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수 李容洙 | |
<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 1928년 12월 13일 ([age(1928-12-13)]세) |
경상북도 대구부 니시키마치니초메 (現 대구광역시 북구 고성동2가) | |
소속 | 일본군 위안부(?~1945)[1], 정의기억연대 |
직업 | 사회운동가, 인권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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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일본군 위안부/피해자로서 위안부 피해 사실을 2차례 미국 정치계에서 공식 증언하였으며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주전장이 이용수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2007년 미국 하원에서 다른 피해자 2명(김군자, 얀 루프 오헤른)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한국 정부나 한국 기존 시민단체 도움 없이 증언하여 미국 하원이 위안부 문제를 개인 매춘이 아니라 강제적 인권 유린으로 공식 비판하는 내용의 결의안 통과라는 엄청난 위업 달성에 공헌하였다.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인 2017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새로 건립된 소녀상은 이용수의 2015년 또 다른 증언으로 가능했다. 이로써 이용수는 위안부 문제에서 본인 명의로 따로 정부 지원금이나 정기 후원금 한 푼 모금하지 않은 개인이 가장 큰 외교적 업적을 2번이나 달성한 효율적인 기록을 남겼다.
2. 생애
1928년 12월 13일 경상북도 대구부 금정2정목(현 대구광역시 북구 고성동2가)에서 6남매의 고명딸로 태어났다. 본적은 성주군 벽진면 봉계동이다. #&@ 부잣집 유모 생활을 하는 어머니 대신 남동생 4명을 키웠다고 한다.[2]2007년 2월 15일, 미 하원 외교위에서 열린 "종군위안부 결의안(HR121호)"에 대한 회의에 김군자(金君子; 1926~2017), 얀 루프 오헤른과 함께 공동 증인으로 참석하였다. 기사 참조 이용수는 당시 증인 3인 중 현재 유일한 생존자다.
2012년 민주통합당의 비례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 그러나 공천 과정에서 비례대표 후보 명단에 들지 못하고 탈락했다고 한다. 참고로 처음에는 새누리당에 공천 신청을 했는데 연락이 없어서 민주통합당에 신청했다고 한다. #
201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인근 세인트메리 파크에 한·중·필리핀 위안부 기념물을 세우기 위한 공청회에 유일한 위안부 피해자 증인으로 참석,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는 반대파를 꺾는 핵심 역할을 했다. 이 소녀상 실제 건립은 2017년으로서 한국 내 기존 소녀상 철거 논의를 포함한 한일 합의 이후였기에 일본 정부의 분노는 평소보다 심했다. 샌프란시스코 소녀상 건립은 특정 민족을 초월한 국제적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라서 특정 정치성이나 집단에 소속되지 않은 피해자 출석이 필요했는데 이용수 할머니 이외에는 힘들었다. 대부분 고령이거나 사망하기도 했고 생존한 분들은 언론노출을 꺼리거나 특정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소녀상이 서 있는 공원은 근처에 손문 동상도 서 있을 정도로 차이나타운 인근 중국계 세력권이고, 3개국 소녀를 함께 묘사해서 앞으로 한국, 일본, 미국 정부 집권당 변화와 관계없이 철거가 불가능한 안전권인데 3명의 가상의 소녀들과 함께 한복을 입은 최초 고발자 김학순 할머니의 전신상까지 묘사한 4인 동상이라는 점에서도 다른 위안부 소녀상들을 뛰어넘는 최고의 역사적, 조형적 가치를 지녀서 샌프란시스코 소녀상 건립 자체가 미 하원 위안부 결의안과 쌍벽으로 역사에 남을 중요성이 있는데, 이 두 건의 위업에 모두 이용수 할머니가 주도적 역할을 한 셈이다.[3] 이용수 할머니가 국내외 어느 정치적 집단과도 거리를 둔 중립적 입장을 지켰기 때문에 가장 까다로운 미국 정치인들의 검증을 통과해서 가능했다. 샌프란시코 소녀상 위키피디아, 샌프란시코 소녀상 사진
2017년 촛불집회에 3월과 5월 참가했다. 98주년 3.1절 촛불집회 “박근혜 탄핵하고, 진정한 광복 맞자”
2017년 5월 성주 사드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 #
2017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가 개봉되면서, LA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YTN
영화 주전장은 최초 위안부 피해를 증언한 김학순과 일본 정부 전체의 집요한 반대를 꺾고 샌프란시스코 소녀상 건립을 가능케 한 증언을 한 이용수 이렇게 두 피해자의 모습을 중심에 놓고 각국 활동가들이 위안부 문제로 비대면 논쟁하는 구조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빈 방문을 하면서 만찬을 가졌을 때, 초대되어 트럼프 대통령과 포옹을 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사실 이용수 할머니는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에 비하면 아직까지 건강한 편이라 대외활동을 많이 하는 편이며,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을 대표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2015년 위안부 합의 논란 당시 방송에 나와서 우리 46명 할머니들은 얼마를 주고 그런 것은 원치 않는다며 찬성하는 할머니들은 치매라고 주장했다. 진행자가 이용수 할머니 같은 의견도 있으나 이 정도면 받아들이자는 할머니들도 계신다고 하자 이용수 할머니는 '치매'라고 단언하며 모두가 반대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의견이 갈린다는 왜곡보도 말라고 엄중 경고하여, 위안부 할머니들의 뜻으로 판단한 대중들은 합의 반대 여론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다만 자의든 타의든 46명 피해자 중 36명이 수령하거나 수령 의사를 밝히기는 했다. #[4][5]
2020년, 정의기억연대 및 그 전임 이사장인 민주당 비례대표 당선자 윤미향, 대구 위안부 피해자 진상규명 시민단체 등 다방 면의 관련조직들의 과오를 모두 폭로했고, 과거에 조계종 계열 피해자 보호시설 나눔의 집 운영자측을 엄하게 야단친 것까지 뒤늦게 보도되면서 국내외 난리가 났다. 생존 피해자 중에서도 오랜 세월 국내외 독립적 활약이 쟁쟁한 분의 말이라서 거론된 모든 단체가 일시에 정당성을 의심받고 있다. 국민들은 기부금을 낸다면 역사의 증인인 할머니들에게 어느 정도는 금전적 지원이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정의연 측은 금전적 지원은 국가만 할 일이고 자신들은 연구 등만 한다고 발표해서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국민들은 할머니 개개인에게 지원하고 싶어도 할머니들 예민한 개인정보라서 불가능하다.
