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6-10 21:10:40

김해(조선)

金澥
1534년(중종 29) ~ 1593년(선조 26)

1. 개요2. 상세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예안(禮安), 자는 사회(士晦), 호는 운송(雲松), 설송(雪松).

2. 상세

1534년 충청도 공주목 우정면 경사동(현 충청남도 공주시 우성면 내산리 정사골마을)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 행 영흥도호부사(行永興都護府使:종3품)를 지낸 아버지 김반천(金半千)과 어머니 창녕 조씨 생원 조세우(曺世虞)[1]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반천과 증조부 김수손(金首孫), 고조부 김신(金新)이 모두 문과 출신으로 관직에 나아갔던 명문가 출신이었다.[2]

1558년(명종 13) 식년시 진사시에 3등 56위로 입격하고 1564년(명종 19) 식년시 문과에 을과 2위로 급제하였다.

1571년(선조 4) 선무랑(宣務郞:종6품 문관의 품계) 수(守) 형조 좌랑(정6품)으로 있던 중 명종실록 편수관(編修官)으로 참여했다.# 1574년(선조 7) 사헌부 장령(掌令:정4품)에 제수되고 1576년 사간원 사간(司諫:종3품)에 제수되었다. 1582년(선조 15) 비위 사실이 발견되어 추고당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당시 상주목사(尙州牧使:정3품)로 있었는데, 당시 순변사 이일이 상주목에 당도했다는 것을 듣고는 순변사의 행차를 맞이한다는 핑계로 도주하여 인근 산골짜기로 들어가 숨어들었다. 이 때문에 상주 고을에는 서열 2위의 판관(判官:종5품)이었던 권길만이 남아 있었다. 이후 권길은 순변사 이일이 도착한 이튿날 저녁에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러나 은신하던 중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당시 별장(別將:종9품)으로 상주 갑장산(甲長山) 영수암(永修庵)에 진을 치고 있던 정기룡에게 급보를 올리고 임시 판관(假判官)에 임명한 뒤 합세하였고, 향병(鄕兵)을 규합하여 개령현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상주성까지 일시 탈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이듬해 왜적에게 포위되어 항전하다가 전사하였다.#@

[1] 1513년(중종 8) 식년시 생원시에 3등 45위로 입격하였다.#[2] 아버지 김반천은 1516년(중종 11) 식년시 진사시에 3등 49위로 입격하고 1537년(중종 32) 별시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하였다. 증조부 김수손(金首孫)은 생원시에 입격하고 1456년(세조 2) 식년시 문과에 정과 4위로 급제, 경력(經歷:종4품)을 지내다가 1476년(성종 7) 중시 문과에 3등 2위로 급제하여 형조 참판(종2품)에 올랐다. 고조부 김신(金新)은 1464년(세조 10) 온양별시 문과에 정과 4위로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掌令:정4품)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