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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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덴도르프 교의 위치 |
루덴도르프 교(Brueke der Ludendorff)는 독일 라인란트팔츠에 위치한 레마겐(Remagen)과 에르펠(Erpel)을 연결하는 다리로 라인강을 건너는 철교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에서 라인강을 도하하는 작전을 서방 연합군이 전개하고 있을 때인 1945년 3월 7일 서방 연합군에게 점령된 라인강 최초의 교량인 것으로 유명하다.
해당 시기의 나치 독일은 패망의 길로 나아가는 상황인지라 독일 본토를 수비하기 위해서 라인강을 방어선을 삼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라인강을 건너는 다리를 체계적으로 폭파해서 서방 연합군이 라인강을 쉽게 건너지 못하게 하고 있었으나 전투지경선 및 근처의 지형과 부족한 수비병력이라는 문제가 터졌고 폭파용 폭약도 폭약의 양도 모자란데 부적합한 종류만 사용가능하다는 악재가 겹친 끝에 루덴도르프 교는 폭파가 실행되었지만 불완전했고 결국 미군에게 빼앗기고 만다.
루덴도르프 교를 건넌 미군은 처음으로 라인 강 너머에 제대로 된 교두보를 빠르게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교량 자체가 튼튼했기 때문에 전투 후에도 긴급보수를 거쳐서 전차와 트럭도 일단 루덴도르프 교를 건널 수 있었다. 도하 작전의 어려움 및 교두보를 확보한 후에나 리본부교같은 부교를 설치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루덴도르프 교는 서방 연합군의 진격에 엄청난 시간단축을 선물해준 다리였다.
루덴도르프 교의 함락은 당연하게도 아돌프 히틀러의 분노를 가져왔으며 나치 독일군은 동원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투입해서 루덴도르프 교를 파괴하려고 노력했다. 서방 연합군도 교두보를 강화하고 교량 주변에 대공포 진지를 도배하며 전투기 부대를 상공엄호하게 하는 등 최대한 방어력을 늘렸으며 교량 자체도 응급수리와 점검을 통해서 쏟아지는 공격에 버틸 수 있도록 노력했으나 결국 루덴도르프 교 함락시 벌어진 폭파로 인한 타격을 이기지 못하고 함락 10일 후인 1945년 3월 17일에 붕괴되었다.
그러나 루덴도르프 교가 붕괴될 시점에는 이미 미군은 튼튼한 부교를 2개소나 건설완료한 상태였고 교두보는 함락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강화되었으며 서방 연합군의 병력과 전차와 포병을 비롯한 중화기와 물자가 라인강을 건넌 후였다.
루덴도르프 교를 둘러싼 전투를 레마겐 전투(Battle of Remagen)라고 부르며 루덴도르프 교 자체도 레마겐의 철교(The Bridge at Remagen)라고 부르는 일이 많다. 그리고 1968년에 레마겐의 철교(The Bridge at Remagen)라는 이름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루덴도르프 교는 복구되지 못했으며 2022년에 해당 위치에 보행자와 자전거 통행이 가능한 교량을 재건축한다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2. 제원
<colbgcolor=#4885ed><colcolor=#fff> 구분 | 상세 |
명칭 | 루덴도르프 교 (Brueke der Ludendorff) |
별명 | 레마겐 철교 (The Bridge at Remagen) |
국가 | 독일 제국 |
설계자 | 칼 비너 (Karl Wiener) |
건설사 | 빌핑어 베르거 (Bilfinger Berger AG) |
형태 | 복선 철교 (목재상판 추가로 보행, 차량통행 가능) |
구조 | 아치 트러스트 |
경간 | 3개 (중앙부 156.21m, 강안부 각각 84.6m) |
교각 | 2개 |
전장 | 398m (철교부위는 325m) |
전고 | 15m (아치부 최상단 28.5m) |
중량 | 4,642t |
시공 | 1916년 |
명명 | 1918년 4월 25일 빌헬름 2세가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이름을 인용함 |
준공 | 1918년 5월 1일 |
비용 | 2,100,000 파피어마르크 |
붕괴 | 1945년 3월 17일 |
3. 역사
