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니 데이먼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조니 데이먼의 수상 경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MLB 월드 시리즈 우승반지 | |||||||||||||||||||||||||||||||||||||||||||||||||||||||||||||||||||||||||||||||||||||||||||||
2004 | 2009 |
2000년 메이저 리그 아메리칸 리그 도루왕 | ||||
브라이언 헌터 (시애틀 매리너스) | → | 조니 데이먼 (캔자스시티 로열스) | → | 스즈키 이치로 (시애틀 매리너스) |
}}} ||
조니 데이먼 Johnny Damon | |
본명 | 자니 데이비드 데이먼[1] Johnny David Damon |
출생 | 1973년 11월 5일 ([age(1973-11-05)]세) |
캔자스 주 포트라일리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88cm / 92kg |
포지션 | 외야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1992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35번, KC) |
소속 팀 | 캔자스시티 로열스 (1995~2000)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2001) 보스턴 레드삭스 (2002~2005) 뉴욕 양키스 (2006~2009)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2010) 탬파베이 레이스 (201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12) |
[clearfix]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했던 야구선수. 2000년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리드오프 중 한 명으로, 통산 성적은 타율 0.284/출루율 0.352/장타율 0.433, 2769안타 235홈런 408도루.2. 선수 생활
군인 아버지와 태국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의 발령에 따라 미군 해외 주둔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은 올랜도 소재의 닥터 필립스 고등학교에서 보냈는데 이때부터 잠재력을 인정받았고, 고교 졸업 직후인 1992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35순위로 고향팀인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지명을 받았다.지명 직후 1993시즌을 앞두고 이미 BA 선정 유망주 랭킹 22위에 오를 정도로 특급 유망주로 꼽힌 데이먼은 착실히 성장하며 1995시즌을 앞두고는 유망주 랭킹 9위에 안착하는 등 로열스 팜 최고의 기대주로 꼽혔다.[2] 그리고 1995시즌 도중 콜업돼 빅 리그 무대에 데뷔한 데이먼은 47경기에서 타출장 .282/.324/.442 OPS .765를 기록하며 잠재력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듬해부터 로열스의 주전 외야수로 자리매김한 데이먼은 몇 년간의 담금질을 거쳐 재능을 개화하며 로열스의 리드오프로 맹활약했다. 특히 1999시즌과 2000시즌에는 2년 연속으로 3할 타율에 OPS 0.8을 넘겼고, 2000시즌에는 도루왕과 득점왕을 동시에 석권했다. 그러나 이미 암흑기에 빠져 있던 로열스는 곧 FA 자격을 얻는 데이먼을 잡을 여력이 없었고, 결국 2000시즌 종료 후 4각 트레이드를 통해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로 건너간다.
당시 오클랜드는 영건 3인방을 앞세워 직전 시즌 91승을 거둬 8년 만에 포스트시즌 무대를 다시 밟는 등 기세를 끌어 올리고 있었고, 여기에 데이먼의 영입으로 화룡점정을 찍어 내친 김에 월드 시리즈 진출까지 도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정작 데이먼은 에이스에서 타출장 .256/.324/.363 OPS .687 9홈런 49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치며 사실상의 풀 타임 첫 시즌이던 1996시즌 이후 가장 나쁜 성적을 냈다. 강점이던 주루에서도 27도루/12실패로 많이 아쉬운 모습을 보인 건 덤. 더구나 출루율이 높지 않고 도루 시도가 잦은 데이먼의 플레이 스타일은 세이버메트릭스에 입각해 출루율을 중시하고 도루 시도를 자제하던 빌리 빈 체제와 맞지 않았고, 결국 에이스는 데이먼과 1시즌 간 동행한 후 FA 자격을 얻은 데이먼을 미련 없이 보냈다. 마침 에이전트가 모든 구단의 악몽인 스캇 보라스라서 예나 지금이나 스몰 마켓인 에이스는 더더욱 데이먼을 잡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후 보스턴 레드삭스와 4년 3,100만달러 규모의 계약을 맺고 합류한 데이먼은 비교적 타자에게 유리한 펜웨이 파크의 덕을 보며 준수한 활약을 선보였다. 3할 언저리의 타율과 함께 매 시즌 두 자릿 수 홈런을 쳐낼 정도로 갭 파워도 과시했다. 특히 2004시즌에는 타출장 .304/.380/.477 20홈런 94타점 19도루로 이적 후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이해 ALCS 7차전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쐐기 만루홈런을 치는 등 밤비노의 저주를 깨는 데 한 몫 했다. 매해 700타석 가까이 소화할 정도로 건강한 모습을 보인 점도 강점.
