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황두연 黃斗淵 | |||
<colbgcolor=#f0ed30><colcolor=#000> 창씨명 | 키하라 토엔(黃原斗淵)[1] | ||
이명 | 황평연(黃平淵), 황창익(黃敞益), 황경익(黃璥益) | ||
출생 | 1905년 2월 15일 | ||
전라남도 돌산군 남면 우실리 (現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우학리 우실마을) | |||
사망 | 1984년 5월 24일 (향년 79세) | ||
서울특별시 성동구 자양동 553-34번지 정안맨션 자택 (現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 | |||
본관 | 창원 황씨(昌原 黃氏)[2]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0ed30><colcolor=#000> 학력 | 전주신흥고등보통학교[3] (졸업) 니혼대학 전문부 (법률과 / 중퇴) 일본성경학교 (졸업) | |
가족 | 아들 황현수, 형 황보익[4],이름 미상의 남자형제 1명, 조카 황성수[5][6], 매제 오석주[7]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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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며 황성수 국회의원이 그의 조카이고 오석주 의원은 그의 매제이다. 종교는 개신교. 1950년 이전에 황평연(黃平淵)으로 개명했다.2. 생애
1905년 전라남도 돌산군 남면 (現 여수시 남면) 우학리 우실마을에서 5남 2녀 중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8]. 1910년경 고흥군 금산면 오천리로 이주하였다. 전주신흥고등보통학교(現 전주신흥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법률과를 3학년 때 중퇴하였다. 이후 일본성경학교(日本聖經學校)를 졸업하였다.귀국 후 1927년부터 1931년까지 고흥 영천학교(永泉學校) 교원 겸 교장을 지냈고, 1930년대에 들어서 순천군 순천읍 행정(現 순천시 행동) 180번지로 이주한 뒤 순천 안력산병원(현 안력산의료문화센터)의 서무과장을 지냈다. 1940년 5월부터는 순천중앙교회 장로가 되었는데, 이때 순천노회 소속 여러 목사 및 신도들을 규합하여 원탁회(圓卓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결의하였다. 이 때문에 같은 해 9월 순천경찰서에 검거되어 수감되었고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바 육·해군형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6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
1943년 8월에는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불경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1944년 8월에서야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친척집을 전전하며 전도활동을 수행하다가 1945년 2월부터 사상범에 대한 예비검속을 시행한다는 소식에 이를 피해 월등면 어느 마을에 은거하기 시작하였고, 6개월 뒤에 광복을 맞았다.
8.15 광복 후 순천읍 부읍장, 순천기독교청년연합회 회장, 순천노동조합장, 미군OCI(정보조정국) 민주주의 지도강사와 우익 정치인으로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순천군연맹 위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농민노동부장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후보로 전라남도 순천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임기 중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났는데, 황병규·김옥주 의원 등과 10월 27일 국회 임시회에 출석치 않아 행방불명 등 신변에 불행이 있다는 추측 보도가 난무하였다. 그러다 10월 30일 평화일보에 순천에서 있었던 반란군 주도 하 인민재판의 배석판사가 황두연 의원이며 국회 휴회 중 고향에 내려가기 전에 반란군들과 사전에 모종의 연락이 있었다면서 평소 미국·소련의 양군(兩軍) 철퇴를 주장한 국회의원의 실체를 폭로한다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전에 10월 13일 국회 본회의에 박종남 의원 등이 발의한 「외군철퇴 요청에 관한 긴급동의안」이 상정되었을 때, 외군철퇴 요청을 거부했으며[9], 국회 휴회를 이용하여 조봉암 당시 농림부 장관의 부탁으로 정부의 미곡매입을 돕기 위해 강연차 10월 19일에 서울을 떠나 그날 밤 11시 순천에 도착했다. 불행히도 여수 14연대에서 봉기가 일어난 때에 순천에 당도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순천으로 반군이 들어오자 외국인 선교사 집에 피신했다가 23일에서야 정부군에 의해 순천이 탈환되자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10]. 이러한 사실들은 황두연이 11월 1일 국회에서 울먹이며 해명한 내용과 일치한다당시 국회속기록.
게다가 11월 2일 공보처장 김동성(金東成)이 사실 관계를 파악한 것에 따르면, 평화일보 내에서도 보도 직전 10월 28일 국회 출입기자 박상학(朴相鶴)이 당시 여수·순천 특파원이었던 이지웅(李志雄) 기자의 기사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정보를 가져왔고 황두연의 자제 황현수(黃賢秀) 또한 평화일보에 직접 찾아와 사실이 아님을 해명했으며, 비슷한 시기 합동통신에서 김웅진 의원이 국회에서 "황 의원이 순천 외국인 선교사 집에 피신해 있다."고 한 발언을 인용하여 보도를 내보냈는데도 양우정 당시 평화일보 사장은 무슨 연유에선지 기사 내용에 대해 절대 확신을 드러내며 기사를 내보내라고 편집국에 지시하였다고 한다.당시 국회속기록
결국 이 일련의 사태는 반대파들의 흑색선전인 것으로 결론이 났으며#, 황두연은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황평연(黃平淵)의 이름으로 국민회 후보로 전라남도 순천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국민당 김양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한편, 1949년 숙명여자대학교 이사, 농림부 자문위원을 지냈고 1950년 구국총연맹 감찰부장이 되었다. 1951년 감찰위원회 감찰위원이 되었으며 1955년 감찰위원회가 폐지되고 사정위원회로 개편되자 1급 사정위원이 되었다. 1954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상임이사를 겸임하였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본업인 목사 생활로 복귀하였다.
1984년 5월 24일 오후 1시 서울특별시 성동구 자양동(現 광진구 자양동) 553-34번지 정안맨션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3.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남 순천군 갑[11]) |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 ]] | 14,677표 (52.88%) | 당선 (1위) | 초선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전남 순천시[12])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국민회 ]] | 5,568표 (26.39%) | 낙선 (2위) |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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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이남규 사퇴 (1948.10.18.) * 광양 김옥주 자격상실 * 진도 김병회 자격상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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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2년 9월 30일 판결문[2] 공희공파 18세손 연(淵) 항렬. 아들 황현수(黃賢秀)는 19세손 수(秀) 항렬.[3] 現 전주신흥고등학교[4] 여순사건 당시 동생 황두연의 대한 근거없는 소문들을 부정하며 변호하였다.[5] 형 황보익의 아들.[6] 사이가 매우 두터웠다.[7] 같은 제헌 국회의원 이였다.[8] 임송자 (2018), 「제헌의원 황두연의 생애와 순천지역 활동」, 『南道文化硏究』 Vol.35, p.42[9] 이는 황두연 의원 뿐만 아니라 99명의 의원들 또한 반대하는 성명서를 냈다.[10] 임송자 (2018), 「제헌의원 황두연의 생애와 순천지역 활동」, 『南道文化硏究』 Vol.35, p.63[11] 제10선거구[12] 제4선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