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허버트 William Herbert, 1st Earl of Pembroke | |
| | |
| 성명 | 윌리엄 허버트 William Herbert |
| 출생 | 1501년경 |
| 잉글랜드 왕국 몬머스셔 | |
| 사망 | 1570년 3월 17일 |
| 잉글랜드 왕국 미들섹스 햄튼 코트 | |
| 아버지 | 리처드 허버트 |
| 어머니 | 마거릿 크레독 |
| 형제 | 조지 |
| 배우자 | 앤 파, 엘리자베스 윌든 |
| 자녀 | 헨리, 에드워드, 앤 |
| 직위 | 초대 펨브로크 백작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백작, 군인. 헨리 8세의 신임을 얻어 많은 영지를 받으면서 부자가 되었고,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에 맞서는 워릭 백작 존 더들리를 지지해 영향력을 키웠다. 이후 제인 그레이를 추대하는 데 앞장섰지만, 대세가 메리 1세 쪽으로 기울자 곧바로 그녀의 편에 섰으며, 엘리자베스 1세 치세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2. 생애
아버지 리처드 허버트는 장미 전쟁에서 요크 왕조의 추종자로서 활약하면서 에드워드 4세에 의해 초대 펨브로크 백작이 된 웨일스 귀족 윌리엄 허버트의 사생아다. 초대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허버트의 적장자인 윌리엄 허버트는 에드워드 4세의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자매인 메리 우드빌과 결혼해 국왕의 처남이 되었으며, 1471년 바넷 전투에서 승리한 에드워드 4세가 런던에 입성할 때 동행했다. 이후 사우스 웨일스와 웨일스 변경백국 모집 위원, 사우스 웨일스 대법관 및 법무관 직책을 맡았다. 1479년 펨브로크 백작 작위를 에드워드 4세의 후계자인 웨일스 공 에드워드에게 넘기고 헌팅던 백작을 맡았다.한편, 초대 펨브로크 백작의 사생아인 리처드 허버트는 기사로서 활동하면서 헤리퍼드셔에 여러 영지를 소유했다. 그는 매튜 크레독 경의 딸 마거릿 크레독과 결혼해 자신의 소유물을 늘렸다. 그가 사망한 뒤 다시의 영지는 큰아들 윌리엄에게 돌아갔고, 상속 재산 일부는 스완시의 허버트 가문의 조상이 된 그의 어린 아들 조지에게 돌아갔다. 윌리엄은 초대 우스터 백작 찰스 서머셋의 부하로 일했고, 1526년 헨리 8세의 연금을 받고 국왕을 섬기는 시종 중 한 명이 되었다. 한 사료에 따르면, 윌리엄은 1년 후 브리스톨의 상인이 자신에게 불손한 말을 하자 격분하여 살인한 혐의을 받고, 유럽 대륙으로 도망쳐 프랑스군에 입대해 그곳에서 용기와 재치로 명성을 떨쳤다. 이후 헨리 8세의 사면을 받고 조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윌리엄은 토머스 파 경의 막내 딸이자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 캐서린 파의 자매인 앤 파와 결혼했다. 이리하여 헨리 8세의 처남이 된 그는 국왕의 총애를 누렸다. 윌트셔의 윌튼 수도원, 웨일스의 카디프 성과 다른 영지, 미들섹스의 헨든 영지 등 여러 토지를 하사받아 대지주가 되었으며, 윌튼 수도원의 파괴된 부지에 웅장한 저택인 윌튼 하우스를 지었고, 이곳을 주거지로 삼았다. 윌리엄은 1543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고, 1544년 1월 24일 에버리스위스의 도시와 성의 대장이 되었으며, 1546년부터는 추밀원에 앉아 수도에 있는 그의 거주지가 된 베이너드 성의 감시인 직책을 맡았다. 또한 같은 해에 잉글랜드 서부에 있는 왕실 소유지의 상당 부분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헨리 8세는 임종 직전 윌리엄을 자신의 유언 집행자로 임명하고 300파운드를 물려줬으며, 에드워드 6세의 미성년 통치 기간 동안 나라를 통치할 섭정 위원회의 12인 중 한 명으로 지명했다.
헨리 8세 사후, 윌리엄은 에드워드 시모어가 호국경으로 선출되는 걸 지지했다. 1547년 7월 10일, 새 왕은 윌리엄에게 노스 뉴턴과 헬콧 영지를하사했고, 그는 이듬해에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1549년 잉글랜드 서부에서 기존의 전례서를 개신교 교리를 참고한 새 전례서로 교체한 것에 반발한 가톨릭 성향 주민들의 봉기가 발발하자, 윌리엄은 웨일스 분견대 2,000명을 소집한 뒤 초대 베드퍼드 백작 존 러셀과 함께 엑서터를 방어했다. 그의 윌튼 영지는 반란군에게 약탈당했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반란자들을 엄하게 다뤘다. 섭정 의회는 그에게 피해 비용을 보상하기 위해 그가 은화 주조에서 얻은 왕실 수입의 일부를 가져가도록 허용했다. 그 결과, 윌리엄은 총 6,709 파운드를 받았다.
