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6:03

가라테와 태권도의 관련성

1. 개요2. 태권도와 가라테의 공통점3. 태권도 원로들의 증언4. 가라테와 구분되는 태권도의 특색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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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라테태권도에 미친 영향을 정리하는 문서.

결론부터 서술하자면, 세계태권도연맹(WT)[1][2]은 태권도가 택견을 계승한 무술이고, 가라테의 영향을 받은 것은 형식적인 것에 그친다고 주장하지만[3], 사실 태권도는 가라테 중에서도 '쇼토칸 가라테'[4]에서 특히 많은 영향을 받아 파생된 현대무술이다.

국제태권도연맹(ITF)의 경우에는 태권도가 가라테의 영향을 받아[5] 최홍희 총재가 1950년대에 창시한 현대 무술이라고 밝히고 있다. ITF 계열에서 말하는 양 단체의 태권도 역사.

2. 태권도와 가라테의 공통점

태권도는 한국의 무술이며 그 이름 또한 택견에서 영향을 받아 유래되었지만, 발길질이라는 외형적 특징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것 정도 외엔 실질적인 형태에서 택견의 영향은 미미한 편이다. 당장 태권도계는 택견의 특색인 유술적 요소나 품밟기, 아래발질 등을 2020년대에 이르도록 전혀 도입하고 있지 않는 반면, 가라테에서 유래된 여러 전통들은 그 유용성에 대한 많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시하며[6] 간직하고 있다.

특히 가라테와 유사성이 한눈에 드러나는 부분이 가라테식 도복품새다.
쇼토칸 가라테의 가타 중 태극형

태권도를 해봤던 사람은 어디서 많이 본 품새 같지 않은가? 우리가 아는 태권도의 태극 품새는 쇼토칸 카라테가 원조이다. 냉정하게 말해 태권도의 WT 품새는 쇼토칸 가라테의 가타를 재조립한 수준에 그친다.

이러한 품새는 태권도에 있어 결코 주변적인 것이 아니다. 태권도계에서 가라테를 모방하여 1990년대부터 품새의 경기화를 단행했고, 이를 협회 주도로 적극 보급한 결과 현재는 기존의 겨루기와 맞먹는 경기 태권도의 주축이 되어 있다. 태권도 품새는 일본 쇼토칸 가라테 카타를 재조립한 수준이라 둘을 비교해보면 동작의 순서만 달라졌을 뿐 전체적인 틀은 크게 다를 게 없다. 당장 태극 품새는 상기 영상에서 보이듯 쇼토칸 가라테의 "태극" 가타와 별 차이도 없다.
쇼토칸 가라테의 정권 지르기
기마자세 정권 지르기를 응용한 톤파 공방술

태권도 도장 가면 주춤 서기와 함께 가장 먼저 배우는 정권지르기. 역시 쇼토칸 가라테의 기본 수련법으로 정권 쥐고 좌우 번갈아 가며 지르는 것까지 똑같다. 애초에 손 기술이 거의 사장된 현대 태권도에서 정권지르기를 가장 먼저 배우는 아이러니도 이런 가라테의 영향이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외 약속 겨루기 같은 것도 가라테에서 왔다.

태권도계 일각에선 태권도가 일본 가라테가 아닌 오키나와 테에서 직접 파생되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물론 오키나와 테에서 비롯된 가라테가 일본 본토에 본격적으로 전파된 게 길어봤자 20세기 초반이고, 이때 배운 사람들이 한반도에도 전파한 것이라 양 지역의 전파 역사가 생각만큼 길게 차이나진 않는다. 다만 후나고시 기친은 오키나와테를 그대로 보급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스타일로 변형한 쇼토칸 가라테를 일본에 보급했고, 다수의 태권도 초기 원로들은 이 쇼토칸 가라테 혹은 기타 일본화된 가라테 유파 무술을 일본 본토에서 배우고 한반도에 와 도장을 차렸지 오키나와에서 오키나와인에게 직접 무술을 사사한 사례는 없었기에 오키나와 테가 한반도에 직접 유입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더욱이 오키나와 테의 경우, 중국 남권에서 파생된 바 중국 무술과 흡사한 모습을 보이며 타격기와 유술기가 혼합된 형태라 지금의 태권도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오키나와 테의 형태를 많이 유지하고 있는 일본의 고주류 가라테를 보더라도 근접해서 잡고 넘어트리는 기술들을 꽤 많이 사용하는데, 입식타격기로 변모한 쇼토칸 가라테를 기반으로 파생된 태권도는 오키나와 테와 형태가 다를 수 밖에 없다. 쇼토칸과 마찬가지로 태권도에서 유술기는 품새흔적으로만 남아 있다. 즉 오키나와 테에서 태권도와 공수도로 같이 갈라지듯 파생된 것이 아닌, 오키나와 테와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 초창기 형태의 가라테에 태권도가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봄이 합당하다. 도복과 띠 체계도 그렇게 이해해야 보다 자연스럽다. 이것은 오키나와 테가 일본에서 현지화를 위해 유도에서 차용한 문화이기 때문이다.