3.1. 건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은 슐리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독일 국내에서의 철도를 비롯한 물류를 원할하게 돌아가도록 여러가지 교통 기반시설을 건설했다. 그 중에서 라인강을 도하해서 전선에 보급을 할 목적으로 3개의 교량을 건설했는데 빙엔(Bingen)의 힌덴부르크 교(Brueke der Hindenburg)와 코블렌츠 근처에 있는 울미츠 교(Brueke der Urmitz)와 여기서 설명하는 루덴도르프 교다.교량을 3개나 라인강에 건설한 이유는 라인강을 건너는 교량이 쾰른이나 뒤셀도르프 같은 중요 지역에 몰려있는 관계로 인해 철도를 비롯한 교통망에 과부하가 걸리고 교통체증이 발생하기 때문에 우회로를 만들 필요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덴도르프 교는 라인강의 양측 강안을 달리는 동 라인선(Rechte Rheinstrecke)와 서 라인선(Linke Rheinstrecke)와 함께 라인강 너머의 아르탈반(Ahrtalbahn)을 연결함으로서 아르탈반에서 룩셈부르크나 프랑스 방면으로 바로 철도 수송을 할 수 있도록 건설되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슐리펜 계획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하는 1912년에 이미 루덴도르프 교를 비롯한 3개 교량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견이 올라갔고 루덴도르프 교의 경우에는 1916년에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건설을 강력하게 주장했기에 전쟁 중인 상황에서도 건설이 진행되었다. 이처럼 루덴도르프 교의 실제 건립에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지분이 많았으므로 1918년 4월 25일 빌헬름 2세가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이름을 따서 루덴도르프 교라는 교량의 명칭을 지어주었으며 교량이 준공된 다음날인 1918년 5월 2일에 레마겐의 시의회는 특별회의를 진행해서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명예시민으로 임명했다.
기술적으로는 당시의 최신형 공법인 아치 트러스트 공법을 도입해서 교각을 2개만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복선 철도를 통해 열차가 전체 길이 398m, 철교부위가 325m인 교량 구조물을 훌륭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철로 양 옆에 보행자 통로도 갖추어놓았고 처음 설계시부터 철교에 목재 상판을 덮어서 철로만 살짝 드러나게 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열차가 지나가지 않을 때는 트럭도 자유롭게 루덴도르프 교를 통과할 수 있도록 건설되었다.
이렇게 루덴도르프 교는 전쟁 수행에 중요한 교량이었으므로 건설 당시부터 다리의 양측 시작부위에 2개의 석재 망루 겸 벙커가 만들어져서 루덴도르프 교를 보호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며 그 외에도 교각 부위에도 방어시설물이 있으므로 모두 합하면 1개 대대 수준의 교량 수비병력을 배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량이 완성된 1918년은 이미 독일 제국에게 패전이 바짝 다가온 시기였고 완성을 빠르게 하기 위해서 러시아 군 포로들까지 동원해서 노역을 시켰는데도 불구하고 이미 때가 늦었다. 그래서 루덴도르프 교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독일 군인들이 라인강을 건너는 목적으로만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3.2. 방치
루덴도르프 교와 바로 연결되는 언덕을 관통하여 에르펠러 레이(Erpeler Ley)를 통과하는 철도 터널이 만들어진 후인 1919년 9월 1일에 루덴도르프 교와 연결되는 철도 노선이 완전히 개통한다. 하지만 이미 독일 제국은 무너지기 시작한 시기였고 실질적인 철도 기점인 루르 지역의 노이스(Neuss) 와 레마겐 사이의 철도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도 건설되지 않았기에 루덴도르프 교의 쓸모는 사실상 없어지고 방치의 길로 돌입한다.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망한 후 독일 점령군으로 미군이 관리했던 4개의 교량 중 하나로 루덴도르프 교가 들어가기도 했고 라인란트가 만들어지면서 독일 본토와의 연결이 느슨해진 관계로 인해 굳이 완성되지도 않은 우회로에 속한 루덴도르프 교는 1926년에 여름철에 한해서 일요일과 공휴일에 라인강변을 따라서 움직이는 관광열차를 제외하면 사실상 레마겐와 에르펠 지역의 주민들이 라인강을 건너가는 인도교로 전락해버린다.
