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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톤 세나의 선수 경력에 대해 서술하는 문서.1.1. 초창기 생애 및 포뮬러 1 데뷔 이전
1960년 철물점 주인이었던 미우통 다시우바와 네이디 세나 다시우바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누나이자 장녀인 비비안과 남동생인 레오나르도가 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세나는 놀랍게도 4살 때부터 카트로 운전을 시작했다. 그의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준 단순한 카트가 시작이었다.
12세부터 본격적으로 카트 레이싱에 뛰어들었고 1977년 고교를 졸업하고 경영학 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지만 3개월만에 중퇴를 하게된다. 같은 해 남미 카트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했고 이후 매년 카팅 월드 챔피언십(Karting World Championship)에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
(15번이 세나, 49번이 퓰러튼)
F1에서 성공한 이후 세나는 이 카트 드라이버 시절을 아름답게 회상한다. 지금까지 경쟁한 드라이버 중 가장 훌륭했던 드라이버가 누구냐는 질문에 당시 같은 카트 드라이버였던 "테리 퓰러튼(Terry Fullerton)"을 꼽은 것. 그와의 경쟁은 돈도 정치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레이싱이라고 했다.
1981년 세나는 영국으로 건너가 포뮬러 포드 1600 레이스에 출전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프로 레이싱 드라이버 생활을 시작했다.
포뮬러 포드 레이스에서 활약하던 세나는 레이스를 극심히 반대하던 부모님의 성화를 못이기고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기로 결심해 레이스를 포기하고 브라질로 돌아갔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상위 클래스인 포뮬러 포드 2000 레이스의 팀으로부터 계약 제안이 들어왔고 세나는 바로 영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때부터 그는 아버지의 성씨인 '다시우바(da Silva)'가 아닌 어머니의 처녀적 성씨인 '세나(Senna)'로 레이스에 출전하게 된다. 그리고 1982년 포뮬러 포드 2000 레이스에서 생애 첫 챔피언을 획득하게 된다.
1983년 세나는 브리티쉬 포뮬러 3 챔피언쉽에 West Surrey Racing 소속으로 첫 출전하게 된다. 포뮬러 포드 2000이후 개인 스폰서쉽을 얻은 세나는 탄탄한 지원 속에서 메이저급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 당시 그는 전직 F1 드라이버이자, 지금은 F1 코멘터로 유명한 마틴 브런들과 같이 F1을 바라보며 경쟁했다. 여기서 브런들은 처음 세나를 만났고 그의 잔인하리만치 무자비한 휠 투 휠을 처음 경험했었다고. 이 레이스에서 세나는 전체 20 라운드중 15 라운드에서 폴 포지션을 획득하며 그 비범한 퀄리파잉 스피드를보이기 시작했고 페스티스트 랩 12회, 우승 12회로 종합 132포인트로 시즌 챔피언을 달성했다. 2위는 마틴 브런들. 그리고 그 해 챔피언 자격으로 전통의 마카오 그랑프리[1]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했다.
(윌리엄스에서 테스트를 받는 세나)
1983년 마카오 그랑프리 이후 세나는 F1 팀들의 주목을 받아 윌리엄스, 맥라렌, 브라밤, 톨만에서 정식 테스트를 받았다. 특히 도닝턴 파크에서 치러진 윌리엄스에서의 테스트에서는 당시 소속 드라이버였던 케케 로즈버그와 같은 현역 F1 드라이버들보다 빠른 랩타임을 냈었다고 한다. 브라밤에서는 당시 같은 고국 선배였던 넬슨 피케보다 2초 느린 랩타임을 기록했고 윌리엄스, 맥라렌, 브라밤은 세나를 데뷔시키고 싶어 했으나 스폰서들이 반대함으로 1984 시즌에는 남는 시트가 없었고, 결국 세나는 톨만 팀을 통해 포뮬러 1에 입성하게 된다.
1.2. 톨먼 그룹 모터스포트
1.2.1. 1984 시즌
1984년 시즌의 개막전이었던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데뷔한 세나는 완주하지 못하고 리타이어했고, 첫 포인트는 다음 경기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6위로 피니쉬하며 획득했다. 또한 이 시즌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세나는 숙명의 라이벌 알랭 프로스트와 첫 대결을 하게 된다. 폭우 속에 시작된 모나코 그랑프리는 폴시터 알랭 프로스트의 리드 속에서 로터스의 나이젤 만셀, 맥라렌의 니키 라우다가 뒤를 잇고 있었다. 세나는 13위에서 출발했지만 세나 특유의 비 속에서 경이로울 만큼의 그립을 잡아내는 테크닉으로 빠르게 차들을 추월하며 알랭 프로스트의 뒤까지 차원이 다른 랩타임으로 따라잡았다. 그리고 29랩째, 사건이 발생하는데 알랭 프로스트가 손을 흔들며 레이스 컨트롤에 경기 중단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알랭 프로스트는 브레이크 문제를 겪고 있었다. 레이스가 32랩때 중단되면서 프로스트는 결승선 앞에서 차를 세웠다. 동시에 세나가 아슬하게 프로스트를 추월하며 1위로 통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경기 결과는 최종 2위. 프로스트의 우승이었다.[2] 당시 경기를 중단했던 재키 익스는 레이스 심판인 스튜어드와 상의하지 않았다는 의혹과 함께 레이스를 왜 중단했는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 경기로 세나는 F1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며 팬들과 관계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동시에 알랭 프로스트와의 F1 역사상 가장 강렬한 라이벌전을 암시하게 되었다. F1에 새로운 신성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영국 그랑프리와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3위로 포디움에 올랐지만 그 뿐이었다. 당시 톨먼은 약체 팀에 속했기 때문에 레이스카는 경쟁력이 없었다. 그렇게 첫 F1 시즌 대부분을 리타이어로 마감하게 된다.
