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6-09 18:59:56

로제 피앙토니

프랑스의 前 축구 선수
파일:Roger_Piantoni.jpg
<colbgcolor=#eee><colcolor=#000,#e5e5e5> 이름 로제 피앙토니
Roger Piantoni
본명 로제 마리오 피앙토니
Roger Mario Piantoni
출생 1931년 12월 26일
프랑스 제3공화국 뫼즈주 에탱
사망 2018년 5월 26일 (향년 86세)
프랑스 뫼르트에모젤주 뤼드르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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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미상|체중 미상
직업 축구 선수 (윙어[1] / 은퇴)
소속 <colbgcolor=#eee> 선수 US 피엔 (1946~1950 / 유스)
FC 낭시 (1950~1957)
스타드 드 랭스 (1957~1964)
OGC 니스 (1964~1966)
국가대표 37경기 18골 (프랑스 / 1952~1961)
1. 개요2. 선수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은퇴 후

1. 개요

프랑스의 前 축구 선수. 인사이드 포워드 포지션에서 주로 활약했으며, 1950년대 후반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스타 선수였다. 1958년 FIFA 월드컵에서 프랑스의 3위 달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당시 최고의 프랑스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다. 별명은 '부 드 슈(Bout d'chou)'로, '양배추 끝'이라는 뜻이다. 프랑스 1부 리그 통산 203골을 기록하며 역대 6위 득점자에 이름을 올렸다.

2. 선수 경력

로제 피앙토니는 뫼르트에모젤주 피엔느 지역의 탄광촌 라 무리에르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이곳에서 타데 치소프스키와 함께 지역 클럽인 US 피엔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948년 로렌 지역 유스팀의 일원으로 남동부 지역 유스팀을 꺾고 전국 유소년컵에서 우승했다. 이듬해에는 프랑스 주니어 대표팀에 선발되어 유럽 선수권에 참가했지만, 체력 부족으로 좋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훗날 미셸 플라티니도 같은 실망을 겪게 된다.

피앙토니는 1950년 19세의 나이에 FC 낭시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1950년 8월 27일 RC 랑스와의 시즌 첫 경기에서 2골을 기록하며 데뷔했다. 첫 시즌에 27골을 넣으며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특히 6-1 승리를 거뒀던 르아브르 AC와의 경기에서 5골을 터뜨렸고, RC 랑스와 RC 스트라스부르와의 경기에서도 각각 4골씩을 기록했다.

FC 낭시에서 7시즌 동안 92골을 기록했으며, 팀과 함께 쿠프 드 프랑스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1950-51 시즌 4강, 1953년에는 결승에 진출했지만 LOSC 릴에게 1-2로 패배했다.

1953년 9월 23일에는 레알 마드리드홈구장에서 열린 친선경기에서 4-2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경기는 피앙토니의 FC 낭시 공식 데뷔전이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레알 마드리드 데뷔전이기도 했다.

하지만 FC 낭시는 심각한 재정 문제에 직면했고, 1956-57 시즌 2부 리그로 강등되면서 주요 선수들을 내보내야 했다. 피앙토니는 25만 프랑[2]스타드 드 랭스로 이적했다.

스타드 드 랭스에서 피앙토니는 쥐스트 퐁텐, 장 뱅상과 함께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레몽 코파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으로 생긴 공백을 완벽하게 메웠다. 1958년 3월에는 라이벌 스당과의 경기에서 4골을 기록했고, 5월 1일 팀의 프랑스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57-58 시즌 32경기에서 17골을 기록했고, 이듬해에는 20골을 추가했다. 쥐스트 퐁텐과의 환상적인 호흡으로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 프랑스 축구를 지배했다.

1958-59 시즌 랭스는 리그에서는 4위에 머물렀지만, 유러피언컵에서는 결승에 진출했다. 1959년 6월 3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에게 0-2로 패하며 준우승했다.

1959-60 시즌 랭스는 38경기에서 109골이라는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주며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피앙토니는 이 시즌 18골을 기록했다.

1960-61 시즌에는 쥐스트 퐁텐이 다리 골절로 은퇴하면서 피앙토니가 팀의 주요 득점원이 되었다. FC 낭시 시절 이후 11년 만에 다시 한 번 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1961-64년 마지막 3시즌 동안 부상으로 37경기에만 출전했지만 23골을 기록했다. 1961-62 시즌에는 18경기에서 16골을 넣으며 팀의 6번째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64년 5월 3일 1-4로 패배한 발랑시엔 FC와의 홈경기에서 랭스 소속으로 마지막 골을 기록했다.

1964년 2부 리그의 OGC 니스로 이적하여 한 시즌을 보냈다. 니스는 2부 리그 우승으로 1부 리그 승격을 달성했고, 피앙토니는 이후 은퇴를 선언했다.

3. 국가대표 경력

1952년 11월 16일 더블린에서 열린 아일랜드와의 친선경기에서 국가대표팀 데뷔를 했다. 67분 동점골을 기록했고, 경기는 1-1로 끝났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는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입은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했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프랑스의 4강 진출을 이끈 핵심 선수였다. 쥐스트 퐁텐, 레몽 코파와 함께 환상적인 공격진을 구성했으며, 5경기에서 4골을 기록했다. 특히 브라질과의 준결승에서 2번째 골을 넣었지만 팀은 2-5로 패했다. 맹장염 수술로 서독과의 3·4위전에는 결장했지만, 프랑스는 6-3으로 승리하며 3위를 차지했다.

1961년 9월 28일 1962년 FIFA 월드컵 예선 핀란드와의 경기에서 79분 프리킥으로 국가대표팀 마지막 골을 기록하며 5-1 승리를 거둔 후 은퇴했다.

1952년부터 1961년까지 37경기에 출전하여 18골을 기록했다.

4. 은퇴 후

선수 은퇴 후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카르팡트라 클럽의 감독을 맡았다. 1970년 8월 29일부터 1988년 12월 31일까지 프랑스 축구 연맹 연방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로렌 지역과 FC 낭시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갔으며, 안테른 2에서 미셸 드뤼케, 베르나르 페르와 함께 축구 경기 해설자로도 활동했다.

AS 낭시의 홈구장인 스타드 마르셀 피코의 한 관중석에는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1] 인사이드 포워드[2] 현재 가치 약 25만 6천 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