당시에 얼마나 루덴도르프 교의 중요성이 떨어졌는지 라인란트 재무장으로 해당 지역을 되찾은 나치 독일은 유사시에 루덴도르프 교를 빠르게 폭파하기 위해서 다리 구조물 전체에 폭파장치를 설치할 정도였다. 원래 설계에도 루덴도르프 교에 폭파용 폭약을 설치할 구멍이 있긴 했으나 협상군 점령 기간동안에 콘크리트로 메꾸어졌기에 새로운 폭파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던 것이다.
폭파 시스템은 각각 3.66kg의 폭약이 들어가는 60개의 폭약상자를 교량의 각 부위에 설치한 후 폭약상자를 강철제 파이프로 보호되는 전기 케이블로 연결한 후에 에르펠러 레이 방향에 있는 철도 터널 안에 폭파 시스템용 제어판을 설치한 것이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서 유사시 루덴도르프 교를 안전한 위치에서 한번에 완파시킬 수 있었으며 전기 케이블이 끊어지는 등의 비상시에 대응할 목적으로 수동으로 점화 가능한 도화선도 같이 매설해놓았다. 해당 폭파 시스템은 프랑스 제3공화국이 지크프리트 선을 돌파할 것에 대비한 것이었으므로 프랑스 침공에서 나치 독일이 승리하자 철거되어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다.
폭파 시스템이 사라진 후에도 루덴도르프 교의 개점휴업은 계속되었다. 1939년에는 교량을 철거해서 철강을 다른 곳에 써먹으려는 준비를 했다가 취소하기도 할 정도였다. 이러다가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에 나치 독일군의 병참을 마비시킬 목적으로 라인강에 있는 교량에 1944년 9월 4일부터 폭격이 가해지면서 루덴도르프 교도 1944년 10월 9일에 33발의 폭격을 맞으면서 상당한 손상을 입는다. 1944년 12월 29일에도 4발의 폭탄으로 루덴도르프 교가 피해를 입었으며 1945년 1월과 2월 사이에도 계속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폭격들은 레마겐이나 에르펠 시가지를 박살내는 것이 주요한 목표이기도 했고 교량에는 상대적으로 부수적인 피해만 받은 경우가 많아서 루덴도르프 교는 계속 수리가 이루어지면서 정상적으로 사용이 가능했다.
그리고 서방 연합군의 전선이 점점 독일 본토로 접근하면서 라인강에 있는 교량에도 유사시 폭파를 할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이전에 폭파 시스템을 제거한 루덴도르프 교의 경우에는 기존의 폭발물들은 이미 다른 용도로 전환된 후에 다른 전장에 공급된 지 오래이므로 많은 양의 고성능 폭약을 일시에 터뜨려서 교량 자체를 붕괴시키는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대략적으로 600kg의 TNT를 사용해서 교량 구조물의 취약 부위를 폭파하면 된다고 계산이 나왔기에 루덴도르프 교도 폭파 준비를 다시 진행하면서 폭약을 설치해놓았다.
하지만 쾰른의 뮐하임 교(Mülheimer Brücke)에 미리 설치해놓은 폭약이 들어간 곳을 1944년 10월 14일에서 15일에 미국의 폭격기 부대가 우연히 폭탄을 정확하게 명중시키는 바람에 뮐하임 교 전체가 폭파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해당 사건 이후에 아돌프 히틀러가 격노하여 관련자를 군사법정에 올려버리고 이후에는 연합군이 교량에 접근하는 경우에 한해서 미리 서류로 허가를 얻어놓은 후에나 폭파 준비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고 규칙을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애써서 확보한 600kg의 TNT는 철거된 후에 다름슈타트로 다시 반납되었고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다.
