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시카고시장 선거 1983 Chicago mayoral election | |||||||
지역별 선거 결과 | |||||||
{{{#!wiki style="margin: -7px -12px" | 1979년 4월 3일 1979년 선거 | → | 1983년 4월 12일 1983년 선거 | → | 1987년 4월 7일 1987년 선거 |
투표율 | 82.07% | |
선거 결과 | ||
후보 | 해럴드 워싱턴 | 버나드 엡튼 |
득표율 | ||
51.72% | 47.99% | |
득표수 | 668,176 | 619,926 |
당선인 | ||
민주당 해럴드 워싱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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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3년 치러진 시카고시의 시장 선거.2. 양당의 경선
2.1. 민주당
1983년 시카고시장 민주당 예비선거 토론회 |
한편 두 경쟁자들 사이 소수인종 표심은 자신들을 배신했던 번과 유색인종에게 불친절했던 아버지를 둔 데일리 중 차악이 누구인지 고민하고 있었다. 백인 정치인들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도중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현직 초선 연방하원의원인 해럴드 워싱턴이었다. 그는 일리노이 주 하원의원, 주 상원의원을 총 16년이나 역임한 잔뼈 굵은 인물로 연방하원에서도 투표권법 연장을 위해 열성적으로 투쟁했다. 워싱턴은 1977년 시장 보궐선거에서 저조한 득표율을 얻은 적이 있었기에 출마를 주저했지만 5만명 이상의 지지자들이 지지 서명을 제출하자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뛰어들었다. 제시 잭슨도 그의 선거 기금 모금을 도왔고 흑인 커뮤니티에게도 풀뿌리 자금 지원을 받았다. 또한 지지층의 외연 확장을 위해 비슷한 처지였던 시내 히스패닉, 주로 오대호 연안에 거주하던 진보적 백인층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3자 토론회에서도 워싱턴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시내 정치 머신을 비판하면서 자신을 개혁 후보로 자리매김했다.
양자 구도였던 선거가 워싱턴의 급부상으로 3자 구도로 재편되자 번과 데일리도 그를 현실적인 위협으로 인식하고 자금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특히 번의 동맹이자 쿡 카운티 민주당 의장이었던 에드 브르돌랴크는 데일리에게의 투표는 워싱턴에게 투표와 똑같다고 주장하며 백인 유권자들의 지지 결집을 바랬다. 반면 데일리의 선거운동은 그의 미숙함으로 점점 무너져 지지자들이 번과 워싱턴 지지로 이탈하게 만들었다. 예비선거일 하루 전, 에드 브르돌랴크의 이번 선거는 인종의 문제라는 노골적인 인종주의적 발언이 폭로되자 흑인, 히스패닉, 일부 리버럴 백인 표가 워싱턴으로 막판 결집했다.
1983년 시카고시장 민주당 예비선거 결과 |
2.2. 공화당
버나드 엡튼 |
엡튼은 자유주의 공화당원으로 1950년대는 매카시즘에 반대하며 당내 예비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한 적이 있었다. 1968년 마틴 루터 킹의 사망으로 전국적으로 폭동과 소요가 번지자 추모 행진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 뒤 시카고 북부 하이드 파크를 지역구로 14년간 주 하원의원을 지내며 지역구 주민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공화당 입장에서는 그나마 괜찮은 선택이었지만 그렇다고 유의미한 경쟁 후보가 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3. 선거 과정
엡튼을 시장으로...너무 늦기 전에 |
백인 지지율의 저하로 쉬워 보이던 선거가 접전이 되어버리자 워싱턴 선거운동측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워싱턴은 백인 민주당원 표심을 되찾기 위해 전 부통령 월터 먼데일과 폴란드계, 이탈리아계, 아일랜드계 중산층들이 많이 거주하는 시카고 북서부에 위치한 성 파스칼 성당(St. Pascal's Church)에서 합동 유세를 했으나 호응받지 못하고 주민들에게 둘러쌓여 인종차별적인 비난과 조롱, 야유를 들었을 뿐이었다.[6] 엡튼 선거운동측은 악명높은 엡튼을 시장으로...너무 늦기 전에(Epton For Mayor...Before It’s Too Late) 라는 슬로건으로 이것를 인종차별적 공격이라고 생각한 워싱턴을 격노하게 만들었다.[7] 그 결과로 지지자들 간의 갈등도 악화되었고[8] 워싱턴은 엡튼의 정신 건강 의혹을 물어뜯었고 또한 그를 시카고시에서 인기 없는 레이건의 부하로 프레이밍했다.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워싱턴은 시내 거의 유일한 중도층인 리버럴 성향 오대호 연안 백인을 포섭하기 위해 "머신" 소속 시의원들을 비난하면서 유세에 총력했다.
