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7:52:48

호베르투 지나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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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베르투 지나미치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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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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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1984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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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 · 1981 ·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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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10대 리우데자네이루주 하원의원
호베르투 지나미치
Roberto Dinamite
파일:지나미치 브라질.jpg
<colbgcolor=#30914D> 본명 카를루스 호베르투 지올리베이라[1]
Carlos Roberto de Oliveira
출생 1954년 4월 13일
브라질 합중국 리우데자네이루주 두키지카시아스
사망 2023년 1월 8일 (향년 68세)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주 리우데자네이루 바하다치주카
국적
[[브라질|]][[틀:국기|]][[틀:국기|]]
재임기간 제6-10대 리우데자네이루주 하원의원
1995년 2월 1일 ~ 2015년 1월 31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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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0914D><colcolor=#000000,#e5e5e5> 신체 186cm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정치인
축구경영인
주발 오른발
소속 <colbgcolor=#30914D> 선수 상 벤투 EC (1968 / 유스)
CR 바스쿠 다 가마 (1969~1971 / 유스)
CR 바스쿠 다 가마 (1971~1980)
FC 바르셀로나 (1980)
CR 바스쿠 다 가마 (1980~1992)
포르투게자 (1989 / 임대)
→ 캄푸 그랑지 AC (1991 / 임대)
경영 CR 바스쿠 다 가마 (2008~2013)
국가대표 파일: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38경기 20골 (브라질 / 1975~1984)
통산 득점 740골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투병
4.1. 사망
5. 소속 정당6. 여담

[clearfix]

1. 개요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출신 정치인. CR 바스쿠 다 가마에서 통산 1110경기 708골을 기록하며 바스쿠 역사상 최다 출전, 득점자며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에서는 통산 190골을 기록하며 역대 1위다.[2][3] 또한 호제리우 세니, 펠레와 더불어 브라질에서 한 팀에서 1000경기 이상을 뛴 3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펠레가 죽은지 얼마 안된 2023년 1월 8일 오전 10시 50분에 같은 사유인 대장암으로 죽으며 브라질 축구계에 안타까움을 전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54년 4월 13일 오전 4시 25분에 태어났고 어렸을때는 칼루(Calu)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고 한다.

1968년에 EC 상 벤투에서 유스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서 팀내 최다 득점자라는 걸출한 활약을 했고 이미 근거리 및 장거리 슛에서 모든 기술과 정확성을 보여주며 1969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어떤 스카우터가 이를 보며 CR 바스쿠 다 가마 유스 팀에 입단했다.

바스쿠 유스 팀에서 1년여 만에 이미 46골 이상을 득점하고 심지어 지독한 근육 단련 덕분에 15kg을 찌우는 성과를 보여줬다. 이 덕에 팀의 코치와 감독으로부터 끊임없는 칭찬을 받으며 팀에서 가장 유망한 선수 중 한 명이 되었다.

1970년 카리오카 유스 챔피언십에서 10골을 기록하며 바스쿠 내에서 최다 득점자였다. 1971년에는 13 골을 기록하며 대회에서 최고 득점자에 오르기도 했다.

2.1.1. CR 바스쿠 다 가마 1기

유스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당시 바스쿠의 감독인 마리우 트라발리니는 지나미치를 성인 팀으로 콜업시킬려 했다. 그리고 1971년 11월 14일에 17세의 나이로 EC 바이아와의 경기에서 프로 데뷔 전을 치렀다. 당시 코치였던 아지미우두 시로우(Admildo Chirol)는 하프 타임에 미드필더인 파스토리우(Pastoril)와 교체시켰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 어렸기에 팀의 경기력를 바꿀 만한 재능은 없었으며, 팀은 1:0으로 패배했다.

이 패배에도 팀은 A조에서 승점 19점으로 6위를 기록해 극적으로 2라운드에 진출했다. 이에 따라 2라운드에서 해당 대회에서 우승할 클루비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SC 인테르나시오나우, 펠레산투스 FC와의 경기에서 출전했다.

클루비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와의 경기 훈련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경기의 선발로 선발되었다. 경기 전날에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유명한 스포츠 잡지사인 조르나우 두스 스포르치스(Jornal dos Sports)는 "바스쿠가 어린 소년 지나미치(다이너마이트)를 선발 출전시키다."라는 제목으로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한편 지나미치(다이너마이트)라는 별명은 인테르나시오나우와의 경기 이후 등장하지 않았다. 이 별명은 조르나우 두스 스포르치스의 두 기자인 엘리우마리우 발렝치(Eliomário Valente)와 아파리시우 피리스(Aparício Pires)에 의해 만들어졌다. 둘 다 CR 바스쿠 다 가마 출신이며 호베르투가 이미 유망했을 때 만들어진 별명이었다.

