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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대왕/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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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왕자 시절2.2. 왕위를 이어 받다2.3. 폭정2.4. 극악무도한 폭군의 말로
3. 의문점

1. 개요

고구려 제7대 차대왕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2. 생애

71년에 태어났다.

2.1. 왕자 시절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 의 기사 초반을 읽어 보면 동생 고백고(신대왕)가 사냥 좀 그만하라고 조언하는데도 "내가 즐길 만하니 즐긴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라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부하들을 모아서 한 번 엎자고 선동하거나, 뒤에 서술할 활약상을 볼 때 놀고 먹기만 하는 허당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즉위 후 앞서 고언한 우보 고복장(高福章)은 끔살당했다. 차대왕의 야욕을 알고 태조대왕에게 차대왕을 제거해야 한다며 그러지 않으면 아들들이 죽게 될 거라고 간언했지만 태조대왕이 공이 많다는 이유로 내버려뒀는데 진짜 그렇게 되었다. 좌보 목도루(穆度婁)는 벼슬이고 뭐고 내팽겨치고 튀었다.

태조대왕의 재위 시절에 장군으로 활약해 요동군의 현들을 활발하게 공격했다.

121년 11월에 후한의 고구려 침공을 격파한 공으로 군사와 국정 전반에 관한 업무를 장악했다. 또한 123년 10월에는 본격적으로 정사에 참여했다. 《후한서》에는 이 시기에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왕이거나, 최소한 왕에 준하는 지위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2.2. 왕위를 이어 받다

次大王諱遂成 太祖大王同母弟也 勇壯有威嚴 小仁慈 受太 祖大王推讓 卽位 時年七十六
차대왕(次大王)의 이름은 수성이고, 태조대왕의 친동생이다. 용감하고 굳세며,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함이 적었다. 태조대왕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그때 나이가 76세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차대왕은 즉위 이후 태조대왕의 아들들과 신하 등 자신의 권력에 위협을 가하는 존재들을 차례대로 살해했다.
二年 春二月 拜貫那沛者彌儒爲左輔 三月 誅右輔高福章
2년(147년) 봄 2월에 관나부 패자 미유를 좌보로 삼았다. 3월에 우보 고복장을 죽였다.

三年 夏四月 王使人殺太祖大王元子莫勤 其弟莫德恐禍連及 自縊
3년(148년) 여름 4월에 왕은 사람을 시켜 태조대왕의 맏아들인 막근(莫勤)을 죽였다. 그 아우 막덕(莫德)은 화가 연이어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목을 메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차대왕조-
만약 태조대왕과 차대왕이 형제가 아닌 부자 관계라면 차대왕과 고막근은 형제 관계가 된다. 차대왕이 자신의 아들인 고추안을 태자로 삼으면서 숙청한 것으로 보인다.

2.3. 폭정

《삼국사기》에 따르면 차대왕은 즉위 후에 별다른 정복 사업을 벌이지 않은 듯 하며, 그의 왕위 계승을 반대하는 우보 고복장고막근, 고막덕 형제를 죽이고[1] 동생인 고백고[2]를 견제하는 등 왕권 강화에 주력했다고 한다. 또한 멋대로 신하들을 처형하고, 세금을 가혹하게 걷었으며 천재지변까지 일어나면서 조정의 신망을 잃게 되었다.

이 시기에 대한 흉흉한 기록도 있는데 차대왕 3년 7월, 사냥을 나갔다가 흰 여우를 만나 화살을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이에 차대왕이 무당을 불러 물으니 무당은 여우는 요사스런 짐승인데 거기다가 흰 여우이기까지 하니 더욱 괴이하지만 임금께서 덕을 닦으시면 화를 바꾸어 복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차대왕은 길하면 길하고, 흉하면 흉하지 요사스럽다면서 복이 된다니 무슨 거짓말이냐며 무당을 죽였다.

또 차대왕 4년 5월, 동쪽 하늘에 별 5개가 모이는 일이 일어나자 일자를 불러 물었는데 일자는 차대왕이 화를 낼까 두려워
"이것은 임금님의 덕이고, 나라의 복입니다."
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차대왕은 기뻐했다고 한다.

게다가 차대왕 2년 11월에 지진이 일어났고, 4년 4월에는 일식이 일어났으며, 동년 12월에는 얼음이 얼지 않았고 8년 6월에는 서리가 내렸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기상이변이 일어났고, 13년 2월에는 혜성이 관측되었으며, 동년 5월에는 또 일식이 일어났고, 20년에도 일식이 일어나는 등 당시 기준으로 봤을 때, 흉하게 여길 일들이 여러차례 일어났다.

