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17:16:37

S.E.S./SM엔터테인먼트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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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음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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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1집

S.E.S.
(1997. 11. 24.)
정규 2집

Sea & Eugene & Shoo
(1998. 11. 23.)
정규 3집

Love
(1999. 10. 29.)
정규 4집

A letter from Greenland
(2000.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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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S._Choose My Life-U.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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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4.5집

Surprise
(2001. 07. 11.)
정규 5집

Choose My Life-U
(2002. 02. 14.)
리믹스 싱글

Remixed
(2002. 08. 28.)
스페셜 5.5집

FRIEND
(200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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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S._Remembe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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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싱글

Love [story]
(2016. 11. 28.)
스페셜 20주년 기념

REMEMBER
(2017. 01. 02.)
[ 일본 음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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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1집

めぐりあう世界
(1998. 10. 21.)
맥시 싱글

I'm Your Girl
(1998. 12. 10.)
싱글 2집

夢をかさねて
(1999. 02. 21.)
정규 1집

REACH OUT
(1999. 03. 10.)
파일:(愛)という名の誇り.jpg
파일:T.O.P. (Twinkling of paradis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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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 3집

(愛)という名の誇り
(1999. 06. 23.)
싱글 4집

T.O.P.(Twinkling of paradise)
(1999. 10. 27.)
싱글 5집

Sign of Love / Miracle
(1999. 12. 08.)
베스트 1집

PRIME -S.E.S the best-
(2000. 03. 15.)
파일:Love∼いつまでも オンジェ·カジナ∼.jpg
파일:Be Ever Wonderfuㅣ.png
파일:海のオーロラ.jpg
파일:Lovin' You.jpg
싱글 6집

Love∼いつまでも オンジェ·カジナ∼
(2000. 04. 21.)
정규 2집

Be Ever Wonderful
(2000. 05. 24.)
OST

海のオーロラ
(2000. 07. 21.)
싱글 7집

Lovin' You
(2000. 08. 21.)
파일:Here & There - S.E.S Single Collection.jpg
파일:S.E.S._Best.jpg
파일:Beautiful_Songs.jpg
파일:S.E.S. 로고 화이트.svg
베스트 2집

Here & There - S.E.S Single Collection
(2001. 03. 16.)
베스트 3집

S.E.S. BEST
(2002. 07. 10.)
베스트 4집

BEAUTIFUL SONGS
(2003. 06. 25.)
[ 참여 음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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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99 Winter SMTOW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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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0 Winter SMTOW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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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Winter vacation in SMTOWN.co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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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 앨범

Christmas In SMTOWN.com
(1999. 12. 01.)
캐롤 앨범

Winter Vacation In SM Town.com
(2000. 12. 08.)
캐롤 앨범

Winter vacation in SMTOWN.com - Angel eyes
(2001. 12. 04.)
여름 앨범

02 SUMMER VACATION IN SMTOWN.com
(2002. 06. 11.)



1. 개요2. S.E.S.가 SM에 제시한 청사진과 끼친 영향력
2.1. 후배 가수들의 롤모델2.2. SM 후배 걸그룹의 교본2.3. SM 후배 걸그룹의 음악적 영감2.4.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는 멤버 구성2.5. 해외 진출 마케팅의 교두보2.6. 해외 음악가와 협업 시스템의 교두보2.7. SM 가수 최초로 무계약 앨범 발매
3. S.E.S. 활동에 있어서 SM에 대한 평가
3.1. 부정적 평가
3.1.1. 정산 문제3.1.2. 대만 광고 계약 거절3.1.3. 화보집 발매 무산

1. 개요

S.E.S.SM엔터테인먼트의 관계를 정리하는 문서. SM이 처음으로 만든 걸그룹인 만큼 이 후 SM의 걸그룹 런칭 전략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S.E.S.가 SM에 제시한 청사진과 끼친 영향력

K-POP 시작을 알린 최초의 대형 기획사이자 20년 넘게 K-POP 산업의 트렌드를 주도하며 선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SM엔터테인먼트에서 최초로 탄생한 걸그룹이자 최초로 성공한 걸그룹이라는 타이틀은 오직 S.E.S.에게만 수여될 수 있는 기념비적인 타이틀이다.