그러나 보스턴 시절 말미 들어 2시즌 연속으로 20도루도 채우지 못하는 등 도루 갯수가 완연히 줄어든 모습을 보였고, 타격 성적도 준수했으나 팀에 없어선 안 될 정도는 아니었고, 고질적인 약점이던 소녀 어깨 문제와 이로 인한 수비 불안도 있어서 결국 2005시즌을 끝으로 4년 계약이 종료된 후 보스턴은 데이먼을 붙잡지 않았다.
아무튼 데이먼은 이적 후에도 준수한 활약을 선보였고, 2009시즌에는
이후 그랜더슨을 내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가 1년 800만 달러에 데이먼과 계약했는데, 타출장 .271/.355/.401 8홈런 51타점 11도루로 나쁘진 않으나 썩 만족스러운 성적도 아니었다. 양키스에서 보여준 정도의 장타력도 구장빨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났다. 결국 1년 만 뛰고 재계약 없이 다시 시장에 나왔다.
2011시즌에는 탬파베이 레이스와 1년 525만 달러에 계약, 타출장 .261/.326/.418 16홈런 73타점 19도루를 기록하고 팀 연속 출루 기록도 깨는 등 나름대로 쏠쏠한 활약을 했다. 또한 베테랑이라고 해봤자 이제 갓 서른인 제임스 쉴즈나 카일 판스워스 뿐이고 대개가 모범생 꼬맹이들 일색인 탬파베이의 클럽하우스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으로서 팀 케미스트리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면서 리더와 같은 역할을 했다. 참고로 이 당시 데이먼은 사실상 매니 라미레즈의 부록 느낌으로 입단한 것인데, 정작 매니는 약빨다가 걸려서 퇴출당해 은퇴했고, 데이먼만 준수한 활약을 보인 점이 아이러니. 아울러 매니의 몫으로 비웠던 지명타자 자리가 붕 떠버리자 데이먼이 그 자리를 꿰차며 데이먼은 수비를 단 84이닝만 소화해 데뷔 후 처음으로 전업 지명타자 수준으로 시즌을 보냈다.[5] 그러나 어차피 유망주들 키워다 쓰는 팀인 탬파베이 입장에서는 굳이 데이먼과 재계약할 이유가 없었다.
이후 한동안 팀을 구하지 못하던 데이먼은 2012시즌 개막 후인 4월 중순 들어 부상으로 이탈한 그래디 사이즈모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1년 125만 달러에 계약한다. 트레이드 거부권과 사이즈모어의 복귀 시점에 옵트아웃을 할 수 있다는 조항까지 알려졌다. 안 그래도 좌타자 일색인 라인업에 케이시 코치맨과 함께 추가로 합류해 계약 당시부터 팬들의 우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결국 노쇠화를 더 피하지 못하며 타출장 .222/.281/.329 4홈런 19타점을 기록하며 최악의 성과를 남겼다. 지난 시즌 지명타자로 나서며 가려진 수비력 문제도 재차 수면 위에 올랐고, 결국 8월 9일에 사이즈모어가 복귀하지도 않았는데 DFA 조치가 내려졌다.
