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1 20:28:45

DH-106 코멧

1. 개요2. 개발3. 첫 비행4. 기체 결함5. 최후6. 기타7. 참고 링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H_Comet_1_BOAC_Heathrow_1953.jpg
파일:boac_dh106.jpg
위는 사각형 창문이 적용된 전기형[1], 아래는 영국해외항공 781편 공중분해 사고 이후 원형 창문으로 교체된 개량형

1. 개요

코메트기의 바퀴가 땅을 떠난 순간부터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안토니 페어브라더[2]

de Havilland Comet

DH-106 코멧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모스키토 전폭기 생산으로 명성을 알린 드 해빌랜드가 제작, 설계한 세계 최초의 상업용 제트 여객기이다. [3]

1949년 7월 27일에 첫 비행을 했으며, 1952년 5월 2일에 영국해외항공(이하 BOAC)[4]에 의해 운항이 시작되었다.

1964년에 단종될 때까지 총 114대(시제기 2대+양산형 112대)가 생산되었으며, 그 중 26대가 사고로 소실되었다.

2. 개발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내각은 제2차 세계 대전 무렵인 1943년 3월 11일에 보수당의 정치인이자 영국 최초의 비행사인 존 M. 브라바존 남작(John M. Brabazon, 1884~1964)을 위원장으로 하는 브라바존 위원회를 개설해 대서양 횡단 우편 비행기를 위주로 개발하여 전후 영국의 민간 항공 업계에서의 선진성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드 하빌랜드 사는 이 위원회에 '타입 4'라는 명칭으로 제트 우편 수송기 시범안을 내놓게 되는데, 이 기체의 설계가 불안정하다는 반응이 많자 이를 변형하여 1946년 9월에 개발을 시작한 것이 코멧 여객기다. 원래는 24석 정도의 무미익기(수평꼬리날개가 없는 비행기)로 제작하려고 했지만, 같은 해에 자사가 만든 무미익 고속 전투기인 DH.106의 시험비행에서 드 하빌랜드사의 창업주이자 사장인 제프리 드 하빌랜드[5]의 아들 제프리 드 하빌랜드 2세가 향년 36세로 추락사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설계를 변경하게 되었고, 1947년 12월에 'DH-106 코멧'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드 하빌랜드 사는 코메트기에 쓸 터보 제트 엔진인 '고스트(Ghost)'를 개발하게 되었지만, 엔진 4개로도 추력이 부족해서 두랄루민을 이용해 동체를 가볍게 만들어야 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코메트 프로토타입 초호기인 G-ALVG는 제프리 드 하빌랜드의 67세 생일이던 1949년 7월 27일에 존 커닝햄이 31분 동안 짧으면서도 굵은 초도비행을 했는데, 코메트기는 당시 최신예기이던 DC-7보다도 빠른 속도와 '플라밍고와도 같은' 우아한 모습은 당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이후 시제기 2호인 G-ALZK도 1950년 7월 27일에 초도비행을 했고, 이후 드 하빌랜드는 여러 테스트를 거쳐 코메트기의 메인 기어를 1축에서 2축으로 바꾸는 등 여러 보수 작업을 거친 후 1951년 1월 9일에 최초의 양산형 기체인 G-ALYP가 BOAC에 인도되었다. BOAC로 인도된 후의 G-ALVG(시제 1호기).

이후 첫 제트 여객기의 비행을 위해 드 하빌랜드는 코메트기에 엄격한 훈련을 거쳤는데, 코메트 여객기는 당시까지 나온 여객기들 중 가장 철저한 훈련을 거친 기종이었다고 한다.

3. 첫 비행

파일:세계 최초의 제트 여객기.jpg
코메트 여객기의 첫 비행 당시 사진. 상술했듯 창문 모양이 사각형인 것을 볼 수 있다.[6]