여당 비례대표 당선자 문제라서 청와대부터 일본 산케이신문까지 윤미향 사퇴 여부부터 수요시위 중단 여부, 일본대사관터 앞 소녀상 철거 여부까지 다방면 영향에 관심을 가지지만, 이용수 할머니 본인이 대구 수요시위에 돌발 참석하여 소녀상 옆 의자에 앉아 직접 발표한 최종 입장은 회계부정은 수사당국이 다룰 일이지 본인은 상관하지 않겠으며 '함께 계속 투쟁하자' 라고 한다. 기사 참조
제 21대 국회 시작 전인 2020년 5월 19일, 윤미향은 모종의 방법으로 이용수가 혼자 머무르던 호텔 객실정보를 입수하고 불시에 모 교수 등 여러 명을 대동하고 방문하여 "눈물어린 용서와 포옹으로 오해 해소"테마의 경향신문 고희진, 박홍두 기자 명의 단독보도가 나갔으나, 이용수는 이 보도를 강경히 부인하고 이 초대도 예고도 없던 방문으로 위압감을 느꼈다고 비난하였다. 윤미향 일행의 불시의 방문 당시 이용수는 자신의 비공식적 수양딸로 알려진 대구 소재 친 민주당 성향 시민단체 소속 여성에게 즉시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리고 서둘러 호텔로 와달라고 부탁했으며, 이 여성이 전화를 끊지 않고 호텔로 향하는 동안 청취한 윤미향과 이용수의 대화에서 '용서'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었으며, 자신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 객실 문 앞에서 윤미향의 일행에게 제지당해 큰 소리로 항의해야 했으며 마침내 객실 문이 열렸을 때 이용수가 손을 떨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이용수를 포함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옛날 강제로 신체를 구속당한 경험 탓에 일반적인 상황도 큰 부담을 느끼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는데도 다른 사람도 아닌 30년 동안 위안부 피해규명 활동을 한 윤미향이 이런 행동을 했다는 자체가 놀랍지만 언론은 윤미향의 이런 심각한 사생활 침해 논란보다도 기부금 등 재화 관련 논란에만 집중하는 미숙한 보도행태를 보였다.
여당 전체가 윤미향을 감싸는 가운데 이용수 할머니는 여당 지지자들로부터 극심한 사이버 인신공격을 받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용수 할머니는 위안부 운동의 역사" 라고 말했지만, 이용수의 요구 사항대로 윤미향을 퇴진시킬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2020년 6월, 민주당 김민석의원의 친형인 경희대학교 교수 김민웅은 이용수를 공격하는 발언을 남겨 구설수에 올랐다. 기사 "이제 저는 선생님을 인정하기 너무나 어렵다. 부디 이제 가실 길을 알아서 혼자 가시기 바란다. 선생님께서는 지난 30년 운동의 역사를 모두 파괴하는데 앞장섰다." 위안부 피해자더러 위안부 운동 하지 말라는 역대급 발언인데, 이후 김민웅 김민석 형제는 사죄를 하지 않았으며 이는 대한민국 국적자 중 식민지근대화론자가 아닌 사람이 위안부 피해자를 비난하고도 사과하지 않고 무사히 버틴 첫 사례로서 의미심장하다.
위안부피해자가족대책협의회는 이용수, 길원옥 할머니를 공동대표로 추대한다고 밝혔다.#
6월 26일 오후 3시에 이용수 할머니와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이 대구의 한 카페에서 만남을 가졌다. 이용수 할머니는 전화 인터뷰를 통해 7월 중에 이나영 이사장과 같이 대구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겠다고 밝혔으며, 이나영 이사장은 할머니가 수요집회에도 계속 참석할 의지를 보였다고 밝혔다. 이 만남은 이용수 할머니가 먼저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고, 쉼터 소장의 죽음을 이용수 할머니가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
7월 3일 정의기억연대에 따르면, 대구의 모 찻집에서 이용수 할머니와 이나영 정의연 이사장 및 위안부 관련 시민다체 대표들 몇몇이 만났고 이 자리에서 이용수 할머니는 수요집회와 위안부 평화비 건립 운동은 계속 되어야한다고 공식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다만 현재의 시위 방식을 바꿔서 한일 청년 세대 교류와 역사 교육에 방점을 맞춰야한다고 했으며, 소녀상 건립에 더욱 힘을 쏟아 도쿄 한복판에까지 세워야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 얼마 후 7월 9일엔 서울 종로구 대사관 앞의 소녀상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고 있는 반아베반일 청년학생공동행동 회원들을 찾아가 그들을 격려했다. #2 #3 같은 날 오후에는 전임 나눔의 집 원장이자 현 조계종 총무원장인 원행 스님을 깜짝 방문하여 그가 위안부 할머니를 극진하게 대접했었고, 현재 나눔의 집 논란에서 원행 스님과 관련된 논란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라며 그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4
7월 10일에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조문한 것이 확인됐다.
8월 14일 충남 천안 국립망향의동산에서 열린 기림의 날 기념식에서 다시 한번 수요집회 폐지 의견을 밝혔다.
