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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b526b><colcolor=#fff> 이름 | 당타이선 / Đặng Thái Sơn 鄧泰山(등태산) |
출생 | 1958년 7월 2일 ([age(1958-07-02)]세) |
베트남 민주 공화국 하노이 | |
국적 | [[베트남| ]][[틀:국기| ]][[틀:국기| ]] | [[캐나다| ]][[틀:국기| ]][[틀:국기| ]] |
주요 수상 | 제10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1위 (1980) |
링크 | 공식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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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의 피아니스트로, 아시아인 최초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을 거머쥔 인물이다. 고전부터 근대까지 다양한 레파토리를 갖고 있고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은 쇼팽이라고 여겨진다.
2. 생애
전문 음악교육을 받은 피아노 교육자인 어머니[1]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웠고 후에는 소련으로 유학을 가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공부하였다. 유년기부터 베트남 전역에 피아노 천재로 널리 알려졌다. 소년 시기에는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꿈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연습을 지속하였다고 한다. 전쟁통에 피아노가 없어서 나무판자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 연습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후 피난 중에 협회로부터 피아노를 공수받아 연주했는데, 피아노가 무거워 배가 점점 가라앉는 바람에 물이 들어가 거의 고장이 나다시피 했지만 종이건반과 판자건반 대신 피아노 건반을 눌러 연주의 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복했다고.베트남의 환경이 워낙 열악하다보니 소련 모스크바로 유학하여 피아노를 배우다 쇼팽 콩쿠르에 출전했는데, 생활이 어려웠기에 참가비만으로도 버거워 비행기는 엄두도 못내고 바르샤바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고 한다. 주최측이 참가비만 내면 숙식을 해결해 주었지만, 그 밖의 개인소품과 의상 등은 직접 준비해야 했기에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단정한 제복을 입었지만 너무 노동자 느낌이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래서 당타이선이 결선 진출은 물론 수상자, 그리고 톱3 까지 바라볼 가능성을 보이며 안정된 실력을 발휘하자 베트남 출전자, 음악가, 지인들이 힘을 모았다. 동료애를 발휘한 이들은 나라를 대표하는 연주자가 남루한 차림이면 안 된다며 돈을 모아 인근 양장점에서 상대적으로 나은 양복을 사 주어, 이후로는 그 양복을 입고 무대에 올랐다.
1980년 쇼팽 콩쿠르에서 1등을 수상하자 한국에선 당시 손 아무개라고 하여 한국계가 아니냐는 말도 오고갔다가 전두환 정부 시절 미수교국이었던 공산국가 베트남 출신이라는 게 알려지자 일절 언론매체에서 다루지 않았던 일화가 있다. 해당 연도는 심사결과가 발표되기까지 매우 분위기가 흉흉했는데, 사건 사고가 많은 회차이기도 했지만 아르헤리치가 우승자를 위해 따로 축하 전보를 보낸 이유도 관객들 사이에 폴란드 정부와 쇼팽 콩쿠르 협회가 같은 공산국가 버프로 사회주의 체제의 공산국가 참가자를 우승시키려 한다는 루머가 돌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승자 선정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의사를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또 아래에 서술된 상금을 시상식장에 두고 간 행위로 인해 혹여 서방국가로 망명하려는 것인지 의심을 받아, 소련 모스크바 음악원의 전담교수들은 만약 제자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해고당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기까지 했다. 당타이선은 우승 후 모스크바로 돌아왔으며 불안해하던 스승들도 안도했다. 이 상황은 베트남 현지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복귀 이후 당타이선의 가족들도 베트남 정부로부터 큰 포상을 받게 된다.
3. 기타
- 당타이선이 우승한 1980년 쇼팽 콩쿠르 진행과정에는 사실 많은 논란이 있었다. 당시 뛰어난 연주를 보였던 이보 포고렐리치[2]가 3차 예선에서 탈락하자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납득할 수 없다며 심사위원직을 사퇴한 것이다.[3] 하지만, 이 때문에 당타이선의 연주가 우승에 적합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사퇴했던 마르타 아르헤리치도 당타이선의 연주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4] 이후의 쇼팽 콩쿠르 심사위원에 당타이선이 지속적으로 발탁되는 것을 보면 쇼팽 협회도 그를 충분히 인정하였고 실제로 그가 발매한 쇼팽 CD들을 들어보면 누구라도 그가 쇼팽 스페셜리스트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쉽게도 그가 연주한 쇼팽 CD들은 현재는 절판되어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이다.