1.3. 팀 로터스
1.3.1. 198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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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에서 생애 첫 F1 그랑프리 우승을 하고 환호하는 세나와 로터스 팀원들. 오른쪽은 당시 팀 감독이던 피터 워(Peter Warr, 1938~2010). |
다음 시즌, 세나는 불만이 많았던 톨먼을 박차고 나와 테스트 때부터 자신을 원했던 로터스와 장기계약을 맺게 된다. 이 시절 로터스 팀은 2010년대에 활동한 로터스와는 다른 팀으로 키미 라이코넨이 달렸던 로터스는 톨먼 팀이 베네통-르노를 거쳐 로터스의 이름만 빌려 쓴 것이다.[3] 세나가 달린 로터스는 50년대부터 출전한 오리지널 팀. 당시 로터스는 V6 터보를 장착했었고 레이스카는 나름대로 괜찮은 수준이었다. 경쟁력을 갖춘 이 시즌부터 세나는 F1 드라이버로써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시작한다. 시즌 2라운드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세나는 F1 첫 폴 포지션을 차지한다. 기록은 1:14:007. 비에 젖은 에스토릴 서킷에서 세나는 쾌조의 스타트로 선두를 유지했다. 비는 계속 내렸고 13랩째 이미 2위와 10초 이상 랩타임이 벌어졌을 만큼 비 속에서 세나는 압도적인 스피드를 자랑했다. 여러 드라이버들이 스핀하며 고전하는 가운데, 재밌게도 이번엔 세나가 레이스 컨트롤에 경기 중단을 요청했다. 그러나 경기는 속행되었고 2시간 룰에 맞춰 레이스를 다 채우지 못한 채 세나가 가장 먼저 체커를 받았다. 그의 생애 첫 그랑프리 우승이었다. 당시 로터스 감독이었던 피터 워는 세나를 극찬했다.[4] 게다가 세나는 페스티스트 랩[5]까지 기록함으로 헤트트릭을 달성했다.
이후 세나는 1985 시즌동안 7번의 폴 포지션과 2번의 우승을 함으로 데뷔 첫 해와 비교해 상위권에서 경쟁하는 드라이버로 껑충 뛰어올랐다. 최종 성적은 38포인트 종합 4위.
1.3.2. 1986 시즌
86년 포르투갈 그랑프리에서 사진을 같이 찍은 세나(88,90,91), 프로스트(85,86,89,93), 만셀(92), 피케(81,83,87).[6]
스페인 헤레스 서킷에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세나 뒤로 만셀이 0.014초 차이로 체커를 받았다.)
터보시대의 최전성기, 굿이어 타이어와 피렐리 타이어의 대결, 로터스-르노 조합은 맥라렌-태그 호이어, 윌리엄스-혼다보단 한 수 아래의 성능을 냈었다. 그러나 세나는 놀랍게도 전체 16 라운드중 절반인 7개 라운드에서 폴 포지션을 달성함으로써, 숏런 능력이 비범한 수준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우승까진 연결되지 못해서 시즌 2승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스페인 그랑프리에서는 나이젤 만셀과의 치열한 배틀 끝에 0.014초로 피니쉬하는 등의 명장면을 여럿 연출했다.
디트로이트 그랑프리에서는 월드컵 8강에서 탈락한 브라질을 위해 국기를 들고 나타났었다. 이 때부터 세나는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면 항상 브라질 국기를 흔들게 된다. 또한 폴 포지션을 잡았었지만 일부러 타이어 공기압을 8분의 1을 빼가며 힘들게 포지션을 지켜 우승한 그랑프리이기도 했다. 최종 성적은 55포인트 종합 4위.
