대학을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나중에 불평하기는 했지만 본인도 나름대로 만족했다고 한다.

1938년 2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머물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때 정신과 의사가 되려는 생각을 해 의사 훈련 과정에 있는 친구 모리스 드루어리에게 병원의 가장 심각한 정신병 환자를 만날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이 방문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정신과 환자의 비정상적인 측면보다 정상적인 측면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서는 정상적인 측면보다는 비정상적인 측면을 보려고 하였다.

3월,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에 '말도 안 되는 루머'라며 일축한다. 그 말을 한 다음 날 히틀러는 진짜로 오스트리아를 침공했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자매에 대해 걱정하는 드루어리에게 '그들은 매우 존경받고 있기 때문에' 무사할 것이라며 여전히 사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심각하게 걱정하고 빈으로 돌아가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대한 생각을 듣기 위해 피에로 스라파에게 편지를 쓰고 스라파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당분간은 빈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스라파는 대신 넌지시 영국 국적을 얻을 것을 제시하고, 비트겐슈타인은 케인즈의 도움을 얻어 4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강사직과 함께 1939년 6월 영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자매들은 이후 긴 협상을 통해 그들이 가진 외화를 건네주는 대가로 1939년 8월, '독일 혈통임을 입증'받음과 함께 1940년 2월, '유대 혼혈임에도 불구하고 혼혈 유대인 정책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고 비교적 전쟁 기간 동안 안전하게 살 수 있었다.

1939년 2월 11일, 1월에 미국을 방문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를 떠나야 했던 무어를 대신해 철학 교수로 선출되다. 비트겐슈타인은 강의에서 본격적으로 수학의 순수성을 공격한다.
"수학이기 때문에…… 그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고 그 때문에 더 매력적이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 표현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설명한다면, 그것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방식으로 표현된다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을 잃게 될 것이며 확실히 내게는 매력적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천국[53]으로부터 어느 누구를 몰아내려는 꿈도 꾸지 않겠습니다. ……나는 아주 다른 일을 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 시도하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떠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당신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저 당신 주위를 보라.'" (평전, 598, 599)

비트겐슈타인에게 수학의 순수성이라는 '신화'와 과학의 우상숭배는 우리 문화가 부패했다는 가장 중요한 증상이며, 또한 그 부패 중 가장 유력한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던 것이었다. 이때의 강의에 참석한 유명한 인물로는 앨런 튜링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지속적으로 '수학적 발견'이란 말은 온당치 않으며, 수학의 비경험성은 그것의 문법에 있지 확실한 지식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튜링은 고전적인 견해를 방어했다. 나중에 결정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이 모순율을 공격하기에 이르렀을 때 튜링은 모순이 수학적 체계의 치명적 결함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그들 사이에 공통된 기반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강의에 참석하지 않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튜링의 지식이 아니라 동기를 공격했고, 이는 튜링에게 있어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예시)
백분율은 1가지 수치의 비율 수치를 다른 것과 비교할 대 더 파악하기 힘들다. 2개의 백분율 사이에 존재하는 수치적 차이를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백분율 수치 사이의 차이를 반영하는 새로운 백분율을 만들 수도 있다. 전문 과학자들조차 가끔 퍼센트와 퍼센트 포인트의 차이라는 미묘한 문제를 놓고 혼동을 일으킨다. 이 둘의 차이를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 1월 1일에 판매세가 구매 가격의 4%에서 6%로 인상된다고 가정해 보자. 6%-4%=2%니까 이는 2% 포인트 상승한 것이다. 하지만 5% 증가한 것도 맞다. 내가 지금 달러로 지불하는 6센트는 이전에 지불했던 4센트보다 50% 더 많은 액수다.
따라서 동일한 변화를 매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실질적으로 다른 인상을 줄 수 있다.[54]
-칼 벅스트롬, 제빈 웨스트, <헛소리 까발리기 CALLING BULLSHIT> 중에서-

강의가 끝나면 비트겐슈타인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았고 이는 그에게 '샤워를 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주었다. 그가 좋아했던 배우 중 하나는 베티 허튼이었는데, 그녀의 익살스런 연기는 비트겐슈타인의 사뭇 엄정한 성격과는 대조적이다. 베티 허튼은 영화에서 유쾌한 인물로 그려질 때가 많았다. 가령, 상사가 뒤에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상사의 욕을 흥겹게 노래로 부르다가 곤혹스런 상황에 처한다든지, 무대 위에서 비 맞은 사람 연기를 하려다 정말로 저체온증에 걸려 실려간다든지 하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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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 허튼 주연의 영화 「The Perils of Pauline(1947)」의 한 장면[55]

1939년 9월 3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 비트겐슈타인은 전쟁 초기, 병원에서 약국의 배달부로 일을 했다. 그 후 1944년 2월 16일까지 피부과에서 쓸 연고를 조제하는 일부터 쇼크에 대한 연구, 호흡과 맥박 사이의 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기계를 고안해 만들어내는 등의 일을 했다. 이 기계는 종래의 것보다 혁신적이어서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쇼크를 연구한 그랜트 박사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자가 아니라 차라리 생리학자가 되었으면 더 좋았을 법했다고 말했다.