9월 29일에 이용수 할머니는 기사에 악플을 단 악플러들의 사과 편지를 받고 고소를 취하했다.# 이용수 할머니가 고소했던 8명 중 2명은 댓글을 삭제하거나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고, 나머지 6명은 경기도에 사는 50대~70대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
2022년 8월 4일, 한국을 방문한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을 만나기 위해 국회 사랑재에서 대기하던 중 경호원들의 과잉 제지로 낙상 사고를 당했다. #
2023년까지만 해도 수요집회에 직접 참석해 발언하는 등 대외활동을 보였으나 2024년 들어 건강 악화로 직접 활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3. 모집 과정에 대한 증언
그녀의 위안부 피해 증언들은 다음과 같다.3.1. 1992년 첫 번째 증언
KBS 〈생방송 여성, 나는 여자정신대: 민족 수난의 아픔을 딛고서〉
1992년 8월 15일 방영
오숙희(사회자): 또 여기 아직 얼굴 모습을 드러내기가 어려운 사정예 계신 한 분이 나와 계신데요. 어떻게 정신대로 가시게 됐습니까?
이용수: 네. 저는 그때 나이 열여섯 살인데, 헐벗고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인가 원피스 한 벌하고 구두 한 켤레를 갖다 줍디다. 그걸 주면서 가자고 그래가지고, 그걸 받아가지고 아주… 그때는 뭐 그런 줄도 모르고 좋다고 따라갔습니다.
오숙희: 아, 그래서 꼬임에 넘어가셨군요?
3.2. 1993년 증언
내 동갑내기 친구 중에 김분순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그 집에 놀러가니까 그 어머니가 “너 신발 하나 옳게 못 신고 이게 뭐냐, 애야, 너 우리 분순이하고 저기 어디로 가거라. 거기 가면 오만 거 다 있단다. 밥도 많이 먹을 거고, 너희집도 잘 살게 해준단다.”라고 했다. 당시 내 옷차림새는 헐벗고 말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 분순이가 우리 집 봉창을 두드리며 “가만히 나오너라” 하며 소곤거렸다.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분순이를 따라 나갔다.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냥 분순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통치마에 단추 달린 긴 면적삼을 입고 게다를 끌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마흔이 좀 안 되어 보였다. 국민복에 전투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옷보퉁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그 속에 원피스와 가죽 구두가 있다고 했다. 보퉁이를 살짝 들쳐 보니 과연 빨간 원피스와 가죽 구두가 보였다. 그걸 받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 나까지 합해 처녀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 길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경주까지 갔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기차를 타보았다.
경주에 가서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 여관 앞 개울가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산비탈에 보라색 꽃이 한송이 피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꽃이어서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니까 도라지꽃이라고 했다.
거기서 이틀밤인가를 지냈는데 또 여자 두 명을 더 데리고 왔다. 그래서 여자가 모두 일곱 명이 되었다.
경주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를 지나가게 되었다. 달리는 기차의 깨진 유리 차창 저편에 우리집이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집생각이 나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난 우리 엄마에게 가야 한다고 하면서 막 울었다.
옷보퉁이를 밀치며 이거 안 가질 테니 집에 보내 달라고 하며 계속 울었다. 울다가 지쳐서 곯아떨어졌는데 얼마나 갔는지 모르겠다.
여러 날을 간 것 같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군위안부들(1) 』, 한울, 1993, p. 124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 분순이가 우리 집 봉창을 두드리며 “가만히 나오너라” 하며 소곤거렸다.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분순이를 따라 나갔다.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냥 분순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통치마에 단추 달린 긴 면적삼을 입고 게다를 끌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마흔이 좀 안 되어 보였다. 국민복에 전투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옷보퉁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그 속에 원피스와 가죽 구두가 있다고 했다. 보퉁이를 살짝 들쳐 보니 과연 빨간 원피스와 가죽 구두가 보였다. 그걸 받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 나까지 합해 처녀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 길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경주까지 갔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기차를 타보았다.
경주에 가서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 여관 앞 개울가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산비탈에 보라색 꽃이 한송이 피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꽃이어서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니까 도라지꽃이라고 했다.
거기서 이틀밤인가를 지냈는데 또 여자 두 명을 더 데리고 왔다. 그래서 여자가 모두 일곱 명이 되었다.
경주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를 지나가게 되었다. 달리는 기차의 깨진 유리 차창 저편에 우리집이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집생각이 나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난 우리 엄마에게 가야 한다고 하면서 막 울었다.
옷보퉁이를 밀치며 이거 안 가질 테니 집에 보내 달라고 하며 계속 울었다. 울다가 지쳐서 곯아떨어졌는데 얼마나 갔는지 모르겠다.
여러 날을 간 것 같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군위안부들(1) 』, 한울, 1993, p. 124
대구에서 우리를 데려간 남자가 위안소의 주인이었다. 우리들은 그를 ‘오야지’라고 불렀다. 여자들 중에서 내가 제일 어렸다. 분순이는 나보다 한 살 더 많았고, 다른 여자들도 열여덟, 열아홉, 스무 살 정도 되었다. 방에 들어가라고 하는데 안 들어가려고 하니까 주인이 내 머리끄댕이를 잡아끌고 어느 방으로 데려갔다. 그 방에서 전기 고문을 당했다. 주인은 지독하게 독한 놈이었다. 그는 전화 코드를 잡아 빼서 그 줄로 나의 손목, 발목에 감았다. 그리고는 “고노야로” 하며 전화통 손잡이를 마구 돌렸다. 나는 눈에 불이 번쩍 나면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울부짖으며 두 손으로 싹싹 빌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전화기를 돌릴 때 나는 견디지 못해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깨어나 보니 물을 끼어 얹었는지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군위안부들(1) 』, 한울, 1993, p. 127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군위안부들(1) 』, 한울, 1993, p. 127
여성가족부의 일본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에 93년 증언 전문이 기록되어 있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더이상 남아 있지 않다. 첫 번째 증언은 '취업 사기'에 가까운 증언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용수가 당시 기준으로도 미성년자고, 위안부가 되는 데 본인과 부모 포함 가족 동의가 없었고, 속임수에 의한 인신매매도 강제 납치로 분류되며, 위안부가 근무하는 지역은 민간인 출입이 자유로울 수가 없는 전방이라는 점에서 이용수를 일본 제국에 의한 납치 피해자로 인정할 수 있다. 영화 '귀향'에 반영된 일본군에 의한 강제납치 증언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에 내용의 일부가 남아있다. e역사관 페이스북 페이지
3.3. 2004년 증언
대구 고성동에서 16살까지 살았고, 1943년 어느 여름 16살 때 코와 입밖에 보이지 않는 모자를 쓴 일본 군인이 동네 언니 4명들과 함께 우리를 강제로 끌고 갔다. 어디로 가는지 왜 데려가는지도 몰랐다.