SM엔터테인먼트 최초의 걸그룹이라는 타이틀 만으로도 S.E.S.의 위상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이 타이틀이 더욱더 빛날 수 있는 건 S.E.S.가 SM엔터테인먼트 아이돌 산업의 교두보 역할 노릇을 하였으며, 현재까지도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SM엔터테인먼트 아이돌 산업 마케팅에 끼치고 있는 영향력만 보자면 당시 보이그룹이었던 H.O.T.보다 더 많은 밑거름을 SM엔터테인먼트에게 제시했다는 걸 알 수 있다.
NCT 127 도영은 최근 한 음악방송 대기실에서 가진 스포츠월드와의 인터뷰에서 "H.O.T. 선배님과 S.E.S 선배님은 SM 개국공신과도 같은 분들"이라고 운을 떼며 "현재 SM에 많은 선배님들이 계시지만, 그래도 제일 감사한 분이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우리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마크도 "S.E.S. 선배님들이 활동할 당시 난 태어나지도 않았다"고 너스레를 떨며 "그럼에도 그분들의 노래를 안다는 게 굉장히 신기했다. 나 역시 그런 가수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NCT 127 "S.E.S는 SM 개국공신, 선배 있어 우리가 존재"(인터뷰) 아카이브 (2010.01.14 스포츠월드)
MC 박나래는 바다에게 SM 사옥에 대한 S.E.S.의 지분은 어느 정도 되는 것 같은지 물어봤다.

바다는 "땅은 저희가 산 것 같다. 땅은 저희와 H.O.T. 선배님들이 산 게 확실하다"며 "저희가 땅을 사놓고 건물 짓는 거는 보아나 이런 친구들이 했을 거다"라고 전했다.
'당나귀 귀' 바다 "SM사옥 지분? 땅은 S.E.S.가 산 게 확실" 아카이브 (2020.11.08 엑스포츠뉴스)

2.1. 후배 가수들의 롤모델

보아, 밀크의 김보미,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의 다나와 스테파니, 소녀시대의 태연과 티파니, 수영, 윤아, 서현 등은 S.E.S.의 모습을 보고 가수의 꿈을 꿨고 이들이 SM 오디션을 보고 입사하게 된 계기도 S.E.S. 덕분이었다.. 소녀시대는 데뷔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서 학창시절 따라다니고 싶었던 가수라는 질문이 나오자 마자 다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S.E.S.를 외치기도 했을 정도로 그들에게 우상 그 자체였다.

동방신기유노윤호는 S.E.S. 숙소까지 찾아갈 정도로 열혈팬이었다.기사 트랙스의 제이[1]는 당시 S.E.S.가 너무 좋은 나머지 SM 청소부도 좋으니 입사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고 밝혔다.영상 슈퍼쥬니어의 려욱은 S.E.S.의 열혈 팬이었으며 SM이 모집한 공식 유로 팬클럽에 가입할 정도였다. S.E.S.의 활약상은 SM을 이끌어갈 새로운 주역들 탄생에 큰 기여를 한 셈이다.

2.2. SM 후배 걸그룹의 교본

밀크는 데뷔 초 방송에서 S.E.S. 무대를 헌정했으며, 소녀시대는 데뷔 초부터 수없이 S.E.S.의 노래 및 무대를 헌정했다. 레드벨벳은 연습생 시절 S.E.S. 노래로 연습을 했고 SM 루키즈 여자팀도 데뷔 전부터 S.E.S.의 무대를 헌정했다. SM 여자 연습생은 반드시 거쳐가야 할 교본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2]

2.3. SM 후배 걸그룹의 음악적 영감

레드벨벳은 <Be Natural>을 리메이크 해서 활동하였고, 에스파는 <Dreams Come True>를 리메이크해서 발표했다. 또한 S.E.S.가 보여준 안전한 대중적인 음악만 고집하는 노선보다는 실험적인 음악도 시도하며 트렌드를 이끄는 노선을 소녀시대가 그대로 이어 받아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S.E.S.의 이러한 음악적 노선이 아직도 직속 후배 걸그룹들에게 구현되는 것은 SM가 자사의 걸그룹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음악적 색채가 무엇인지 그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S.E.S.에게 여러 히트곡을 안겨주고 음악적 색채를 완성해준 SM 작곡가가 유영진이라면[3], 소녀시대에게 그런 존재는 켄지라 할 수 있다. 자사가 공들인 1등 걸그룹에게 음악적 색채를 공고히 해줄 수 있는 담당 작곡가를 두고 서포트하는 시스템도 S.E.S.를 통해서 구현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훗날 유영진에스파의 음악적 아버지[4] 역할을 하는 등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남성 잡지 GQ에서 S.E.S.와 유영진의 협업을 다루는 기사를 기고한 적도 있다.#