1944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44년 여름까지 휴직을 신청하고 웨일스의 스완지로 가 「철학적 탐구」를 완성하기 위해 힘을 쓴다. 스완지에 있을 때 비트겐슈타인의 이웃에는 클레멘트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특히 그는 클레멘트 부인과 그녀의 딸들을 사랑했다. 나중에 비트겐슈타인은 그 가족의 집에서 살게 되었는데, 여기에 몇 가지 재밌는 일화가 있다.
"'그녀는 천사가 아닌가요?'라고 비트겐슈타인은 어느 일요일 점심 식사 시간에 그녀의 남편에게 물었다. '그런가요?'하고 클레멘트 씨는 되물었다. '제기랄, 물론 그렇습니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평전, 664)
"……클레멘트 부부는 두 명의 딸, 11세인 조앤과 9세 바버라를 두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그들의 집에 머무는 동안 거의 한 가족처럼 대우를 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이란 이름이 약간 발음하기 힘들 정도로 길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비키'라고 불렀다. 비록 그렇게 하도록 허락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유일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했지만 말이다. 클레멘트가와 함께 사는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보통 그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는 또한 다른 가족 생활에도 참여했다. 특히 그는 소녀들과 루도(주사위 놀이의 일종)와 뱀과 사다리 놀이(주사위를 던져 말을 나아가게 하는 놀이)를 즐겼는데, 한번은 뱀과 사다리 놀이에 푹 빠져서 놀이가 두 시간 넘게 계속되자 소녀들은 그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그 놀이를 중간에서 그만두자고 간청해야 했다. 그는 또한 두 소녀의 교육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큰딸인 조앤은 그때 그 지역에 있는 중학교의 장학생 선발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결과가 발표되던 날 비트겐슈타인은 집에서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떨어졌다고 연락을 받았던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럴 리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제기랄!'하고 그는 말했다. '한번 알아봐야겠다!' 조앤과 그녀의 어머니가 근심스럽게 따라오는 가운데 비트겐슈타인은 조앤의 학교로 들어가서 그녀가 떨어졌다고 말해주었던 선생을 만났다. '조앤이 떨어졌다고 말했다니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장담하건대 합격했음이 틀림없습니다'라고 그는 선생에게 말했다. 약간 위협을 받은 그 선생은 기록을 검토한 후, 모두에게 아주 다행스럽게도 거기에 정말로 실수가 있었고 조앤은 그 시험에 합격하기에 충분한 점수를 받았음을 발견했다. 그 선생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서 '무능한 멍청이'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비록 그의 판단이 정당했고 조앤의 능력이 입증되었지만, 클레멘트 여사는 부끄러워서 학교에 다시 찾아갈 수 없었다." (평전, 664~665)

나중에 비트겐슈타인의 유고 관리자 중 한 사람이 되는 엘리자베스 앤스콤이 비트겐슈타인의 강의에 참석하게 된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이 다정하게 '친구old man'라고 부르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느 강의에서 다른 학생들이 참가하지 않은 가운데 앤스콤 혼자만 참가한 것을 보고 "여자들이 사라져서 아주 다행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외에 비트겐슈타인의 강의에 참가한 적이 있는 여성으로는 작가 아이리스 머독이 있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의 강의가 사람들의 기를 꺾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를 "……항상 한 인격으로서 외경심과 놀라운 마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56]

1944년 10월, 케임브리지로 복귀. 그는 「철학적 탐구」를 완성하지 못한 것에 낙담했고, 강의를 하는 책임을 다시 맡아야하는 것에 대해 열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러셀과의 관계가 서먹해진 것이 극명하게 나타난 때.

1945년 7월, 영국 선거에서 노동당에 투표하고,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유. 비트겐슈타인은 처칠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의 비관주의는 곧바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끔 한다. "이 전쟁을 '일으킨 자들'을 완전히 박멸하면 -물론 미래의 전쟁은 오로지 이들만이 일으킬 것이라는 이유로- 이 세계는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될 것처럼 가장하는 것은 말도 안 되게 더러운 짓이다. 실제로는 비참한 미래를 불러올 뿐이다." (평전, 685).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의 현대 문명에 대한 혐오는 극에 달했고, 케임브리지에 대한 혐오감 역시 그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1946년, 벤 리처즈와 사랑에 빠지다. 물론 그도 남자다.

1946년 10월 26일, 전설의 탄생. 칼 포퍼와의 도덕학 클럽에서의 패싸움 논쟁. 논쟁 전, 비트겐슈타인은 포퍼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57]였고, 더군다나 벤 리처즈와의 관계로 사랑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반면, 포퍼는 10년을 기다린 만남이었다. 논쟁의 시작은 포퍼가 비트겐슈타인이 제안한 몇 가지 연설 규칙에 대해 비웃은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규칙은 초청장에 명시되어 있었는데, "짧은 발표문, 서론은 간단하게, 몇 개의 철학적 수수께끼를 제시할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에 비트겐슈타인은 그 초청장은 자신이 비서(와스피 히잡)에게 시킨 일이며 비서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변호했다.

포퍼는 비트겐슈타인의 (일종의) 철학적 허무주의에 대해 비난을 가했고, 비트겐슈타인은 "순수 수학이나 사회학에서 다루어질 문제 외에 문제는 없다."고 응수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때 예를 들기 위해 부지깽이를 들어 허공을 콕콕 찔렀고 특유의 과장된 몸짓으로 말을 했다. 그 모습을 본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비트겐슈타인, 부지깽이를 내려놓으시오."라고 말하게 된다. 간간이 비트겐슈타인의 제자들은 소리를 지르고, 성난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비트겐슈타인은 부지깽이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러셀도 따라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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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 사건을 다룬 풍자화
비트겐슈타인: "러셀 선생, 당신은 날 항상 오해하죠."
러셀: "비트겐슈타인, 자넨 뒤죽박죽으로 얘기하는군. 자넨 항상 뒤죽박죽으로 얘기하지."

