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4 19:16:17

한영숙(무용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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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예술세계4. 여담

1. 개요

벽사(碧史) 한영숙(韓英淑, 1920년 2월 2일~1989년 10월 7일)

한국의 전통무용가,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제40호 학무(1995년, '학연화대합설무'로 개칭)[1]의 前 예능보유자.

할아버지 한성준(韓成俊, 1874년~1941년)[2][3]이 정립한 근대 한국 전통 무용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이어지게 했던 20세기 한국 전통무용계의 거목(巨木).

2. 생애

1920년 충청남도 천안군에서 출생하였으며, 13세 때부터 할아버지였던 한성준의 문하에서 춤을 배웠다. 한성준은 19세기 말~20세기 초반기에 활동했던 당대의 명고수로도 유명해 명인명창의 장단을 도맡아 쳤으며, 동시에 경기·충청도 지역에 전승되어왔던 재인 계통 춤을 집대성 해 근대적 무대 예술로 탈바꿈 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4] 한영숙은 한성준의 문하에서 살풀이춤, 승무, 태평무, 학춤, 검무, 선비춤, 바라춤 등을 배웠다.

18세가 되던 1937년[5] 10월 서울 부민관(府民館)[6]에서 있었던 한성준의 첫 무용발표회를 통해 처음 무대에 데뷔하였다. 이후 일본, 만주, 황해도, 평안도 등지로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김소희, 박귀희, 박초월 등이 돈암동에 개설한 한국민속예술학원을 개설하고 무용교사로 일했고, 이후 1960년 이곳이 한국국악예술학교(現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로 개편된 뒤에도 계속 무용교사로 재직하였다. 이때 길러낸 제자들 가운데 사물놀이의 김덕수와 최종실이 있다.[7] 그 외에 한영숙무용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서울예술대학, 세종대학교에 출강하며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국립무용단, 서울시립무용단에서도 단원들을 대상으로 무용을 가르쳤다.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現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8]되었고, 이때 문하의 이애주(1947년~2021년 5월 10일)와 정재만(1948년~2014년)을 각각 여자, 남자 후계자로 지정하였다.[9] 1971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 학무의 예능 보유자로 지정됨에 따라 두 종목의 예능보유자로서 활동하였다.

말년에는 15년 가까이 간경화증을 앓았으며, 또 만성심근경색으로 투병 생활을 길게 이어왔다. 그러한 와중이었던 1988년 1988 서울 올림픽 폐막식 무대[10]에서 살풀이춤을 보여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듬해인 1989년 10월에 만성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3. 예술세계

한마디로 담백하고 깊이있는 춤 세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한영숙은 승무와 학무로 예능보유자가 되었지만, 그 외에도 살풀이춤, 태평무에도 능했다. 특히 경기, 충청 지역에서 전승되어 왔다는 재인계통 살풀이춤[11]의 대가로 손꼽혔다. 1988 서울 올림픽 폐막식 무대에서 선보였던 살풀이춤의 경우 당시 무용 업계에서도 손꼽히는 호연으로 꼽혔으며, 사진기자 정범태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그 무대를 사진에 담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면서 다른 공연장에서 한영숙에게 그 아쉬움을 토로하자 한영숙이 본래 태평무를 추기로 되어 있었던 것을 바꾸어 살풀이를 추어서 그것을 대신 사진에 담았다고 한다.[12] 한영숙의 살풀이춤은 빠른 장단에서 나타나는 리드미컬한 빠른 발디딤과 화려하지는 않지만 선이 분명하면서도 단아한 팔사위가 특징이며 지은듯 만듯한 미소에 도도한 표정 연기를 통해 상대적으로 기품있어 보이는 춤태로 유명하다. 또 수건을 뿌릴 때에는 뿌리는 동작 이외의 인위적인 기교를 최대한 절제하여 상대적으로 화려하진 않지만 절제미가 돋보인다.[13]

한영숙의 승무는 이매방의 승무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시선의 눈높이가 높으며, 북과장이 자진모리~당악 넘김채 정도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짧다. 대신 뒤이어 경기 대풍류의 당악 연주에 맞춘 춤이 다시 이어지는데, 이매방류 승무에 비해서 춤의 비중이 높다고 할 수 있다.[14] 또 비교적 차분했던 전반부의 호흡이 북과장-당악과장에서는 매우 활달하게 이어짐을 알 수 있다.[15]

4. 여담

  • 무용가로서 후학 양성을 제법 많이하기도 했지만, 무용가가 아니면서도 그에게 춤을 배운 사람들이 몇 있다. 앞서 기술한 김덕수가 대표적이고, 또 한영숙과 절친했던 박초월의 수양아들인 조통달[16] 역시 국악예고 시절, 한영숙에게서 춤을 배웠는데, 한영숙이 매우 아꼈다고 한다.
  • 일가가 모두 예술계에 관련을 두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할아버지인 한성준은 물론 아버지 한희종 역시 피리, 해금 연주자로 활동했고,[17] 남편 황병렬은 아코디언 연주가로 활동했으며,[18] 사돈이 임방울이다.[19] 또 가수 김완선이 5촌 조카가 되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매니저이자 이모였던 한백희 역시 한영숙의 사촌 동생이 된다.