일부 태권도 원로들의 증언에 따르면 자기들은 앞차기, 옆차기, 뒷차기 내지는 관절차기, 금적차기 정도만 배웠다고 하는데 이것은 오키나와테에 존재하는 거의 유일한 발차기들이다. 쇼토칸 가라테에서는 1936년~1945년 사이 후나코시 기친의 아들 후나코시 요시타카가 원래 발차기가 그다지 없던 기존 오키나와 테에 사바트 발차기를 차용 및 체계화하였다. 이후 가라테 역시 손 기술이 주축이지만 발차기 역시 제법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태권도와 수렴진화하는 그림을 보이고 더 나아가 역으로 태권도의 기술을 차용하기도 한다.
앞차기
돌려차기
옆차기
낚아차기[7]
뒤차기
사바트를 통한 가라테 발차기 형성 과정

크게 보면 태권도는 쇼토칸 발차기를 개량 개조한 형태들이다. 통합 이전 각 관들은 본인들이 수련하던 계파들의 가라테를 수련하였지만 송도관 계통의 청도관, 무덕관[8]과 교류하기 전엔 발차기 수련을 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이에 대해선 전 국기원 부원장 이종우도 조선연무관서 과거 권법을 배울 당시 발기술을 배우지 않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물론 현재의 태권도가라테와 많이 다르다. 애초에 가라테부터가 중국 남권을 차용한 오키나와 무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고[9], 가라테가 일본 열도에 보급되기 시작한 당시 오키나와는 조선반도와 사정이 비슷한 식민지였기에 가라테 자체도 당시 일본에선 비주류 무술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태권도가 쇼토칸 가라테에서 유래된 무술이라는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브라질리언 주짓수유도하고 차이가 상당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 유도가 브라질에 유입되어 탄생한 무술이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10]

3. 태권도 원로들의 증언

초창기 태권도 원로 사범들은 다수가 일본에서 가라테를 배웠지 택견이나 수박을 배우지는 않았다. 태권도의 뼈대를 잡은 기간도장 9대관 관장들은 황기 관장처럼 중국무술을 가르치거나 택견을 어린 시절에 배웠다는 정도를 제외하곤 다수가 가라테를 배운 사람들이었으며, 형식적으로도 종국엔 쇼토칸 가라테에 수렴하는 가운데 중국 북권이 약간 혼합된 형태가 되었다.

택견은 이때도 태권도의 원형처럼 묘사되었고 실제 택견의 발기술에서 영감을 받아 태권도의 발차기를 구상했다는 식의 증언도 있으나, 이는 역사성을 계승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이해해야지 실질적인 스타일이 이식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실제 황기 관장과 같이 태권도와 전통무술의 접목을 적극적으로 시도한 인물은 주요 도장 통합 과정에서 배제되어 나갔다.

이런 점은 태권도 원로, 중진 중에서도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 태권도의 개척자인 이준구 사범은 딱 잘라서 청도관식 태권도가 가라테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했다.[11]
▶9개 관에서 가르치는 기술은 다 비슷했습니까.

“그럼요. 다 가라테를 기본으로 한 것인데.

▶관마다 특징이 있지 않았나요.

“굳이 말하자면, 청도관이 옆차기로 유명했고, 무덕관은 앞차기를 잘했다는 정도죠.”

▶가라테 기술과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합니까.

“가라테를 가르친 거니까. 당수니 공수니 다 같은 거예요.”

▶발차기에서 차이가 없었나요.