비트겐슈타인은 이후 자리를 떠났고, 그가 나가면서 '쾅' 하는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비트겐슈타인이 나간 후 리차드 브레이스웨이트는 도덕 원칙의 사례를 하나만 들어달라고 포퍼에게 요청했고, 포퍼는 "초청 연사를 부지깽이로 위협하지 말 것."이라고 비꼬았다. 나중에 포퍼는 이 사건을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는데,
"……바로 그때 비트겐슈타인이 -그는 그때까지 난로 가까이 앉아서 신경질적으로 부지깽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며, 간혹 자기 주장을 강조할 때마다 마치 그것이 지휘자의 지휘봉이라도 되는 것처럼 흔들어 댔다- 내게 항의했다. '도덕률의 예를 들어 보십시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초청 강사를 부지깽이로 위협하지 않는 것.' 이 말에 비트겐슈타인은 벌컥 화를 내면서 부지깽이를 집어던진 뒤, 방에서 뛰쳐나가며, 문을 쾅 닫았다."[58]

그러나 이것은 칼 포퍼의 주장이고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십분에서는 도덕 원칙을 제시하라고 말한 이가 비트겐슈타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포퍼에게 도덕 원칙을 제시해 보라고 말한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었을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피터 기치뿐 아니라 폴란드 태생의 철학적 논리학의 전문가 카시미르 레위 역시 포퍼를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했다. ……처음에 그 질문이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나왔다고 확언한 비닐롯 경 같은 사람들도 나중에는 기억이 확실치 않다며 뒤로 물러섰다."[59]

비트겐슈타인은 이 논쟁에 관해 자신의 옛 제자이자 친구인 러시 리스에게 쪽지를 보내는데, 여기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형편없는 발표였다네. 런던에서 포퍼 박사라는 고집불통이 와서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한 감상적이고 쓰레기 같은 말들을 늘어놓았고, 나는 늘 그렇듯이 말을 많이 했지……." [60]

2.5. 노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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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노년기(1950년경)
1947년, 여름 학기 중 비트겐슈타인은 가르치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그는 게오르크 폰 리히트에게 교수직을 사임할 것이고 그가 계승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교수직을 사직한 후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가 「철학적 탐구」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1948년, 비트겐슈타인은 정신적 위기를 겪는다. 산책을 하던 중 시적인 감정에 빠지기도 하고 우울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집 안에서 혼자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 그 모습을 본 사람이 "누가 있는 줄 알았다"고 말하자, "맞습니다. 나는 아주 친한 친구, 나 자신과 말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이는 자칫 심각해지면 분열정동장애로 의심될 수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을 정신분열증의 사례로 소개하는 심리학 교과서가 있기도 하다.[61] 이 시기, 노먼 맬컴이 미국에서 보내주는 스트리트앤스미스 출판사의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을 즐겨 읽었다.

1948년 9월, 병에 걸린 맏누나 헤르미네를 보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 머물다.

1949년 4월, 자신이 「철학적 탐구」를 완성하지 못할 것이라 직감.

1949년 7월, 미국에 사는 노먼 맬컴의 가족을 방문. 이 시기 맬컴이 교수로 있던 코넬 대학의 모임에 참석한다.
"모임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맬컴이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팔에는 윈드 재킷과 낡은 군복 바지를 입은 가냘픈 노인이 기대어 있었다. 만일 지성으로 빛나는 얼굴이 아니었더라면, 사람들은 그를 맬컴이 추위를 피하게 해주려고 데려온 거리의 부랑자로 간주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개스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다.' 개스는 내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농담하지 말라'라는 식의 말을 했다. 그 후 맬컴과 비트겐슈타인이 입장했다. 블라토스가 소개되었고 그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 모임의 사회를 보던 블랙이 일어서서 그의 오른편을 향했다. 이제 분명해졌다. 모든 사람이 놀랍게도 ……맬컴이 모임에 데리고 온 그 야윈 노인에게 블랙이 말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 충격적인 말이 들렸다. '비트겐슈타인 교수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고 블랙이 말했다. 블랙이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말하자마자 그 자리에 모인 학생들이 숨을 크게 멈추는 소리가 났다. 당신은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1949년의 철학 세계에선, 특히 코넬에선 신비스럽고 두려운 이름이었다. 그 숨이 멎는 소리는 블랙이 '플라톤,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라고 말했을 경우에 생겼을 것과 같은 것이었다." (평전, 796~797)

1949년 10월, 비트겐슈타인은 아파서 쓰러지게 된다.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걱정한다. "나는 미국에서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유럽인이야. 유럽에서 죽고 싶어…… 바보처럼 여기에 오다니." 그러나 병세는 곧 회복되었고, 10월 말, 런던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때 받은 건강 진단의 결과가 11월 25일 나오고, 비트겐슈타인에게 전립선암 진단과 함께 시한부 인생이 선고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에는 전혀 놀라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잘만 치료받으면 6년 정도를 더 살 수 있다는 말에 놀란다. "내 인생이 그렇게 연장된다니 유감이다. 이런 반쯤의 생활에는 여섯 달도 너무 길다."고 말한다. 시한부 선고 이후, 비트겐슈타인은 헬레네에게 편지를 보내어 빈에서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194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보내기 위해 비행기를 타 빈으로 출발한다.

1950년 2월 11일 헤르미네 사망.

이 시기, 후에 과학자들에게는 악마와도 같은 존재가 될 철학자 파울 파이어아벤트가 비트겐슈타인을 방문하게 된다. 처음에 비트겐슈타인은 집사를 대신 보내어 학단 모임에 초대하고 싶다는 파이어아벤트의 초청에 거절할 뜻을 밝혔으나, 파이어아벤트가 정중하게 편지를 보내 다시 부탁하자 그 편지의 내용이 마음에 들어 초대에 응하게 된다. 모임이 있던 날, 파이어아벤트는 감기에 걸려 아팠지만 항생제를 다량 복용하고 모임에 참석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약속된 시간보다 1시간 늦게 도착했고, 파이어아벤트는 비트겐슈타인의 얼굴을 꼭 '말린 사과' 같다고 생각했다. 모임의 분위기는 호전적이었고 비트겐슈타인에게 무례한 질문과 방해가 쏟아졌지만 파이어아벤트는 오히려 아부보다는 차라리 그런 건방진 상황이 더 나았을 것이라며 그 상황을 호의적으로 보았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도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고 파이어아벤트는 전해 들었다고 한다.[62] 파이어아벤트는 후에 「이성이여 안녕」, 「방법에의 도전」 등을 저술하며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를 주장하고, 과학의 우상화를 신랄하게 비판하게 된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가졌던 현대 문명에 대한 비관적 흐름과 커다란 맥을 같이한다.