1952년 5월 2일 GMT 오후 3시 12분, 런던에서 이륙한 G-ALYP("Yoke Peter", DH.106 Comet 1)[7]가 36명의 승객과 7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로마-베이루트-하르툼-엔테베-리빙스턴-요하네스버그라는 많은 경유지를 거치며 5월 3일 GMT 오후 2시 38분에 23시간 26분의 비행을 마치고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하며 제트 여객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코메트의 첫 버전인 코메트 1은 길이가 28m, 2+2열만 가능한 좁은 동체에 탑승인원은 최대 44명밖에 안 되는 보잉 737-100보다도 작은 비행기였고,[8] 동래의 프로펠러 여객기보다도 탑승 인원과 항속 거리가 떨어졌다.[9] 하지만 그런 결점에도 코메트는 당대 여객기의 2배 가량 빠른 속도인 시속 740km로 비행할 수 있었고, 높은 고도에서 비행하여 날씨의 영향도 적게 받았으며, 정시 발착율도 높아졌고, 이전의 비행기들보다 월등히 조용하고 진동도 없는 기내 환경으로 인해 승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연비 면에서의 우려도 저렴한 연료값과 많은 승객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이후 코메트기는 전술했듯 항속거리의 한계 때문에 대서양 횡단 노선은 운항하지 않았지만, 해외 노선을 넓혀나가며 영국 왕실의 해외 방문에도 이용되었다, 1953년 여름 기준으로는 8개의 BOAC 소속 코메트기가 매주 런던을 떠났는데, 3개는 요하네스버그 노선을, 2개는 도쿄 노선을, 2개는 싱가포르 노선을, 1개는 콜롬보 노선을 운항했다고 한다.

이 기세를 틈타 발표된 코메트기의 개량형인 코메트 2는 팬 아메리칸 항공, 일본항공, 에어 인디아, 아르헨티나 항공, 남아프리카 항공 등 해외의 항공사들로부터 50기 이상의 주문을 받게 되었으며, 대서양 횡단용으로 항속거리와 동체 길이를 늘린 코메트 3 역시 팬암 등의 미국 항공사들의 주문을 받게 되었다.

참고로 코메트기는 취항 초기 1년여간 조종사 과실로 2건의 동체 손실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후 드 하빌랜드사에서는 부랴부랴 극초기형의 날개 설계를 수정한 코멧 1A형을 내놓게 된다.

1953년 5월 2일에 캘커타에서 BOAC 소속의 G-ALYV가 이륙 직후 돌풍을 만나 추락하여 탑승객 43명이 전원 사망하는 BOAC 783편 추락 사고가 발생했는데,[10] 이 사고의 원인은 조종사가 악천후 속의 난기류를 피하기 위해 비행 제어 장치를 과도하게 조작하여 기체에 설계 한도 이상의 하중이 가해져 그 여파로 수직미익이 파괴되어 추락한 거였다. 이 사고 후 모든 코메트기에는 기상 레이더가 장착되었다.

4. 기체 결함

그러나 1954년 1월 10일에 이륙 20분밖에 되지 않은 코메트기가 공중에서 분해되어 지중해에 추락하는 영국해외항공 781편 공중분해 사고가 발생하자,[11] BOAC는 모든 코메트기의 운항을 중단시켰다. 이 사고는 목격자도 없었고, 부분적인 무전이 유일하다시피 한 증거여서 조사에 난항을 겪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난기류, 연료 탱크의 폭발, 금속 피로 등의 다양한 원인들을 사고 원인으로 추측했다고 한다. 당시 조사위원회는 가장 유력한 사고 원인을 화재라 보고 화재에 안전하게 기체를 보완한 후 1954년 3월 23일에 코메트기의 운항을 재개했다.

그러나 코메트기가 운항을 재개한 지 약 2주밖에 안 된 1954년 4월 8일에 남아프리카 항공 201편 공중분해 사고까지 일어나며 모든 코메트 1은 강제로 운항이 종료되었고, 코메트 1의 생산 역시 중지되었다. 3개월 동안 공중분해 사고가 2차례나 일어나자 윈스턴 처칠 총리는 "코메트기의 미스터리를 푸는 데 드는 비용은 돈으로도, 인력으로도 계산되어서는 안 됩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사고 원인을 철저히 규명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사건 원인 규명을 위해 조사팀은 금속 피로를 사고의 유력 원인으로 간주하게 되는데, 조사팀은 BOAC가 사고 원인 규명을 위해 기증한 G-ALYU를 특별 제작한 1954년 6월 초부터 거대한 수조 속에 담근 후 수압을 걸어 인공적인 여압 상태를 만들고 해제하는 실험을 반복하는 등 힘겨운 노력을 이어나갔다. 이들은 시험 과정에서 기체에 치명적인 파손이 몇 달 뒤에야 발견될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로부터 3주 뒤인 1954년 6월 24일에 기체가 폭발했다. 조사팀은 이 실험 데이터를 해석한 결과 수만 비행분으로 계산된 구조 수명이 실제로는 수천 시간에 불과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공중 분해 이유는 제작 당시 드릴작업 없이 리벳을 박으면서 외피에 미세한 균열이 발생할 수 있었고, 제트기 특성상 고고도 순항 및 착륙을 반복할 때 이루어진 가압/감압으로 인한 금속피로+코멧기의 각진 사각형 창문에 동체의 나머지 부분의 2~3배에 달하는 응력이 가해지며 꼭짓점에서 시작된 균열이 피로해진 금속동체를 갈갈이 찢어놓은 것. 또한 당시의 여객기 제작 시에는 이렇게 고고도를 날아다니는 여객기를 제작해 본 경험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12] 동체 두께에 대한 규정이 상당히 얇은 편이었는데, 이렇게 얇은 동체의 금속벽 두께는 감압-가압을 버틸 수 없었다.