“태권도의 발차기 기술이 가라테보다 더 발전했지. 일본은 전통을 따지기 때문에 지금도 옛날 것 거의 그대로 가르쳐요. 그런데 한국은 그런 의식이 없어 뒤돌려차기니 뭐니 해서 제멋대로 만들어냈어요. 그게 뒷날 다 복이 된 거요.”

▶당시엔 뒤돌려차기가 없었습니까.

“그랬지. 나도 그때 뒤돌려차기는 못 배웠어요. 기본 동작만 배웠지. 지금은 뛰어앞차기 등 기술이 얼마나 화려해요. 가라테보다 훨씬 앞서 있지. 상대가 안 되죠. 쿵푸도 그렇고. 그러니 올림픽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야. 대중이 좋아하니까.”

▶태권도에 대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까요? ‘시초는 가라테이지만, 이후 기술적으로 더 발전한 것’이라고.

“다른 도장은 몰라도 청도관만큼은 분명해요.[12] 품새도 가라테의 평안이니 철기니 하는 것을 그대로 배웠으니. 태극형도 마찬가지고요. 거짓말하면 안 되지.


출처: 75세에 송판 깨는 美 태권도 황제 이준구.

전 지도관 관장이자 국기원 부원장을 지낸 이종우 사범도 비슷한 태도를 보였는데, 2002년 신동아와 인터뷰에서 이종우는 태권도는 가라테의 변형이며 모든 기본기가 가라테에서 온 것이라는 발언으로 일대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13]
―부원장께서 무예를 처음 접한 건 언제입니까.

“해방 직후죠. 사춘기의 꿈이라고 할까. 17세 무렵 막연하게 무림의 고수를 꿈꾸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소공동에 가면 18계를 가르치는 곳이 있다고 하잖아. 그래서 거기를 찾아갔죠. 그곳이 바로 일제강점기의 유도 도장이었는데, 그때는 조선연무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유도부와 권법부를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권법부에서 가라테를 배운 거죠. 권법이 바로 일본 가라테거든요. 일본말로 부르면 국민감정도 있고 하니까 권법이라고 부른 겁니다.
...
―당시 가라테는 당수(唐手)로 불렸죠.

“당수(唐手)로 쓰는 사람도 있고 공수(空手)라고 쓰는 사람도 있었죠. 당수나 공수를 일본말로 옮기면 가라테가 되거든. 모두 같은 내용인데 도장별로 특색 있게 보이기 위해 권법이다 당수도다 공수도다 그렇게 불렀어요.

―태권도 이전에는 태수도(跆手道)로 불렸습니다. 태수도라는 말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겁니까.
...
“내가 한남동 외무부장관 공관 위에 살 때 최홍희 집은 그 건너 이슬람교회 너머에 있었어요. 그래서 둘이 자주 만났죠. 5·16이 나고 얼마 안됐는데, 최홍희가 태권으로 쓰자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태권이 뭐냐? 가라테의 변형인데’라고 대꾸했어요. 그러다가 가라테(당수·공수)하고 태권도를 합해서 태수도라는 말이 나왔죠. 우리끼리 펴면 수(手)고 쥐면 권(拳)이니까, 쥔 거나 편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했어요. 그때 최홍희가 6군단장이었는데 권총을 차고 막 출근하려다 말고 나하고 얘기한 기억이 나요.”
...
―많은 태권도 교본들이 태권도의 뿌리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잡고 있습니다.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더라도 좀 무리가 따른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도 그런 식으로 책을 쓴 사람이에요. 솔직히 우리가 내세울 게 없었잖아요. 초창기에는 태권도를 해외에 보급하는 과정에서 옛날부터 있었던 한국의 전통무술이라고 하면 명분도 서고 잘 먹혀들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유사성이 있더라도 그것은 사실과 다른 겁니다. 역사적 원류로 본다면 중국 것이 일본으로 들어갔고 일본 것이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해야 설득력이 있죠. 일본 사람들이 중국 무술을 많이 개량해서 과학적으로 만들었어요. 한가지 문제가 뭐냐 하면 일본 사람들은 유연성보다 근육성에 바탕을 두고 운동을 만들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몸의 움직임이 굳을 수밖에 없죠.