3월 23일, 빈을 떠나 런던으로 돌아간다. 러시 리스 부인의 집에 머물다.

4월 4일, 케임브리지에 있는 폰 리히트의 집으로 간다.

1951년 2월, 비트겐슈타인은 여러 번 노르웨이의 스키올덴 별장이나 수도원에 가려는 생각을 하나 건강 때문에 실행이 불가능하게 된다. 결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자신의 주치의인 베번 박사의 집에서 머물기로 한다.

4월 26일, 비트겐슈타인의 예순두 번째 생일이자, 마지막 생일. 4월 28일, 베번 박사가 이제 며칠밖에 살 수 없음을 이야기. 비트겐슈타인은 "아주 좋습니다!"라고 대답. 베번 여사는 그의 입종을 지키면서 4월 29일 친구들이 도착할 것을 전함. 비트겐슈타인이 '멋진 삶을 살았다'고 친구들에게 대신 전달해 줄 것을 부탁. 4월 29일, 벤 리처즈, 엘리자베스 앤스콤, 요릭 스마이시스 그리고 모리스 드루어리가 비트겐슈타인의 임종을 보기 위해 베번의 집에 모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친구들은 그에게 가톨릭 의식을 치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스마이시스가 언젠가 비트겐슈타인이 가톨릭 친구들이 자신에게 기도해 주기를 바랐다고 얘기하자 그를 위해 기도한다. 기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베번 박사는 그가 임종했음을 말했다.

4월 30일, 케임브리지에 있는 성 자일스 교회에서 가톨릭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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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죽음(1951년)
"신이 인간을 어떤 방법으로 재판하는지, 우리에게는 상상이 안 된다. 신이 그때 유혹의 강도와 인간의 약점을 헤아린다면 도대체 누가 지옥에 떨어지겠는가. 만일 신이 그 두 가지를 헤아리지 않는다면, 바로 그 두 힘이 티격태격한 결과가 인간에게 예정된 목표가 된다. 결국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두 힘이 티격태격하는 싸움을 통하여 이기느냐 지느냐 어느 한쪽으로 정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종교적 사상 같은 것도 아니고 도리어 과학적 가설인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영역에 머무르고 싶으면 싸우는 도리밖에 없다."[63]

3. 기타

3.1. 히틀러와의 인연

비트겐슈타인과 아돌프 히틀러가 같은 학교에 다닌 동문이라서 히틀러와 나치의 반유태주의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느낀 열등감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그 시절에는 학교에서 중간 정도의 성적을 내는 학생이었던데다가 같은 반을 다니지도 않았고, 학년도 서로 달랐기 때문에 학교에서 그 둘이 서로를 알고 지냈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히틀러가 학교에서 "이상한 유대인"을 만났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아마도 세계 최고의 지성 중 한 사람과 세계 최악의 독재자가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이러한 음모론이 도는 듯하다. 물론 둘 다 사회성이 조금 낮은 편인[64] 사람들이었으며, 고집이 아주아주 세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있기는 하다.

아돌프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 간의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그들이 다닌 학교는 중하층 계급의 자식들이 다니던 곳이다. 요즘으로 따지면 직업전문학교 같은 곳이다. 문제는 히틀러나 비트겐슈타인이나 상류층, 혹은 부유층 자식이었다는 점.[65] 비트겐슈타인은 독일어의 2인칭 존칭 대명사 Sie라는 말을 사용[66]하여 많은 학생들의 눈총을 샀다.[67] 그리고 그가 유대인이라는 점, 엄청난 거부의 자식이라는 점, Sie라는 말을 쓰는 등 귀족적인 티를 냈다는 점은 학내에서도 유명한 사실이었고 이는 히틀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만한 어떠한 자료도 없다. 다만,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가 같이 찍은 사진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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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가 같이 찍혔다고 추정되는 사진(1901년경)[68]

3.2.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수치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회고에 따르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조카 파울 비트겐슈타인(2세)[69]과 같이 비트겐슈타인 가문의 수치였다고 한다. 다음의 일화 참조.
"……그는 수십 년 전 자신의 삼촌 루트비히가 그랬던 것처럼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왔으며, 그와 삼촌을 있을 수 있게 해 준 모든 것을 버렸고, 예전에 삼촌 루트비히가 그랬던 것처럼 가족들에게 파렴치한 인물로 낙인 찍혔다. 루트비히는 파렴치한 철학자의 길로 나섰고, 파울은 파렴치한 미치광이의 길로 나섰다. ……파울은 삼촌인 루트비히가 비트겐슈타인 가족들의 공격을 받을 때, 그리고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으로서 평생 비트겐슈타인 집안의 수치 덩어리였던 삼촌이 친척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될 때 적극 나서서 그를 옹호했다는 것이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파울 비트겐슈타인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바보천치일 뿐이었다. 그런 바보천치를, 괴상한 소리만 들으면 대단한 것인 줄 알고 귀가 솔깃해지는 외국인들이 유명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면서, 이 집안의 천치 한 명에게 전 세계가 홀라당 속아 넘어갔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어느 날 난데없이 영국에서 유명해지더니 위대한 사상가로 돌변해 버리는군, 하고 웃기는 현상으로 치부해 버렸다. 비트겐슈타인 집안 사람들은 지극히 교만했으므로 자기 가문의 철학자를 무시할 뿐 눈곱만한 존경심도 갖지 않았다. 존경심은커녕 오늘날까지도 경멸이라는 벌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파울과 마찬가지로 루트비히도 오직 배신자일 뿐이었다. 그들은 파울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루트비히도 집안에서 잘라내 버렸다. 그들은 파울이 살아 있는 내내 파울의 존재를 수치스러워했듯이, 오늘날까지도 루트비히의 존재를 수치스러워하고 있다. 이것이 진실이다."[70]


