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1:05:35

카와사키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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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투표 관련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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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 과정
2.1. 발단2.2. 전개2.3. 절정2.4. 결말
3. 여파4. 다른 투표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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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川崎憲次郎投手をオールスターに!】
ヤクルト時代はローテーションの柱として88勝を挙げ'98には最多勝のタイトルを獲得。
特に巨人戦には滅法強く、現役最多の勝利数を誇る。
'00年オフにFA権を行使し打倒読売、そして優勝請負人として満を持して中日入団。
背番号20は元祖燃える男・星野仙一が着けていた番号だった。
しかしここからが苦難の始まりだった。
度重なるケガ。
エースとしての働きを期待されながら2軍で、練習すらできない日々。
01成績…登板機会無し
02成績…登板機会無し
ファンはその巨人キラーの異名と熱い期待をいまだに忘れることができない。
3年契約の3年目、ようやく傷も癒え練習を再開。彼にふさわしい舞台とは?
そう彼に相応しい復活の舞台はオールスターだ
(中略)[1]
○オールスターの投手には川崎に投票しよう○
頼む!!!
카와사키 켄지로를 올스타로
야쿠르트시절에는 로테이션의 기둥으로 통산 88승을 올렸다. 98년에는 최다승 타이틀을 얻었다.
특히 요미우리전에는 굉장히 강했으며 요미우리 상대 현역 최다 승리를 자랑한다
00년 시즌 종료후 FA권을 행사해 타도 요미우리를 외치고 우승청부사로서 주니치에 입단
등번호 20번은 원조 불타는 남자 호시노 센이치의 등번호였다.
그러나 여기서부터가 고난의 시작이었다
반복되는 부상
에이스로서 활약이 기대되면서 2군에서 연습조차 할수없는 나날들
01 성적 등판기록없음
02 성적 등판기록없음
팬들은 그의 거인 킬러 별명과 뜨거운 기대를 잊을수없다.
3년계약의 3년, 드디어 부상도 완치하고 연습을 재개 그에게 어울리는 무대란?
그렇게 그에게 어울리는 부활의 무대는 올스타다.
(중략)[1]
올스타 투수는 카와사키 켄지로에게
제발!!
카와사키 축제가 한참이었던 2003년 5월달 카와사키 축제의 중심이 된 카와사키 켄지로를 올스타전 팬투표 1위로 만들자 스레드 메인에 걸린 글비꼬는게 예술이다.

川崎祭

2003년 일본프로야구 올스타전 투표에서 일어난 인터넷 투표 관련 사건.

2ch/5ch에서 일으킨 수많은 인터넷 투표 관련 사건 중 타시로 축제[3]와 함께 아버지격인 사건이기도하다.

2. 전개 과정

2.1. 발단

카와사키 켄지로라는 투수는 1993년에는 일본시리즈 MVP를 받았고 1998년에는 일본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 상을 수상했다. 부상도 있었지만 공만 던지다면 어느정도 준수한 활약을 펼쳤기 때문에 2000년 시즌 후 FA가 되면서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관심을 받았다지만 시장에서 주니치의 열렬한 구애로 주니치 드래곤스 이적으로 마음을 돌렸고 이후 주니치로 이적했다.

하지만 FA 계약 이후 오른쪽 어깨통증으로 2001년 2002년 내내 1군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고 2003년에도 시즌 초반 로스터에 들지 못하면서 이렇게 먹튀 투수 1로 커리어가 끝나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03년 4월 25일 2ch에 川崎憲次郎をオールスターファン投票1位にしよう。라는 의문의 스레드가 세워졌다.

2.2. 전개

첫날의 반응은 미적지근했으나 점점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고 세력을 크게 불릴 계기가 생겼는데 첫번째 올스타전 중간발표가 그것이었다. 당시 투표 1위를 차지한 건 카와사키 켄지로와 같은 팀이었던 카와카미 켄신이었지만 카와사키 켄지로도 무려 13등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는데 2ch 내부에선 기대감이 크게 오르기 시작하고 참여자도 늘기 시작했다.

외부에 이 사건이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03년 5월 14일 근 2년간 1군에서 실종된 투수가 팬투표 13등으로 올라온 걸 의아하게 느낀 도쿄 스포츠에 조사한 뒤에 기사화하면서였다.

기사가 나온 지 6일 뒤인 5월 20일 올스타 위원회에서 조사에 나섰는데 하나의 PC에서 1000표 이상의 투표를 한 부정투표 움직임이 나타났다. 당연히 대응한다고 패스워드 입력 창까지 만드는 번거로움을 추가했으나 카와사키 켄지로를 향한 투표를 멈추지 않았다. 위에 언급된 타시로 축제로 인해 2ch 유저들이 어느 정도 노하우가 생긴것도 있었고 일본의 올스타전 투표 방식 중에는 인터넷을 제외하고도 ARS와 각 홈구장을 필두로 지정된 장소에 비치된 엽서로도 투표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 방법까지 써 가면서 카와사키 켄지로에게 투표했다.