이후 현역 연장에 도전한 데이먼은 어머니의 혈통을 따라 태국 대표팀으로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참가했지만, 태국이 본선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예선에서 광탈하면서 그걸로 끝(...). 이후 데이먼도 새 팀을 구하지 못하며 자연스럽게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리드오프로서 하나하나의 능력이 탑 수준은 아니지만 반대로 말하면 모든 부분에서 고른 기량을 갖춘 정상급 리드오프.3할 타율을 밥먹듯이 기록하는 선수는 아니었으나 매 시즌 최소 140~50개의 안타와 2할 후반대 타율은 보장했고, 볼넷 생산력이 특출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프리 스윙어는 아니라 커리어 내내 한 시즌 100개에 삼진을 넘겨본 적이 없다. 여기에 당대 리드오프 치고는 비교적 장타력이 좋은 편에 속해서 로열스 시절부터 15개 이상의 홈런을 때려냈는데, 로열스의 홈인 카우프만 스타디움이 상당한 투수 친화 구장임을 고려하면 꽤 인상적인 지표다. 실제로 좌타자가 홈런 치기 편한 양키스 이적 후에는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20홈런 시즌을 2번이나 보냈다. 도루왕을 차지할 정도로 주루 툴도 좋았다.
다만 대부분의 툴이 S급이라고 하기엔 아쉬운데 충분히 A급 소리는 듣는 애매한 정도였다는 점이 데이먼의 평가를 박하게 하는 이유 중 하나. 여기에 데이먼의 수비력에 관한 갑론을박은 커리어 내내 따라다녔다. 발이 빨라서 수비 범위 자체는 준수한 편이었지만, 리그 최약의 소녀 어깨라는 점이 크나큰 감점 요인이 됐다. 그나마 전성기 시절에는 수비 범위라도 넓으니 중견수 역할을 나름 소화했으나 이때도 카를로스 벨트란 등 어깨가 좋은 중견수들이 합류하면 좌익수로 자리를 옮기곤 했고, 노쇠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2007시즌을 전후해서는 점점 좌익수 출전 비중을 늘려가더니 결국 커리어 막바지엔 거의 전업 좌익수로 뛰었다.
4. 명예의 전당 입성 실패
누적 안타 개수는 2769안타로, 이는 2013년 기준으로 메이저리그 역대 5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다만 그 외에는 딱히 두드러지는 성적이 보이지 않으며 골드글러브나 실버슬러거도 하나 없고 올스타 출전도 고작 2회에 불과한데다 여기에 2013년 이후로 괴물같은 성적을 낸 선수들이 계속 명예의 전당 후보로 오를 예정이라 사실상 입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이다.그가 쿠퍼스타운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3000안타를 채우는 것뿐이었지만, 결국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누적이 조금 모자란 선수가 노장선수로 들어서면서 누적을 채우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6]
결국 2018년도 첫 후보 등록서 곧바로 1.9%의 득표율로 광속 탈락.
5. 여담
보삭스 시절에는 정말 덥수룩하게 기른 장발 머리와 수염이 아이덴티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원시인(Caveman). 한국에서는 이를 직역해 '동굴맨'이라고 흔히 부르기도 했다. 이후 데이먼은 양키스 입단 후 팀 내규에 맞추기 위해 이를 깨끗하게 밀어버렸는데, 앞서 언급된대로 양키스가 데이먼을 FA로 영입하며 예외를 허용했음에도 데이먼이 스스로 나서서 규율을 지키겠다고 면도를 단행했다.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는 2005시즌 후 FA 시장에 나온 데이먼을 두고 "리키 헨더슨보다 더 낫다."라는 희대의 언플을 시전해 데이먼이 반대급부로 평지풍파를 얻어맞은 적이 있다. 물론 데이먼이 당시 시장에 나온 리드오프 가운데는 최상위 매물로 꼽을 만큼 준수한 선수였지만, 역대 1위인 1,406개의 도루를 필두로 통산 출루율이 4할이 넘어가고 홈런도 297개나 날린 역사상 최고의 1번 타자에 들이댄 건 무리수였다. 참고로 데이먼의 통산 출루율은 0.352, 통산 도루는 408개다. 통산 홈런도 235개로 리드오프로서 적지 않고 커리어에서 다녀간 홈 구장들도 양키 스타디움 정도를 빼면 좌타자들에게 유리한 구장이 없었던 걸 감안하면 더욱 무시할 수 없지만 역시 다소 애매하다.
현역 시절 빅클럽인 레드삭스와 양키스의 전성기에 장기계약을 맺어 주전 리드오프로 뛰며 오랫동안 활약했고 팀 성적도 좋았으며, 다이나믹하게 뛰는 야구를 했고 날렵한 몸매와 멋진 장발, 동서양 혼혈로 이국적인 외모를 지녔던 덕에 인기는 많았던 스타 선수였다.