[1] 비트겐슈타인의 형제는 다음과 같다: (태어난 순서로) 큰누나 헤르미네, 큰형 한스, 둘째 형 쿠르트, 둘째 누나 헬레네, 셋째 형 루돌프, 셋째 누나 마르가레테, 넷째 형 파울, 그리고 루트비히이다.[2] 오스트리아의 앤드루 카네기로 불리던 재벌이었고, 가난하던 10대 시절 돈벌겠다고 미국에 무작정 이민가서 10개월 정도 살다가 더 망해서 돌아온 적이 있는데, 그때 미국에서 영어를 배워서(당시 유럽 학교들은 영어를 필수로는 안 가르쳤다. 필수 제1외국어로 프랑스어만 가르쳤고, 영어는 제2외국어 정도였다.) 재벌이 되고 나서는 진짜 그 앤드루 카네기 가족들과 친분도 생겼다. 이렇게 말하면 카를이 아버지의 재산을 손쉽게 물려받은 재벌 2세쯤으로 여겨질지도 모르나 무일푼으로 바이올린만 들고 뉴욕에 가거나, 웨이터, 바텐더 일을 하는 등 그 자신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되려고 하였다.[3] 창업한 회사도 있고 주식지분 인수로 가지게 된 회사도 있어서 복잡한 지분관계에 있는 회사들이 되게 많았다. 사실 유통 등 공업과 무관한 회사도 일부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유럽은 대기업 대주주의 타기업 지분소유 상한선에 관한 법률이나 산업에 따른 지분 제한 관련 법률 등 여러 법률의 제정으로 인해 하나의 개인이나 한 기업이 산업이 다른 분야의 회사 여러개의 대주주가 되어 실질적으로 다 소유하는 재벌이 허용되지 않지만, 20세기초의 유럽은 그런 법이 없어서 지금의 한국 같은 재벌이 있었다. 즉 족벌식 경영이 가능했다. 한국의 순환출자나 기타 복잡한 형태의 지분 소유 방식이 과거의 유럽에도 존재했다. 루트비히의 아버지 역시도 지금의 유럽에는 없는 진짜 재벌인만큼 철광과 무관한 회사들도 대주주로서 가지고 있었다.[4] 카를이 창업한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만든 회사를 인수한 것이다. 70여년 뒤인 먼 훗날 다른 수많은 회사들과의 인수합병들을 통해 현재의 Voestalpine이 되었다. 단 Voestalpine의 뿌리는 당시 인수나 합병의 주체였던 다른 회사로 간주된다.[5] 루트비히와 넷째형에게 한국어로 치면 "병신"이라고 모욕하는 표현을 한 편지가 발견되었다. 넷째형은 팔이 없다고 병신이라고 하고, 막내 루트비히는 (부친이 어렵게 만든 오스트리아 최대규모의 재벌기업을 쉽게 넘겨서 지분을 없앴다고) 머리가 병신이라고 욕을 하고 다녔다.[6] 따라서 루트비히가 유대 민족 문화 속에서 그것과 친숙한 가운데 자라났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요하임 슐테, 김현정 옮김. (인물과사상사, 2007) 비트겐슈타인, 17. "비트겐슈타인 집안에서는 유대교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7] 체코의 Kladno는 당시 체코가 오스트리아 제국 땅이라 오스트리아 영토였지만,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고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땅이 되었다.[8] 파울 엥겔만이라는 건축가와 같이 지었다.[9] 알렉산더 워, 서민아 옮김. (필로소픽, 2014) 비트겐슈타인 가문, 293, 294. "……식사를 하면서 파울은 마르그리트 롱에게 이 작품에 약간 수정을 가했다고 말하자, 그녀는 작곡가를 염려하며 연주 전에 라벨에게 미리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연주가 진행되는 동안 라벨의 얼굴은 분노로 어두어졌다. '연주자는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파울은 이렇게 주장했고, 이에 대해 라벨은 '연주자는 노예이다'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후에 공식적으로 화해했고 (같은 책, 296) "……언론에는 두 사람이 관계를 회복한 것으로 공식적인 기사를 내보냈다. '라벨과의 오랜 다툼이 해결되었습니다.'" 따라서 라벨과의 불화가 특별히 관계가 뒤틀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여전히 "……파울이 자신의 악보를 수정한 것이 여전히 불만스러웠……"(같은 책, 297)긴 했지만 말이다.[10] 같은 책, 208.[11] 왼쪽부터 헬레네, 루돌프, 헤르미네, 루트비히, 마르가레테, 파울, 한스, 쿠르트.[12] 여기에서 들을 수 있다.[13] 같은책, 41.[14] 같은 책, 62.[15] 다수의 학자와 예술가가 배출돼서 이러한 별명이 붙었다. 이 시기 빈 출신의 유명한 사람들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오스카 코코슈카, 아르투어 슈니츨러, 구스타프 말러 등이 있다.[16] 비평가 카를 크라우스가 붙인 별명이다.[17] 하지만 다른 도시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나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특히 식생활 조건이 우수했는데 다른 곳에서라면 명절 때나 먹었을 말고기 따위를 즐겨 먹을 수 있었다. 이는 빈에서 노동 조합이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18] 앨런 재닉·스티븐 툴민, 석기용 옮김. (이제이북스, 2005)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19] 그러나 그에게 따라붙는 '최고의 지성'이란 수식어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학문적 업적'(물론 학문적인 업적도 있었지만)보다는 '예술적 독창성'과 친밀하다. 비트겐슈타인 스스로 자신을 "씨앗을 뿌리기보다, 씨앗을 뿌릴 토양을 만들려고 한다"고 말한 것과 같이 기존의 학문적 도식에서 벗어나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다음의 루돌프 카르납의 말을 참고: "그의 관점과 태도는 과학자의 것이라기보다는 창조적인 예술가에 훨씬 더 가까웠다. 거의 종교적인 예언자나 선각자의 태도와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마치 신적인 영감을 통해 통찰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어떤 온당하고 합리적인 논평이나 분석도 신성 모독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윤 옮김. (필로소픽, 2015) 비트겐슈타인의 인생 노트, 부록.