2.3. 절정

2003년 5월 20일 투수 투표 2등을 차지하는 등 페이스가 아직도 줄지 않자[4] 운영위원회에서도 양심 있는 투표를 하라고 호소했지만 그럼에도 페이스는 줄어들지 않았다.

마침내 2003년 6월 17일 이가와 케이를 제치고 1등을 차지했다. 당연히 당시 2ch에서는 대축제가 열렸다.

의문의 1등이 된 카와사키는 6일 뒤인 6월 23일 프로야구선수회 홈페이지에 글을 기고하면서 '억울하지만 이 한 표 한 표를 자신에 대한 질책과 격려로 생각하고 하루 빨리 1군에 올라가겠다.'는 소감을 남겼다.

2.4. 결말

하지만 투표의 실상을 알고 부담감을 느낀 카와사키 켄지로는 2003년 7월 3일 올스타 사퇴 의사를 밝혔고 그대로 올스타에서 사퇴했다.[5]

파일:2003년 NPB 투수 올스타 결과.jpg

투표 결과

여담이지만 만약 카와사키 켄지로가 사퇴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올스타에 나갈 뻔했다. 좌측의 1등이 카와사키 켄지로[6]

3. 여파

이 사건의 영향으로 2004년부턴 올스타 인터넷 투표를 회원가입제로 바꿨으며 1인 1일 5회라는 제한까지 생겼다.[7] 선수를 추천할 때도 아예 이런 케이스를 막기 위해 투수는 5경기 이상 등판 혹은 10이닝 이상 등판, 타자는 10경기 혹은 20타석 이상이라는 올스타전에 참가가 능한 최소 기준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됐는지는 몰라도 저 시즌이 끝난 다음해인 2004년 오치아이 히로미츠 감독이 부임한 주니치는 개막전 선발 투수로 무려 카와사키 켄지로를 지명했다.등판 결과는 묻지말자 팀은 이겼다.