이 비극을 반면교사로 삼아 연구한 끝에 여객기 창문의 모퉁이를 둥글게 만들어 오늘날처럼 안전한 여객기 동체가 만들어졌는데, 이를 두고 앞서 언급한 존 커닝햄은 '만약 드 하빌랜드가 코메트기의 기체 결함을 먼저 겪지 않았으면 보잉더글라스가 드 하빌랜드와 비슷한 일을 당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 때문에 이미 양산형 13기가 완성된 상태였던 코메트 2는 동체 강도를 높이고 엔진을 롤스로이스 Avon으로 교체한 후[13] 사각형 창문을 원형으로 바꾸어 1953년 8월 27일에 초도비행을 했으며, 코메트 3은 전면적인 재설계 끝에 1954년 7월 19일에 초도 비행을 했다 하지만 이미 모든 민간 항공사들은 코메트기의 주문을 취소한 뒤였고, 이 여파로 코메트 3은 제대로 생산된 기체가 단 1대(G-ANLO)밖에 없었다고 한다.

결국 비싼 가격과 운용비에 설계 결함으로 인한 이미지 추락까지 겹치며, 코멧의 최종형인 코메트 4가 출시된 1958년까지 코메트기를 운용한 항공사는 BOAC를 제외하고는 에어 프랑스, UAT[14], 남아프리카 항공 이렇게 단 3곳밖에 없게 되었다.[15]

5. 최후

이후 코메트기의 최종형인 코메트 4는 길이가 34m 정도에 2+3열을 적용하여 최대 81명을 태울 수 있게 되었으며, 1958년 4월 27일에 초도 비행을 한 후 동년 10월 4일에 런던-갠더[16]-뉴욕 노선을 개항하여, 세계 최초의 제트기 대서양 횡단 노선을 개척하게 된다. 그러나 그로부터 고작 22일 후인 10월 26일에 미국의 팬 아메리칸 항공보잉 707로 뉴욕 - 파리 노선을 개항하여서 기껏 얻은 파이를 빼앗겼다. 보잉 707은 기체 크기, 승객 수, 속력, 항속거리 등 모든 면에서 코메트기보다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에[17] 코메트기는 그나마 남아있던 체면까지 없어지며 자연스럽게 몰락하게 되었다.

BOAC의 코메트 4의 런던-뉴욕 노선은 항속거리 부족으로 인해 캐나다나 아일랜드에 중간기착을 해야 했는데, 결국 1960년 5월 27일에 보잉 707 운항을 시작한 BOAC는 707 도입 직후에 코메트에 의한 뉴욕 노선을 단항시켰고,[18] 이후 BOAC는 코메트기를 중동, 서아시아, 아프리카처럼 비교적 수요가 적은 중거리 제국(MRE, Medium-Range Empire) 노선 중심으로 운항했다고 한다.

드 하빌랜드는 이후 제트 엔진을 롤스로이스 콘웨이 엔진으로 개선해 좌석을 증가시킨 코멧 5의 개발 계획을 세웠지만, 어떠한 항공사도 발주하지 않아 시제기조차 만들어지지 못했고, 결국 1964년에 코메트기는 총 114기 생산을 끝으로[19] 최종 단종되었다. 그리고 BOAC도 1965년 11월에 코메트기를 모두 퇴역시킨 후 코메트기를 제3세계 항공사들에게 대여 혹은 매각하거나 영국유럽항공[20]에 보내 유럽 내 단거리 노선에 투입했다.

1980년 11월 9일에 댄에어[21]의 코메트 4C 운항을 끝으로 여객기 코메트는 영원히 이 세상에서 볼 수 없게 되었고, 1997년 3월 14일에 영국 기술부의 통신기술 시험용으로 쓰인 코메트 4C인 XS235의 비행을 끝으로 모든 코메트기는 운용이 종료되었다. 여담으로 코메트는 작은 동체와 나쁜 연비 때문에 화물기로도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퇴역한 기체들 몇몇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중에서 로열 에어 포스 박물관 실내에 한대가 전시되어 있는것이 대표적이라고 한다.