3.3. 함락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이 시작되고 라인강을 건너는 다리에 대한 폭파계획이 실행되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루덴도르프 교에 대한 나치 독일군의 관심도는 매우 낮았으며 지휘권 관할 문제와 전투지경선 문제로 인해 혼란스럽기까지 했다.이렇게 된 이유는 루덴도르프 교의 위치 때문이기도 했다. 루덴도르프 교가 위치한 지역인 레마겐과 에르펠의 교통로 상황이 안좋고 지형도 원할한 교통 흐름에 지장이 오기 때문이다. 일단 레마겐은 주요 도로에서 약간 떨어진 라인강 서쪽 강안의 좁은 평지에 있어서 접근성이 낮았고 건너편의 에르펠은 한 술 더 떠서 강안까지 높은 언덕이 접근하는 바람에 루덴도르프 교를 건너도 동쪽 강안을 따라서 좌우로 갈라지는 좁은 통로밖에 없으며 직진하는 통로는 에르펠러 레이(Erpeler Ley)를 통과하는 396m 길이의 철도 터널밖에 없었다. 애초에 지형 조건이 이렇게 안좋았기 때문에 철도가 연결되었어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을 수준이고 방어전의 대가인 발터 모델조차 연합군이 바보가 아니라면 건너편 강변에 높은 언덕이 있는 레마겐 방면의 라인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레마겐과 주변의 지역에 수비병력을 증강시키는 것을 반대할 정도였다.
라인강을 건너는 교량에 대한 관할권도 개판이었다. 원래는 군관구(Wehrkreis)가 담당하고 군사 관련사항은 무장친위대에 보고하는 형태였으나 1945년 2월 시점에서는 서방 연합군이 독일 본토에 초근접하는 바람에 전선을 담당하는 독일 국방군에게 라인강을 건너는 다리에 대한 권한이 넘어갔다. 하지만 지도자원리에 따라서 내부에서 권력투쟁을 하던 나치 독일답게 군관구 소속 장교들은 라인강의 교량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하려고 노력했으며 교량을 대공방어하는 대공포 부대는 나치 독일 공군에게만 보고하는 등 지휘권이 파편수준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루덴도르프 교는 1945년 2월에 Wehrkreis VI에서 Wehrkreis XII로 관할권이 이전되면서 업무 인수인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루덴도르프 교는 전투지경선에 있는 구역처럼 사실상 버려졌으며 1945년 3월 1일에 발터 보치(Walter Botsch) 중장이 레마겐 지역을 포함한 방면을 방어하는 임무를 받은 후에 1945년 3월 5일에 루덴도르프 교를 방문했을 때 빌리 브레트게(Willi Bratge) 대위 휘하의 수비병력이 고작 36명이며 병력의 대부분이 회복중인 환자였고 약간의 공병과 대공포병이 있긴 하지만 명령체제가 달라서 빌리 브레트게 대위의 지휘하에 있지 않다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보고 경악해야 했다.
발터 보치는 증원병력 투입과 폭발물 및 공병, 노동자를 보내겠다고 약속했으나 상부에 보낸 요청이 거부당해서 빌리 브레트게 대위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만다. 심지어 교량 폭파용 폭약도 애초에 필요한 고성능 폭약인 TNT 600kg이 아니라 도나리트(Donarit)라고 불리는 광산 채굴용 저성능 폭약 300kg만 1945년 3월 7일 오전 11시에 간신히 받을 지경이었다.
결국 미군이 1945년 3월 8일 새벽에 루덴도르프 교 근방에 도착했을 때 교량이 멀쩡하게 남은 것을 보고는 가용 가능한 병력을 모두 동원해서 공격을 개시했고 전력으로 보기에도 곤란한 국민돌격대까지 포함해도 1천명 수준으로 적고 탈영병까지 발생하는 혼란 속에 지뢰 매설등의 방어전 준비도 전혀 안된 상황에서 그나마 나치 독일 육군, 나치 독일 공군, 나치 친위대 등으로 지휘권이 분산된 독일 수비대는 패배하고 루덴도르프 교를 빼앗긴다.