4. 다른 투표에서는

2003년 시즌의 올스타전 투표는 카와사키 축제가 기세를 탄 영향인지 2ch의에서 올스타전 투표 관련 스레가 성행하기도 했는데 아래의 선수들은 2003년 川崎憲次郎をオールスターファン投票1位にしよう。라는 스레드에서 언급되거나 의견이 모여서 아예 파생 스레드가 따로 세워진 선수들이다.
투표 포지션 - (소속팀)/(선수명칭): 선수 설명과 투표 대상이 된 이유
  • 센트럴 리그 포수 - 히로시마/스즈에 유우키(鈴衛佑規): 1996년 히로시마 입단 후 카와사키 축제가 일어난 시기인 2003년까지 1군 출장이 단 2번밖에 없던 2군 포수였음에도 전력외 통보 즉 방출을 당하지않은 특이한 커리어를 지녔는데 그나마 상위라운드 출신이라면 예전 포텐셜을 보고 부여잡겠지라는 생각이라도 가능했지만 이 선수는 하위라운드인 6라운드 지명출신이다.[8] 당연히 저러한 이유로 일본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유우 연습장의 요정이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던 선수였고 투표 대상이 된 이유도 이것이었다. 총 투표 결과는 23,506표로 센트럴 리그 포수 10등 여담이지만 사건 이후인 2005년에 2군에서 3할 후반대의 고타율을 기록하면서 다시 1군에서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타석에 그대로 서보지 못했고 2006년에 은퇴하면서 결국 1군 커리어는 2경기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불펜 포수로 전향했다. 여담으로 이놈의 생존왕 기믹 덕분에 ‘스즈에 잔류!’ 라는 밈도 생겼다.
  • 센트럴 리그 포수 - 한신/노무라 카츠노리(カツノリ/野村克則): 前 한신의 감독이자 일본 야구를 대표하는 명장이었던 노무라 카츠야의 아들로 아버지가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있던 시절인 1996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3라운드로 입단했다. 등록명은 カツノリ. 다만 들어간 팀도 그렇고 이후 아버지의 팀을 따라간 커리어나 보여주는 성적이 워낙 저조하다 보니 아버지 빽으로 프로판에 들어왔다고 욕을 엄청나게 먹었는데 당연히 투표 대상이 된 이유도 이것이었다. 총 투표 결과는 152,980표로 센트럴 리그 포수 7등.
  • 센트럴 리그 1루수 - 한신/트레이 무어(トレイ・ムーア): 2003년 당시 한신의 2년차 외국인 선수였다. 여기까지는 무난해 보이겠지만 사실 이 선수는 위의 각주에서 언급되었겠지만 투수다. 대상이 되었던 이유는 타격능력이 투수치곤 좋아서였는데 실제로 지명타자를 쓰지 않는 센트럴리그 특성상 타석에 자주 나오는 편이었고 2002시즌에는 .274/.286/.339의 슬래시 라인을 2003시즌에는 ,326/.326/.395의 슬래시 라인을 기록했다. 총 투표 결과는 437,116표로 센트럴 리그 1루수 3등...[9] 다만 투수로서의 퍼포먼스가 외국인 투수치곤 묘해서 2003년 이후 재계약에 실패했다. 오릭스가 주워갔지만 6점대 방어율을 기록하면서 그대로 방출되었다.
  • 센트럴 리그 2루수 - 야쿠르트/츠기오 사토(ツギオ/佐藤二朗): 일본계 브라질인으로 본명은 ツギオ・レイナルド・サトウ(Tsugio Reinaldo Sato). 1999년에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한 선수로 일본에서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고 브라질 국적이었기 때문에 용병슬롯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당시 야쿠르트는 로베르토 페타지니, 알렉스 라미레스라는 걸출한 외국인 타자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타자인 이 선수가 용병 자리를 먹을수는 없었고물론 페타지니는 2003년에 요미우리로 이적하지만 일본인으로 귀화를 시도했다. 대상이 된 이유도 당연히 일본인 귀화였다. 총 투표 결과는 85,154표로 센트럴 리그 2루수 8위. 여담으로 일본인 귀화를 선언한 2003년 시즌 후 전력외 통보를 받고 방출당하고 말았다. 이후 사회인 야구 기업팀인 시닥스와 야마다에서 활동하다가 2019년부터 플레잉 코치를 하였고 2020년부터 2022년까지는 선수를 은퇴하고 전임 코치를 하다가 2023년에 완전히 실업야구판까지 떠났다. 사회인야구에서는 꽤 잘 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해피엔딩.
  • 센트럴 리그 3루수 - 한신/카타오카 아츠시(片岡篤史): 첫 스레드가 세워졌을 때 3루수로 뽑자고 언급된 한신의 내야수. 별다른 이유를 찾기 힘들 정도로 준수한 성적에 외적인 이유도 없다. 물론 이때 올스타 투표 기본 틀에 올라간 한신의 3루수는 용병인 조지 아리아스였다. 어쨌든 이유를 찾기 힘들어서였는지 스레드 내에선 밀어주는 느낌도 아니었고 자주 언급되진 않았다.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올스타 투표가 한창이던 6월 주전 우익수였던 하마나카 오사무가 어깨부상으로 시즌아웃이 되면서 올스타 투표에 1루수로 올라가 있던 히야마 신지로가 우익수로 갔고 3루수로 올라가 있던 조지 아리아스가 1루수로 가면서 주전 3루수에 등극했다. 그 영향인지 나름 올스타 표를 받았다. 총 투표 결과는 센트럴리그 3루수 5등인 364,169표.
  • 센트럴 리그 3루수 - 요코하마/후루키 카츠아키: 선수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2003시즌 퍼포먼스의 영향으로 대상이 되었다. 총 투표 결과는 센트럴리그 3루수 4등인 483,511표.
  • 센트럴 리그 유격수 - 요코하마/이시이 타쿠로: 항목에도 나와 있는 선수 외적인 이슈가 워낙 강한 것 때문에 대상이 되었다. 총 투표 결과는 센트럴리그 유격수 6등인 244,239표.
  • 퍼시픽 리그 마무리투수 - 오릭스/맥 스즈키(マック鈴木): 일본인 메이저리거 출신 선수. 본명은 스즈키 마코토(鈴木 誠)로 미국 진출 당시 마코토라는 발음을 미국인들이 하기 힘들다고 맥으로 불러 맥 스즈키가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외부에서 일으킨 폭력사건으로 퇴학당한 후 또 폭력사건으로 인해 가정법원까지 간 영향인지 아버지와 지인의 소개로 도망치듯이 미국으로 유학을 간 뒤 커리어를 시작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케이스다. 이로 인해 돌아올 때 드래프트를 받고 팀에 입단했는데 오릭스가 2라운드 픽까지 써 가면서 데려왔다.[10] 하지만 미국에서도 좋은 기량을 보여준 투수는 아니었고 입단한 오릭스에서도 애매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면서 대상이 되었지만 메이저리그라는 이름값의 영향인지 총 투표 결과는 퍼시픽 리그 마무리 투수 2등인 499,164표.
  • 퍼시픽 리그 지명타자 - 세이부/마쓰자카 다이스케: 동명이인이 아니라 그 투수 마쓰자카가 맞다. 마쓰자카 다이스케 항목에도 서술되었지만 실제로 투수치곤 타격 평이 괜찮았던 터라 무어랑 같은 이유로 대상이 되었다. 총 투표 결과는 퍼시픽 리그 지명타자 7등인 148,583표.
  • 퍼시픽 리그 포수 - 치바 롯데/후쿠자와 요이치(福澤洋一): 노쇠화로 인해 마지막 시즌이 유력했던 치바롯데의 원클럽맨. 하지만 14년 프로통산 안타를 124개를 기록할 만큼 경기에 자주 나서지 못했던 백업포수였다. 당시 올스타전 2차전 경기가 치바 롯데의 홈구장인 ZOZO 마린 스타디움에서 열렸기 때문에 원클럽맨인 그를 위해 2ch의 치바 롯데 팬들이 밀었다. 총 투표 결과는 퍼시픽 리그 포수 7등인 94,173표.
  • 퍼시픽 리그 3루수 - 킨테츠/나카무라 노리히로: 다른 포지션 투표와 다르게 이쪽은 이 선수를 떨구기 위해 2ch에서 의견이 모아진 케이스로 심지어 짧게 스레까지 따로 세워졌다. 이유에 대한 전후 과정 설명은 나카무라 노리히로 항목 참조. 어쨌든 안티 나카무라 노리히로 연합이 밀던 선수는 당시 닛폰햄에서 뛰던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결과는 1,158,012표를 얻은 오가사와라가 988,656표를 얻은 나카무라를 이기면서 안티 나카무라의 승리가 되었다.
  • 퍼시픽 리그 유격수 - 치바 롯데/릭 쇼트(リック・ショート): 치바 롯데의 1년차 외국인 선수 이 선수는 트레이 무어와 다르게 야수다. 그나마 여기까지만 본다면 일반적인 투표처럼 보이겠지만 하지만 이 선수의 주 포지션이 외야수와 3루수였다. 유격수로 뛴적이라곤 싱글 A 시절 이후에는 전무했는데 그냥 이름이 ショート라서 타겟이 되었다. 총 투표 결과는 퍼시픽 리그 유격수 7등인 115,007표. 여담이지만 이름 때문에 대상이 된거지 타격 성적 자체는 준수한 편이었고 나름 외야 전포지션을 맡는 유틸리티성으로 인해 일본프로야구에서 몇 년간 활약했다. 미국으로 돌아간 2004-2005년을 제외한 2003, 2006, 2007, 2008 4시즌 연속 3할을 기록했고 2008년 라쿠텐 시절에는 타율 1등까지 기록할 정도였다.