우리는 이걸 가지고 스포츠로 경기화하기 위해서 겨루기를 시킨 겁니다. 반면 일본 사람들은 겨루기를 안하고 혼자 하는 운동으로 놔두었고, 중국에서는 손 맞춰서 하는 유연한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렇게 볼 때 태권도는 중간 입장에서 어느 쪽도 아니에요. 쉽게 얘기하면 우지좌지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거죠. 그런데 우리는 겨루기를 했기 때문에 급속도로 발전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중국과 일본이 역으로 우리 걸 배우게 된 겁니다. 자기들 무술은 보급이 잘 안되는 데다 젊은 아이들이 자기와의 싸움보다 치고 받는 걸 좋아하잖아요.”

―광복이 되고 도장을 연 사람들은 모두 가라테를 했나요.

“기본기를 놓고 볼 때 이렇게 막는다 저렇게 때린다 하는 건 모두 가라테와 똑같아요.

―그렇다면 우리 전통무예와의 유사성은 없다는 얘기입니까.

“언뜻 보기에는 있는 것 같지만, 기본기가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사실상 유사성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택견도 현대에 와서 많이 변질됐어요. 태권도 하던 사람들이 택견을 배우니까 발차기가 태권도 스타일로 나오는 거죠.”

―광복 이후 태권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영향을 끼친 무술은 가라테 뿐입니까. 다른 것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나요.

그게 솔직한 대답입니다.[14] 나도 별의별 것을 다 끌어들여서 책을 쓴 사람이지만, 이제는 밝힐 때가 됐어요. 가라테를 가르치는 관장들이 모여서 태권도의 형틀을 만들었고, 그 실무작업을 제가 했잖아요. 지금은 우리가 세계 정상에 있으니까 밝혀도 큰 문제가 없어요.”


출처: 이종우 국기원 부원장의 ‘태권도 과거’충격적 고백!

이후 이 인터뷰 내용이 당시 태권도계에서 논란이 되자, WTF 쪽에서는 해당 인터뷰 내용을 부인했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댔다.
  • 이종우 자신이 발언을 번복했다.
  • 문제 기사를 작성한 신동아 기자가 퇴사한 상태라 진실성을 확인할 수 없다.
  • 신동아는 태권도계를 비방하는 기사를 여러 번 냈기 때문에 해당 기사도 믿을 수 없다.

허나 두 번째, 세 번째는 사실 궁색한 소리일 뿐이고, 첫 번째도 나중에 이종우가 어느 정도 말을 바꾼 것은 사실이지만, 신동아 인터뷰 때문에 일대 홍역을 치른 다음 가진 오마이와의 인터뷰에서도 말을 바꿨다는 말이 무색하게 가라테의 변용이라는 입장은 여전히 고수하는 태도를 보였다.
- 모든 문화는 역사를 기본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태권도는 아직도 사관이 정립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태권도가 가라데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태권도의 1세대의 산증인으로써 어떻게 생각 하는가?

"지금의 태권도는 부분적이나마 가라데에서 유래해 왔다. 그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가라데가 어디에서부터 나왔냐가 중요하다. 일본의 가라데가 일본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동양 문화권은 중국으로부터 많이 나왔다.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조상들이 무조건 외국의 무술만 모방한 게 아니다. 손발을 움직이면서 하나의 무술을 완성시킨 것이 일본가라데인데, 또 이전에 중국의 우슈가 나오기 이전에 우리나라에도 고유의 무술이 많이 있었다. 고구려시대 무덤의 벽화에서도 무술화가 있지 않으냐? (중략) 아주 아득한 옛날에 우리가 기록이 없었을 때에 우리는 누군가가 자신을 해하려고 했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손발을 움직여 자기 방어를 해 왔다. 그렇다고 체계적인 것을 따져서 우리가 기록되어 있는 그 사실을 봐서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부끄러울 필요가 없다. 부인할 필요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이전에도 여러 나라에 독특한 무술이 있었다는 점이다."

- 그렇다면 태권도가 가라데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무조건 부정하는 일부의 태도가 오히려 태권도에 대한 자긍심이 부족한 탓이란 말씀인데, 부총재께서는 태권도가 가라데의 영향을 받았을 뿐, 오히려 가라데와 우슈를 한 중국과 일본이 태권도를 배울 만큼 집대성한 태권도의 진수를 언급해달라?

