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수포프 공작과 그의 아내 이리나 공주[1]
이리나 공주.
1. 개요
1887년 3월 23일 ~ 1967년 9월 27일Феликс Юсупов, 러시아 제국의 귀족. 괴승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죽인 장본인이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과정
유수포프 가문의 수장, 지나이다 유수포바 여공작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수포프 가문은 흑해-카스피해 스텝에 있었던 노가이 칸국의 무슬림 튀르크 혈통을 이어받았고, 이반 4세 때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다. 러시아 귀족들 중의 상당수가 이런 타타르계이다. 유수포프는 가문의 7대 종주인 어머니 지나이다의 성씨고, 아버지는 펠릭스 펠릭소비치 수마르코프엘스톤(Фе́ликс Фе́ликсович Сумаро́ков-Эльстон)백작이었는데, 어머니가 유수포프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라 외할아버지에 의해 어머니의 성씨와 작위를 따랐다.[2]젊은 시절 미소년 소리를 많이 들었을 정도로 외모가 수려했다. 때문에 딸을 기대했던 부모에 의해 어렸을 때는 여장을 하고 자랐으며, 어느 정도 자란 이후로도 여장을 취미삼았다. 당대 미녀로 손꼽혔던 어머니를 닮은 수려한 외모 덕분인지 여장한 모습이 상당히 예뻐서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영국의 에드워드 7세가 진짜 여자라고 생각하고 찝적거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청년이 된 이후에도 여장을 한 것이 아버지에게 이를 들켜 엄청나게 얻어맞은 뒤로는 여장을 그만두었다.
펠릭스의 형은 젊었을 때 결투 중에 죽었고, 펠릭스가 유수포프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다. 펠릭스의 아내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는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인 크세니아 공주(1875-1960)의 딸이자 알렉산드르 3세의 외손녀로, 펠릭스는 니콜라이 2세의 조카사위가 된다. 펠릭스의 장인 알렉산드로 미하일로비치(애칭 산드로, 1866-1933)는 니콜라이 1세의 막내 아들 미하일의 4남으로, 자신의 아내 크세니아에게는 5촌 아저씨가 된다.
슬하에 딸 이리나 유수포바(1915~1983)를 두었다. 이리나는 1938년에 프랑스에서 러시아계 귀족인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셰레메테프(1904~1979)와 결혼해 외동딸 크세니야(1942~)를 두었고, 크세니야에게는 현재 딸 1명과 손주 두 명이 있다.[3]
2.2. 라스푸틴 처단
1916년 12월 20일, 유수포프를 중심으로 모인 반 라스푸틴 황족·귀족들이 라스푸틴 몰래 그에 대한 궐석재판을 실시하고, 일방적인 재판 진행 끝에 사형을 선고한 뒤 라스푸틴을 처단했다. 황족들 중에서도 라스푸틴을 죽이고 싶어 안달난 이들은 많았으나, 하필 유수포프 공작이 앞장서 라스푸틴 암살에 나선 이유에는 2가지 설이 있다.하나는 라스푸틴이 공작의 얼굴을 보고는 "당신은 게이가 아닌가, 나는 게이가 싫다!"고 말해 그때부터 원한을 품었다는 설이다. 유수포프 공작은 여장남자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 여장을 하는 취미가 있었으며 유수포프 공작과 이리나 공주가 결혼할 때 다른 러시아 황족들이 둘의 결혼을 반대한 이유 중 하나가 유수포프 공작이 양성애자라는 것이었기 때문에[4] 아마 이와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다른 하나는 유수포프 공작의 아내 이리나 공주의 미모에 흑심을 품은 라스푸틴이 찝적대자 남편인 유수포프 공작이 화가 머리 끝까지 나 그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설이다. 하긴 평민 출신의 정상인도 아닌 사이비 종교인이 일개 귀족도 아닌 고위 황족 영애에게 추근댔으니 분노했을 만도 하다. 젊은 시절에 여장 취미가 있던데다 양성애자로 의심을 받는 것과는 별개로 이리나 공주와의 금슬은 그런대로 괜찮아서 말년까지 잘 해로했다고 한다. 자식은 외동딸 이리나를 두었다.
