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7-03 17:26:59

야마토 유키하라

파일:남극 국기.svg
남극의 영유권 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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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정 국가가 공식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나, 남극조약으로 실질적 통치·분쟁이 유보되고 있는 지역
: 남극조약 조건부로 영유권 주장이 동결되어 공식화하지 않은 지역
: 남극조약 이전 국가 또는 민간에 의해 영유권이 선언되었다가 철회된 지역
: 영유권이 주장되지 않은 지역
유형 국가 지역명
영국 영국령 남극 지역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령 남극
칠레 칠레령 남극 지역
뉴질랜드 로스 속령
호주 호주령 남극 지역
프랑스 프랑스령 남방 및 남극 지역(테르아델리 지구)
노르웨이 퀸모드랜드·페테르 1세 섬
브라질 브라질령 남극
나치 독일 노이슈바벤란트
일본 제국 야마토 유키하라
없음 마리버드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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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1. 개요

야마토 유키하라(大和雪原)는 1912년 일본 제국의 탐험가 시라세 노부(白瀬矗) 등으로 구성된 남극 원정대가 탐험하고 명명했던 남극 일대의 지명으로, 남위 80° 5′ 0″, 서경 156° 37′ 0″의 로스 빙붕의 일부로 확인된다.

2. 역사

1861년 출생인 시라세 노부는 일본 육군 소속의 군인으로, 1892년 전역 후에는 전문 탐험가로서 활동하며 당시로서 개척되지 않았던 쿠릴 열도를 탐사했으며, 격오지에 캠프를 만들어 장기 야영하거나 알래스카로 밀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괴혈병과 폭풍우 등으로 대원들이 여럿 실종,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원래 최종적으로 북극점을 탐사하고자 했으나, 로버트 피어리 등이 이미 북극점을 탐사했다는[1] 소식을 듣고 목표를 남극점으로 바꾸었다. 그는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호응받지 못하고 성금을 모아 탐사를 준비했으며, 카이난마루(開南丸)호를 타고 호주뉴질랜드를 거쳐 남극에 도달했다.

시라세 본인은 일본의 야마토 유키하라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했으나, 그가 탐사했던 곳은 땅이 아니라 빙붕 위 얼음이었을 뿐인데다 그의 주장은 영토 확장에 적극적이었던 당대 일본 정부에서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대 영국 등이 남극 대륙상에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일본 정부에서 '남극에 대한 각국의 탐사 및 선언 등은 각국의 영유권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정부에 영유권 주장에 대해 건의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의 주권이 미치는 범위를 정하면서 남극의 영유권은 완전히 부정되었으며, 주권 회복 이후에도 일본은 오히려 남극의 평화 이용을 추구하는 남극조약 체결에 참여하였다.

2012년, 일본 국립극지연구소(国立極地研究所)는 시라세 노부의 남극 원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야마토 유키하라를 공식 지명으로 등재하는 것을 추진하였다.


[1] 나중에는 피어리 역시 북극점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