전투 과정에서 독일군은 폭파가 실패하자 목숨을 걸고 비상폭파장치까지 돌진해서 폭약을 기어이 터뜨렸지만 용량도 부족한 저질 폭약은 루덴도르프 교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상판에 약간의 손상만 가했으며 미군이 전차까지 동원해서 다리를 건너고 공병이 남은 폭약을 모조리 제거하면서 전투가 마무리된다. 여기에 더해서 기존에 설치한 폭약도 터지지 않았는데 강제징용된 폴란드인 기술자가 일부러 뇌관을 손상시켰다고 말했는데 완전한 입증은 되지 않았으나 가능성이 높다.
3.4. 붕괴
루덴도르프 교를 함락시킨 미군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매우 기뻐하는 가운데 즉시 동원 가능한 4개 사단을 포함해서 많은 병력을 즉시 루덴도르프 교를 통해서 라인강을 건너게 했다. 그리고 폭파 충격으로 손상된 루덴도르프 교를 공병을 동원해서 긴급 수리 및 보강작업을 진행하게 한다.나치 독일의 수장인 아돌프 히틀러는 말 그대로 폭발해서 이미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빌리 브레트게(Willi Bratge) 대위를 제외한 현지 책임자인 영관급 장교 4명을 군사법정에 세워서 즉결처분하게 했고 빌리 브레트게 대위도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루덴도르프 교를 공격한다. 동원한 수단도 Ar 234 제트 폭격기, V2(로켓), 600mm 자주박격포 칼, 슈투름티거, 오토 스코르체니가 지휘하는 잠수부 부대등 매우 다양했다.
미군도 루덴도르프 교를 보호하기 위해서 대공포 부대를 도배하고 레이더를 설치하며 전투기 부대로 상공을 엄호하며 M3 리 기반의 탐조등 전차까지 투입하며 교량의 긴급수리를 진행하는 등 루덴도르프 교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치 독일의 공격은 모두 실패하고 희생이 많았으나 루덴도르프 교도 함락 당시 발생한 폭파의 충격을 받은데다가 300m 이내에 V2가 명중하는 등 지근탄으로 인한 충격이 너무 심해서 결국 함락된지 10일 후인 1945년 3월 17일 오후 4시 30분에 붕괴된다. 붕괴 시점에서도 교량 수리를 위해서 200명의 공병이 작업중이었다가 다리가 붕괴되면서 28명이 사망하고 63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이미 25,000명의 병력과 수천대의 차량이 루덴도르프 교를 건너서 라인강 동쪽의 교두보를 크게 강화했으며 부교도 이미 2개를 건설해놓았고 추가로 3개를 더 건설할 예정이라서 나치 독일의 입장에서는 이미 때를 놓쳤다.
4. 말로
이미 1차대전 이후부터 효용성을 상실하고 인근 주민의 인도교로 활용하던 것이 루덴도르프 교이므로 복구하려는 노력이 미약했다. 그래서 붕괴된 철교만 라인강 수운을 위해서 제거한 후 방치된다.루덴도르프 교 주변의 철도가 전철화된 후에 1960년에 서독 정부가 루덴도르프 교의 재건을 검토했으나 1962년에 5월에 비용에 비해 효과가 부족하다고 취소된다. 교각은 1976년에 라인강 수운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철거된다. 그리고 루덴도르프 교로 들어가는 철도 진입구간도 사라진다.
루덴도르프 교의 양측 강안지역에 있는 진입로의 석재 망루는 레마겐 쪽은 레마겐 평화 박물관으로, 에르펠 쪽은 기념물 및 공연 예술 공간으로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2020년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 조사에서 91%가 다리를 재건하는 것을 지지했다. 다리가 없다면 44km라는 긴 구역에서 라인강을 건널 수 없고 페리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2022년에 보행자와 자전거 통행인을 위한 현수교를 건설하는 계획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