[1] 이 부분에는 시즌전 카와사키 켄지로의 기사/카와사키 켄지로의 리그 기록/올스타 투표방식이 적혀있다. 지금 시점에선 시간이 엄청나게 지났기때문에 이 항목에선 없앴다.[1] [3] 당시 여러 성추문으로 인해 몰락한 타시로 마사시를 2001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투표했던 사건[4] 이때의 1등 투수는 이가와 케이였다.[5] 참고로 NPB는 올스타전에 뽑히고 난 후 사퇴 시 후반기 개막부터 10경기 출장정지라는 징계를 내리는데 이때만큼은 사안이 사안이었던 만큼 카와사키 켄지로에게 내려진 징계는 없다.[6] 좌측의 센트럴 선수들의 순위를 2등부터 나열하자면 이가와 케이, 카와카미 켄신, 우에하라 고지, 이라부 히데키, 이시카와 마사노리, 타카하시 켄(히로시마의 전천후 좌완투수로 2009년에 40세라는 고령에 mlb에 진출한 투수이기도 하다. mlb 성적은 28게임 27.1이닝 1패 2,96),쿠와타 마스미,아래에 언급되는트레이 무어, 구로다 히로키 순이다.[7] 2008년에 다시 1인 1일 1회로 또 축소되었다.[8] 카프는 스즈에의 방출 후 또 이런 식으로 1군에 거의 올라가지도 못하는 2군전드 포수를 한 명 배출해냈는데 바로 19년 통산 90경기에 나온 시라하마 유타다. 단 이 선수는 1라운더이긴 했다.[9] 참고로 당시 히로시마에서 주전으로 뛰고 있던 아라이 타카히로가 4등으로 밀렸다.[10] 사실 이때 후일담이 있었는데 원래 맥 스즈키를 좋게 평가하던 팀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였다. 사실상 입단을 기정사실화하고 일본 리턴을 했는데 상기된 이유로 드래프트를 거칠 수밖에 없었고 그 드래프트 과정에서 오릭스 블루웨이브스가 얼리픽으로 먼저 데려갔다. 맥 스즈키를 놓친 야쿠르트는 울며 겨자먹기로 차순위 선수를 지명했는데 그 선수가 바로 다테야마 쇼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