1.3.3. 1987 시즌
1987 시즌은 아일톤 세나의 F1 커리어의 전환점이였다. 해당 시즌 팀 타이틀 스폰서가 CAMEL로, 엔진은 당대 최고였던 혼다의 V6 터보로 교체되었다. 자연흡기 엔진과 터보엔진이 격돌했던 시즌. 세나는 이번에도 상위권 경쟁을 했지만 챔피언을 바라보기엔 역시나 로터스의 레이스카는 약간 부족했다. 게다가 디펜딩 챔피언 맥라렌의 알랭 프로스트도 신통치 않았고 레이스카의 포텐셜이 터진 윌리엄스의 두 드라이버, 나이젤 만셀과 넬슨 피케의 정면대결인 시즌이었다. 윌리엄스 레이스카의 성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이 시즌 동안 세나의 표정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폴 포지션도 한 번밖에 하지 못했고 그랑프리 우승도 여전히 2번이 전부였다.하지만, 이 시즌에 세나는 모나코 첫 승을 올렸었다. 미스터 모나코의 시작이었다. 2번째 그리드에서 출발한 세나는 레이스 내내 만셀의 뒤에서 달렸으나 30랩때 만셀이 터보 이상으로 리타이어함으로 선두로 올라섰고 그대로 훌륭한 피트 전략을 수행해 타이어 스틴트의 손실 없이 모나코 첫 승을 기록했다. 마지막 그랑프리엔 호주 그랑프리에선 경기 후 브레이크 규정을 어겼다고 판정되어 실격 처리 되기도 했었다. 최종 성적은 멕라렌-TAG의 알랭 프로스트를 제치고 57 포인트 종합 3위. 비록 챔피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해당 시즌 로터스-혼다의 드라이버로서 혼다와 연을 쌓은 것은 그에게 있어 크나큰 행운이였다. 시즌이 끝나고 론 데니스와 알랭 프로스트가 혼다와의 협업에 앞서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데니스는 프로스트에게 내년의 파트너로 어느 드라이버를 원하냐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 때 맥라렌에서 프로스트의 파트너가 될 드라이버 후보는 넬슨 피케가 있었는데, 프로스트는 세나를 선택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혼다의 추천과 데니스 자신의 평가로 세나를 맥라렌에 합류 시킴으로 로터스에서의 커리어는 막을 내리게 된다.
1.4. 말보로 맥라렌
1988 시즌, 세나는 맥라렌과 계약했다. 그리고 당시 F1에서 최고의 드라이버로 군림하던 알랭 프로스트와 듀오를 맺었다. 맥라렌은 1987년 이미 뛰어난 엔지니어들이였던 닐 오틀리와 스티브 니콜스에 더해 고든 머레이 또한 새롭게 개발팀에 참가하여 진일보한 MP4/4를 완성했고, 윌리엄스에게서 터보시대 최고의 엔진을 만들던 혼다를 빼와 계약함으로 막강한 전투력을 보유하게 된다.
이는 곧 맥라렌-혼다 외에 챔피언십 경쟁을 할만한 팀이 없었다는 뜻이 되었고, 반대로 멕라렌-혼다 팀 내에서의 F1 역사상 가장 치열한 라이벌 매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1.4.1. 198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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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카 서킷에서 선두였던 프로스트를 추월하는 세나 |
1988 시즌, 1987시즌에 윌리엄스가 FW11라는 명 섀시와 혼다 엔진의 힘으로 타이틀을 획득하는 것을 대책없이 지켜봐야 했던 맥라렌이었지만, 윌리엄스의 내부 사정과 이에 대한 혼다의 불만은 혼다가 새로운 팀을 찾는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혼다의 선택은 당시 윌리엄스에 뒤지지 않는 섀시 설계 능력을 갖고 있던 멕라렌이였고, 이렇게 멕라렌은 당시 F1 내에서 최고의 엔진을 만든다고 평가받던 혼다와 계약할 수 있었다. 특히 1988년은 2014년 이전까지 터보 엔진이 허용되는 마지막 시즌이기도 했는데, 당해의 RA168E는 다른 엔진 제조사들이 89년 부터 시작되는 3.5리터 자연흡기 규정에 대비하여 터보 엔진 개발 규모를 최소한으로 제한한 것과는 반대로 전년도의 엔진 대비 크게 개선된 엔진으로서 이미 커다랬던 엔진 격차는 더할 나위 없이 커진 상태였다.