11월 21일 클루비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와의 경기에서 호베르투는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결국 교체됐다. 어린 지나미치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바스쿠 팬들의 아쉬움은 컸다.

다음 경기는 11월 25일 목요일 마라카낭에서 열린 SC 인테르나시오나우와의 경기였다. 후반에 바스쿠가 1:0으로 이기고 있을 때 아지미우두 시로우는 지우송 누니스(Gílson Nunes)를 빼고하고 호베르투를 교체했다. 교체 투입 후 처음으로 공을 받은 호베르투는 왼쪽 구석에서 4명의 선수를 상대로 드리블했고, 프로팀에서 그의 첫 번째 아름다운 골을 넣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경기 다음 날 조르나우 두스 스포르치느가 "지나미치(다이너마이트) 같은 소년의 폭발!(GAROTO DINAMITE-EXPLODIU!)"이라는 헤드라인을 게시했다.

한편 이러한 활약에도 팀은 6경기 동안 1승 2무 3패를 기록하며 승점 4점으로 꼴지로 탈락했다. 그래도 인테르나시오나우를 상대로 이기며 인테르나시오나우가 아틀레치쿠 미네이루에게 득실로 밀려 2위를 기록하게 하며 의미는 챙겼다.

이 시즌에 지나미치(Dinamite)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것이 유명세를 타며 칼루(Calu)라는 이름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나미치의 바스쿠 신화가 시작되었다. 1974년에 득점왕을 차지하며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1971년부터 1980년까지 바스쿠에서 뛰다가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했을 때 많은 돈이 드는 협상을 했다. 하지만 지나미치는 3개월 후 바스쿠로 돌아와 1989년까지 머물렀다가 포르투게자로 임대 이적했다. 6개월 후에 지나미치는 39세의 나이로 1993년에 화려한 경력을 마감하기 위해 다시 바스쿠에 합류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호마리우를 뛰어 넘는 바스쿠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로 기억되고 있다.

지나미치는 1977년, 1982년, 1987년, 1988년, 1992년의 5번의 주 챔피언십 우승에 기여했다. 1974년에 그는 결승에서 크루제이루를 2:1로 꺾고 브라질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했다. 결승에서 득점하지 못했지만, 지나미치는 16골로 대회 최다 득점자였으며 전례 없는 우승에 가장 큰 책임이 있었다.

2.1.2. FC 바르셀로나

1980년에 FC 바르셀로나의 감독 라슬로 쿠발라와 싸우며 팀을 떠난 한스 크란클의 대체자로 영입되었다.

UD 알메리아와의 경기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며 좋은 데뷔 전을 치른 지나미치였지만 감독이 엘레니오 에레라로 바뀌고 나서부터 기회를 못받았다. 결국 3개월 동안 11경기 3골을 기록하며 부진한 성적을 펼치자 다시 브라질로 돌아가게 되었다.

2.1.3. 브라질로의 복귀 과정

지나미치는 FC 바르셀로나에서 실패하며 다시 브라질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때 바스쿠의 최대 라이벌인 CR 플라멩구의 회장인 마르시우 브라가(Marcio Braga)가 지나미치를 영입하려 했다. 한편 처음에 연락을 받았던 바스쿠는 관심이 없었고, 팬들의 압박에 지나미치의 브라질 복귀를 놓고 분쟁에 돌입했다. 당시 바스쿠의 회장인 유리쿠 미란다(Eurico Miranda)는 라이벌 플라멩구와 계약하지 말라고 경고했고, 그와 대화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갈 것이라고 경고한 지나미치는 그를 떠난 지 불과 3개월 만에 바스쿠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이에 감명받은 바스쿠 팬들은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바스쿠의 홈 구장인 이스타지우 상 자누아리우를 붐볐다.