창문이 없는 기차에 우리를 태웠는데, 가지 않겠다고 하니 조센징이라고 하면서 구둣발로 밟고 때렸다. 집에 가겠다고 하니 또 때리더라. 너무 많이 맞아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창문이 없는 기차에 우리를 태웠는데, 가지 않겠다고 하니 조센징이라고 하면서 구둣발로 밟고 때렸다. 집에 가겠다고 하니 또 때리더라. 너무 많이 맞아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3.4. 2006년, 2007년 증언
- 2006년
열다섯 살이던 1942년경 집에서 자다가 일본군에 의해 대만으로 끌려갔다.
동아일보
- 2007년
16살에 집에서 자다가 군인에게 납치됐고 기차를 통해 위안소로 끌려갔다.
3.5. 2014년 증언
- 7월
15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일본 군인이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무서워서 도망갔는데 또 다른 일본 군인에게 붙잡혀 기차를 타고 대만의 한 일본군 부대로 끌려갔다.
뉴시스 - 9월
16세에 원피스와 빨간 가죽 구두를 보여주며 '배불리 먹여주고 집도 잘 살게 해주겠다'는 일본 남자의 말에 속아 친구와 함께 따라 나섰다. 중국을 거쳐 대만 위안소로 강제 동원됐다. 위안소의 주인이었다. 이 주인에게 전기고문도 당했다.
# (링크는 아시아경제의 인터뷰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3.6. 2017년 증언
열다섯 살에 집에서 자다가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다.3.7. 증언에 대한 의문과 반론
박원순 서울시장 성추행 의혹에 대해 피해자의 증언과 정황만으로는 확정할 수 없다며 '피해자'가 아닌 '피해 호소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나왔는데, 이에 대해 성범죄 전문 변호사는 "성범죄로 인한 정신적 상해는 물증이 존재하기 힘든 측면이 있어서 피해자의 객관적이고 일관된 진술이 크게 작용한다. 피해자의 정신과 상담내역과 일관된 진술은 충분한 증거"라고 설명했다. # 그런데 이용수의 증언은 사소한 오류 수준이 아닌 핵심적인 부분에서 증언이 극적으로 달라진다는 점에서 논란이 생긴 것이다.대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세부 사안이나 디테일한 부분의 증언이 달라질 수 있으나, 핵심적인 부분만큼은 꿈에서 악몽으로 계속 등장하여 재현될 정도로 일관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나므로 핵심 부분만큼은 일관되게 마련이다. 만약 납치를 당했다면, 그것은 10대 여성에게는 매우 큰 충격이었을 것이므로 (성인 남성이라도 마찬가지) 적어도 납치만큼은 일관적이어야 하는데, 이 부분의 증언이 극적으로 바뀐다. 오히려, 1993년 첫 증언에서 나온 '빨간 원피스와 가죽 구두'가 2014년 증언에 뜬금없이 또 등장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첫 증언에서는 어린 마음에 빨간 원피스와 가죽 구두가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며 따라나섰다고 진술했는데, 원래 엄청 좋았던 순간이나 끔찍했던 순간만큼은 잘 안 잊혀지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설령 처음엔 강제 납치가 너무 끔찍하여 생각하기도 싫어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에 혹해 따라갔다고 진술했다고 쳐도, 이후엔 '강제 납치설'로 진술을 번복하여 강제 납치로 굳어진 마당에 뜬금없이 2014년에 또 '빨간 원피스와 가죽 구두'를 언급하며 따라갔다고 증언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 일본 등에서 군국주의자들 또는 역사 수정론자들 중 이용수 증언의 세부 내용 차이를 지적하며 자발적 매춘 또는 단순 민간 인신매매 피해자라고 보는 시각도 일부 있었지만, 미국 하원 포함 미국 정치계 공개 청문회에서 2번이나 이용수가 일본 정부가 묵인하고 본인이나 부모 동의 없는 미성년자 강제 연행 피해자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미국 정치계의 이런 2차례에 걸친 검증 통과는 국적 초월 전체 위안부 피해자 중 이용수가 유일하다.
나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쓴 책을 분석해도 시간, 장소 등의 오류가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그걸 가지고 독일은 물론 이스라엘 내부에서 생존자를 의심하는 일은 없다. 생존자가 당시의 극한을 넘는 신체적, 심리적 수난과 가해자 개개인에 대한 증오까지 매번 재생해야 하는 증언 과정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근태나 상벌 기록 같은 증빙이 남는 직업 활동도 아닌 기간을 떠올리는 과정을 일반생활 기억과 똑같이 비교할 수는 없다. 피해자가 과거를 잊거나 가해자 개개인을 용서하거나 당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일시적으로라도 잘 대해준 특정 가해자를 고맙게 기억하는 이유는 증오로부터 자신의 평정을 보호하려는 생존 욕구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강간당한 여성의 진술에 진정성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 진술이 현실적으로 믿기 어렵고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를 겪은 주체가 자신의 경험을 진술할 때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면이야말로 그 진술에 진정성이 깃들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슬라보예 지젝
'진정성' 자체는 신뢰할 수 있을지언정, 진술 하나하나가 다 '팩트'는 아닐 수도 있다. 법원에서 강간 사건 피해자들의 증언은 가해자가 강간을 했냐, 안 했냐가 중요하고 나머지는 부가적이므로 지엽적이거나 사소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다 기억할 필요도 없고,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또 강간이라는 큰 충격에 정신적 피해로 인한 기억 왜곡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다소 횡설수설할 수 있는 부분도 감안해야 하기에, 굳이 증언 하나하나를 현미경 검증으로 팩트체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용수의 주장은 개인간의 사적인 범죄가 아닌 국가의 역사와 관련된 증언이므로 더욱 세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통일 이슈] 거짓·과장·왜곡 탈북자 증언 ‘밥벌이 메커니즘’을 고발한다 -신동아
탈북자와 위안부의 진술은 비슷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우선 진술의 팩트체크가 어렵다는 점, 또한 이들을 필요로 하는 정치 세력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북한 인권 실상의 아이콘이던 신동혁의 진술 일부가 거짓으로 밝혀지자 그것을 근거로 '가짜 탈북자'로 모는 여론도 있던 반면, 그의 진정성과 북한 인권의 본질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변호하는 여론도 있었다.