여기에 더하여 맥라렌에서도 당시 로터스에서 활약했던 고든 머레이[7]가 섀시 개발팀에 합류하였고, 그렇게 탄생한 맥라렌 MP4/4는 훗날 F1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한 최고의 명차 중 하나로 평가받게 된다. 1988 시즌에서 세나는 16 라운드중 13개 라운드에서 모두 폴 포지션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그랑프리 하나만을 제외하고 모든 그랑프리를 맥라렌 드라이버 둘이서 나눠 우승했다. 지금까지도 23레드불[8]과 함께 단일 F1 팀이 F1 시즌 전승에 가장 근접했던 시즌이다.[9] 정말이지 맥라렌 세상이었고 세나와 프로스트만의 대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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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코 그랑프리에서 큰 차이로 경기를 리드하다가 사고를 당한 세나의 차. |
시즌 출발은 좋지 못했다. 첫 라운드였던 브라질에서 세나는 기어 변속기 고장으로 레이스 스타트를 하지 못했고 그린 플래그 이전에 스페어카로 바꾸려 했으나 늦어버려 실격처리 되고 말았다. 이렇게 세나는 또 브라질 그랑프리 우승을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산마리노 그랑프리는 우승, 모나코에서는 리타이어하고 말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세나와 프로스트가 여기서부터 격돌하기 시작했기 때문. 기량이 만개한 세나는 퀄리파잉에서 1:23:998로 알랭 프로스트보다 무려 1.427초나 빠른 기록으로 폴 포지션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대로 레이스를 시작해 굉장한 페이스로 치고 나가 격차를 50초 넘게 벌려놓은 상태였다. 67랩때 팀은 팀 라디오로 페이스가 너무 빠르니 좀 줄이라는 오더를 내렸으나 세나는 페이스를 줄이지 않았고 이윽고 혼자서 사고를 내고 말았다. 세나는 리타이어하고 말았고 2위로 달리던 프로스트가 모나코 우승을 차지. 문제는 이후 프로스트의 인터뷰인데 그(세나)가 자신과 레이스를 하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일종의 모욕감을 주려 했다고 주장했다. 세나 또한 자신의 실수를 매우 아쉬워 했다고 하며(리타이어 직후 그의 표정을 보면 자신의 실수를 참을 수 없었는지 일그러져 있다.) 그 레이스를 하는 동안 자신이 무언가 다른 차원에, 거의 무의식 속에서 달린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 모나코 그랑프리를 이후로 세나는 좀 더 침착해져서 이후 그랑프리들에서 연승을 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둘의 경쟁 구도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는 것.
이후 둘의 옥신각신하는 경쟁 후에 챔피언쉽 포인트 선두로 스즈카로 오게 된 세나는 일본 그랑프리에서 우승만 한다면 프로스트의 성적과 관계 없이 월드 챔피언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그리드 또한 폴 포지션. 레이스가 시작되고 세나 또한 출발했지만 세나의 스타트는 좋지 못했다. 엔진 스톨이 생겼던 것인지 차가 멈칫했고 세나는 두 팔을 흔들었다가 극적으로 다시 출발한다. 그러나 이미 순위는 10위 밖까지 떨어진 상황. 이후 세나는 미친 듯이 달려 2랩만에 6위까지 회복하였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바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이후 세나는 조국 브라질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환대 받으며 꿈같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전 라운드를 거의 모두 우승한 맥라렌이지만 신기하게도 몬차 서킷에서 열린 이탈리아 그랑프리만큼은 세나가 윌리엄스의 장-루이 슐레서에게 들이받히며 순위가 하락하여 10위, 프로스트는 점화 플러그에 문제가 생겨 리타이어라는 성적으로 마감해야 했다. 게다가 1988년 9월 11일 열린 이탈리아 그랑프리 우승은 당시 페라리 소속의 게르하르트 베르거. 마치 페라리가 우승할 운명이었던 것 같은 경기 내용 때문에 팬들은 죽은 엔초 페라리가 라이벌 놈들이 전경기를 우승하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하늘에서 도왔다는 얘기를 우스갯소리로 하곤 했다.[10]
1.4.2. 1989 시즌
(47랩째, 카시오 시케인에서 충돌한 세나와 프로스트. 그리고 마지막 사진에서의 프로스트의 표정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세나와 프로스트의 경쟁이 극에 달한 89년 시즌.