"좋은 질문이다. 중국의 우슈가 많은 발전을 했다. 그리고 많은 인구가 또 그것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태권도를 수입해 가지고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 월드컵대회 등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해서 금메달을 따는 영광도 있었다. 또 우슈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도 태권도가 많은 발전을 하고 있다. 또 일본도 가라데의 본고장이다. 일본도 나날히 태권도가 발전되어가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이 태권도를 선호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한국이 일본의 가라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현시점에서 우리가 과학화하고 실질적으로 과거에 자기들이 하던 것 보다도 더 훌륭한 투기경기라고 생각 했으니까 받아 들이는 것이다. (중략) 나는 어딜 가든지 종주국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종주국이라는 것은 처음 시작을 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지 우리는 한 없이 앞으로도 백년 이백년 천년 앞을 내다 보고서 우리는 더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시작해야지 먼저 시작 했다는 것만 가지고 안주한다면 멸망한다. 나는 이것을 주장한다. 그래서 나는 한국이 태권도의 종주국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웃는다. 종주국이라는 것은 소용이 없다. 예를 들어서 축구가 영국에서 나왔으니 축구의 종주국이 영국이다. 그러나 영국의 존재라는 것은 무의미 하다. 현실적으로 봐서 월드컵에서 우승한 불란서라든가 과거에 우승한 브라질을 더 의미있게 보지 않나, 우리가 우리 후대에게 뭘 남겨 주느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종주국은 소용이 없다. 어떻게 보면 강국으로써 어떻게 계속 유지 되느냐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내가 여기에 찾아오는 후배들에게 우리가 종주국인 것을 빼라고 강조한다. 어떻게 하면 세계 최강국으로 남느냐에 심혈을 기울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출처: 태권도의 산증인을 찾아서 (1)

보다시피 국기원의 '정론'인 택견 유래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부분적이나마"라는 단서를 붙여서 태권도의 가라테 변용설을 반복하고 있다. 전통적인 것이건 외래적인 것이건 태권도를 창출한 가라테 외적인 요소에 대해서도 전혀 지적이 없다. 여러 모로 태권도의 유래가 길지 않음을 인지하는 사람의 태도로밖에 보이지 않고, 기존의 신동아 인터뷰와 상충되기보다는 보론에 가까운 발언이다. 즉, 가라테에서 100% 파생되었다고 보긴 어렵지만 부분적이나마(=가장 핵심적인 재료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4. 가라테와 구분되는 태권도의 특색

쇼토칸 가라테태권도의 모체격 되는 무술이지만, 자식과 부모의 모습이 다르듯 태권도와 가라테도 오늘날의 모습이 똑같은건 아니다.

상기했듯 태권도는 쇼토칸 가라테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다른 무술에서도 일정 영향은 받았다. 예를 들어 택견이 부분적인 영감을 준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는 발차기 기술 중심의 대련을 통한[15] 경기가 호구 개량과 함께 본격적으로 자리잡으며, 태권도는 지금의 가라테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태권도의 시그니처 기술인 찍기(내려차기), 뒤차기, 뒤후리기, 나래차기와 같은 발차기였는데, 이는 21세기 종합격투기 시대에선 인지하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1990년대 이전엔 나름 허를 찌르는 비기로 취급받았다.[16]

그리고 이런 발기술들은 역으로 태권도가라테에 영향을 주기도 했는데, 전통 가라테에서 킥은 앞차기 옆차기, 뒷차기를 기반으로 돌려차기나 걸어차기 정도였고 찍기나 뒤후리기 등은 없었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게 등장했는데 일본 가라테 사범들도 이는 태권도를 참고한 것이라고 말한다고 한다.[17] 또 수도 위주로 킥은 미들킥 이하가 중심인 가라테와 달리, 하이킥 등 화려한 발차기가 많은 태권도는 그 차이점을 어필한 덕분에 가라테와 차이가 있는 무술로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글로벌 전파될 수 있었다.