2.4.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는 멤버 구성

SM은 S.E.S. 기획 당시 노선을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글로벌 걸그을 목표로 준비했다. 또한 군입대 문제가 있는 보이 그룹 H.O.T.보다 해당 사항에서 자유로운 걸그룹 S.E.S.를 시작으로 해외 진출을 구상한다.[5] 재일교포 출신으로 일본문화와 일본어에 능통한 를 필두로 재미교포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한 유진을 선발한 것도 이러한 노선에 준한 선택이다. 여기에 최종적으로 탈락하긴 했지만 중국 시장도 고려해 외교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중국에서의 생활한 이력이 있어서 중국어에 능통한 걸그룹 티티마 출신의 소이까지 멤버로 구상하기도 했다. 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이수만은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 시장도 강조했다고 한다.[6] S.E.S.의 이러한 글로벌 멤버 구성은 이후 SM 아이돌의 교과서 같은 멤버 구성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S.E.S.를 필두로 초기에는 각 나라에서의 생활 경험을 통해 외국어에 능통한 실제 교포 출신을 위주로 꾸렸다면 이후 [한 발 더 나아가서 자사 연습생들을 해외에 어학연수를 보내는 식으로 그 나라의 언어를 익히게 하는 서포트도 아낌 없이 지원했다. 슈퍼주니어 최시원, 소녀시대 효연, 샤이니 민호와 종현, 엑소 수호 등은 데뷔 전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보내 중국문화와 중국어를 익히게 하는 트레닝을 지원했으며관련 게시물 참고 소녀시대 데뷔 당시 프로필 기사, 소녀시대 수영은 소녀시대로 데뷔 전 일본에 진출해서 활동하며 일본어를 익히게 트레이닝 했다.

이젠 더 나아가 각 나라의 해외 멤버를 영입해서 구성원을 꾸리는 식으로 진화하며 이러한 전략은 완전체에 다다르게 된다. SM 아이돌 그룹에서 일본과 중국 멤버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되었다. 2020년 11월 에스파 데뷔 당시 이수만이 S.E.S.를 통해서 구현하려 했던 한중일 멤버 구성 걸그룹을 드디어 실현했다는 네티즌들의 반응이 주를 이었다.

2.5. 해외 진출 마케팅의 교두보

이수만은 소속 가수들 중 최초로 S.E.S.를 통해 해외 현지 음악 시장에 진출하였다. S.E.S.의 일본 활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시도할 수 있었다. 또 이 과정에서 깨달은 시행착오를 발판 삼아 직속 후배 BoA일본에 진출할 때 더욱더 발전된 방향으로 삼을 수 있었다. S.E.S.의 해외 진출은 세계 시장을 노리는 SM이 꿈에 도전하고 실현시킨 첫 사례이며, 이후 SM 가수들의 해외 진출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2.6. 해외 음악가와 협업 시스템의 교두보

정규 2집 타이틀곡 <Dreams Come True>는 핀란드 작곡가의 곡을 5집 U는 스웨덴 작곡가의 곡의 판권을 사온 것이었다. 이는 현재 SM 시스템의 일부로 자리잡은 송캠프의 시초가 되는 사례이다.

2.7. SM 가수 최초로 무계약 앨범 발매

2017년 1월 2일, SM의 지원하에 완성된 데뷔 20주년 기념 앨범이 발매되었다. SM 역사를 통틀어 자사 가수 데뷔를 기념하는 새 앨범을 발매해주는 것도, 현재 소속 관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앨범을 발매해주는 것도, 계약 없이 앨범을 발매해주는 것도 모든 것이 다 최초였다.

S.E.S.가 이러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SM의 개국공신으로서 수많은 업적을 쌓았으며, S.E.S.를 통해 SM은 자사의 기초 및 정체성이 세워지는 여러 비전을 시도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생긴 시행착오 등을 발판 삼아 더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SM 역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절대 등한시 될 그룹이 아니라는 것.