탈북자들의 증언이 과장되거나 왜곡되는 원인으로는, 그들이 자극적인 발언을 내놓기를 원하고 그러지 못하는 탈북자들을 갈음하는 사회구조가 꼽힌다. 예를 들어 신동혁도 자극적인 진술로 인해 뜬건데, 만약 진술이 약하다면 사회에서 외면을 받는다는 것이다.
실제 신동혁처럼 시위 등에 나와 앞장서는 탈북자들을 그다지 탐탁지 않아하는 탈북자들도 존재하는데, 위안부 운동의 '대모'로 꼽히는 김문숙 부산 정대협 이사장은 윤미향이 정대협 대표 맡은 뒤 돈벌이에 열중하며 위안부 퍼포먼스화를 했다고 강하게 성토했다. # 옷을 잘 차려입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카메라 앞에서 영웅처럼 퍼포먼스를 하는 방식이 맞지 않아 갈라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서는 점점 자극적인 진술에 대한 압박을 직간접적으로 받기 때문에 기억이 왜곡될 소지가 있다. 이 부분은 한국 전통적 고정 관념의 오류로 볼 수도 있다. 현대 서양에서는 성폭력 포함 모든 폭력의 피해자가 옷을 잘 차려입고 헤어스타일도 돈 들여 새로 한 모습으로 당당히 인터뷰하고 '용감하다(brave)'라는 찬사가 붙는 등 영웅 대접을 받는다. 옷을 잘 차려입는 부분은 서양에서는 인터뷰의 예의로 본다.
경찰서에서도 진술만으로는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강요나 부추김 등으로 왜곡될 수 있기에 수사의 '참고'만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특히 과거엔 경찰이 "이런 거 있었지?" 물어보며 못 봤다고 하면 "있었잖아. 잘 기억해봐" 이런 식으로 유도 질문을 하여 허위 진술을 끌어낸 사례도 많았기에 더더욱 진술만으로는 단언할 수 없게 되었다. 실제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이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주장하던 정의기억연대도, 막상 칼끝이 자신들을 향하자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은 정의기억연대 측에 악감정을 가진 단체가 부추겨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TBS 진행자인 김어준은 이용수의 폭로에 대해 '냄새가 난다'며 배후설을 주장했다가 고소당했는데(무죄 판결), 만약 정의기억연대의 주장대로 이용수가 이권과 결탁하여 누군가의 부추김에 의해 거짓말을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그간 이용수의 증언들은 정의기억연대가 부추긴 것이었냐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특히 일본에서 이용수의 증언을 위안부 단체가 부추긴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을 때 정의기억연대는 이용수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옹호했는데, 이용수와 오랜 세월 함께하며 가장 잘 알고있을 정의기억연대가 너무도 쉽게 '누군가 부추긴 것'이라고 단언할 정도면, 이용수가 애초 못 믿을 사람이거나, 혹은 정의기억연대가 정의롭지 않은 거짓말을 했거나 둘 중 하나다. 물론 이용수는 김어준의 배후설에 대해 내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을 때부터 이용수 할머니가 첫 증언을 할 때까지 약 50년의 시간이 흘렀다. 또한 약취 및 유인이든 납치이든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본군 위안부가 되었고, 이러한 사건들은 어린 그에게 엄청난 정신적 트라우마를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피해자에게 증언의 일관성을 강요하는 것은 피해자의 정신적 고통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증언의 신빙성이 절대적인 경우는 증거가 증언밖에 없거나 피해자 한 사람의 증언 밖에 없을 때이다. 피해자 한 사람의 증언이 절대적인 '일반적인' 성폭행 사건과 일본군 위안부 성폭행과 같은 '집단적' 성폭행을 같은 선상에서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같은 장소나 같은 환경에서 겪은 이야기라면 객관성이 확보가 되므로 신빙성이 있다. 위안부로서 일본군과 같이 지낼 때 경험은 공유되는 부분이 있으니, 교차 검증이 가능하므로 그 부분에 대한 논란은 크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이용수의 증언의 신빙성을 따지는 사람이 만약 집단강간당하고 그 사실을 40년 숨기도록 강요받은 뒤에 증언하면 증언 세부가 몇 번이나 정정될 것인지 역지사지로 헤아려 볼 수 밖에 없는데, 선입견과는 달리 최근 여러 전쟁, 내란 등 분쟁 지역 조사 결과 집단강간 피해자는 남녀노소 모두를 포함하며 UN은 분쟁 지역 남성 응답자 중 강간당한 피해자가 15%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UN 성폭력 남자 피해자 조사결과 심지어 사라예보처럼 인종 청소가 목적인 분쟁지역 수용소 조사 결과는 남성의 강간 피해 경험율이 80%에 이를 정도로 기사 위안부 피해자의 고통은 보편적인 문제인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집단 강간 피해자의 증언에서 세부를 꼬투리 잡지는 않는다.
