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60년 2월 23일 오후 16시 15분, 당시 황태자 부부였던 아키히토 황태자와 미치코 황태자비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도쿄의 궁내청 병원에서 태어났다.본래 일본 황실의 출산은 궁성 내의 산전(宮中産殿)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전통이자 관례였으나, 미치코 황태자비는 이 전통과 관례를 깨고 궁내청 병원에서 첫 아이인 히로노미야 나루히토(浩宮 徳仁)를 낳았다.
이름은 「명명의식(命名意識の儀)」[1]에서 할아버지 쇼와 덴노에 의해 지어졌다. 이름의 유래는 사서오경 중용 제32장 구절에서 인용해 따왔다.
미치코 황태자비는 1965년 둘째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과 1969년 셋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도 궁내청 병원에서 낳았다. 그 이후부터 다른 일본 황족들도 역시 궁내청 병원에서 출산을 했다.
2. 유년 시절
1960년, 나루히토를 낳고 궁내청 병원에서 퇴원하는 미치코 상황후.[2]
도쿄 황궁 동궁어소에서 아버지 아키히토 상황, 어머니 미치코 상황후와 함께.
미치코는 미국인 소아과 의사 벤저민 스포크 박사가 쓴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라는 육아 서적을 영어 원서[3]로 읽으며 자녀교육에 대해 공부했고, 공무 때문에 아이들을 시종에게 맡길 때면 자신이 메모한 육아 지침[4]을 주며 그에 따르도록 했다.
미치붐(ミッチーㆍブーム)[5]이 정점에 달한 시절, 황태자 부부의 혼인 바로 이듬해 태어난 귀하디 귀한 맏아들 나루히토는 엄격한 황실 후계자 교육, 즉 미래의 천황 교육에 순응하며 곧고 예의 바르게 성장하였지만, 그 때문에 사람들과 능숙하게 어울리지 못하며, 자신의 생각을 자유로이 표현하지 못한다는 평도 받았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장래 천황이 될 후계자[6]이기 때문에 그는 5살 아래의 남동생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과 9살 아래의 여동생 구로다 사야코에 비해 대단히 엄격하게 양육되었다고 한다.
1961년, 첫 돌을 맞은 나루히토 덴노.
첫 돌 기념 영상
1962년, 1월에 찍은 가족사진에서. 온 가족에게 둘러싸여 애정과 귀여움을 한몸에 받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5살 아래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1965년생)과 함께.
1967년 4월, 가쿠슈인 초등과에 입학하는 나루히토. 어머니 미치코 상황후와 함께. 이후 가쿠슈인 중등과(남중)와 고등과(남고)를 거쳐, 가쿠슈인 대학에 진학한다.
그동안 일본 황실의 관례로는 주로 생물학[7] 등의 자연과학 전공이 대세였으나, 나루히토는 1982년 3월에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였고 가쿠슈인 대학 대학원에 높은 성적으로 진학하였다.[8] 이후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 머튼 칼리지에 유학하여 템즈 강의 수운사에 대해 연구하였고[9], 1988년 가쿠슈인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 2월 23일, 갓 성년(만 20세)을 맞이해 도쿄 황궁 고쿄에서 거행된 성인식(成人式の礼)에 전통예복을 입고 참여하는 당시의 나루히토.
성인식 영상
어느 가는 곳마다 나루히토를 알아보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는 일본과 달리, 영국에서 나루히토는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다른 학생들처럼 평범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학생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자유로이 외출하고[10], 손수 청소를 하고 물건을 구입하는 등. 2년간의 영국 유학 이후로, 어릴 적의 막연히 인내심이 깊던 성격에서 보다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게 되고, 일본 내에서만 교육받아 형성되던 닫힌 세계관[11]이 확장되어 세계를 보는 「안목(慧眼)」, 선진적인 새로운 사상과 진보적인 성품을 배워왔다고 한다.
나루히토의 유년시절 영상[12]
3. 나루히토/헤이세이 시대
나루히토의 황태자 책봉 이후 즉위 이전까지의 행보에 관한 것. 해당 문서 참조.4. 나루히토/레이와 시대
[1] 생후 7일을 맞이해서 이름을 지정해주는 황실 의식이다.[2] 옆에 앉아 있는 심술궂은 표정의 여성은, 당시 동궁(東宮)의 궁녀장(宮女長)이자 시녀였던 마키노 쥰코(牧野純子)이다. 쥰코는 미치코 황태자비를 몹시 미워한 마츠다이라 노부코가 손수 추천한 인물이니,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는 뻔한 일이다.[3] 미치코 상황후는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영어를 잘 했다.[4] 이 지침은 나루 짱 헌법(ナルちゃん憲法)이라고 불리며 많은 일본 부모들의 공감을 산 베스트셀러(육아 필독서)가 되었다.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5] 아키히토와 평민 쇼다 미치코의 약혼과 결혼으로 인해 생긴 일본의 사회 현상이다. 평민인 미치코가 황태자와 '테니스 코트에서 자유 연애'에 의해 결혼에 이른 것, 미치코가 가톨릭계 미션스쿨 출신이었음 등을 언론이 보도해 일본 내에서 큰 화제가 된다. 이를 계기로 당시 아키히토 황태자 부부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흑백)텔레비전이 보급되는 등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의 경제, 패션, 매스컴, 미디어 등의 영역에서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더 자세한 것은 미치코 상황후 문서 참고.[6] 아버지 아키히토 황태자가 1순위, 그 뒤를 이어 나루히토 친왕이 2순위[7] 나루히토의 할아버지인 쇼와 덴노와 큰고모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와 남동생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도 조류(새)를 연구했다. 후미히토 친왕은 조류 외에도 메기를 연구하기도 했다. 또한 여동생 구로다 사야코도, 시집가기 전 조류연구소에서 비상근 연구원으로 일하기도 했다.[8] 나루히토에게 사학과 진학을 권유한 사람은 종조할아버지, 즉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의 작은아버지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항목 보면 알겠지만, 다카히토 친왕 본인도 고대 오리엔트사를 전공한 역사학자였다.[9]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동생인 토모히토 친왕의 큰딸 아키코 공주도, 가쿠슈인 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한 바 있다. 아키코 공주는 미술사를 공부하여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일본 황실 최초의 여성 박사'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0] 물론 궁내청 소속 경호원들이 몰래 숨어서 따라다니며 경호했겠지만.[11] 기존 일본 황실의 관념[12] 황실의 장손이자 차기 덴노로써의 인생을 정말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