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4:17:32

이태호(축구)

이태호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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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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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 감독
파일:2012090501000225700017821.jpg
<colbgcolor=#e6e6e6> 이름 이태호
李泰昊 | Lee Tae-Ho
출생 1961년 1월 29일 ([age(1961-01-29)]세)
충청남도 대전시
(現 대전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직업 축구 선수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교수
학력 자양초등학교 (졸업)
대전동중학교 (졸업)
우송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체육교육학 / 석사)[1]
현직 강동대학교 스포츠건강관리과 교수
소속 <colbgcolor=#e6e6e6> 선수 대우 로얄즈 (1983~1992)
감독 동의대학교 (1995~1998)
대전 시티즌 (2001~2002)
신한고등학교 (2004~2007)
동의대학교 (2007~2010)
MMC (2011)
대만 대표팀 (2011~2012)
부산 카파 FC[2] (2014~2015)
강동대학교 (2015~ )
코치 대전 시티즌 (1999~2000)
국가대표 3경기 1골 (대한민국 U-20 / 1979)
80경기 24골 (대한민국 / 1980~1990)
병역 병역 특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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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
2.1. 대우 로얄즈2.2. 국가대표 경력2.3.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경력
3.1. 초기3.2. 대전 시티즌3.3. 이후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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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대학 교수.

현재 강동대학교의 레저 스포츠학과 교수 겸 축구부 감독이다.

부산 아이파크 구단 역대 최다 득점 보유자이다.

2. 선수 경력

2.1. 대우 로얄즈

파일:33977380_3.jpg

대전 출신으로 대전 동중학교[3] 시절부터 2년 후배 김삼수와 함께 학교를 전국 정상으로 이끌었다.[4]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후 대우 로얄즈에 입단하였다. 대우 로얄즈의 창단 멤버이자 프로 생활은 오로지 대우 한 클럽에서만 보낸 원클럽 멤버이다. 대우에서 10년동안 181경기에 출장하여 57골 27도움을 기록하였다. 입단 첫해인 1983년 시즌에는 8경기 3골 3도움을 기록하였다. 원래 포지션은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였지만 이때쯤 포지션을 최전방 공격수로 바꾸었고 포텐을 터뜨렸는데, 특히 2년차였던 1984 시즌은 20경기 11골 3도움을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그해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대표팀에 승선하였다.

하지만 1987년 포항 스틸러스와의 경기에서 골문에서 볼을 다투다 상대 수비수의 발에 눈을 강타 당하였고, 이후 오른쪽 눈은 시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본인의 노력과 의지로 축구선수에게 가장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좁은 시야를 극복해 낸 인간 승리의 주인공이다.[5] 이후 1990년에도 베스트 일레븐에 포함되었으며, 1990 이탈리아 월드컵 대표팀에 승선하였다.

2.2. 국가대표 경력

1979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16개국 본선에 출전해 캐나다와의 16강 조별리그 2차전에서 선취골을 성공시키며 한국의 U-20 월드컵 1호골의 주인공이 되었다.[6]

1980년 대학생 신분으로 처음 성인대표팀에 발탁되었으며, 태국과의 대통령배컵에서 국가대표 데뷔골을 성공시켰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전 일본전 동경어웨이 경기에서 전반전 역습찬스에서 최순호의 크로스 패스를 받은 후 수비수 2명과 골키퍼 까지 제치고 밀어넣은 결승골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88년 AFC 아시안컵에는 3골로 득점왕에 오르며 대한민국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이외에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포함되었고, 그 외 아시안컵과 올림픽 멤버로 출전하기도 하였다. 한쪽눈이 실명상태임에도 상당히 골감각이 좋은 선수로 평가 받았다. 최순호와 투톱으로 나서 최순호가 1선에서 수비수를 끌고 2선으로 내려와 패스를 찔러주면 1선으로 침투해 패스를 받아 골로 연결하는 플레이로 활약했으며 이 투톱은 80년대 대표팀의 주요 공격 루트였다.

또한 역대 중국전 최다 골의 주인공이다. 공한증을 만든 사람 중 하나 3경기에서 4골을 기록하였으며, 최초의 중국전 2경기 연속골과 서울아시안게임 중국전 결승골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등지고 하는 플레이가 뛰어났다고 꼽는 축구인도 있고, 골감각이 뛰어나다고 꼽는 축구인도 있으며 기술적으로 탁월하다고 꼽는 축구인도 있다. 반면 너무 슈팅을 아낀다고 평가하는 축구인도 있다.

2.3. 플레이 스타일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게터. 득점감각은 차범근이 인정했을 정도였으며 한국의 게르트 뮐러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었다.

등지고 하는 플레이가 뛰어났고 좁은 공간에서 볼간수 능력이 굉장히 좋았다. 원래 미드필더였음에도 골 감각이 뛰어났고 기술적으로 타고났다. 당시 한국 선수들 중 패스 앤 무브를 가장 잘 실천하던 선수 가운데 한 명이었으며 최순호와의 투톱은 1980년대 최고의 공격 조합 중 하나였다.[7] 지금의 공한증을 만든 선수다. 중국전에서 3경기 4골을 넣었을 정도이다. 한쪽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이 약점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노력과 의지로 커버했다. 좁은 시야 때문에 공중볼은 거의 감각으로 슛을 날렸다고 한다.