4. 귀국 후 삶에 대한 증언
4.1. 93년 증언
대만에서 2년 동안 있다 귀국 뒤 술집 종업원, 가정부 등 밑바닥 생활을 떠돌다가 가족들의 끈질긴 권유로 지난 87년 60살의 나이로 8남매를 둔 75세 노인의 후처로 들어갔다. 때늦었지만 면사포도 써보고 혼인 신고도 처음이고 또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그러나 5년 동안 살면서 돌아온 것은 치매 걸린 남편의 행패와 폭력, 가족들의 냉대뿐으로 지난 3월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이혼하고 말았다. #
4.2. 99년 증언
일제 당시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야학에서 한문 등을 배웠으나 43년 16세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대만에서 고생하다 해방 이듬해인 46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결혼을 하지 않고 보험회사 등에 다니며 홀로 지냈다. #
5. 도와준 일본 군인에 대한 증언
아우슈비츠 생존자 중에서도 극히 일부지만 나치 간수에게 특혜를 받아 자신과 가족, 친구의 목숨을 건지거나 심지어 특정 간수와 연애에 가까운 어느 정도 평등한 성적 관계를 유지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아우슈비츠 러브 스토리아우슈비츠는 나치가 싫어하던 집단을 그 혼혈까지 말살하는 완전한 인종 청소를 목적으로 했기에 그런 성관계는 상부에 보고될 경우 양쪽 모두에게 죽음(수용자는 가스실, 독일군은 최전방행)을 의미했고, 나치는 간수가 금욕할 필요 없도록 성적 서비스 시스템을 갖추었으며, 해당 간수가 동료보다 다른 수용자들에게는 특별히 너그럽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간수는 자신이 혐오하던 타인들이라도 그들의 죽음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애완동물처럼 마음을 쏟을 존재가 필요했을 수도,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가장 잔인하고 이기적인 인간도 심리적 트라우마를 받을 수 있고, 인간이 심리적 트라우마를 처리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이런 관계는, 종전 후 그 독일군이 전쟁 범죄로 처형될 상황에서 특혜로 목숨을 건진 생존자가 자진해서 증인으로 나와 선처를 청함으로써 알려진다. 민족이 도살당하던 상황, 서로 당시 성관계가 금지된 상황에서 은밀한 관계로 민족의 원수로부터 특혜를 받아 목숨을 건졌다는 과거를 공개한다는 게 워낙 부담스러운 일인데도[6], 생존자가 전후 그 독일군을 살리고자 자기 신원을 노출시켰을 정도라면 실제로는 이런 경우가 더 많았을 수도 있다. 현재는 이스라엘 포함 어디에서도 이런 이유로 생존자를 비난하지 않으며 생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영웅으로 대우한다.
한편 위안부는 아우슈비츠와 반대로 성관계를 의무적으로 가져야 했기에 상황은 더욱 복잡했다. 여러 증언에서 일본군 전체에 카미카제 조종사들도 일과의 일부로서 매일 구타당했을 정도로 구타가 만연했으며, 위안부는 이런 군대 구타 문화의 최하위 약자로서 성관계에 순응해도 군인들이나 위안소 관리자에게 수시로 구타당했음을 알 수 있다. 계급이 아주 높은 일본군과 유사연애를 하다가 드문 행운으로 귀향 특혜를 받은 위안부 피해자 증언도 있지만, 대부분은 특정인과의 유사연애를 해서 받는 특혜는 구타를 모면하거나 덜 맞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최초로 알려진 오키나와 위안부 배봉기 증언집에 따르면 동료들 중 용모나 처세술 좋은 사람은 계급이 비교적 높은 일본군과 유사연애 상대로 알려짐으로써 다른 군인들로부터 학대받을 확률이 낮았다. 이런 비공식적인 특혜받던 동료들도 다수와의 성관계는 계속해야 했던 것으로 보이며, 전쟁 막바지엔 남들과 다를 바 없이 폭격으로 죽을 정도로 특혜는 미약했다.
5.1. 98년 증언
16살 때 일본군 막사에 들어가지 않으려다 두들겨맞고 초주검이 되어있는데, 21살 된 이 장교가 데려가 보살펴줘서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 장교는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죽으러 간다"며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대만에 가서 이름도 모르는 장교였지만 인형에 '하세가와'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영혼 결혼식을 치렀다. 중앙일보위안부 출신 할머니 일본군 장교와 '영혼 결혼식'69세의 위안부 할머니가 전쟁터에서 만난 일본군 장교와 뒤늦게 '영혼 결혼식'을 올렸다.
1944년 16세의 나이로 일본군 위안부로 대만 (臺灣) 으로 끌려갔던 이용수(李容洙·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할머니는 지난 20일 54년 만에 지옥 같았던 대만 종군위안소를 다시 찾았다.
종군위안부 신분으로 당시 사경을 헤매던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이름도 모르는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출신 일본군 장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이 사연을 전해 들은 일본 역사연구가들과 대만 국회의원 세치다(謝啓大) 등이 두 사람의 '재회' 를 추진, 李 할머니의 기억을 더듬어 위안소 자리를 찾아내 지난 22일 위령제를 올리고 한국에서 준비해간 두 사람을 상징하는 인형을 놓고 영혼결혼식 의식도 치렀다.
李할머니는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은 저주해 마땅하지만 그이의 인간애는 어떤 이념으로도 지울 수 없다" 고 말했다.