2.3. 말년
말년의 펠릭스 유수포프.
어쨌든 황제와 황후를 구워삶으면서 국정을 농단하던 라스푸틴을 나라를 위해 처단하기는 했지만 러시아 제국의 상황은 이미 되살려내기에는 너무 늦었기 때문에 러시아 제국을 구원하지는 못했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 다른 귀족들처럼 망명가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도 상트페테르부르크나 얄타 등에서 관광객을 맞고 있는 여러 유수포프 궁전처럼 러시아 각지에 유수포프 가문의 재산이 많았지만 결국 가져갈 수 있는 보석류만 가지고 러시아를 영원히 떠나야 했다.[5]
그는 몰타를 거쳐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이후 프랑스에 정착했으며 러시아에서 가져온 보석 등을 밑천 삼아 패션브랜드를 차려서 사업을 벌였고 러시아계 망명자들을 위한 자선사업도 벌였다. 그렇지만 펠릭스의 사업수완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쪼들리게 되었고 1920년대 말에 결국 사업을 정리하게 되었다.
픽션 면책 조항을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32년, MGM에서는 Rasputin and the Empress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에서는 '나타샤'라는 캐릭터가 라스푸틴에게 성폭행을 당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었다.[6] 배심원단은 영화를 두 번 검토한 이후 원고(이리나)가 명예훼손을 당했다는데 동의했다. 그는 이리나와 함께 항소 법원에서 127,373달러(2020년 2,464,000달러 상당)의 손해 배상금을 받았다. 이후 더 이상의 소송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이 영화는 수십 년 동안 배급이 중단되었다. 이 소송 사건 이후 다른 영화 제작사들은 비슷한 법정 소송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픽션 면책 조항을 넣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난 이후 영화 뿐만 아니라 게임, 애니메이션, 소설, 만화 같은 다른 매체에서도 픽션 면책 조항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1930년대 말에 대궐같은 큰 집을 팔고 작은 아파트로 이사가서 거기서 말년까지 살게 되었다. 나치가 한창 세를 떨쳤을 때 소련을 점령하면 러시아에서 고위직에 앉게 해주겠다고 나치 측이 제안한 적이 있지만 펠릭스는 시원하게 거절했고, 종전 이후로는 조용히 살다가 1967년에 사망했다.
말년에는 프랑스에서 라스푸틴을 죽인 것에 대해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영상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수포프 궁전은 라스푸틴 처단 당시를 재현해서 보존하고 있고 박물관으로 쓰인다. 유수포프 궁전 홈페이지
3. 매체
- 오르페우스의 창 - 레오니드 유스포프 후작: 그를 모티브 삼은 캐릭터이다. 그를 모티브로 했기에 본인의 수려하고 냉철해보이는 외모를 닮아있다.
[1] 모계로는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인 크세니아의 딸로 니콜라이 2세의 조카였고, 부계로는 니콜라이 2세와 마찬가지로 니콜라이 1세의 증손주였다.[2] 아버지의 작위인 수마르코프엘스톤 백작위 역시 물려 받았기 때문에 자신을 유수포프 공작 겸 수마르코프엘스톤 백작으로 칭했다고 한다.[3] 크세니야는 1990년대에 니콜라이 2세의 유골이 발굴되었를 때 신원 확인을 위해 미토콘드리아 DNA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크세니야가 니콜라이 2세의 여동생의 모계자손이기 때문에 니콜라이 2세와 동일한 미토콘드리아 DNA를 공유하기 때문이다.[4] 실제로 그가 양성애자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많은 이들이 그를 양성애자로 여기고 있다. 여담으로 유수포프 공작이 라스푸틴의 의심을 풀고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했던 상담 내용 중 하나가 자신의 양성애 기질을 없애달라는 것이었다.[5] 얄타의 유수포프 궁전은 얄타 회담 때 이오시프 스탈린이 숙소로 사용하기도 했다.[6] '나타샤'라는 캐릭터는 MGM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그의 아내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유수포바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