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20 06:07:36

유시언

<colbgcolor=#0047a0> 이명 유해동(柳海東)·김세진(金世鎭)
출생 1895년 3월 15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남면 하회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1] 709번지)[2]
사망 1945년 3월 29일 (향년 50세)
경상북도 안동군
본관 풍산 류씨(豊山 柳氏)[3]
학력 동화학교 (졸업)
보성법률상업학교 (졸업)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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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95년 3월 15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풍남면 하회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709번지)에서 아버지 유형우(柳馨佑, 1875 ~ 1903.3.4.)[4]와 어머니 인천 채씨(1870 ~ 1950.6.5.)[5]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안동군 풍산면 구담동(현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로 이주하였다.[6] 10대에 하회마을에 있던 동화학교(東華學校)를 졸업하였고, 1913년 보성전문학교에 진학하여 1917년 보성전문학교가 격하된 보성법률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고향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동지를 모아 독립운동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919년 5월 중화민국 펑톈성 펑톈시를 거쳐 푸순현 둥서촌(東社村)[7]에 있던 성동학교(盛東學校)에서 조선인 청소년들을 교육하였고, 이듬해인 1920년 상하이시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촉하게 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라는 비밀 명령을 받고 같은 해 유성우와 함께 귀국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긴밀히 상의하였다.

1920년 5월 4일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서중리 장수학(張守學)의 집에서 군자금 115원과 5,000원의 기부서약서를 징수하였다. 1920년 6월 1일부터 2일 사이에 안동군 풍서면 구담동 김기혁(金基爀)의 집에서 군자금 200원을 징수하였고, 상주군 아무개의 집에도 침입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지자, 급히 평안북도 의주군을 거쳐 만주로 피신하여 모금한 군자금 중 일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조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때 함께 활동했던 유성우는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1920년 10월 만주에서 베이징시 완산(萬山)으로 피신한 뒤 김정묵(金正默)·최용덕 등과 함께 집의학교(集義學校)를 설립하였고, 1년간 교사로 근무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1921년 4월부터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어 교직에서 퇴임하였고, 소련 치타로 가서 고려공산당에 입당하고 4개월간 체류하였다. 한편, 1921년 7월 11일[8]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 회부되었고[9], 1921년 11월 29일 대구지방법원의 궐석재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10]

1922년 1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조선인 촌락의 공산당 지도자 이성(李成)의 휘하에서 지방선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4월 상하이시로 귀환하여 조선인 공산당원 모집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 6월 지린성 어무현(額穆縣) 중아학교(中亞學校)에서 조선인 자제들의 교육과 사회주의 선전을 담당하였다. 1922년 10월 지린현(吉林縣)으로 이동하여 의성단(義成團) 단장 편강렬과 협의하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고려공산당 선전부에서 이동휘와 이성 휘하에서 지방선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12월부터 길림교육회의 운영을 맡아 교육 진흥에 주력하였다.

1923년 1월 상하이시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되자 길림교육회 대표로 참석하여 대표위원 겸 헌법 개정위원, 교육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군자금 모집, 독립사상 선전, 외국과의 교섭 문제, 무기 조달방법 등을 논의하였다. 1923년 2월 소련의 지원금 문제를 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부를 비롯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민대표회의 간에서 논쟁이 벌어졌으나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1923년 2월부터 3월까지 논의에서 "여러 단체가 모두 복종만 하면 창조도 할 수 있고 개조도 할 수 있다.", "임시정부는 없이하고 다시 새 정부를 창조함이 통일상 오직 하나의 좋은 계책", "서로 양보함이 옳은 일이라 생각" 등의 발언을 하며 창조파와 개조파의 절충을 시도하였다. 이 때문에 원세훈의 반대를 받는 동시에 안창호·정광호 등과도 대립하였다.[11]

그러나 국민대표회의가 뚜렷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내분이 계속되자, 만주로 되돌아가 독자적인 항일투쟁 방향을 모색하였고, 만주와 시베리아의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조선독립을 위하여 러시아, 중화민국, 미국 등과 군사, 재정, 외교 등의 교섭을 시도하였다. 1923년 6월 15일 지린성 창춘현(長春縣)에 도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비밀리에 업무연락을 추진하던 중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6월 22일 국내로 이송되었다. 1924년 7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주거침입, 강도 등의 혐의에 대해 예심이 있었고[12], 과거 1921년 11월 29일 궐석재판에서 내려진 판결에 대해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924년 8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주거침입, 강도 등의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었고[13], 같은 날 출옥하였다.[14]

그러나 1924년 10월 28일[15]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16] 이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925년 2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혐의에 대해 공소를 취하하여 미결 구류일수 1일이 형기에 산입되었을 뿐[17] 원심이 확정되었다. 1924년 11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다이쇼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강도 혐의로 한 차례 구류 갱신이 결정되었고[18], 이후 복역하였다.

1945년 3월 29일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사망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여담


[1] 인근의 광덕리와 함께 풍산 류씨(豊山 柳氏) 집성촌이다.[2] 1924년 8월 21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에는 하회동 16번지로 기재되어 있다.[3] 서애(西厓) 찰방공파(察訪公派)-치목(致睦)파 26세 시(時) 항렬.[4] 자는 덕경(德卿).[5] 채홍우(蔡鴻遇)의 딸이다.[6] 1921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형사사건부[7]중국 랴오닝성 푸순시 푸순현(撫順縣) 상마진(上馬鎭) 관내에 있었다. 1956년 다훠팡(大伙房)저수지 축조로 인하여 수몰되었다.[8] 1921년 11월 29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에는 1921년 10월 6일에 예심 판결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9] 1921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 형사사건부[10] 1921년 11월 29일 대구지방법원 수형인명부 #1, 1921년 11월 29일 대구지방법원 수형인명부 #2[11]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12] 1924년 7월 9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13] 1924년 8월 21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14] 1924년 8월 21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15] 1924년 10월 30일 대구지방법원 형사사건부에는 1924년 10월 30일로 기재되어 있다.[16] 1924년 10월 28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 판결문, 1924년 10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 #1[17] 1924년 10월 28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 #2[18] 1924년 11월 20일 대구복심법원 집행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