5.2. 2015년 증언
17살에 가미카제 부대 안에 있는 위안소에 끌려가 어린 일본군인을 만났다. 그 군인은 위안소에서 맞고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나에게 도움을 주고 '도시꼬'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군인의 이름은 '하야까와 기꾸쇼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야카와는 어느 날 저녁 "내일 죽으러 가야 된다"고 하면서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하야카와는 "도시꼬, 너의 부모별도 있고 나의 부모별도 있어. 내가 내일 죽으면 별이 하나 떨어질 거야"라고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하야카와는 다음날 보이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1945년 5월, 하야카와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죽었다.6. 정의기억연대 고발 기자 회견
자세한 내용은 정의기억연대 위안부 피해자 이용 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7. 논란
7.1. 위안부 피해증언 신빙성 의혹
1993년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힌 최초의 증언 이후 여러 차례 증언을 하면서 증언이 자주 바뀐 점을 들어 일각에서는 증언의 신빙성 문제를 언급하며 정말 위안부가 맞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존재하였다.[7]과거 이용수 할머니는 미국 정치계에서 이미 두번 검증을 통과한 사례가 있다. (미 하원 위안부 결의안, 샌프란시스코 소녀상 설치)
미국 청문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을 반대한 미국 의원들도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 신빙성을 가지고 반대한 게 아니라 일본이 과거에 사죄를 했으니 또 추궁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반대했다.[8]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주전장에서는 와타나베 미나 소장이 "피해자 주장의 세부가 달라져도 핵심은 늘 동일하다. 자의가 아닌데도 위안부가 되었다는 점이다." 라고 말했다.
과거 《제국의 위안부》 도서 발간으로 논란이 된 박유하 세종대 교수조차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며 이용수 할머니가 가짜라는 건 엉뚱한 소리라고 말했다. 게시글
일본어 위키백과의 이용수 문서에서는 출처 짜집기를 통해 이용수를 가짜 위안부라고 왜곡하며 피해자를 모욕하고 있다.
거기다 애초에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한 모든 위안부 할머니들이 현재 연세가 고령의 나이인 것과 위안부로 끌려갔을 때 엄청난 구타와 강간으로 인해서 다른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PTSD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온갖 음모론을 펼치는 자들이 더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이용수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열었을 당시에 자신이 위안부에 끌렸갔었을 때랑 일본의 궤변 및 위안부 관련 사건에 대해서 년도와 시간까지 고령의 나이임에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시점에서 이미 가짜 위안부가 아니다.
7.2. 정의기억연대 위안부 피해자 이용 논란 관련
정의기억연대 위안부 피해자 이용 논란 관련 수사 재판 과정의 제1심에서 8개 혐의 중 횡령 관련해서 1700여만원을 사용한 부분에 대해서 유죄 판결이 나왔으며 나머지는 모두 무죄 판결이 나왔다.재판부는 "정대협은 십시일반 모은 국민의 돈으로 운영되는 단체로 누구보다 공공으로 운영될 필요가 있었는데 피고인들이 기대를 저버렸다"며 "정대협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와 영향력을 생각할 때 피고인의 죄가 가볍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피고인이 모금한 돈 상당 부분을 정대협 운영에 사용했고 횡령할 목적으로 개인 계좌에 돈을 보관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형사 처벌 전력이 없고 열악한 상황에서 30년간 활동하며 위안부 할머니 피해 회복에 기여했으며 국내 여러 활동가들이 선처를 호소하는 점을 참작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
윤미향과 검찰 측은 1심 판결에 불복하며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항소심 재판부는 횡령액을 앞선 1700만원보다 5배 가량 큰 8000만원으로 인정하였으며 불법 모금, 국고보조금 부정수령 등 기타 혐의들도 상당 부분 유죄 판결했다. 이에 따라 형량도 1년6개월/집행유예 3년의 징역형으로 대폭 상향되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윤미향은 정의연 상임대표로서 아무런 감독을 받지 않은 채 시민들의 후원금과 국가지원금 등을 보관하며 공적 용도의 지출과 사적 용도의 지출을 명확히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들었다”며 “횡령 범행을 저질러 정의연에 후원한 시민들은 물론 단체의 위상에도 피해를 끼쳤다” 라고 일갈하였다.
7.2.1. 비판
정의연과 윤미향 지지자들은 정의기억연대 위안부 피해자 이용 논란 관련 수사 재판 과정의 제1심에서 8개 혐의 중 7개 혐의가 무죄 판결이 나왔고, 1개의 혐의인 횡령 관련해서 1700여만 원을 사용한 부분에 대해서 유죄 판결이 나왔으나 회계 착오에서 비롯된 일에 불과하며 윤미향이 착복할 동기 자체가 없다고 주장했다.1700여만 원 횡령 외의 정의연 관련 해당 논란에서 일었던 상당 부분의 의혹들, 정의연이 할머니들 돈을 갈취 논란, 윤미향 딸의 유학비 1억 관련 논란#, 그 외에 각종 논란들 등등, 총 7개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나오자 민주당계~좌파 진영에서는 현재 보수 정권이 사법계에 압력을 넣고 있고, 검찰 카르텔 논란 등을 보면 법조계가 윤미향에게 결코 우호적일리가 없는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서조차 저정도 판결이 나왔다고 주장하며, 윤미향 또한 1700여만 원조차 횡령한 적이 없다며 항소를 한 상태이다.