여전히 맥라렌의 퍼포먼스는 압도적이었고 MP4/4만큼은 아니지만 MP4/5 또한 압도적인 스피드를 자랑했다. 엔진은 V6 터보에서 자연흡기 V10으로 변경되었다. 챔피언 등극 이후 세나의 실력은 완전히 무르익어 예전처럼 불안정한 멘탈을 보여주는 일도 없었다. 세나와 프로스트의 관계는 완전히 뒤바뀌었는데 세나의 챔피언쉽 우승 이후 프로스트가 완전히 경쟁심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세나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둘의 경쟁구도는 나날히 심해져 맥라렌은 어느 그랑프리에서 누가 어떤 엔진을 쓸 것인지 공평하게 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팀 내 분위기는 매우 치열해지고 동시에 빠르게 차가워져 갔다. 프로스트는 세나가 너무 과열적이며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나에게 불만을 가졌고 세나는 반대로 프로스트에게 항상 이러저러한 이유로 경기 결과에 대해 핑계를 댄다고 불만을 가졌었다. 팀원들도 그런 둘의 주장에 둘로 쪼개지기 시작하며 팀은 더 이상 정보와 인력을 공유하지 않게 되었다. 둘 사이 반목의 주 원인은 둘의 드라이빙 스타일의 차이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나는 항상 모 아니면 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승리를 위해 위험도 서슴치 않는 스타일이었고 프로스트는 계산을 통한 레이스를 하며 우승이 힘들 것 같으면 최대한 많은 포인트를 얻는 스타일이었다. 이후 둘은 완전히 틀어져 얘기조차 하지 않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당시 서로를 쳐다보는 표정을 보면 정말 살벌하기 짝이 없을 정도. 어쨌든 세나와 프로스트는 서로 우승을 주고 받으며 챔피언쉽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또 운명적이게도 둘의 챔피언쉽 향방은 일본 그랑프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프로스트는 리타이어 3번, 세나는 리타이어 5번으로 세나가 포인트에서 많이 불리한 상황이었고 때문에 세나는 반드시 일본 그랑프리를 우승해 챔피언쉽을 끝까지 끌고 가야만 했다. 동시에 프로스트 또한 세나가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면 자신이 챔피언을 확정 짓는 상황이었다. 그리드는 세나의 폴 포지션, 프로스트가 2위였다. 하지만 스타트에서 프로스트가 세나를 제치며 스즈카 1번 코너로 들어가게 된다. 운명의 45랩째, 팽팽한 꼬리 물기 끝에 시케인 직전에 프로스트 뒤에까지 붙은 세나는 바로 메인스트레이트 직전 시케인에서 프로스트에게 추월을 시도했으나...
11분 48초부터. |
여기서 중요한 일이 발생하는데, 둘 다 모두 시동이 꺼지고 만 것. 만약 여기서 둘 다 리타이어 한다면 프로스트의 챔피언이 확정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로스트는 차에서 내려 리타이어했지만, 세나는 다시 시동을 걸어 시케인 옆 탈출로로 나와 서킷에 복귀했다. 빡친 프로스트는 곧장 심판진에게 달려갔으나, 세나는 프론트윙이 파손된 상황에서 그대로 차를 끌고 가 피트에 복귀해 윙을 교체하고 서킷에 들어왔다. 그 사이 선두를 놓쳐버리게 된 상황이라 랩타임을 끌어올린 세나는 51랩때 똑같은 카시오 시케인에서 아슬아슬하게 인을 파고들어 선두를 차지했다. 그리고 그대로 그랑프리 우승.
여기까지는 좀 찝찝해도 문제가 없는 듯 했으나 이상하게도 시상식이 한참이 지나도 시작되지 않는 일이 생겼다. 세나가 충돌 사건과 관련해서 프로스트와 같이 불려간 것이다. 그리고 면담 끝에 내려진 심판 측 발표는 "세나를 실격 처리한다."였다. 이유는 시케인 충돌 후, 세나가 시케인을 통과하지 않고 인정되지 않는 코스를 통해 서킷에 복귀했다는 것. 그렇게 알랭 프로스트는 챔피언을 확정지었고 세나는 한동안 멍하게 앉아 있어야 했다. 여기에 대해선 당시 굉장한 논쟁이 이어졌는데, 시케인으로 복귀하진 않았지만 옆에 장애물이 있는 복귀용 코스를 통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주장(맥라렌 측), 세나가 이미 공간을 선점한 후 라인을 바꾸고 있는 와중에 끼어들어 사고를 일으켰다는 주장(프로스트 측)이 엇갈렸다. 특히 맥라렌이 공식적으로 세나의 처리에 대해 항소함으로 프로스트는 당시 팀에 대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11]
특히 세나는 당시 FISA[12] 회장인 장-마리 발레스트르가 같은 프랑스인 드라이버인 프로스트를 위해 레이스에 부당한 개입을 했다고 믿고 있었던 듯하다. 물론 프로스트가 그렇게 비열한 사람은 아니지만 당시 상황을 세나는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이후 세나는 항소에서 패배했고 레이스에서 위험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추가로 10만 달러의 벌금과 드라이버 면허를 6개월간 정지당하는 중징계도 받았다.
그렇게 세나는 1989 시즌을 굉장히 불쾌하게 마감했다. 퀄리파잉을 거의 휩쓸고 우승도 많이 하며 성적면에서는 나쁠 게 없었지만 정치적으로 휘말림으로 좋지 못한 시즌이었다. 최종 성적 60포인트 종합 2위.
1.4.3. 1990 시즌
(스즈카 1번 코너에서 충돌하는 세나와 프로스트.)
1990 시즌에는 페라리로 이적한 프로스트와 스즈카 결투를 펼치기도 했다.