그 후 에드워드 시모어와 워릭 백작 존 더들리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두 정치인 모두 윌리엄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에드워드 시모어는 웨일스 가신들을 런던으로 데려와달라고 간청했고, 존 더들리는 에드워드 시모어가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윌리엄은 1549년 10월 8일에 에드워드 시모어에게 잉글랜드 서부가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기 때문에 군대를 철수할 수 없다고 알렸고, 그 후엔 존 더들리와 동맹을 맺었다. 1550년 4월 8일 웨일스 총독에 선임되어 평생 이 직책을 맡았다. 에드워드 시모어가 실각한 뒤, 그는 존 더들리, 노샘프턴 후작 윌리엄 파와 함께 왕실 위원회에서 일종의 삼두정치를 형성하여 나라를 효과적으로 다스렸다.
1551년 12월 1일, 윌리엄은 권력을 탈취하려고 음모를 꾸민 혐의로 체포된 에드워드 시모어의 재판에 참석했다. 그는 존 더들리와의 동맹에 대한 보상으로 1551년 10월 10일 허버트 남작에 선임되었고, 10월 11일에 초대 펨브로크 백작이 되었으며, 윌트셔와 다른 땅에 있는 서머셋 영지를 1553년 5월 7일에 받았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워더 성과 그 주변 공원, 그리고 이전에 윈체스터 주교 스티븐 가디너가 소유했다가 가톨릭을 추종한 혐의로 런던 탑에 감금되면서 몰수된 몇몇 영지를 받았다. 그 결과 윌리엄은 잉글랜드 왕국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 중 한 명이 되었다.
1551년 11~12월에 스코틀랜드의 대비이자 섭정인 마리 드 기즈가 런던을 방문할 때 동행했고, 1552년 여름에는 기병 50명과 함께 서쪽으로 가는 왕의 여정에 참여했다. 8월 28일, 에드워드 6세는 그의 영지인 윌튼에서 밤을 보냈다. 여기에 윌리엄은 장남 헨리 퍼버트를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의 둘째 딸이자 에드워드 6세의 사촌인 캐서린 그레이와 결혼시켰다. 결혼식은 1553년 5월 21일에 치러졌는데, 이는 존 더들리의 아들 길포드 더들리와 캐서린의 언니인 제인 그레이의 결혼과 같은 날이었다.
그 후 에드워드 6세의 상태가 위중해지자, 윌리엄은 존 더들리와 함께 제인 그레이가 왕위 계승자가 되도록 노력했다. 당초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였던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누나 메리 공주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그녀가 집권하면 윌리엄은 이전에 수도원에 속했던 많은 재산을 잃을 위험이 있었기에, 개신교 신자인 제인 그레이가 여왕으로 등극하길 원했다. 1553년 7월 6일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자, 윌리엄은 존 더들리, 제2대 헌팅던 백작 프랜시스 헤이스팅스, 노샘프턴 후작 윌리엄 파, 그리고 다른 귀족들과 함께 제인 그레이에게 가서 왕위를 수락하라고 설득했다. 제인은 처음에는 왕위를 잇는 것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거절했지만, 부모와 남편까지 나서서 설득하자 결국 받아들였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한 뒤 제인에게 왕관을 넘긴 이는 윌리엄이었다고 한다. 윌리엄은 런던 탑에 있는 그녀의 임시 궁정에서 그녀와 함께 했다.
이후 메리 공주가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여왕으로 등극한 뒤 런던으로 진격하자, 존 더들리는 메리와 싸우러 출진했지만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는 끊임없이 늘어났다. 7월 18일, 제인 그레이는 그녀의 "충실하고 사랑하는 사촌들"인 윌리엄과 아룬델 백작 헨리 피츠앨런이 이끌 새로운 군대를 모집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대세를 읽고 메리 1세에 가담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날인 7월 19일, 윌리엄은 런던에서 정변을 일으켜 내각과 런던 시장의 지원을 받아 메리 1세를 여왕으로 선포했다. 결국 제인은 폐위되었고, 존 더들리도 제압된 뒤 곧 처형되었다.
런던에 입성한 메리 1세의 고문들은 윌리엄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베이너드에 머물라고 명령했지만, 윌리엄은 8월 13일에 에드워드 6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는 곧 추밀원으로 돌아갔고, 10월 1일 메리 1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1554년 1월, 메리 1세와 스페인 왕자 펠리페의 결혼 계획으로 인해 토머스 와이엇의 난이 발발했고, 윌리엄은 다시 반란을 공모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러다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가 반란군에게 패배하면서 상황이 다급해지자, 메리 1세는 한동안 주저한 끝에 윌리엄에게 반란군으로부터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수도에 모인 군대의 지휘를 맡겼다. 허버트는 피카딜리에 기병대를, 차링 크로스에 보병대를 배치한 뒤, 반란군과 대적한 끝에 승리했고, 그 덕분에 메리 1세와 측근들의 신임을 회복했다.