해당 판결이 나오며 김두관, 이재명 등 더불어민주당 주요 정치인들이 그동안 본인들조차 의심했다며 윤미향을 비난한 것에 대해 사과하였다.#
그러나 이후 항소심 재판부가 피고인 윤미향에게 1년 6개월/집행유예 3년의 징역형을 선고하면서, 1심 형량을 근거로 한 위 문단은 모두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판결문에는 윤미향이 총 8000만원을 횡령하였음이 사실로 드러났으며, 윤미향의 개인 계좌로 김복동 할머니의 장례비 등 1억 3000만원을 모금한 것도 불법이었다. 또한 인건비를 허위로 계산해 여성가족부 등에서 국고 보조금 6520만원을 부정 수령한 혐의도 모두 서실로 밝혀졌다. 횡령 뿐 아니라 기타 상당 부분의 혐의가 유죄로 뒤집힌 셈이다. 대법원에서도 항소심 형량이 확정될 시, 윤미향은 의원직을 상실하게 된다. 앞서 1심 재판 판결을 바탕으로 윤미향의 억울함을 주장했던 더불어민주당 주요 정치인들은 중형이 선고된 2심 판결에 대해 침묵을 유지하고 있으며, 과거 윤미향의 범죄 의혹을 내부고발한 이용수 할머니를 허위로 비방한 것에 대해서도 어떠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다. [9] #
7.2.2. 옹호
국민의힘의 김기현 대표는 1700여만원 횡령의 유죄를 근거로 “재판부에서 인정된 혐의가 줄어들었다고 위안부 피해자들 후원금을 등친 파렴치 죄가 없는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지적했다. 검찰 측도 균형을 잃은 판결이라며 항소하겠다고 밝혔다.이후 항소심 재판부는 횡령액을 앞선 1700만원보다 5배 가량 큰 8000만원으로 인정하였으며 불법 모금, 국고보조금 부정수령 등 기타 혐의들도 상당 부분 유죄 판결했다. 이에 따라 형량도 징역형 1년6개월/집행유예 3년으로 대폭 상향되었지만, 항간에는 검찰이 주장한 혐의의 중대성을 재판부가 인정하였음에도 검찰의 구형인 징역 5년을 1년 6개월로 감형한것에 대한 아쉬움의 여론도 일부 존재한다.
8. 관련 자료
- 낮은 목소리 - #1, #2, #3
- 시대의 초상 - 위안부라 하지마라 - 이용수 (EBS)
- MBC 느낌표 경림이의 길거리특강
- 美의사당 울려퍼진 '위안부 할머니' 통한의 절규 (연합뉴스)
- 프랑스 의회서 눈물 떨군 위안부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연합뉴스)
- [단독] 최봉태 변호사 "이용수 할머니의 분노, 위안부 청구권에 소홀한 정부 탓"(한국일보)
- 일본군 위안부 참상, 홀로그램으로 ‘영원한 증언’이 되다(경향신문)
- "아베는 역사 산증인 똑똑히 보라" 美의회서 위안부할머니 울분(연합뉴스)
- 위안부 피해 할머니 “문희상 안 집어치워라…일본 사죄 받아야 한다”(서울신문)
- 한글날도 수요시위 계속…"日주장 답습하는 적폐세력 청산해야"(연합뉴스)
- “증오만 가르치는 수요집회 없애야… 성금 어디 쓰는지 몰라”(세계일보)
- 우희종 "이용수 할머니, 기억 왜곡된 듯…검증 필요하다" (중앙일보)
- 이용수 할머니 비판에 윤미향 "할머니 기억 달라졌다" (오마이뉴스)
- 이용수 할머니 발언 파장, 그간 무슨 일 있었나 (오마이뉴스)
- 이용수 할머니는 왜 ‘30년 동행’ 수요집회를 비판했을까 (한겨레)
- 이용수 할머니 “한·일 학생들 왕래 ·교류하면서 역사 배워야” (동아일보)
[1] 증언에 따라 언제부터 있었는지 바뀐다.[2] 가족 중에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람이 있으며 6.25 전쟁 중 사망했다고 한다.[3] 정의기억연대 소녀상과는 관계없는 디자인이며, 여러 나라 여성들이 위안부 피해자가 되었으며 미래세대를 위해 김학순 할머니가 증언하셨다는 내용을 한눈에 알기 쉽게 형상화했다[4] 여기에 대한 해석은 엇갈린다. 과거 1997년 아시아여성기금 수령 당시 석복순 할머니는 "정대협에서는 큰 돈을 요구하는데, 이것이 천년 세월이라면서, 우리는 나이 먹고 자꾸 죽어간다며, 그냥 주는 보상금 받아서 쓰고 죽겠다, 이게 다수''라고 주장하였고, 2015년 합의 때도 받지 말기를 종용했다는 다른 할머니의 증언도 있다. [단독/레이더P] 정의연, 과거에도 위안부 할머니에게 "더러운 돈 받으면 화냥년 된다" 발언 반대로 당시 박근혜 정부 관계자들이 돈을 받도록 회유했다는 일본군 위안부 연구자의 지적도 있다. 성공회대 강성현 교수의 글[5] 단, 전자의 해석이어도 그것이 피해자들이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합의를 일본의 진정한 사죄로 승낙했다는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앞의 석복순 할머니의 증언에서도 나이 때문에 보상금을 받는다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 밝히고 있으며,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취재했을 때 배상금을 받은 피해자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연세가 많았다. 자식들이 돈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울자 겨자 먹기로 이를 승낙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일본 측 사죄의 승낙과는 별개로 경제적, 사회적 약자인 위안부 피해자들이 언제 이 돈을 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기에 승낙한 것으로 보인다.[6] 종전 직후는 독일군과 강압적 성관계를 유지하던 아우슈비츠 생존자가 나치 협력자로 몰려 시베리아 수용소에 끌려가는 일도 있었고 즉결 처형이나 조리돌림도 비일비재해서 특혜 받은 생존자는 남녀 불문 수십 년 그런 과거를 숨겼다.[7] 과거에는 주로 뉴라이트 세력이 의문을 가졌지만 현재 뉴라이트 세력은 의문을 가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의원이 이용수 할머니와의 최초 통화 기억을 언급하며 "제가 아니라 제 친구가요..." 라고 발언한 것이 논란이 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거의 대부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맞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용수 할머니를 비난하는 친 민주당 성향의 사람들은 친일세력이 배후에 존재해 할머니를 이용한다는 음모론으로 비난한다.[8] 고령의 피해자로 70여년 전의 기억을 완전히 가지고 있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기억의 망각이나 트라우마, 인생의 풍파로 일부 축소나 과장, 왜곡은 존재할 수 있고 학계에서도 이용수 할머니의 주장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9] 이러한 행태에 대한 사회적 문제는 내부고발자 항목 4번 문단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