이후 알랭 프로스트는 맥라렌 레이싱의 라이벌인 스쿠데리아 페라리로 이적했다. 팀 내 반목이 사라져 온전히 맥라렌을 자신의 팀으로 가지게 된 아이르통 세나는 정신적 충격을 추스리고 그리드에 다시 섰다. 세나와 프로스트 사이 경쟁구도는 여전했고 사이 또한 이보다 최악일 수는 없어서 둘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서로를 헐뜯곤 했다. 프로스트는 페라리로 이적해 맥라렌의 위닝카를 잃은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페라리 641은 MP4/5B와 경쟁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알랭 프로스트와의 3차전이기도 했지만 나이젤 만셀도 페라리에서 둘과 삼파전을 벌이곤 했다. 세나는 일본까지 6승에 2위 2회/3위 3회/20위 1회/리타이어 2회, 프로스트는 5승에 2위 2회/3위 및 5위 1회/4위 및 리타이어 2회로 당시 승점 제도[13]에 따라 3번 연속으로 스즈카 서킷에서 챔피언 향방이 결정되게 되었다.
이는 마치 둘의 대결은 숙명적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이번엔 반대로 프로스트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세나의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세나는 챔피언을 확정할 수 있었다. 경기 전 드라이버 브리핑에서 위험한 행동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넬슨 피케가 "그러면 오피셜들이 원하는 것은 시케인에서 탈출로로 빠지면 거기서 유턴을 해서, 달려오고 있는 다른 경주차들과 마주하며 돌아가라는 것인가? 그게 훨씬 위험하지 않나?"라며 작년에 오피셜들이 세나에 대해 내린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언급과 오피셜들이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뜻을 비췄다. 이에 대해 세나는 "이것 봐, 나는 아무 말도 안하는데 다른 사람들 조차 이해할 수 없다 하고, 모든 드라이버가 동의 하지 않느냐?"라며 다시 분노하며 브리핑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세나를 힘들게 하는 일은 또 있었다. 바로 폴 포지션의 그리드에 관한 것이었다. 스즈카 서킷에서는 폴 포지션 그리드가 오른쪽 그리드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맨 앞이지만 스즈카 서킷의 레코드 라인은 메인 스트리트에서 왼쪽 끝에 붙어 달리기 때문에 오른쪽은 당연히 그립이 한참 부족한 곳이었다. 그렇게 되면 스타트에서 보나마나 불리할 게 뻔하니 폴 포지션을 차지한 의미가 없게 된다. 오히려 두번째 그리드가 더 좋은 상황. 세나는 그리드 변경을 위해 적극적으로 항의했었다. 세나로서는 다분히 자신이 정치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고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상황...
세나는 폴 포지션을 차지했고 프로스트는 바로 뒤 2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레이스 당일 우려대로 폴 포지션의 그리드는 오른쪽 첫째 자리였다. 그대로 레이스는 시작되었고 프로스트는 스타트에서 세나를 제쳐 선두로 올라섰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1번 코너에서 세나와 프로스트가 충돌한 것이다! 두 사람의 차는 바깥 그래블로 날아갔고 둘 다 리타이어하고 말았다. 세나의 챔피언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그것도 스타트 첫 코너에 들어선 순간이였다.
자료를 보면 프로스트가 선두를 차지한 후 1번 코너에 들어가면서 인을 닫으려 하자 세나가 그대로 프로스트의 리어 타이어와 충돌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미 프로스트는 차 한대 거리 정도 앞서 있었기 때문에 저런 경우라면 진입 속도를 줄여 세나쪽에서 몸을 사리려 했을텐데 전혀 그런 움직임 없이 바로 충돌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세나는 폴 포지션 위치가 변경된 이후부터 첫 코너에서 감속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세나는 당시 폴 포지션 그리드 변경에 대해 공공연히 발레스트르를 비난하면서 모두 그가 벌인 일이라 한다. 물론 정말 그랬는지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전혀 자기 레이스카를 지키려 하지 않은 듯한 움직임을 보면 정황상 프로스트와 FIA에게 제대로 엿 먹이려 했던 것 같다. 실제로 FIA는 세나가 그럴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경기를 그냥 속행시켜 버렸고 세나의 챔피언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리타이어 직후 인터뷰에서 세나는 폴 포지션 그리드가 바뀐 것 때문에 그렇게 했냐는 질문에 욕까지 사용하며 전혀 거리낌 없이 인정하며 경기의 부조리함을 비난했다.
프로스트는 인터뷰로 세나에게 죽빵을 갈기고 싶다고 하며 치를 떨었으며 세나도 전혀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가 세나와 프로스트 경쟁의 최정점이었으며 F1이 상업적으로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최종성적 78포인트 종합 1위.
사실 이쯤되면 발레스트르 회장의 행동의 의도가 다분히 느껴지긴 한다. 물론 프로스트가 그와 적극적으로 협조해 스포츠의 형평성을 훼손했는지는 모르지만 발레스트르 회장이 당시 권력을 사용해 프로스트를 간접적으로 도우려 했다는 의도는 프로스트가 세나와 경쟁을 하는 동안은 다분히 느껴진다. 또한 프로스트도 그러한 정치적 이점을 분명 십분 활용했을 것이다. 때문에 세나는 누구보다 발레스트르 회장에 대한 분노가 컸다고 볼 수 있다. 프로스트와의 경쟁은 이후 93년을 끝으로 끝나지만 그때까지 세나가 프로스트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프로스트가 윌리엄스로 복귀했을 때는 나의 친구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그와의 새로운 경쟁을 매우 기뻐했다.[14]
1.4.4. 1991 시즌
세번째 월드 챔피언을 달성하다.
