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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이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 한양이[1]라고 읽는 것이 옳다. 청주한씨제7교대동족보 29권 880쪽에도 한양로 등재돼 있다.]}}}
韓良履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여경(汝敬, 女敬)
석초(石蕉, 石樵)
본관 청주 한씨[2]
출생 1883년 1월 16일[3]
경상도 용궁현 신읍면 송암리
(現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송암1리 용암마을[4] 387번지)
사망 1946년 2월 16일[5]
묘소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신전리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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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한태섭의 차남이며, 독립유공자 한장리는 6촌 재종형(再從兄)이다.

2. 생애

1883년 1월 16일 경상도 용궁현 신읍면 송암리(現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송암1리 용암마을 387번지)에서 아버지 한태섭울진 장씨(蔚珍 張氏, 1823. 7. 5 ~ ?. 3. 20)[6] 사이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이강년이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자, 농토 6,700여 평을 매각해 이강년에게 군자금으로 기부했다. 이후 이강년이 의병을 일으키자 정식으로 의병대에 입대했고, 종사관에 선임되어 의병 모집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강원도 원주군, 충청북도 단양군·제천군, 경상북도 문경시·안동군·안동군 내성면·봉화군 재산면, 경기도 관악산, 경상남도 등지에서 일어난 전투에 참가해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8년 6월 4일 청풍군 북면 성내리(現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 까치성[7] 전투에서 일본군과의 격전 중에 이강년 의병대가 패하고 이강년이 체포되자 피신했고, 이후 이강년의 장남 이승재(李承宰)와 함께 전국을 돌며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할 동지를 모집했다. 이에 이기하(李起夏) 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도륙암살 결사대를 조직하여 한성부에 잠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일본 밀정에게 탐지되자 은신했다. 그러나 곧 용궁군 신읍면에서 체포되었고,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했다는 이유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2년 출옥한 후에는 문경군 가은면(現 문경시 가은읍) 죽문리로 이주해 그곳에서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배일 사상을 고취시키는 한편 독립운동을 함께 할 동지를 은밀히 모집했다. 또한 독립동지회를 창설하고 의남단(義南團)을 조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비밀리에 연락했다.

1919년 동지 이응수(李應洙, 경북도단 총무국장)·서상업(徐相業, 경북도단 재무국장)·김찬규(金燦奎, 경남도단장) 등과 거사할 것을 상의하고, 1920년 4월 이응수의 권유로 의용단(義勇團) 경북도단(道團)을 조직하였다. 한편 중화민국에서 활동하던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 및 흥업단(興業團)과 연락해 제휴를 맺고, 길림군정서로부터 군자금모집 사서(辭書)·권총·폭탄·암호문·독립신문 등의 지원을 받았다. 또한 1920년 12월에는 의용단 경북도단 서기 겸 간사에 임명되어 무장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다 1922년 의용단 경북도단 총무국장 이응수, 의용단 단원 이대기(李大基) 등과 함께 경상북도 대구부 계림여관(鷄林旅館)에 비밀사무실을 열어 연락서신을 작성하던 중 일제 밀정에게 탐지되어 5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체포되었고, 1923년 9월 30일 대구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공갈, 약품 및 약품영업 취체령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아방면되었다.

출옥 후에는 신태식(申泰植, 경북도단장)·김찬규·서상업 등과 함께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옥고의 여독이 재발해 활동을 잠정 중단하고 1939년까지 산으로 들어가 휴양 생활을 하며 심신을 수양했다. 1940년에는 예천군 유산면에서 사숙을 열고 문인을 모아 유학의 보전을 꾀했고, 이곳에서 이강년의 행적을 다룬 《운강문집(雲崗文集)》을 정리하고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을 편찬했다.

그 뒤 1946년 2월 16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1971년 4월 25일 예천군 유천면 가리 유천초등학교 교내에 '석초한양이의사기념비(石樵韓良履義士記念碑)'가 건립되었다. 1977년 8월 15일 광복절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12월 26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본래는 한[2] 장도공파(章悼公派) 28세 리(履) 항렬.[3] 음력 1882년 12월 8일. 청주한씨제7교대동족보 29권 880쪽에는 1882년 12월 9일생으로 등재돼 있다.[4]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한장리·한태섭도 이 마을 출신이다.[5] 청주한씨제7교대동족보 29권 881쪽에는 1961년 2월 25일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6] 장영복(張永福)의 딸이다.[7] 현재의 작성산(鵲城山). 이곳 사람들은 까치성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