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00:25:14

미라이 공업

야마다 아키오에서 넘어옴
미라이 공업
未来工業 | Mirai Industries
국가 일본
창립일 1965년 8월
주소 기후현 안파치군 와노우치정[1]
창업주 야마다 아키오
규모 중견기업
유형
시가총액
본사



1. 개요2. 연혁 및 역사
2.1. 1대 사장 야마다 아키오2.2. 4대 사장 야마다 마사히로
3. 사업 분야4. 유토피아 경영5. 자회사6. 기타7. 참고 자료

1. 개요

일본의 전기회사. 건축에 쓰이는 전기 용품 사업이 메인이고, 건축에 쓰이는 수도 용품 사업이나 가스 용품 사업도 하고 있다.

2021년 3월 기준으로 직원은 1,223명이며 경상이익 41억 2100만엔, 매출 360억 6900만엔, 자본금 70억 6786만엔이다. 경상이익률 약 11% (동종업계 3%)인 셈이다.

기존 일본 경영학 통념인 경영자 중심을 박살내며 사원과의 공존 및 사원을 위한 경영방침으로 유명하다. 야마다 아키오 창업자의 경영철학인 유토피아 경영때문인데, 하는 짓만 보면 회사가 이익을 내는 걸 포기한 걸로 보이지만, 마쓰시타 전기공업[2]을 누르고 업계 1위에 등극하는 등 다른 회사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기상천외한 방식에 직원들 혜택까지 다 주면서도 할 일은 똑바로 다 한다는 점에서 비상식적인 경영방침이 아니라 혁신적인 경영방침이라고 부르는 것이 옳을 정도다.[3] 기업의 북유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정년보장도 되어있고 수입도 높은데다가 대기업보다 복지가 좋다보니 많은 일본인들에게 꿈의 직장으로 유명하다.

2. 연혁 및 역사

2.1. 1대 사장 야마다 아키오

山田昭男(1931~2014)

창업자 야마다 아키오는 상하이에서 출생해 오가키 구제중학교를 졸업했다[4].

1947년 3월 졸업 직후 아버지가 운영하던 야마다 전선 제조소에 입사해서 낙하산 인사로 16살에 전무이사 자리를 받았다. 회사에서 2번째로 높은 연봉을 받는 자리였으나 회사 일은 하지 않고 연극에만 몰두했다. 당시 마작이 직장인들 퇴근 후 취미로 유행이었는데, 마작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끼리 요즘 직장인 밴드 만들듯 연극단을 만들어 1957년부터 연극단 '미라이자'(未來座)에서 무대 감독을 맡았다. 어차피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을 금수저이니까 열심히 일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런 태도는 아버지와 마찰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아들이 놀기에만 바쁠 뿐 회사에는 관심이 없다며 탐탁지 않게 여겼고, 아들은 영업 활동을 쓸모없다고 취급하는 데다 혁신을 싫어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1965년 7월 야마다 아키오는 놀기에만 바쁘고 싹수가 노랗다는 이유로 아버지 회사에서 쫓겨나고 퇴직금도 받지 못한 채 의절을 당했다. 일반 샐러리맨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취업을 하려고 해도 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저축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어서 할 줄 아는 것은 영업 기술 뿐이었다.[5]

이 때문에 1965년 8월 미라이 공업을 설립해 부친의 회사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마지 못해서(…)' 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시작부터 골때린다

공동 창업자는 야마다 아키오(영업 및 경영 담당), 시미즈 쇼하치(기술 개발 담당), 그 외 남자 1명 여자 1명, 총 4명의 연극단 친구들이었다. 당시 상황은 방 두 개 있는 단층 집을 빌려서 공장으로 만들어야 했을 정도로 열악했다. 첫 제품은 전선 하나를 여러 가닥으로 갈라지게 하는 기구인 ‘투명 조인트박스’였다. 야마다 아키오는 18년간 부친의 회사에서 영업 경험을 쌓으면서 물건을 팔아줄만한 영업력을 갖췄고, 시미즈 쇼하치는 계속해서 아이디어 상품을 내놓는 등 초기 스타트업으로서 콤비가 잘 맞았다.

기술 개발과 차별화를 거듭해 나가면서 규모가 점점 커지고 일본 각지에 공장과 영업소를 세우며, 설립된 지 26년 후 1991년 나고야 증권거래소 2부에 상장했다.

그러다 1999년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사장 자리는 공동창업자 시미즈 쇼하치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고문 직책을 맡아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다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2014년 7월 30일 사망했다.

1999년 당시 사원 수는 701명. 매출액은 127억 엔이었다. 그런데 7년 후인 2007년의 사원 수는 783명으로 82명밖에 늘지 않았지만 매출액은 두 배가 넘는 261억 엔 (한화 3,300억원)으로 배가 성장했는데, 놀라운 건 이 시기는 일본 경제가 거품이 꺼지고 장기 침체기를 맞은 시기다. 닛산, 파나소닉(마츠시타), 소니, 도시바 등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수천 명 단위로 정리해고를 하면서 겨우 흑자를 유지했던 시기다. 그런데 미라이공업의 사원 수는 오히려 늘었고, 매출액도 증가했다. 1991년~2007년 (취재 시점) 평균 경상이익률이 14.19%(업계평균 7.1%), 당기순이익률 8.9%(업계평균 4.3%)로 업계 평균보다 두 배나 많다.