2.1.4. CR 바스쿠 다 가마 2기

지나미치의 복귀는 나우치쿠와의 경기라고 생각했지만 바스쿠 복귀전으로 굳힌 진짜 경기는 1980년 5월 5일에 소크라치스SC 코린치안스와의 경기에서 벌어졌다. 이 경기 전에 큰 갈등을 일으켰던 CR 플라멩구 경기가 있었다. 11만여 명의 사람들이 5골을 넣고 바스쿠의 5:2 승리를 선언한 지나미치의 복귀를 목격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온 기자까지 동반한 구단 최고의 선수의 화려한 복귀전이었다. 기자는 "이것이 진짜 다이너마이트다.(Esto, Si, Es lo Verdadero Dinamita.)"라고 작성했다.

그리고 1981년에 61골을 기록하며 라이벌 CR 플라멩구의 최대 레전드로 불리는 지쿠의 60골 기록을 넘어섰다. 힌편 2000년에 호마리우70골을 기록하기 전 까지는 바스쿠의 단일 시즌 최다 득점자였다.

1984년에는 대회에서 16골을 기록하며 커리어에서 2번째로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팀은 아쉽게 2위를 기록했다.

지나미치의 마지막 골은 1992년 10월 26일에 캄페오나투 카리오카에서 바스쿠가 상 자누아리우에서 고이타카지스를 2:0으로 이겼을 때다.

은퇴식은 마라카낭에서 열린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와의 친선 경기에서 치러졌다. 이 경기에서 라이벌 플라멩구의 지쿠는 친한 친구의 은퇴식을 바스쿠의 유니폼을 입었으며, 경쟁과 적의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보여줬다.
2.1.4.1. 아소시아상 포르투게자 지 데스포르투스 (임대)
커리어가 선수 경력이 끝나갈 무렵인 1989년에 아소시아상 포르투게자 지 데스포르투스의 임대 요청을 받았다.

포르투게자의 감독 안토니우 로페스의 훈련을 받으며 팀에 빠르게 적응했고, 1989 세리 A에서 2위인 친정 바스쿠에 이어서 포르투게자를 3위로 이끌었다. 2라운드에서는 아쉽게 4위를 기록했다.

포르투게자에서 11골을 기록했는데, 득점 내역은 친선 경기에서 2골, 그 해 브라질 챔피언십에서 9골이였다. 한편 전국 대회에서 190골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달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며 팀 내 최다 득점자가 되었다. 대회 득점왕은 11골의 툴리우 마라빌랴로 아쉽게 득점왕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포르투게자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이며 완전 영입을 시도했으나 바스쿠가 시즌 후에 다시 복귀시키며 완전 이적은 무산되었다.
2.1.4.2. 캄푸 그랑지 AC (임대)
1971년에는 캄푸 그랑지에서 임대로 뛰어달라는 요청을 받고 팀에 합류했다. 이 때 지나미치는 엘로이(Elói)와 클라우지우 아당(Cláudio Adão)도 팀에 합류했다.

그리고 팀이 5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었고 같은 챔피언십의 2라운드에서도 선두를 차지했다. 시즌 후에 다시 바스쿠로 복귀했으며, 엘로이와 아당 역시 시즌 후 원 소속팀으로 돌아갔다.

2.2. 국가대표 경력

파일:지나미치 브라질.jpg
클럽 커리어에서는 바스쿠 팬들에게 역대 최고로 기억되었을지 언정 국가대표에서는 2번의 월드컵 참가, 38경기 20골을 기록하며 아쉬운 커리어를 보냈다. 그래도 확실한 득점력을 보여줬지만 클럽 커리어를 생각하면 생각보다 적은 출전 수로 인해 상당히 저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 시기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암흑기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 나서는 브라질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면서 어린 시절 첫 국제대회를 나서게 된다. 월드컵처럼 힘을 준 대표팀은 아니지만 유망주로 구성된 대표팀에 뽑혔다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후 1975년에 A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1976년 잉글랜드와의 A매치 친선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국가대표 데뷔골을 넣었다. 하지만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며 텔레 산타나 체제에서는 후보 공격수로 밀리면서 차차 교체 출전 혹은 벤치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나마도 카레카가 부상으로 아웃되면서 겨우 대회 엔트리에 들 수 있었다.

1983년에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했으며 이것이 커리어 마지막 국제 대회 참가였다. 불과 30대에 불과한 지나미치였으나 1984년 마지막 경기를 뛰고 나서 텔레 산타나 감독의 눈에서 아예 밖으로 나게 된다.