맥라렌에서의 4번째 시즌. MP4/6는 여전히 강력했지만 세나는 혼다의 신형 V12 엔진에 썩 만족하지 못했다. 출력 자체는 르노보다 뛰어났지만, 르노는 이미 80년대 부터 뉴메틱 스프링 같은 신기술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하여 개발하고 있었고, 이에 반해 혼다는 여전히 상당히 보수적인 엔진 설계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라이벌 알랭 프로스트가 처참한 퍼포먼스의 페라리 때문에[15] 세나와 경쟁하지 못했고 세나와 그나마 경쟁구도를 형성한 것은 윌리엄스의 나이젤 만셀이었다. 사실 나이젤 만셀과는 예전부터 여러 차례 맞붙었으나 제대로 환경이 조성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991 시즌에서 세나는 오랜 꿈과 같은 일을 해내게 된다. 바로 조국 브라질 그랑프리에서의 우승이었다. 세나는 지난 F1 커리어동안 한 번도 조국에서 우승을 해본 적이 없었다. F1에서 브라질을 알리고 열렬한 애국심에 브라질의 영웅이었던 세나로서는 정말이지 반드시 하고 싶었던 우승이었다. 인터라고스 서킷에는 '올레! 세나! 세나!'를 외치는 수십만명의 브라질 국민이 있었고 여유롭게 폴 포지션을 차지한 세나는 조국 동포들의 응원을 받으며 힘차게 출발했다. 세나는 매우 쉽게 레이스를 이끌어 갔고 이대로라면 염원하던 브라질 그랑프리 우승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때는 54랩, 세나의 기어박스가 고장나 6단 이외의 기어는 전부 사용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져 경기 말미엔 2위가 거의 다 따라잡은 상황[16]이었다. 여기서 세나는 포기할 수 없었기에 오직 6단 기어만을 사용해 남은 7랩을 돌기로 결심한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상황인가 하면 애초에 자동차가 6단만으로 저속과 고속을 넘나 들며 달릴 수도 없거니와 당시에는 스티어링조차 파워 스티어링이 아니었고[17] 패들 시프트도 아닌 일반적인 H 쉬프터였기 때문에 6단의 엄청난 토크와 힘을 맨손으로 모든 코너마다 견뎌내야 한다는 얘기였다. 시간이 갈수록 세나의 체력도 떨어져 갔고 2위 리카르도 파트레제도 세나를 맹추격하며 마지막 랩에 2.9초까지 차이를 좁혔지만 세나는 그것을 해내고야 말았고, 경기 후반에 비가 내린 덕분에 결국 모두의 환호 속에서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첫 우승을 거뒀다. 단 7랩이지만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그는 경기 직후 팔도 들어올리지 못할 정도로 근육에 무리가 가 있었다. 서킷 한가운데 차를 세웠고 자력으로 장갑을 벗지도 못했다.[18] 그는 비명을 지를 정도로 좋아했고 포디움에서 트로피와 브라질 국기를 간신히 들어올리며 브라질 국민과 기쁨을 나눴다.
AAAAAAH! AAAAAAAAAAAAH!!! AAAAAAH!
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
I DON'T BELIEVE IT! EU NÃO ACREDITO!
말도 안돼! (포르투갈어로) 말도 안돼!
AAAAAAAAAAAAH! PUTA QUE PARIU!
아아아아아아아! X발!
AAAAH! Ah, eu não acredito....ah....ah....ah...
아아아아! 아, (포르투갈어로) 말도 안돼....아....아....아...
결승선을 통과한 세나의 비명. (이후 잠깐 동안 실신하기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영웅적인 순간이었다.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
I DON'T BELIEVE IT! EU NÃO ACREDITO!
말도 안돼! (포르투갈어로) 말도 안돼!
AAAAAAAAAAAAH! PUTA QUE PARIU!
아아아아아아아! X발!
AAAAH! Ah, eu não acredito....ah....ah....ah...
아아아아! 아, (포르투갈어로) 말도 안돼....아....아....아...
결승선을 통과한 세나의 비명. (이후 잠깐 동안 실신하기도...)
이후 세나는 그야말로 시즌 내내 날아다녔다. 그를 향한 정치적 억압도 극심한 팀 내 갈등도 없이 그는 8번의 폴 포지션, 모나코 폴 투 윈, 시즌 7승이라는 성적을 기록했다. 만셀과 타이틀 경쟁을 했지만 만셀이 시즌 첫 3경기를 내리 리타이어하고 분수령이었던 일본 그랑프리마저 허무하게 그래블의 먼지속으로 사라지면서 세나는 여유롭게 시즌 챔피언을 획득했다. 그의 세번째 월드 챔피언 타이틀이었다. 최종성적 96포인트 종합 1위.