[1] 일반적으로 '학춤'이라고 알려진 그것이다. 학무(鶴舞)는 1971년 처음 중요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될 당시의 정식 지정명칭.[2] 생몰년은 네이버에서 제공하고 있는 한겨레음악대사전의 내용을 기준으로 함.[3] 큰할아버지라는 말이 있고 할아버지라는 말이 있다. 우선 여기서는 지난 2017년 월간조선 2월호에 실린 藝家를 찾아서-한국 근대 춤의 아버지 한성준의 후손들의 내용을 기준으로 하였다.[4] 이러한 그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춤이 태평무. 엇박이 많은 경기 지역 도당굿의 장단을 바탕으로 구성된 이 춤은 장단을 모르면 출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장단 구조가 복잡하며, 이 복잡한 장단구조를 타고 빠른 발디딤으로 풀어낸다. 왕십리 일대의 당굿 장단을 대폭 수용해 이러한 복합성을 가장 극대화시키면서 보다 더 화려한 춤으로 발전시킨 것이 한영숙과 동문인 강선영(姜善泳, 1925년~2016년 1월 21일)으로 강선영이 재구성한 태평무가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어 있다.[5] 1935년 7월이나 10월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사전들도 있는데 1935년 12월에 준공된 극장에서 그해 7월, 10월에 공연한다는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아마 1937년의 오기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6] 지금의 중구 태평로 1가 60-1에 위치. 1935년 12월 10일 준공된 경성부 부립극장으로 1945년에 있었던 부민관투탄의거의 현장이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규모이며 대강당 1,800석, 중강당 400석, 소강당 160석, 그 외에 특별실, 이발실, 식당 등 여러 부속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해방 이후에는 그 사용도가 여러번 바뀌기도 했는데, 대충 정리해도 다음과 같다. 해방 직후 미군정이 임시로 사용하다가 1949년 서울시 소유로 이관되었으며, 1950년 4월 국립극단의 창단과 함께 국립극장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6.25 전쟁으로 인해 국립극단이 대구로 이전한 뒤에는 비어있다가 수복 이후인 1954년 6월부터 3대 국회의 정식 국회의사당으로 쓰였다가[20] 국회가 여의도로 이전한 이후에는 다시 시민회관으로 쓰였으며, 1976년 세종문화회관이 준공되면서 그 별관이 되었다. 1991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서울특별시의회 건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11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7] 단, 김덕수의 경우, 무용 전공은 아니었다. 김덕수는 당시 피리 전공에 판소리 부전공으로 들어갔다고 자신이 수 차례 증언하고 있다. 그보다 1년 후배인 최종실의 경우에는 당시 상세한 전공을 알 수 없다.[8] 1987년 이매방이 또 다른 예능보유자로 지정됨에 따라 승무는 한성준-한영숙류와 이대조-이매방류의 2개 유파가 동시에 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되었다.[9] 두 사람은 한영숙 사후 한성준류 춤 전승의 중심 축이 되었으며 이애주는 1996년에 정재만은 2000년에 각각 승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정재만이 2014년 사고로 사망함에 따라 지정해제 된 이후, 지금까지는 이애주가 홀로 한성준-한영숙류 승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이애주가 2021년 5월에 사망한 이후, 현재는 2019년에 지정된 채상묵(이매방 계열)이 보유자로 남아있다. 다만, 그 과정이 시끄러운데, 자세한 건 관련 기사 참조.[10] 참고로 당시 올림픽에는 그 때까지 '무용가' 내지는 '안무가'라는 명함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총출동하다시피 하여 개막식, 폐막식 무대는 물론, 올림픽 전후에 있었던 거의 대부분 행사에서도 앞다투어 안무작을 발표하곤 했다.[11] 한영숙의 제자인 정재만은 김덕원-김숙자 계열의 도살풀이춤을 경기 무속 계통의 살풀이춤으로, 이대조-이매방 계열의 살풀이춤을 호남 교방계통의 살풀이춤으로, 한성준-한영숙 계열의 살풀이춤을 경기 재인 계통의 살풀이춤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12] 이 때 찍은 사진으로 발간된 사진집이 1992년, 열화당에서 발간된 『한영숙 : 살풀이』라는 사진집이다.[13] 흔히 한영숙의 마지막 제자로 일컬어지는 한국 무용가 이은주는 '인위적인 움직임을 최소화 함으로써 춤을 추는 무용수마다 허공에 그려지는 수건의 선이 다른 맛이 있다.'고 자평하였다.[14] 단, 근래에는 시간을 15분 내외로 대폭 줄이고, 이매방류와 마찬가지로 휘모리 북가락을 넣어서 다시 대풍류의 굿거리로 끝내는 경우가 많다.[15] 정재만은 이러한 높은 시선처리가 천신과의 교감을 의미하는 춤사위라고 한다.[16] 조관우의 아버지 그 조통달이 맞다.[17] 정재만에 의하면 한영숙은 한희종의 서녀라고 한다.[18]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고 한다.[19] 임방울의 사위 중 한 사람이 한영숙의 친정 7촌 조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