이후 2022년 직속 후배 걸그룹 소녀시대가 멤버 과반수가 SM 소속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데뷔 15주년 앨범 기념을 발매해주는 등 S.E.S.를 통해서 보여준 지원이 다른 후배 가수에게도 이어졌다.

3. S.E.S. 활동에 있어서 SM에 대한 평가

3.1. 부정적 평가

3.1.1. 정산 문제

2009년 8월 2일, 조선일보 공식 홈페이지에 유진이 주연배우로 나서는 영화 《요가학원》 홍보를 위해 진행하였던 인터뷰가 보도되었다. 해당 인터뷰에서 유진은 당시 연예계의 화두였던 동방신기와 SM의 소송 문제를 언급하며, S.E.S. 활동 당시에도 자신들도 정산과 관련하여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러한 문제가 남아있는 게 안타깝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하였다. 활동 시절 정산과 관련한 문제가 있었다는 게 공식적으로 밝혀진 최초의 인터뷰였다.

데뷔 당시 S.E.S. 멤버들의 나이는 고작 바다가 18세, 유진가 17살에 불과한 미성년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 대만 등 해외까지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내야만 하였다. 국내 일정만으로도 버겁게 느껴질 텐데, 심지어 일본은 직접 현지에 가서 아예 다른 시스템과 스타일링, 이미지, 심지어 아예 새로운 언어까지 다 부딪히며 해내야만 했다. 당시 미성년자였던 멤버들이 감내해야만 했었던 무게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SM이 S.E.S.를 많이 굴렸다는 건 이들이 한국과 일본, 대만에서 발매한 디스코그라피 내역들만 봐도 너무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과 일본, 대만에서 발매한 모든 디스코그라피가 30개는 기본적으로 넘어갈 정도니 가히 5년 기간 동안 얼마나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냈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 5년 간의 활동 기간 내내 거의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일했지만 정산 문제로 멤버들에게 금전적인 문제를 일으켰다는 건 그 어떤 말로도 쉴드거리가 될 수 없다. SM이 S.E.S. 활동에 있어서 일으킨 여러 삽질 중 가운데 가장 비판 받아야 될 부분이다. 이외에 여러 삽질과 그로 인해 비판 받아야 될 거리는 넘쳐나지만, 해당 정산 문제에 비하면 애교수준으로 보일 지경이다.[7]
[동방신기 TVXQ]
[스타 피디아] 유진과 '시시콜콜 키워드 인터뷰 아카이브 (2009.08.12 조선일보)

3.1.2. 대만 광고 계약 거절

1999년 2월 4일, 대만의 굴지 레코드 기업인 滾石唱片[8]가 주관한 《Korea Big 4 Concert》에 클론, H.O.T, 디바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로 공연을 펼치며 본격적으로 대만 음악 시장에 문을 두드렸다. 데뷔와 동시에 첫 한국 베스트 앨범이 20만 장이 팔려나가고, 한국과 일본에서 동시 발매된 화보집이 2천 부 한정으로 수출돼서 완판되고 또 추가 수출을 시킬 만큼 데뷔와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많은 대중들이 S.E.S. 일본 현지와 진출만 더 관심 있게 보고, 그에 비해 당시 대만에서 쌓은 한류 가수로서의 인기나 업적이 조명 받지 못 하지만 그 당시 한국 여자 가수 중 가히 압도적인 인기를 누렸을 만큼 인기가 어마아마 하였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당시 대만의 굴지 기업 두 곳으로부터 광고 및 CF 계약을 제의 받았다. 하나는 음료회사 흑송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삼양 스쿠터 광고였다. 이때 제의 받았던 제품군만으로도 당시 대만에서 S.E.S.인기가 어느 정도로 많았는지 체감할 수 있다.

스쿠터 광고는 한국인에게는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당시 대만인들에게는 일종의 대중 교통 수단 같은 존재였고, 홍콩의 4대 천왕 스타들도 스쿠터 광고를 찍을 만큼 소위 말해 정말 잘 나가는 연예인들만 찍을 수 있는 CF였다고 한다.