2.2.1.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에 참여하며 커리어 첫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1, 2차전에서는 무득점을 했으나 3차전 오스트리아전에서 전반 40분에 득점하며 1:0 승리를 이끌었다. 이 덕에 단 2득점만으로도 2라운드(8강)에 진출했다. 이 골을 득점 한 후에 "저는 20일 넘게 모든 언론과 팬들에게 잊혀졌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를 상대로 한 골로 다시 한 번 브라질 국민의 우상으로 환호받았습니다.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2라운드에서도 선발로 출전했으며 3차전 폴란드전에서 후반 13분, 18분에 멀티 골을 만들며 3:1 역전승을 이끌었다. 특히 득점 장면에서 상대가 걷어낼려는 걸 잡고 슈팅한 것이 골대를 맞았지만 쇄도한 지나미치가 골을 만들어 낸 것은 지금까지도 위대한 골 중 하나로 여겨진다. # 하지만 이어진 아르헨티나와 페루의 경기에서 아르헨티나가 6:0으로 이기며 극적으로 결승에 진출하는 역대 최악의 승부조작으로 의심되는 경기가 나오며 아르헨티나에게 득실에서 밀려 탈락하게 되었다. 이에 지나미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경력에서 가장 슬펐던 일은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우리가 실격당한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무패였지만 아르헨티나가 페루를 6:0으로 이기면서 탈락했습니다.

2.2.2.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1982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당초에 명단에 없었으나 카레카의 부상으로 인해 대체 선수로 소집되었다. 하지만 텔레 산타나는 지나미치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으며 이번에는 월드컵에서 출전하지 못했다.

3. 플레이 스타일

공격시 동료들에게 자신을 거치도록 요구할 만큼 개인주의적인 플레이를 했다. 그러나 공을 받으면 거의 돌려주지 않았다.

키가 크고 힘이 센 지나미치는 몸을 아주 영리하게 사용했고 상대에게 공을 거의 잃지 않아 상대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그는 22년 동안 1110경기를 뛰면서 708골을 기록했는데, 이는 시즌당 평균 36골을 기록했을 만큼 득점기계의 면모를 보여줬다.

지나미치의 주요 특징은 상술했던 기회주의, 능력 및 행운이었다. 지나미치는 다른 사람들처럼 프리킥을 차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오랜 경력을 통해 상대의 두 다리 사이로 공을 빼내는 일명 알까기 능력을 개발하기도 했다.

4. 투병

2022년 1월에 장폐색으로 수술을 받았으며, 암 진단을 받으며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2022년 8월 20일에는 2주 동안 입원한 병원을 떠났다. 암 투병 중 장 수술을 받고 퇴원했다.

4.1. 사망

2023년 1월 8일 오전 10시 50분에 바하다치주카(Barra da Tijuca)의 우니메지 병원에서 펠레와 마찬가지로 대장암으로 인해 사망했다. 시신은 매장을 위해 두지키카시아스에 있는 베들레헴의 성모님(Nossa Senhora de Belém)이라고 불리는 묘지로 옮겨졌다.

바스쿠 구단은 추모의 의미로 1주일 간 유니폼에 애도의 의미인 검은 줄무늬 사용과 SNS 프로필을 지나미치의 사진으로 바꿨다.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92 - 2002 정계 입문


2002 - 2015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5 - 2023 정계 은퇴

6. 여담

  • 아들 호드리구 지나미치 역시 축구선수다. 다만 아버지에 비해서 좋은 커리어를 보내지는 않다.
  • 마찬가지로 바스쿠의 프렌차이즈 스타로 평가받는 호마리우와는 구단주 재임 시절에 호마리우의 아들이 바스쿠 유스 입단 관련 사건으로 한 번 틀어지며 사이가 안좋았었다. 하지만 이후에 화해한 듯하고, 지나미치가 사망하자 호마리우는 "바스쿠의 가장 위대한 선수 호베르투 지나미치에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추모글을 남겼다.

[1] 로망스어게르만어권의 인명이나 지명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통산 득점자 상위 20명 중 158골의 프레드가 통산 2위고, 현역 중에서는 130골의 지에구 소자가 3위다. 그나마 가브리에우 바르보자가 104골을 기록하고 있는지라 매시즌마다 못해도 10골 이상 씩만 기록하면 몇년 내로 이 기록을 넘을 듯 하다. 한편 대부분은 펠레가 1위일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의외로 101골 만을 기록하며 17위에 이름을 올렸다.[3] 골 순도율은 0.69(127골)의 세르지뉴 출라파가 1위고 지나미치는 0.54(190골)로 4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