눈 외의 또다른 단점은 피지컬과 체력. 피지컬이 떨어져서 유럽이나 남미 선수들과의 몸싸움을 견디지 못했다. 동시대의 스트라이커인 최순호가 유럽, 남미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는 피지컬과 스피드, 제공권을 가졌기에 국제 무대에서는 자주 외면받았다. 하지만 세계 수준과 파워에서 거리가 있었을 뿐이고 아시아권에서는 비교적 준수한 편이었다. 좋은 기술과 빠른 스피드로 승부하는 타입이라 큰 단점이 되지는 않았다.

3. 지도자 경력

3.1. 초기

은퇴 이후에는 동의대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1998년 축구특기생 선발과 관련해서 고등학교 감독 등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되며 논란이 일었고,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2천만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1999년 대전 시티즌의 수석 코치로 부임해 김기복 감독을 보좌하였다.

3.2. 대전 시티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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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김기복 감독이 성적 부진 등을 이유로 사퇴하면서 후임 감독으로 코치였던 이태호를 추천하였고, 연봉 1억2천만원에 2년 계약을 맺으면서 구단의 2대 감독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대전은 서동원신진원과 같은 주축 선수들이 대거 팀을 이탈하고 시즌 초 김은중이관우 등의 주축 선수들이 부상에 시달리는 악조건 속에 큰 어려움을 겪으며 리그에서 최하위를 거두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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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구단의 첫 우승을 이끌다.

하지만 FA컵에서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결승까지 진출, 결승에서도 강호 포항을 물리치고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대전 구단 사상 첫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어찌됐든 대전이 FA컵 우승을 거두면서 2002년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게 되면서 감독으로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였으나 16강 조별리그의 문턱을 넘지 못하였다.현재까지 이태호가 대전을 이끌고 아챔에 나간 처음이자 마지막 감독이다. 그리고 리그에서는 2년 연속 꼴찌를 기록했는데, 문제는 리그에서 단 1승만을 거두는 치욕스러운 성적을 거두면서 팬들로부터 상당한 사퇴 압박을 받아야만 했으며, 결국 2002시즌을 끝으로 성적부진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물론 이태호가 거둔 FA컵 우승이라는 성과는 아무나 이룰 수 없는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문제는 그것 이외에 성과는 상당히 실망스러웠기에 대전 팬들 사이에서는 FA컵 우승 하나 때문에 이태호가 지도자로서 상당히 과대평가받고 있다는게 평이며, 만일 이 당시 K리그에 승강제가 있었다면 어쩌면 이때부터 현재까지 쭉 2부 리그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역시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후 대전 시티즌 구단에 이태호보다 더한 최악의 감독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우승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만큼 재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3.3. 이후

이후 2004년 타계한 이길룡 감독의 후임으로 신한고등학교 축구부의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며, 2008년 동의대학교 축구부의 감독으로 복직하였다.

2011년 브라질로 축구유학을 떠난 뒤 두달동안 네팔의 MMC 감독을 맡았으며,[8] 6월 대만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부임하였으며, 1년간 활동한 뒤 3년 계약 연장 제의를 받았지만 열약한 환경을 이유로 재계약을 거절했으며,[9] 이후 K리그 감독 복귀를 추진했으나, 아는 지인의 소개로 한중대학교 스포츠산업학과의 교수로 부임하였다.

2014년 9월 새로 창단된 FK리그 소속의 프로풋살구단 부산 카파 FC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2015년부터는 강동대학교 레저스포츠학과 교수직과 축구부 감독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4. 여담

  • 찢어진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고 한다. 원래는 허구한날 등산복 차림이었는데, 미국 유학중인 아들을 만나러 갔더니 아들이 쇼핑몰에 데려가 청바지를 사준 이후부터 청바지를 즐겨 입기 시작했으며, 또한 언젠가 나훈아가 텔레비전에 나와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노래하는 모습을 인상깊게 봤었는데 그러던 차에 아들의 선물을 계기로 지금까지 청바지를 즐겨 입게 된 것이라고 한다.#
  •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간경화로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50일 뒤에 어머니도 돌아가시면서 큰 충격을 받아 우울증에 걸려 한동안 병원에 다녔다고 한다.
  • 과거 대우시절 경기 도중 남기영과의 충돌에서 눈쪽에 큰 부상을 입고, 실명으로 이어졌다. # 한쪽 눈이 안 보임에도 훌륭한 커리어를 이어갔으니 유상철, 곽태휘, 김은중과 비슷한 케이스.

[1] 석사 학위 논문: 고등학교 축구선수의 걸음걸이 동작이 Instep shooting에 미치는 영향 : 부산시내 고등학교 축구선수를 대상으로(1995)[2] 축구단이 아닌 풋살단이다.[3] 현 우송 중학교[4] 이후 한동안 걸출한 후배가 없었으나 몇 년 후 박건하가 등장, 학교를 다시 정상으로 이끈다.[5] 공중볼은 잘 안 보이는 경우가 많아 거의 감각에 의지해 헤딩슛을 시도했다고 한다.[6] 대한민국은 대회 9위로 아쉽게 8강 실패했다.[7] 이태호가 미드필더에게 공을 받아 2선으로 내려오는 최순호에게 건내고 비워진 1선 공간에 침투, 최순호가 침투한 이태호에게 패스하는 방식은 당시 대표팀의 주요 공격루트였다.[8] 무보수로 일했다고 한다.[9] 이태호의 말로는 대만은 야구와 농구에 밀려서 축구에 대한 투자가 거의 없으며, 훈련도 한달에 두번 정도 밖에 못하고, 그나마 모이면 이런저런 핑계로 10명 정도 밖에 훈련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