2008년 기준 자산합계 531.03억엔, 매출액 261.73억엔, 자기자본비율 82.2%, 현금 및 예금 174.39억엔, 종업원 1인당 당기순이익 200만엔, 종업원 1인당 영업이익 340만엔이다. 그리고, 2007년 기준 야마다 아키오의 아버지의 회사는 연 매출 5억엔이며 미라이 공업은 연 매출 247억엔이다. 쫓겨난 자식의 역전승 아무래도 똑게형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2.2. 4대 사장 야마다 마사히로

山田雅裕(1963 ~ )

2013년 6월부터 사장을 맡고 있다. 야마다 아키오 창업주의 아들이지만, 더 이상의 세습경영은 없다는 점과 단순한 혈통빨이 아니라 아래 사례에서 볼수 있듯이 능력이 확실하게 검증된 점이 재벌과 매우 비교된다. 참고로 마사히로 현 사장은 자녀가 없어서 더 이상의 세습은 없다. 부친이 내복 바람으로 다녔듯이 현재 사장은 알로하 셔츠 차림으로 돌아다니며, 언론 인터뷰 역시 알로하 셔츠 차림으로 한다.

1987년 4월 니혼대학 경제학부를 졸업 후 미라이 공업에 입사해 영업 사원을 맡았다. 30대 초반에는 나가노 현 마츠모토 영업소의 소장으로 발탁되었다. 마사히로 사장은 '의욕에 넘쳐 있었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제조 기획 부서로 발령나면서 패잔병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 혼자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사와 본사와 연계했어야 했는데 그 시기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라고 회고했다. 이후에는 제조기획 부서의 과장으로 갔다. 영업에만 10년 일하고 있었으니 시야를 넓혀서 공장에 대해 알라는 것이었다. 이후에는 야마가타 공장장 및 감사 실장을 경험했다.

2006년에는 자회사인 '진보 전기'에 파견되었고 2008년 6월에는 진보 전기 사장으로 취임했다. 진보 전기는 적자로 인해 본사의 발목을 잡고 있는 자회사다. 따라서 재건을 하는 어려운 업무를 맡게 된 것이었다. 특히 이 시기에 2008년 경제 금융 위기로 인해 더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2012년 즈음에는 최고 이익을 달성하였다. 2013년 6월에 미라이 공업 4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본인의 말로는 진보 전기 사장 시절 5년간 단 한 번도 직원을 꾸짖은 적이 없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의욕이 올라서 적자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17년 현재 1억 2천만원 정도의 연봉을 받고 있다. 이는 사원들보다는 많은 것이지만 이만한 규모의 회사의 경영자로서는 턱없이 적게 받는 것이다.[6]

3. 사업 분야

4. 유토피아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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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5. 자회사

  • 진보전기
  • 미라이운수

6. 기타

  • 비상교육고등학교 1학년 통합 사회 교과서에 이 기업이 언급된 자료가 나온다. 딱히 이 기업이라고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내용을 훑어봤을 때 이 기업이 확실하며 내용이 거의 일치하다.
  • 주 4일 근무제를 시도하다 포기한 적이 있다. 보통 이런 경우 사원들이 반발하는데 오히려 사원들이 라인 교대가 불편하다는 진정서를 냈다. 기계는 비싼데 사원들 근무시간이 짧으니 기계 가동률이 떨어진다는 판단 하에, 2교대 하루 7시간으로 주 4일 근무제를 실시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나이든 사원들은 찬성했으나 젊은 사원들은 주말에 휴일이 없으면 친구들을 만날 수 없어 불편하다고 호소하였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되어 사원들이 “너무 많이 쉬어서 건강 리듬이 깨지고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면서 불만을 표출했다. 이 때문에 일본 최초의 주 4일제 근무 시도는 사원들의 반대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 1999년 오키나와 영업 사무소를 개설하면서 경리를 채용했는데, 19일간 연말 휴가를 주자 경리의 어머니가 딸을 불러서 화를 냈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요즘 출근도 하지 않고, 틀림없이 회사에서 잘린 거지? 거짓말 하지마, 2주일 3주일씩 휴가를 주는 회사가 세상에 어디 있니? 왜 부모한테까지 거짓말을 하는 거니!"
  • 기업 성장엔 큰 관심은 없다. 2007년 당시 재무제표에서 회사에 이익잉여금이 214억엔이나 쌓여 있었는데, 기자는 이 금액으로 앞으로 회사를 성장시킬 계획은 없냐고 물어보자 야마다 전 사장의 대답은 간결하다.
없어. 기업이 커진다 해서 사원 월급이 크게 늘어나는 경우를 못 봤거든.”
  • 자회사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자회사 중 가장 큰 규모로 10억엔 정도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미라이 정공은 원래 미라이 공업 내의 '금형부'였는데, 여기에 놔두면 의지하게 돼 버리니까 따로 독립해서 사업하라고, 의지하면서 어리광 부리는 것은 하지 말라 했다고.

7. 참고 자료


[1] 가장 가까운 신칸센역은 기후하시마역으로 나고야 공항에서 열차/신칸센을 통해 1시간 정도 걸린다. 역에서부터 택시로 15분 정도 거리에 논밭 가운데 미라이 공업이 있다. 주변에는 변변한 식당 하나 없는 전형적인 시골이다.[2] 마쓰시타 전기산업(현재의 파나소닉)에서 분사된 전기부품 메이커이다. 2004년에 파나소닉이 재인수한 후 2012년에 흡수합병하였다.[3] 실제로 아래에서도 나오지만, 경영학에서 나중에 논의되는 것들을 선구적으로 실험한 사례가 많다.[4] 이 시절에는 중학교가 오늘날 중고등학교 통합과정에 해당하는 중등교육기관이고, 구제고등학교는 대학예과 과정에 상응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5] 구제 중졸 (현대의 고졸)이고 전기 기술에 대해서는 실무이든 전공지식이든 거의 없었다.[6] 일반적으로 대기업의 경우 부장급 연봉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