[20] 페피라는 소년과 사귀기도 했지만 그 우정이 오래가지 못했는지 린츠의 실업학교의 졸업 이후의 기록은 없다.[21]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가 같이 찍혔다는 단체 사진에 대해서도 어린 히틀러는 분명하나 옆에 있는 아이가 어린 비트겐슈타인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22] 바이닝거는 1902년 그의 나이 22세에 「에로스와 프시케, 생물학적-심리학적 연구」라는 묘한 제목의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자신 18세에 그리스어, 라틴어, 불어, 영어에 능통하고 나중에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만큼 충분한 천재였는데도 말이다.[23] 오토 바이닝거, 임우영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성과 성격, 836. 임우영 해설. "비트겐슈타인은 바이닝거의 장례식 때 마츨라인스도르프 공동묘지까지 따라가기도 했는데, 평생 그의 추종자로 머물렀다."[24] 후에 아돌프 히틀러는 어느 날 저녁에 친구인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자기에게 확신하기를 "유대인은 다른 민족들이 해체되는 것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자살한 오토 바이닝거 말고는, 인정할 만한 유대인이 없다"고 말했다고 술회했다.[25] 한스 켈젠, 심현섭 옮김. (법문사, 2010) 켈젠의 자기증언, 49. "...나는 얼마 후 곧 대부분의 강의 듣는 것을 포기하고 철학저서를 읽기로 했다. 이런 방향전환은 나보다 두 살 위의 친구인 오토 바이닝어에 의해 힘얻게 되었다. 이 친구는 당시 자신의 박사 학위 테마를 연구했고, (중략) 바이닝어의 인격과 그가 남긴 저작의 큰 성공은 학문하겠다는 나의 결심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바이닝거의 몇 장 없는 사진 중 하나인 벤치에 앉아 주먹 쥔 사진은 그가 켈젠에게 "활기 있는 휴식을 위해" 선사한 것이라 한다. (같은 책, 146).[26] 앨런 재닉·스티븐 툴민, 석기용 옮김. (이제이북스, 2005)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288~289.[27]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593~594.[28] 세계 철학계 2대 프린키피아로 불리는 그 책이다. 첫번째는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자연철학자 아이작 뉴턴의 17세기 가장 위대한 걸작 "자연 철학의 수학 원리(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이고, 두번째가 20세기의 이 책이다. 둘 다 프린키피아라고 불리며, 철학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29] 이 시기에 종종 러셀의 친구인 수학자 필립 저데인에게 자신이 해결한 방법을 보내기도 했다.[30] 비트겐슈타인은 문제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며 사물이 아니라 사실을 부각시키려고 했다고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당시의 그 소재로 하는 논쟁은 현 시점에 와서 무의미해졌다.[31] 이때의 일화에 대한 러셀의 육성을 유튜브를 통해 들을 수 있다. #[32] 그는 기묘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특이해 보였어요. 학기 내내 나는 그가 천재인지 아니면 단순한 괴짜인지 판단하지 못했어요.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지낸 첫 학기가 끝나갈 때쯤 내게 와서 이렇게 말하더군요. "내가 단순한 멍청이인지 아닌지를 말해주실래요? 내가 단순한 멍청이라면 그냥 비행사나 되렵니다. 그게 아니라면 철학자가 될 거고요." 나는 그에게 어떤 철학적 주제에 관해서 방학 중에 뭔가를 써와보라고 얘기했습니다. 써오면 그가 단순한 멍청이인가 아닌가를 말해주겠다고 하면서요. 다음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내가 제시했던 것을 완성시켜서 가져왔더군요. 나는 딱 한 줄만 읽고 바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안 돼, 자네는 절대로 비행사가 되어서는 안 되네." 그리고 그는 비행사가 되지 않았지요.[33] 그 때문에 사도회에 선출되지는 못했다.[34] 이때 수혜자로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스카 코코슈카, 아돌프 로스, 헤르만 바그너, 카를 달라고, 테오도어 해커 등이 있다.[35] 그러나 케임브리지의 사람들과 완전히 연을 끊은 것은 아닌데 논리학 연구를 하며 러셀, 무어 등과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 받았다.[36] 노먼 맬컴, 이윤 옮김. (필로소픽, 2013) 비트겐슈타인의 추억, 14~15.[37] 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03) 러셀 자서전 - 상, 481~482.[38] 1913년부터 1914년 6월경까지 비트겐슈타인은 노르웨이 스키올덴 지방의 우체국장 집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디자인한 별장은 완성된 직후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사용되지 않다가 1936년부터 1937년까지 「철학적 탐구」의 앞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을 작성하기 위해 사용된다. 이 별장은 1957년 허물고 다시 지어졌으며 현재는 장소 자체가 많이 훼손된 상태다.[39] 비록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지만.[40] 재미있는 점은 이 기간 동안 그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반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는 니체의 저서도 읽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반그리스도」를 읽었는데, 니체의 적대감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은 맞지만 근본적인 신앙심에는 변함이 없던 것으로 보여진다. (평전, 229)[41] 이 기간 중 프레게와 논리학에 관한 편지를 주고 받는다.