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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 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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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ra Kelly
파일:Petra_Kelly.jpg
본명 페트라 카린 켈리
Petra Karin Kelly
출생 1947년 11월 29일
연합군 점령하 독일 바이에른 귄츠베르크[1]
사망 1992년 10월 1일[2] (향년 44세)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신체 NNNcm, NNkg, 혈액형
가족 이름 (관계)
학력 초등학교 (졸업·중퇴)
중학교 (졸업·중퇴)
고등학교 (졸업·중퇴)
대학교 단과대학 (학과1·학과2[복수전공] / 재학·학사·중퇴)
종교 종교
직업 정치인, 환경운동가
소속

서명
파일:빈 가로 이미지.svg

1. 개요2. 생애
2.1.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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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정치인. 독일 녹색당의 창당자 중 한 명이다.

2. 생애

페트라 켈리는 1947년 독일 바이에른 주 귄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이혼하고 미군 존 켈리와 재혼하면서 1959년부터 미국에서 거주하게 된다.

그녀는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으며 1966년 워싱턴 D.C의 아메리칸 대학에 진학했고,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입학 전 그녀는‘우리 세대는 달라’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이번 세기 숱한 전쟁을 일으킨 모든 세력들 /그러나 아무리 극성스런 악의 세력도 /사랑의 힘만은 꺾을 수 없어 /그 놀라운 힘 우리 안에서 /66학번 우리 친구들의 힘이 되어 /세상 밝히는 빛이 되리라.”

마틴 루터 킹을 지지하고,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로버트 케네디휴버트 험프리의 선거운동을 했던 것을 보아 10대 후반~ 20대 초반부터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가졌던 듯 하다. 초기 녹색당이 기본정책을 미국과 소련을 모두 비판하는 비폭력과 평화주의로 삼게 된 것도 켈리가 킹 목사나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의 암살 사건을 겪은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맘때쯤 평소 친분이 있던 엘리자베스 로스토의 집을 방문했을 때,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안보담당 정책보좌관인 엘리자베스의 남편이 백악관과의 통화에서 베트남 전쟁과 관련해서 몇 군데 새로운 공격을 감행하자는 내용의 통화를 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된다. 수만의 목숨이 걸린 일을 두고 아무 망설임없이 결정을 내리고, 식사자리에서도 태연하게 전쟁 이야기를 하는 것을 켈리는 잊을 수 없었다고.

켈리는 1학년 때부터 특별장학금을 받았는데, 이때 로버트 케네디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장학금이 외국인[4]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는데, 그녀가 편지를 보내자 케네디가 이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1970년 독일(서독)으로 돌아오게 된다. 70년 5월 켈리는 유럽의 동서문제를 다룬 논문으로 아메리칸 대학을 졸업했고, 일단은 유럽통합 문제를 연구하기로 진로를 정하고 암스테르담 대학의 유럽학과에 진학했다. 1971년 5월 켈리는 암스테르담 대학의 유럽연구소에서 연구조교로 일하면서 유럽통합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10월 유럽공동체 집행위원회에 취직해 6개월간 인턴 활동을 한다.

그녀는 1972년에 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전후 최초의 사민당 출신 총리인 빌리 브란트에 감명받았고, 그의 정당을 통해서라면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 '정치인'은 아니었던 켈리는 '시민주도 환경보호 전국연합(BBU)’에서 산성비 문제, 숲의 황폐화, 신규 핵발전소 건설 등의 문제를 공론화하며 환경운동가이자 평화운동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빌리 브란트 이후의 사민당이 주류정당이라는 한계로 시민사회의 열망을 전혀 대변하지 못한다고 느낀 켈리는 1979년 사민당 당적을 버리고 여러 단체들과 대안정치연대인 '모든 정당을 반대하는 정당' 녹색당을 창당하게 된다.

1981년, 켈리는 40만 명이 참여한 핵무기 반대 시위를 이끌었다.

1983년 총선에서 녹색당이 5.6%의 정당득표로 봉쇄조항 5%를 넘겨 원내에 진출하게 되고, 그녀 역시 바이에른의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4년 후 1987년 총선에서는 더 높은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2.1. 죽음

1992년, 자택에서 같은 녹색당 정치인이자 연인이었던 게르트 바스티안[5]과 함께 숨진 채 발견되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자의에 따른 동반자살인지 아니면 바스티안이 그녀를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한 것인지, 혹은 또 다른 배후가 있는 것인지 등 죽음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다.

페트라 켈리는 44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정당인 녹색당은 많은 진보적인 정책을 주장했고#, 1998년 사민당과의 적녹연정으로 연립여당이 되어 그것들을 실현시켰으며, 2021년 9월 최근에는 2021년 총선에서 창당 이래 최고의 성적으로 사민당-기민련 양당에 있어 캐스팅보트가 된 상황에서 본다면 그녀의 삶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1] Günzberg[2] 위키피디아에 적힌 날짜.[복수전공] [4] 당시 켈리는 독일(서독) 시민권을 유지하고 있었다.[5] Gert Bastian. 원래 나토군 사령관이었으나 핵미사일이 독일에 배치되는 것을 반대해 직을 내려놓고 녹색당 활동을 했다. 1923년생으로 페트라 켈리보다 24살 연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