2.4. 극악무도한 폭군의 말로

165년 10월 결국 이를 참지 못한 조정 관료들이 연나부[3] 출신의 명림답부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차대왕은 처형되었다. 이후 동생인 고백고가 제8대 신대왕으로서 왕위를 잇게 되었다.

《후한서》에는 차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형제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의 피를 이은 자식마저 미워해 아들인 신대왕이 아버지를 두려워하여 숨었으며, 명림답부가 차대왕을 시해한 후에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태조대왕의 장수 기록이 워낙 쩔어줘서 그렇지, 이 사람도 만만치 않다. 신대왕과 더불어 소위 '장수 형제'로 취급되는 왕들 중에서 유일하게 제 명에 못 죽은 케이스인데, 현대 기준으로도 충분히 오래 살았다. 더구나 《후한서》에 기록된 즉위년을 기준으로 하면 무려 42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3. 의문점

먼저 기록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재위기간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삼국사기》 -태조대왕조-의 김부식이 주석으로 인용한 부분에서 나오는 《후한서》에 따르면 121년 궁(宮 = 태조대왕)이 승하하고, 수성(遂成 = 차대왕)이 뒤를 이었는데 아들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를 궁의 사자(嗣子 = 대를 잇는 아들)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태조대왕이 146년에 양위하고 이후 165년에 승하한 것과 모순된다. 《삼국사기》의 내용은 《구삼국사》와 《해동고기》에 잘못 적힌 내용을 그대로 적어버린 탓에 그렇게 된 것으로 추측되며, 《후한서》 등 당대의 중국이 남긴 기록을 보면 121년 태조대왕은 이미 승하했고, 그 뒤를 차대왕이 이어받았다. 이것이 후대에 이르러 연대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76세에 왕위를 이어받은 것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차대왕의 나이는 원래보다 대략 24세~25세 정도 많게 조작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차대왕과 신대왕의 나이에서 24년을 낮춰보면 후대의 왕과 현실적인 나이차가 된다.

《삼국사기》에는 차대왕이 태조대왕신대왕과 형제 관계로, 모두 고재사의 아들들로 기록되어 있지만 각각 24년과 18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데 이걸로 보아 이들의 수명은 후대의 조작일 가능성이 높으며, 정말로 형제 관계인지는 불투명하다. 최소한 태조대왕과 차대왕의 수명이나 재위기간 등에 관한 기록의 정확성은 당대의 기록인 《후한서》나 《삼국지》의 내용이 맞는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삼국사기》의 내용이 꼬여버린 것은 김부식이 연도를 잘못 썼거나, 착각해서 벌어진 일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미 김부식 등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 참조한 국내 문헌부터가 고구려인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조작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김부식 본인이 이에 대해 -태조대왕조-에서 "《후한서》 기록이랑 우리쪽 기록이랑 비교해보니 앞뒤가 안맞는데 어느 쪽이 맞는거야?"라며 어리둥절해하는 사론을 남겼다.

특히 이 시기에 등장하는 고구려의 주요 인물들인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명림답부 등은 수명 부분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긴 수명[4][5]을 자랑한다는 점도 조작 의심을 부채질하는 부분이다.[6]

결론은 차대왕이 121년, 태조대왕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하여 165년에 쫒겨나는 등의 모종의 방법으로 폐위되었으며, 차대왕이 저지른 폭정이 실제 일어난 일인지, 조작인지는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1] 차대왕이 조카 또는 형제인 고막근을 죽이자 고막근의 동생인 고막덕은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 차대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신대왕을 참조.[3] =절노부=연내부=제나부=북부[4] 태조대왕 118세, 차대왕 94세, 신대왕 90세, 명림답부 112세.[5] 당대 중국의 기록상 태조대왕은 121년에 승하한 것으로 나오므로, 이를 계산하면 향년 75세라는 정상적인 수명이 된다.[6] 실제로 차대왕의 동생인 신대왕은 179년에 91세를 일기로 승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차남고국천왕이 176년 태자에 책봉되어 179년에 왕이 되었고, 197년에 승하했다. 아버지 신대왕과의 나이차를 현대식으로 계산해 30년으로 잡아도 고국천왕 역시 80세 이상은 살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음 왕인 산상왕은 신대왕의 4남으로, 197년에 즉위해 30년 후인 227년에 승하했다. 또한 명림답부는 113세까지 살았다고 적혀 있으며 그는 신대왕과 같은 해에 죽고, 태조대왕은 차대왕과 같은 해에 죽는다. 이게 우연일까? 태조대왕~산상왕 시기의 비정상적인 연령대는 제11대 동천왕의 등장으로 비로소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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