비록 마지막은 쓸쓸했지만, 코멧의 설계개념은 1969년 10월부터 2011년 6월까지 사용된 영국의 초계기인 호커 시들리 님로드에 이어지게 된다. 그 예로 님로드의 개발 단계에서는 코멧의 기수에 레이돔을, 님로드에 쓸 수직미익을 코멧에 설치하여 시험하는 등으로 코멧을 활용했으며, 기체 설계 방식도 코멧의 그것을 이어받아 코멧처럼 엔진을 주익에 내장했다.

6. 기타

  • '코멧'이라는 명칭은 드 하빌랜드가 1934년에 개발한 경주용 비행기 DH.88에도 사용되었다.

7. 참고 링크



[1] 사진 속 기체는 G-ALYX로, 1953년 6월 2일에 런던 히스로 공항에서 촬영되었으며, 후술할 사고의 여파로 1954년 4월에 퇴역당했다.[2] Anthony J. Fairbrother, 1926~2004. 코메트의 초도 비행에서 비행 테스트 엔지니어를 맡았다.[3] 실제로 이 비행기를 처음으로 시운전한 영국 공군 대령 출신의 에이스 파일럿이자 드 하빌랜드의 수석 테스트 파일럿이었던 존 커닝햄(John "Cat's Eyes" Cunningham, 1917~2002)은 훗날 코메트기를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인 콩코드 여객기에 비유했다.[4] British Overseas Airways Corporation, 1939년부터 1974년까지 존속하던 옛 영국의 플래그 캐리어. 1974년 3월 31일에 영국항공으로 개편된다.[5] Geoffrey de Havilland, 1882~1965. 대배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사촌이기도 하다.[6] 이후 이 기체는 2년 후 이 사각형 모양 창문으로 인해 추락했다.[7] 코메트기 중 최초의 양산 기체로, 1951년 1월 9일에 초도비행을 했다.[8] 다만 코메트 1의 동체 너비는 737-100보다는 넓었다고 한다.[9] 코메트 1의 항속 거리는 겨우 2400km에 불과했는데, 참고로 전술한 보잉 737-100의 항속 거리가 2850km였고, 피스톤기인 DC-3의 항속거리(2540km)보다도 짧았다. 그래서 코메트기는 태평양은 물론이고 대서양 무착륙 횡단 비행도 불가능했다.[10] 참고로 이 사고는 제트 여객기의 상업 노선 내 최초의 사망사고였다.[11] 참고로 여기에 휘말린 기체가 상술한 G-ALYP이다.[12] 이것이 B-29와 이후 군용 고고도 프롭, 제트 항공기를 제작해 본 보잉과, 중고도 폭격기인 모스키토를 제작해 본 드 해빌랜드의 차이였다.[13] 이전에는 전술한 것처럼 드 하빌랜드 고스트 엔진을 사용했는데, 이 엔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동체두께를 키우기에는 엔진이 너무 불안정했기 때문에 엔진을 교체했다.[14] Union Aéromaritime de Transport, 1949년부터 1963년까지 존재했던 프랑스의 항공사. 1963년 10월 1일에 TAI(Transports Aériens Intercontinentaux, 1946년에 창립된 프랑스의 항공사.)와 합병되어 UTA(Union de Transports Aériens)가 되어 프랑스 제2의 항공사로 위세를 펼치다가 1992년 12월 18일에 에어 프랑스와 합병되었다.[15] 참고로 에어 프랑스와 UAT는 1A형만 각각 3개씩 운항했으며, 남아프리카 항공은 1953년부터 1954년까지 BOAC로부터 2대의 코메트기를 전세해 운항했다.[16] 캐나다 뉴펀들랜드섬의 공항[17] 코메트 4의 항속거리는 5190km였는데, 보잉 707의 최초형인 보잉 707-120의 항속거리가 6940km였다.[18] 참고로 BOAC는 707을 1956년 11월 8일에 처음으로 주문했다.[19] 이들 중 코메트 4가 79기였다.[20] British European Airways, 1946년부터 1974년까지 존재한 영국의 국영 항공사. BEA라는 약칭으로 더 유명했으며, 1974년 3월 31일에 BOAC와 합병되어 오늘날의 영국항공이 되었다.[21] Dan-Air, 1953년부터 1992년까지 운항한 영국의 항공사. 1960년대 후반부터 당시까지 존재했던 비행이 가능한 코메트기 49대를 모두 구입해 운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