그 후 윌리엄은 자신이 충실한 사람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장남 헨리의 아내이자 자신의 며느리인 캐서린 그레이를 집에서 내쫓았고, 1555년에 공식적으로 결혼 무효를 선언했다. 헨리 허버트와 캐서린 그레이 모두 자신들은 이미 성적으로 결합했으므로 결혼 무효가 될 수 없다고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메리 1세가 가톨릭 진흥 정책을 실시하는 와중에도, 윌리엄은 계속해서 칼뱅파에 가까운 개신교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했고, 가톨릭 교회 부흥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부 재산을 잃었는데, 특히 윌튼 수도원에게 토지를 돌려줘야 했다. 그러면서도 왕실 자문위원으로 계속 활동하며 스티븐 가디너 등 가톨릭 파 인사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윌리엄은 반란 진압 후 메리 1세와 펠리페 왕자의 결혼을 공개적으로 동의했는데, 아마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펠리페의 아버지인 카를 5세가 그에게 부여한 연금 2,000 크라운이 그가 그런 입장을 표명한 동기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윌리엄은 1554년 3월 6일 여왕의 공식 약혼식에 펠리페를 대신하여 온 스페인 대사를 왕실에 소개했고, 7월 19일 사우샘프턴에서 펠리페 왕자를 만나 여왕이 기다리던 윈체스터로 안내했다. 이후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열린 결혼식에 메리 1세를 인도한 귀족 4인 중 한 명이었으며, 결혼식이 끝난 후 7월 25일에 열린 펠리페의 잉글랜드 국왕 대관식에 검을 드는 역할을 수행했다.
윌리엄은 곧 펠리페 왕자의 호의를 얻었다. 베네치아 공화국 대사는 윌리엄이 잉글랜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며, 모든 사람이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집에 서신을 보냈다. 1555년 초, 윌리엄은 칼레에서 프랑스와 협상을 진행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같은 해 3월에 그는 다시 칼레로 가서 프랑스군의 예상되는 침공에 대비해 요새 방비를 수행하려 했지만, 5월에 다시 소환되었다. 펠리페가 그를 필요로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외국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프랑스에서 윌리엄이 행동의 제약을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1555년 9월 4일, 윌리엄은 펠리페와 함께 브뤼셀로 가서 카를 5세에게 소개되었다. 1556년 11월 칼레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1557년에는 스페인을 돕기 위해 파견된 잉글랜드 분견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생캉탱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한 지 이틀 후 연합군에 합류하여 생캉탱 시를 공격하고, 프랑스의 총감인 안 드 몽모랑시 공작을 생포했다. 총감의 갑옷은 그 이후로 윌튼 하우스에 보관되었다.
1558년 11월 메리 1세가 사망한 후, 윌리엄은 왕위 계승을 앞둔 엘리자베스 공주의 거처인 헤트필드 하우스로 가서 충성을 서약했다. 엘리자베스 1세가 등극한 뒤 왕실 위원회 첫 회의에 참석했고, 그 후 새 국왕의 측근으로 남아 잉글랜드 국교회 회복을 열렬히 지지했다. 1560년 5월, 윌리엄은 엘리자베스 1세와 샤텔로 공작 제임스 해밀턴의 장남인 제임스 해밀턴의 결혼을 협상하기 위해 찾아온 스코틀랜드사절단을 환영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중병에 걸려 오랫동안 사경을 헤맸다가, 1561년 말 마침내 건강을 회복하여 업무에 복귀했지만, 1564년 9월 다시 병에 걸려 수년간 은거하면서 영향력이 제한되었다.
윌리엄은 병마에서 회복되었을 때 프랑스의 위그노 신자들과 동맹을 맺고 스페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네덜란드인들에 대한 지원 정책을 옹호했다. 1562년 엘리자베스 1세가 중병을 앓았을 때, 그는 여왕이 사망했을 경우를 대비해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의 후손인 제3대 헨틴덩 백작 헨리 헤이스팅스의 왕위 계승을 지지했지만, 여왕이 곧 회복되면서 없던 일로 처리되었다. 1568년 왕실 관리인으로 임명되었고, 1년 후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와 스코틀랜드의 전 여왕 메리와의 결혼을 지지했다.
그러다가 1569년 12월 제7대 노섬벌랜드 백작 토머스 퍼시와 제6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찰스 네빌이 메리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잉글랜드 북부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윌리엄 역시 자기들과 뜻을 함께 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에 윌리엄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반란군이 "불경스럽고 거짓으로"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면서 자신은 엘리자베스 1세와 개신교에 반하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토벌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을 도맡고 싶다고 간청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를 예비군 사령관으로 삼기로 했고, 반란은 그가 나설 필요도 없이 쉽게 진압되었다.
1570년 3월 17일, 윌리엄은 햄튼 코트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4월 18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나중에 무덤 위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사후 장남 헨리 허버트가 제2대 펨브로크 백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