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22년 8월 8일 |
경상북도 경주군 (현 경주시) | |
사망 | 1989년 8월 16일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118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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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경찰공무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22년 8월 8일 경상북도 경주군(현 경주시)에서 태어났다.그는 1944년경 학도병으로 일본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중국 전선으로 보내졌다가, 그해 12월 하남성 개봉시(開封市)에서 홍구표·최일룡과 함께 탈영한 뒤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해 항일투쟁에 종사했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충정로3가 65번지에 본적을 두었으며, 1946년 경찰공무원에 입직하였다. 1949년 5월 10일부터 1950년 7월 31일까지 제5대 용인경찰서장으로 재직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에서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아 당시 용인군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체포했으나 연맹원들에게 '지금 조선인민군이 내려오고 있는데, (당신들을) 체포 명령이 내려와서 데리고는 왔는데, 내가 다 보내 줄 테니까 가서 경거망동하지 말고 안녕될 때까지 조용히 잘 있으라'고 부탁을 하며 모두 석방해주어 당시 용인군에는 보도연맹 학살사건의 피해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2] 이후 경감으로 경기도경찰국에 전보되었다가 미국 육군 제1기병단 포병사단 임시 호위중대장으로 편입된 뒤 낙동강 방어선에서 승리를 거두고 북진하는 데에 전공을 세웠다하여 1950년 12월 13일 미국 육군 제1기병단 포병사단 총사령관 찰스 D. 팔머 준장으로부터 성훈장(星勳章)과 포병사단기, 감사장 등을 수여받았다.
1952년 부산철도경찰대장(총경), 1952년 10월 12일부터 1953년 2월 28일까지 제3대 국회경비대장, 1953년 3월 1일부터 1953년 10월 30일까지 제7대 진해경찰서장 등을 역임하고 1953년 10월 31일 경남경찰학교장으로 영전되었고, 1953년 12월 24일 내무부 치안국에 전보되었다. 그 뒤 1954년 4월 10일 같은 한국광복군 출신인 전호인, 이세경(李世鏡)과 함께 근무형편을 이유로 면직했다.
경찰공무원 퇴직 후 1956년부터 1958년 사이에 경상북도 대구시 원대동(現 대구광역시 서구 원대동3가) 1145번지 및 1150번지에서 대흥직물공장(大興織物工場) 및 천광직물공장(天光織物工場)의 대표로서 인견 등의 직물을 생산하는 섬유공업을 경영하기도 했다.
이후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1989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89년 8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 1963년 8월 14일 조선일보 기사와 1963년 8월 14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金[2] 용인 근·현대사 증언 구술생애 자료집 IV 용인사람 용인이야기(용인문화원 부설 용인학연구소, 2020), 384쪽 정찬섭씨의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