[42] 윌리엄 바틀리 3세, 이윤 옮김. (필로소픽, 2014) 비트겐슈타인 침묵의 시절 1919~1929, 42, 43.[43] 같은 책, 47.[44] 비트겐슈타인의 학생들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제시한 논리적 형식 없이도 자유로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45] 같은 책, 19, 20.[46] 버트런드 러셀,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03) 러셀 자서전 - 상, 565~566. "……위대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에게도 약점이 있었다. 1922년, 신비주의에 한창 열을 올리던 그가 내게 똑똑한 것보다는 착한 것이 낫다고 아주 진지하게 호언장담하던 시절, 나는 그가 말벌을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스브루크에서 나와 함께 숙박 시설에 묵을 때도 벌레들이 무서워 한곳에서 이틀을 자지 못했다. 나는 그때 러시아와 중국을 여행한 후여서 그 정도 사소한 문제에는 단련이 되어 있었으나, 세상에 어떤 것을 준다 해도 벌레를 진득하니 참고 살 수는 없다고 하는 그의 확신에는 도무지 단련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작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 인상적인 사람이었다.".[47] 그러나 바틀리는 "이 시기에 그가 철학을 포기했다가 갑자기 -예컨대 네덜란드의 수학자 브라우어의 1928년 3월의 강의에 참석한 후- 다시 철학에 복귀했다고 가정하는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이를 부인한다. 윌리엄 바틀리 3세, 이윤 옮김. (필로소픽, 2014) 비트겐슈타인 침묵의 시절 1919~1929, 81.[48] "……마르그리트는 비트겐슈타인이 그 당시 조각했던 흉상의 모델이 되었다.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흉상은 엄밀히 마르그리트의 초상화는 아니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의 관심이 주로 태도와 얼굴의 표정에 있다 하더라도, 그가 포착하려고 했던 것은 그녀의 실제 표정이 아니라 그 자신 창조하고 싶었던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완성된 흉상은 그레틀에게 선사되어 쿤트만가세의 저택에 (중략) 전시되었다." (평전, 350, 351).[49]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이윤 옮김. (필로소픽, 2015) 비트겐슈타인의 인생 노트, 184.[50] 다시 말해서 시험을 치르는 사람(비트겐슈타인)과 평가관(러셀 포함)이 뒤바뀐 듯한 구도였다는 뜻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학문적 명성이 이미 대단한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51] '이것은 빨갛다'는 주장은 단순히 독립적인 게 아니라 '이것은 파랗지 않다'를 함축한다는 얘기.[52] 재밌는 점은 일본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감독 코이즈미 타카시)에서 한 학생이 "수학도 인간이 만든 것 아닌가요?"라고 묻자 작중 화자로 등장하는 선생이 "아닙니다. 수학은 인간이 있기 전부터 있었습니다."라고 하디와 비슷하게 말한다는 점이다.[53] 수학자인 힐베르트가 "아무도 우리를 칸토어가 창조했던 천국으로부터 쫓아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말을 두고 한 말[54] 이경우 여기서 수식은 동일한 수학 이라는 문법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은 같지만, 그러한 수식이 어떠한 맥락속에서 사용되는지를 알아야 혼란을 이해할 수 있다.[55] 전체 영화는 http://www.youtube.com/watch?v=DdmOmirM_SU 이곳에서 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 정확히 베티 허튼의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그의 생전에 촬영된 필름 중 하나이다. 시기상 베티 허튼의 단편 영화나 「The Fleet's In(1942)」, 「Star Spangled Rhythm(1942)」 등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중 「Star Spangled Rhythm(1942)」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56] 여담이지만 나중에 아이리스 머독은 치매로 고생을 겪는데 그 일화가 영화 「아이리스(2001)」로 나온다.[57] "……포퍼라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군." 데이비드 에드먼즈, 존 에이디노, 김태환 옮김. (옥당, 2012)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 345.[58] 칼 포퍼, 박중서 옮김. (갈라파고스, 2008) 끝없는 탐구, 203.[59] 데이비드 에드먼즈, 존 에이디노, 김태환 옮김. (옥당, 2012) 비트겐슈타인과 포퍼의 기막힌 10분, 360.[60] 같은 책, 377.[61] 권석만. (학지사, 2013) 현대 이상심리학, 372.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창조적 업적을 남긴 천재 중에는 정신분열증적 증상을 지녔던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 학자로는 Issac Newton, Ludwig Wittgenstein, John Forbes Nash 등이 있으며……."[62] 파울 파이어아벤트, 정병훈 옮김."킬링 타임"(한겨레출판사, 2009), 143~145.[63]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김양순 옮김. (동서문화사, 2008) 논리철학논고/철학탐구/반철학적 단장, 579.