당대 메이저리그를 다룬 영화에 제법 언급되는 선수로, 영화 머니볼에서 피터 브랜드가 빌리 빈에게 세이버매트릭스를 설명하면서 보스턴으로 이적한 조니 데이먼을 대차게 까는 씬이 있다. 1번타자로 좋은 선수고 도루도 잘하지만, 고액연봉을 받을 만한 정도는 아닌데 거액을 주고 데려간 보스턴이 멍청하다는 식.[7] 실제로 에이스 시절 데이먼이 부진했던 점을 고려하면 이 말이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그런데 정작 데이먼은 보스턴으로 이적해 완벽히 부활해 4년간 bWAR 16.5를 기록했고, 1 bWAR가 당시 기준으로 300만 내지 400만$의 가치가 있다고 보면 3100만$의 몸값이 하나도 아깝지 않은 맹활약을 보여 이 말을 성적으로 반박해버린 것이 개그 포인트.
보스턴 레드삭스 열성팬의 연애를 다룬 연애영화 '날 미치게 하는 남자' 에도 출연. 여성 팬들이 타석에 나서는 데이먼에게 당신 엉덩이가 가장 섹시하다고 캣콜링을 날리고, 데이먼은 웃으며 화답하는 장면이나 패배 후 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팬들의 화를 돋구는 장면(...)이나, 클라이막스엔 여주인공이 도망치다 본의아니게 데이먼의 섹시한 엉덩이를 움켜쥐는 등으로 선수 측에서 가장 비중있게 등장한다. 활약 시기가 보스턴과 양키스의 전성기를 관통한 미남 선수였던 덕에 인기가 좋았던 선수.
2020년 2월 20일 음주운전으로 체포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6. 관련 문서
[1] 보통 Johnny 혹은 Jonny라는 이름이 John과 Jonathan의 애칭으로 쓰이는 것과 달리, 데이먼은 본명부터 Johnny였다. 참고로 Johnny의 표기법상 표기는 '조니'이나 미국에서는 미국식 발음으로 '자니'로 불렀다.[2] 비슷한 수준의 유망주들의 성적은 메이저 리그 유망주 순위를 참조.[3] 예외적으로 기르게 허용했지만 선수가 규율을 존중하고 지킨건 바다건너 저 멀리 있는 나라의 양키스처럼 역사깊은 팀 꼰대구단 이선수 케이스와 상당히 비슷하다.[그나마] 2008시즌까지는 중견수 자리에서 삽질하자 좌익수로 돌려서 나름 재미를 봤는데, 2009시즌에는 타격을 얻은 댓가인지 좌익수 수비마저 지표가 급락했다.[5] 사실 원래는 칼 크로포드가 이탈한 후 매니 라미레즈가 DH, 데이먼이 좌익수로 낙점되었다. 하지만 매니가 약물 스캔들에 또 휩싸여서 은퇴해버렸고, B.J. 업튼을 트레이드한 후 데스먼드 제닝스를 중견수에 기용하겠다는 계획도 업튼의 트레이드가 실패로 돌아가며 제닝스가 좌익수, 데이먼이 DH로 밀려나고 말았다.[6] 프레드 맥그리프가 비슷한 케이스인데, 통산 500홈런까지 불과 7개만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급격히 찾아온 노쇠화를 이기지 못한 채 결국 은퇴하고 말았다. 사실 맥그리프는 1994년 파업의 영향으로 1995시즌 초반까지 거의 70경기 가까이를 손해본 게 컸고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도 최종 10회까지 버텼다. 그리고 결국 베테랑 위원회 투표로 명예의 전당에 갔다.[7] 한글 대사 - "데이먼의 후임을 찾아요? 보스턴 레드삭스는 조니 데이먼을 연봉 750만 가치를 가진 스타로 보지만 전 그런 시각이 야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그는 훌륭한 수비수 겸 1번 타자죠 도루도 잘하고...하지만 레드삭스가 주기로 한 연봉 750만의 가치가 있을까요? 천만에요 야구계는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 갇혀 있어요. 까놓고 말하면 전 데이먼을 내보내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