4. 결과
<rowcolor=#000> 1983년 시카고시장 선거 | |||
후보 | 득표수 | 순위 | |
정당 | 득표율 | 비고 | |
해럴드 워싱턴 (Harold Washington) | 668,176 | 1위 | |
| 51.72% | 당선 | |
버나드 엡튼 (Bernard Epton) | 619,926 | 2위 | |
| 47.99% | 낙선 | |
에드 워런 (Ed Warren) | 3,756 | 3위 |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0.29% | 낙선 | |
계 | 총 투표수 | 1,291,858 | 유지 |
접전이었던 선거 결과와 달리 선거구별 결과에서는 몰표 현상이 두드러졌다. 흑인 다수 거주 지역이던 6구에서는 워싱턴이 무려 99.2%를 득표했고 반대로 백인 다수 거주지역이던 13구에서는 엡튼이 95.7%나 득표했다. 총 득표수와 달리 승리한 지구 수는 엡튼이 28개로 워싱턴의 22개를 앞섰다. 사회주의 성향의 제3후보인 에드 워런은 0.3%의 부진한 득표율을 얻었다.
워싱턴의 승리와는 달리 시장 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시의회 선거에서는 반 워싱턴 시의원이 29명,[9] 친 워싱턴 시의원이 21명[10]이 당선되어 사실상의 여소야대를 이루었다. 브르돌랴크 29라고 불리던 "야당" 시의원들은 1986년까지 워싱턴의 시정을 사사건건 발목잡는 "의회 전쟁"을 벌여 시카고의 별명을 "호수 옆 베이루트"로 만들었다.[11] 브르돌랴크 29이 구성원들의 낙선 및 전향으로 해체된 뒤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에드 브르돌랴크는 1987년 시카고시장 선거에 지역정당인 일리노이 연대당[12] 소속으로 출마했지만 현직 시장인 워싱턴에게 밀려 낙선했고 이후 공화당에 입당했다.
5. 평가
It's Washington |
비록 워싱턴은 재선 임기 중 심근경색으로 급사했고 시카고 시장직은 보궐선거에서 리처드 M. 데일리가 차지했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시카고시 지역정당인 해럴드 워싱턴 당을 만들어 활동했다.이후 시카고가 속한 일리노이에서도 1992년 주에서 처음으로 흑인 상원의원이 선출되었다.
버락 오바마가 정치계에 진출한 계기도 바로 이 선거였다.[14] 워싱턴 지지자로 정계에 입문한 오바마는 캐롤 모즐리 브라운의 당선을 도왔고, 1996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2004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임기 중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유력한 당내 경쟁자 힐러리 클린턴을 꺾고, 본선에서도 존 매케인에게 승리해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다.#
6. 여담
- 2023년 시카고시장 선거가 이 선거와 유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흑인 진보파(해럴드 워싱턴/브랜든 존슨) 후보가 여성 현직 시장(제인 번/로리 라이트풋)과 백인 온건파(버나드 엡튼/폴 발라스[15]) 후보를 꺾고 승리한 것과 인종별 투표가 뚜렷하게 갈린 것도 동일하다. 우세한 지역도 워싱턴-존슨, 엡튼-발라스가 각각 비슷하게 나왔다. 다만 1999년 시카고시장 선거부터 선거법이 개정되어 무당파적 선거와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였기에 이 선거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16]
- 만약 엡튼이 당선되었다면 52년만의 공화당 소속이자[17] 최초의 유대인 시카고 시장이 되었을 것이다.
[1] 소수인종의 대표성이 줄게 선거구를 게리멘더링, 흑인 인사 축출[2] 시카고가 위치한 일리노이주의 카운티[3] 투표지에 없는 인물의 이름을 적어서 제출하는 방식의 투표로 미국 일부 주에서는 효력이 인정된다. 스트롬 서먼드와 리사 머코스키가 이 방식으로 상원의원에 당선된 적이 있다.[4] 전국적으로 공화당이 압승한 197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쿡 카운티에서는 닉슨 53.4% vs 맥거번 46.0%로 격차가 크지 않았다. 이마저도 쿡 카운티 내 교외 지역 때문이었지 시카고시만 따지면 맥거번이 승리했다.[5] 1년 뒤 민주당이 대패한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시카고에서는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이 65%를 득표했다.[6] 먼데일 또한 검둥이 애호가(Nigger Lover)라는 욕설을 들었다. 이 에피소드 또한 워싱턴 측의 선거 광고로 이용되었다.[7] 물론 엡튼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시가 파산 위기에 처해 있어서 그러한 슬로건을 사용했다고 말했다.#[8] 엡튼 지지자들은 하얀 단추와 깨진 수박이 그려진 뱃지를 상징으로 삼았다.[9] 백인 28명, 히스패닉 1명[10] 흑인 16명,백인 5명[11] 당시 레바논은 내전이 한창이었다.[12] 애들레이 E. 스티븐슨 3세가 1986년 주지사 선거에서 이 정당 소속으로 출마했었다.[13] 제인 번도 반 머신 정치를 외치며 당선되었고 자신이 시내 머신 정치를 이겨냈다고 발언하기도 했으나 그녀는 근본적으로 리처드 J. 데일리 시장의 계파 소속이었다.# 하지만 워싱턴은 머신에 의존할 상황도 아니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14] 실제로 해럴드 워싱턴 상을 의회 블랙 코커스로부터 수상받기도 했다.[15] Paul Vallas, 미국의 교육인이자 정치인으로 2014년 미국 중간선거에서 민주당 일리노이 부지사 후보로 출마하였다가 낙선했다.[16] 폴 발라스도 공화당원이 아닌 중도 성향 민주당원이었다.[17] 1931년 안톤 서맥 당선 이래 지금까지 시카고 시장직은 민주당이 독식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