심지어 음료수는 캔 앞에 S.E.S. 멤버들 얼굴이 부착되어 판매될 예정이었다. 고작 대만에 진출한 3개월 밖에 안 되는 외국 연예인을 대표 상품의 얼굴로 등장시킬 제의까지 받았을 정도면 이들이 인기가 어느 정도였고, 얼마나 가파른 속도로 인기 행진에 불이 붙었는지는 너무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동년 5월 18일 대만에 두 번째로 방문하였을 때 촬영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일정상 다음에 와서 찍기로 하고 미뤄졌다. 하지만 추후 업체 측에서는 광고효과를 위해서 2주 정도 현지에 와서 프로모션 홍보 활동을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SM 측에서는 일본 활동 때문에 할 수 없다며 결국 거절하였다.

잡혀 있는 일정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되고, 내부 사정이 있을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S.E.S.가 일본에서 열심히 노력했던 땀방울과 이뤄낸 소기의 성과는 대단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이나 대만에서 만큼의 인기와 위상을 쌓는 다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할 수 없는 성과였다.

우선 대만에서 발매한 첫 한국 베스트 앨범이 20만 장 팔렸다는 것과 일본 현지 앨범의 오리콘 판매량만 보더라도 하늘과 땅 차이다. 즉 상업적으로 돈이 더 되었던 곳은 대만이었다. 심지어 그때 대만 광고 업체 측에서 제시하였던 개런티는 무려 4,000만 원 대의 고가 광고였었다. 엔터사가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돌아가는 집단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해당 광고 계약을 거절했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위에 서술된 것처럼 물론 내부 사정과 잡혀 있는 일정도 있겠지만, 일정 조율을 잘 해서 해당 CF 계약 건을 체결시킬 수 있는 기지를 발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회사 측과 S.E.S. 멤버들에게 이득이 갈 수 있는 금전적 이득을 빵 찼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커리어도 날라갔다. 자사가 자사 가수의 커리어를 대차게 날려버렸다는 것 또한 쉽게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3.1.3. 화보집 발매 무산

2001년 여름, 스페셜 앨범 4.5집 《Surprise》로 활동 당시 화보집을 발매하기 위해 이미 촬영까지 다 마친 상태였고 발매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SM 측이 제작하여 공개하였던 <달끝까지>와 <Love Is Day By Day> 편집 뮤직비디오를 통해 해당 화보집 촬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뮤직비디오

하지만... 결국 발매는 되지 않았다. 왜 미발매 됐는지에 대해 명확한 이유를 아는 팬들은 20년이 훌쩍 지난 현재도 없다. 뭐 회사 내부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언제까지 내부 사정이 있을 거라고 이해를 해야 되는지... 본격 인내심 시험하니..? 그렇다면 팬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안내가 있어야 되는데 팬들에게 그런 기본적인 배려조차 없었다.

또한 이렇게 발매도 안 해줄 거면서 왜 바쁜 멤버들을 붙잡고 촬영까지 시켰는지에 대한 비판도 면할 수 없다. 당시에도 팬덤이 크고 활발하였기에 어느 정도의 상업적인 성공도 보장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팬들에게 더 아쉬움으로 다가왔던 건 아주 살짝 공개된 화보집 컨셉이 굉장히 좋았기 때문이다. 만약 실제로 발매까지 이어졌다면 좋은 퀄리티의 화보집을 소장할 수 있었던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결국 팬들은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화질도 좋지 않은 당시 편집 뮤직비디오를 통해 공개된 아주 짧은 모습밖에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1] 현재는 본명 김견우로 개명 후 배우로 활동 중이다.[2] BoA도 마찬가지이며, S.E.S.와 BoA를 거쳐간 소녀시대 또한 이젠 이러한 위치에 있다.[3] 우스개 소리로 유영진의 음악적 뮤즈는 S.E.S.였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이며. 그 말에 대부분 사람들은 동의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4] 농담이 아니라 에스파도 진짜 유영진을 아버지라고 부른다.[5] 해당 내용은 SM과 동방신기의 법정 소송에서 밝혀진 공식 내용이다.[6] 2022년 11월 10일 인터넷 방송에서 가 직접 밝힌 내용이다.[7] 동방신기 사태 이후인 2011년부터 연예계의 표준계약서가 만들어져 아이돌의 계약기간은 기본 7년으로 제한되게 되었다. 이전만 해도 연예기획사가 연예인 개인과 맺을 수 있는 계약기간에 제한이 없어서 10년, 20년 등 장기계약이 매우 흔했고 그 기간동안 제대로 된 수입조차 얻지 못하고 착취에 가깝게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8] 영어 Rock Records. 한국어 록 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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