- 한국에서의 인지도 또한 매우 높은 편인데, 2022년 8월 21일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쇼팽 곡으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으로 내한 독주회를 열었다. 역시 쇼팽 스페셜리스트답게 뛰어난 연주를 선보였으며, 공연 종료 후 사인회가 있었는데, 음악당 지하까지 줄이 이어지기도 했다. 또한 2024년 3월 8일~9일에 걸쳐 내한 공연을 했었는데 3월 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가브리엘 포레, 클로드 드뷔시, 프레데리크 쇼팽, 이 세 프랑스 작곡가들[5]의 곡들을 연주했다.
- 본인만큼이나 제자들도 쇼팽 콩쿠르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2015년 쇼팽 콩쿠르에 입상한 당타이선의 제자가 셋이나 된다. 3위를 차지한 케이트 리우[6], 4위를 차지한 에릭 루, 5위를 차지한 토니 이크 양이 그들이다. 2021년에 열린 쇼팽 콩쿠르에서는 그의 제자 브루스 리우가 1위를 차지하였다. 이들은 서로 다른 스타일이지만 전형적인 쇼팽 스타일 족집게 과외 라인으로 각광받는 타건형식을 갖고 있다.
-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을 때 프렐류드 No. 24: Allegro appassionato (D minor) 마지막 최저음 레를 주먹 타건으로 연주하는 모습을 선보여 큰 화제가 되었다. 한 손으로 최저음 레 양 옆인 도와 미를 살짝 누르고 레를 다른 손으로 주먹으로 치면 되는 방식인데, 워낙 인상적인 모습이다보니 그 뒤로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연주법을 따라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 주먹 타건 기법은 선배 우승자에 대한 예우로서 쇼팽 콩쿠르에 당타이선의 제자가 출전하면 제자가 사용하고, 다른 출전자는 가급적 이 타건을 쓰지 않고 손가락 여러 개를 붙여 타건하는 불문율이 있다.[7]
[1] 프라하 음악원 출신[2] 지금은 이미 유명한 중견 피아니스트다. 내한 공연도 꽤 자주 한 편.[3] 물론 이보 포고렐리치의 연주는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연주이긴 했고 그의 1차 예선통과를 납득하지 못하고 심사위원직을 사퇴한 로이스 켄트너같은 사람들도 있었다.[4] 사퇴하고 공항으로 향했다가 돌아왔으며 심사위원석이 아닌 자리에서 당타이선의 마지막 연주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아르헤리치는 부침이 많은 심사과정과 그의 사퇴 소식을 전해 들으며 연주가 끝나고 호텔방에서 불안해하는 당타이선에게 작은 배려를 보이고자 했다. 그러나 여전히 포고렐리치의 탈락에 대한 분이 풀리지 않은 듯 직접 만나지는 않고, 우승 소식을 호텔에서 쇼팽 콩쿠르 스탭으로부터 전해 듣자마자 다리가 풀려 쓰러지는 바람에 관계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시상식장으로 향한 당타이선에게 전보를 보내고 출국했다. 현장에서 직접 연주를 들었고 매우 훌륭했으며 우승을 축하한다는 아르헤리치의 메시지를 받아 본 당타이선은 며칠 간의 긴장을 풀고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고. 사회주의 국가 이념 속에서 자란 탓에 당타이선은 상금 액수를 베트남 화폐로 환산하다 온 가족이 10년을 먹고 살 수 있는 액수에 놀라 상금 봉투와 부상마저 시상식장에 두고 나올 만큼 불안해했으며 이 사실에 기겁한 쇼팽 콩쿠르 스탭이 시상식장을 뒤져 찾아내 당사자에게 돌려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당타이선의 자서전과 출간 후 인터뷰에서 더욱 자세히 볼 수 있다.[5] 쇼팽은 성인이 된 후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에 거주했으며 법적으로 프랑스 시민권자이다.[6] 케이트 리우는 이때 결선 무대에서 심사위원들로부터 가장 많이(3명) 만점(10점)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쇼팽 콩쿠르 규정상 심사위원들은 단 한 명의 참가자에게만 만점을 줄 수 있다.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조성진도 케이트 리우보다 적은 2명에게서 만점을 받았다.[7] 2015년에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을 비롯한 한국인 피아니스트들도 이를 지키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