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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 부룬디의 경우 임기가 중간에 단절되었다가 다시 집권해도 처음 집권했을 당시의 대수를 유지한다. | }}}}}}}}} |
장바티스트 바가자 | |
<colcolor=#fff><colbgcolor=#000> 출생 | 1946년 8월 29일 |
루안다-우룬디 루토부 (現 부룬디 루토부) | |
사망 | 2016년 5월 4일 (향년 69세) |
벨기에 브뤼셀 | |
역임 | 부룬디 대통령 |
1976년 11월 1일 ~ 1987년 9월 3일 | |
가족 | 배우자, 슬하 4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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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룬디의 독재자이자 군인, 정치인이었다.2. 생애
1946년 투치족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20대 시기에 부룬디군에 입대하여 벨기에의 군사학교로 유학을 가 교육을 받았다. 귀국 이후 장교 신분으로 정계에 입문해 당시 대통령이었던 미셸 미촘베로의 직속 부하로 일하다 1976년 쿠데타를 일으켜 미촘베로를 실권시킨 뒤, 민족진보연합의 당수로서 정권을 잡았다.미촘베로의 부하 시기였던 1972년 르완다 이키자 지역에서 미촘베로의 독재에 반대하는 약 30만 명의 후투족들의 대량학살을 지시했다. 하지만 대통령 부임 이후 초기에는 유화책을 펼쳐 억압당하던 후투족에게 국가 고위직을 쥐어주는 개혁을 도입했다. 또한 기존의 토지법을 개정하여 투치족이 독식하고 있던 농지를 후투족에게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게 했으며, 수력발전소를 건설하여 국토의 현대화도 진행하였다.
하지만 집권 중기인 1984년 여러 개의 정당을 자신이 당수로 있던 민족진보연합으로 합당하여 단일 체제로 만든 뒤부터 강압적인 정치를 시작했으며, 종교 활동이나 유흥 등 국민의 자유를 통제하려다 1987년 피에르 부요야가 일으킨 쿠데타로 전복된 뒤 강제 추방되었다.
이후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 퀘벡으로 망명했다가 1993년 우간다와 리비아를 거쳐 내전이 끝난 1994년 다시 부룬디로 돌아왔다. 망명 시기인 1993년 당시 현직 후투족 대통령이었던 멜키오르 은다다예의 암살에 배후로 있었다는 의혹이 있었으나 본인은 완강히 부인하였다.
귀국 이후에는 민족재생당의 당수로서 자신을 실각시켰던 피에르 부요야 정권 아래에서 간간히 모습을 비추며 정계 활동을 이어갔다. 1997년 출처 불명의 무기를 수급하여 경찰에 체포된 이후로는 딱히 이렇다 할 문제도 일으키지 않은 채 조용히 살았다. 말년에는 벨기에의 별장에서 지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