[64] 히틀러는 학교를 다닐때도 활달한 성격이 아니었고, 군복무를 했을 때도 전우들과 어울리지 않고 사교적인 활동도 전혀 하지 않았다. 군대 내 왕따나 부조리는 겪지 않았지만. 당시는 평시도 아닌 한창 전쟁중이었고 당시 독일군이 똥군기가 만연한 군대도 아니었다. 한창 전쟁 중이라 불시에 단시간에 준비해서 전투를 해야 할 때도 있고, 전투에서 누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열악한 환경이라 집단에서 조직적으로 왕따 같은 걸 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고문관도 아니었고 시키는 건 잘한다는 이미지와 오스트리아 출신인데 독일을 위해 자원했다는 고평가가 섞여 있어서 부사관들이나 동료 병사들 모두 항상 좋게 쳐줬었다. 그래서 사병들 사이에서도 히틀러의 사회성에 비해 고문관처럼 군 생활을 못한다고 평가하는 경우나 무시하는 분위기도 없었기에 내무반 내 문제는 없었다. 요약하자면 '이상하게 조용하고 내성적이고 친교적이지도 않지만, 군인으로 할 건 다 하니 문제될 건 없는 애' 정도의 이미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전투에서 크게 다쳐 죽을뻔했다 해도 받기 힘든 훈장인 철십자훈장도 받은 것이었다.[65] 한국으로 치면 비트겐슈타인은 재벌 2세, 히틀러는 고위 공무원(세무서장) 아들이었다. 물론 히틀러는 귀족이나 전통 부잣집이 아니니 중상류층 정도로 볼 수도 있으나, 아버지가 귀족 여자랑 결혼했다가 사별했기에 집이 귀족들이 살던 저택이었고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유했다. 히틀러의 청춘기 행적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깔보거나, 아니면 동정하여 동전이나 음식을 동냥해 줬던 흔적들이 꽤 있다. 자신을 상류층이나 부유층으로 생각하고 살았던 것.[66] 재밌는 점은 히틀러도 비트겐슈타인처럼 다른 학생들에게 존칭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다음의 책을 참고. 요하임 페스트, 안인희 옮김. (푸른숲, 2009) 히틀러 평전1, 62. "어쨌든 그는 실업학교에서 '친구도 동료도 없이' 지냈고,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들과 함께 임시로 하숙하고 있던 늙고 못생긴 제키라 부인 집에서도 그는 무뚝뚝하고 조용하게 홀로 지냈다. 당시 그와 함께 지냈던 사람 중 한 명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하숙생 다섯 명 중에서 누구도 그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우리들 사범학생들끼리는 당연히 서로 '너'라고 불렀지만 그는 우리에게 '당신'이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그 점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67] 독일어의 존대어와 한국어의 존대어, 독일 포함 유럽과 한국의 사제지간 문화(중등교육 기준)는 느낌이 좀 다르긴 하지만, 일단 당신이 중고딩이었을 때 같은 반 아이 중에 애들에게 전부 존댓말을 쓰고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지 상상해 보자. 존댓말 항목에서 보듯, 동양문화권에서도 어느 정도 면식이 있고 동등한 관계에서 존댓말을 쓰는 것을 화자가 나와 거리를 두려는 의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참고로 독일어의 존댓말은 우리말의 존댓말처럼 상대방을 높여 주고 자기를 낮춘다는 느낌보다는 상대방과 격식을 차리기 위해 거리를 떨어뜨려 둔다는 느낌이 강하다. 사실 위에서 나온 한국고등학교의 예보다 정확한 예를 현대 한국에서 찾자면 중고교가 아니라 딱, 대학생인데 만학도인 것도 아니고 고졸 후 입학해 나이, 학번, 전공이 모두 같고 자주 보는 학교 친구들에게 계속 존대말을 하는 정도의 느낌이다. 유럽에서는 프랑스건 독일이건 영국이건 과거부터 학교 문화에서 고등학생만 되어도 성인 대우하는 문화(즉 현대 한국으로 치면 대학생 대우하는 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있어서, 잘 안 지켜질 때도 있으나 대부분 선생님들도 (안 친한, 처음 본) 학생한테는 대학교수가 하듯이 존대말하는 게 기본 문화고, 학생들도 선택 수업을 하므로 처음 보는 애가 있으면 존대하는 것에 대해 이상한 걸로 생각하는 경우가 없다. 대신 존대말의 정도 자체가 동양보다 매우 약하다. 단지 면식이 생기고도 그걸 너무 오래 이어가면 문제가 되는 정도일 뿐이었으며 한국처럼 고등학생까지 성인이 아닌 것으로 보는 학교 문화라 같은 학년 학생임이 확인되면 처음봐도 반말을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학교 문화와는 토대가 다르다. 유럽 고등학교도 담임 선생님 개념은 있으나, 어디까지나 대학에서 전공 학생을 나눠 학교 생활을 돕는 교수 정도의 포지션이라, 기본적 상담이나 기타 행정적인 것을 위해 존재하는 담임 개념이고, 조례 종례 청소 등을 시키지 않으며, 그 외 한국 고등학교의 담임 선생님이 하는 분야들은 다른 담당 선생님들이 각자 따로 맡고 있어서 한국의 담임 선생님과 다르다.[68] 우측 상단의 아이가 히틀러인 것임은 분명하나 좌측 하단의 아이가 비트겐슈타인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69] 루트비히의 넷째 형의 아들로 광인으로 여겨졌다.[70] 토마스 베른하르트, 배수아 옮김. (필로소픽, 2014)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89, 91. 강조는 원문. 장르가 자전 소설이기 때문에 픽션인지 실제 있었던 일화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또한 그의 누이는 그가 자랑스럽다고 여긴 적(루트비히는 유산의 상당수를 처분한 후 과부가 된 누이에게 새 저택을 지어준 적이 있다)이 있었다. 다만 집안 전체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의 삼촌이 그를 경멸한 것은 확실하다. 위의 집안의 쓸모없는 놈이 어느날 유명인이 되다니 어이 없다는 반응도 그의 삼촌의 것이다. 그의 형제인 카를과 함께 사업에 참여했었는데, 카를의 사후 조카가 가장 큰 지분을 다 팔아서 과거처럼 가족이 경영에 참여할 기회를 날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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