ITF 태권도에 한정 짓는다면, 사인웨이브 이론을 도입하며 가라테와 기술의 원리도 상당한 차이가 나게 되었다. (품새)도 전부 새로 만들어 가라테 카타와 겹치는 것이 없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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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하기관인 대한태권도협회, 국기원도 포함.[2] 다만 국기원은 최근(?) 역사 페이지서 가라테가 한국 토착 무술들과 결합한 거라고 어느 정도는 인정했다.[3] 사실 이 말도 좀 웃긴 게, 무술에서 형식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4] 근대 가라테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키나와 출신 후나코시 기친(船越義珍, 1868-1957)이 창설한 유파로 전통 가라데 유파 중 가장 규모가 크다. 타 유파에 비해 발차기 활용 빈도가 높으며 여러 발차기들을 개발했었다.[5] 다만 언론 인터뷰 등에선 택견에서도 일정 영향을 받았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가라테가 모체긴 하지만 택견도 자양분 정도는 된다는 입장인듯.[6] 특히 WT 계열. ITF 계열은 틀(품새)은 이미 가라테 가타와 겹치는게 없다. WT는 가라테와의 연관성을 그렇게 오랜 세월 부정해왔음에도, 표절한(...) 일부 품새 동작은 아는지 모르는지 고칠 생각도 안해왔다.[7] 1946년쯤 나카야마 마아토시가 중국 북권 스타일의 발차기를 배워와 후나코시 기친 허가 아래 도입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8] 다만 무덕관을 세운 황기는 가라테를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 그가 가르친 것도 가라테가 아닌 전통무술, 중국무술, 가라테 등 여러 무술이 혼합된 무근본 짬뽕 무술이었다. 그 외에도 초기 태권도를 이끈 관 중 가라테가 아닌 다른 무술을 가르친 관들은 존재했으나, 통합 과정에서 결국 가라테 형태가 주류가 된다.[9] 그래서 중국 국뽕들이 태권도가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일각의 주장도 하는 것이다. 물론 태권도는 짬뽕된 현대 무술이라 최대한 넓게 보면 중국 무술에서도 영향을 받은 것은 맞으나(오키나와 테로 이어지는 남권 흐름 외에도 후술되어있듯 해방 이후 중국 북권 무술에서 직접 유입된 것도 있다), 사실 그 범위나 시기가 작거나 너무 오래된 것이다보니 직접적인 영향력은 쇼토칸 가라테에 비하면 많이 떨어진다.[10] 물론 일본 고류 무술계통인 유도보단 전통적인 의미의 일본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떨어지긴 한다. 오키나와 테를 배운 오키나와 사람 후나코시 기친이 일본에 와서 자기식으로 현지화해 전파한게 쇼토칸 가라테이기 때문.[11] 이준구 사범은 쇼토칸 영향을 받은 청도관 계열에서 태권도를 배웠다.[12] 실제 5대관 중엔 가라테와 상관없는 도장도 분명 있었으나, 태권도 통합 과정에서 주류화되진 못했다.[13] 참고로 이종우는 전직 가라데인으로 가라데에 대한 자부심도 초기엔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때문에 최홍희 계열이 주도한 태권도 명칭에도 거부감이 있었는지 오랜 기간 공수도 냄새가 나는 태수도를 고집한 인물이기도 했다.[14] 다만 이 대답은 정확한 답은 아닌게, 쇼토칸 가라테가 주축이긴 했어도 중국 북권 스타일 등 다른 무술들의 형식 역시 일부 영향은 받았다. 그래서 후술되어있듯 이종우도 다른 인터뷰에선 부분적으로 유래했다고 말을 바꾼다.[15] 택견의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게 아니라, 발기술과 시합 위주의 택견에서 영감을 받아 가라테 발차기를 태권도 수준으로 발전시켰다는 것.[16] 사실 요즘 종합격투기에서도 태권도식 뒤차기와 뒤후리기가 비기 취급을 받으며 종종 쓰인다. 종합격투기에서 KO를 뽑아내는 발차기는 무에타이나 킥복싱의 로우킥이나 미들킥이 아니라 뒤후리기처럼 턱을 노리는 하이킥이거나 복부를 정통으로 강타하는 뒤차기다. 로우킥이나 미들킥은 주로 견제용이나 데미지 누적용으로 쓰인다. 비기라는 것이 상대의 허를 찔러서 전투불가능 상태로 만드는 기술을 의미하는데 예상치 못한 순간에 터져나와 상대를 KO시키는 뒤후리기와 뒤차기는 비기라는 말이 어울린다. 물론 비기이기 때문에 로우킥처럼 자주 쓸 수 있는 기술은 아니다.[17] 가라테는 과거부터 해외 무술들과의 교류가 활발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