시즌 중 사고도 있었는데 멕시코 그랑프리에서였다. 그는 그랑프리 전 제트 스키를 타다가 경미한 부상을 입었었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페럴타다 코너에서 그래블에 빠지고 타이어월에 부딛힌 다음 차가 그대로 공중회전을 해서 머리부터 바닥에 꽂혀버렸다. 물론 세나는 의식을 잃는 일 없이 자력으로 탈출했지만 그가 처음 겪어보는 꽤 심각한 사고였다.
시즌 중 해고당한 프로스트는 결국 시트를 구하지 못해 1992년을 쉬어야 했고, 1993년에 다시 윌리엄스로 복귀했다.
1.4.5. 1992 시즌
[19]
1992 시즌은 사실상 미래의 자동차 경주 판도가 바뀌는 정도로 F1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기술이 등장한 시즌이었다. 그 기술의 이름은 바로 액티브 서스펜션. 액티브 서스펜션을 장착하면 차량 안에 탑재된 컴퓨터가 달리는 동안 서스펜션을 조정해 차의 지상고를 자동으로 조정하게 된다. 그렇게 각 상황에 맞는 최적의 그립을 만들어내 어느 코너에서도 가장 빠른 속도를 얻게 하는 기술이었다.
드라이빙의 순수성을 해친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어쨌든 규정 내 허용 범위였고, 이를 장착하지 못한 레이스카는 매우 불리한, 경쟁이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안타깝게도 세나의 맥라렌에는 액티브 서스펜션이 탑재되지 못했다. 그 이외에도 맥라렌은 업데이트가 자주 지연되었고, 여러 신뢰성 문제도 있었으며 이미 1992 시즌을 끝으로 F1에서 철수할 예정이었던 혼다의 V12 엔진은 더 이상 특출나게 강력한 엔진도 아니었고 MP4/6와 MP4/7은 더 이상 위닝카가 아니었다. 그러나 세나는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전설적인 경기를 연출하는 등 몇몇 그랑프리에서 우승했다. 물론 거의 모든 폴 포지션은 FW14B를 탄 나이젤 만셀의 차지였고 우승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액티브 서스펜션이 드라이빙의 의미를 해치고 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벨기에 그랑프리에선 퀄리파잉에서 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고 서킷 한가운데 반파된 채 있었던 리지에의 에릭 코마스를 구하기 위해 다른 차량이 서킷을 주행하고 있음에도 차에서 내려 서킷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코마스를 구출하기도 했다.[20][21] 이후 2년 뒤 코마스는 세나가 이몰라 서킷에서 사망하자 충격에 빠져 레이스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결국 1994년 일본 그랑프리를 끝으로 F1에서 은퇴하게 된다.[22] 이외에도 인디카 테스트를 받았고[23] 브라질 그랑프리에선 당시 루키였던 미하엘 슈마허와 말싸움을 하는 등 여러 사건이 있었다. 하지만 타이틀 방어에는 실패해 총 3승, 최종 성적 50점, 종합 4위에 머물렀다.
1.4.6. 199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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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닝턴 파크에서 우승한 세나 그는 모두가 인정하는 레인 마스터였다. |
맥라렌 F1 팀에서의 마지막 시즌. 명경기를 남기고 떠나다.
맥라렌은 F1에서 철수한 혼다를 대체할 엔진 업체로 당시 혼다와 비슷한 성능의 엔진을 만들던 르노와 협상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동시에 알랭 프로스트가 나이젤 만셀이 은퇴한 자리에 윌리엄스를 통해 복귀했지만 문제는 계약 조항에 얘랑 팀메이트 안함이라고 걸어놔 그것과 연관이 있지 않냐는 추측이 있었다. 맥라렌은 포드의 V8 엔진으로 엔진을 교체했고 뒤늦게 액티브 서스펜션 또한 탑재할 수 있었다. 시즌 5승을 할 정도로 차는 경쟁력을 되찾았으나 이미 강했던 윌리엄스-르노를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몇몇 인상적인 경기를 펼쳤는데 대표적으로 도닝턴 파크에서의 유로피언 그랑프리였다. 4번째 그리드였던 세나는 스타트에서 밀려 5위로 밀려나고 말았다. 앞에는 윌리엄스 듀오와 슈마허등이 있었다. 그러나 레인 컨디션이었던 도닝턴 파크에서 세나는 단 한 랩 동안 4명을 모조리 추월해 선두로 올라섰다.
이후 서킷이 잠시 말랐다가 다시 비가 내리면서 각 팀의 타이어 전략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세나는 거기서 웻타이어가 아닌 슬릭 타이어로 도박을 걸어 많은 랩타임 이득을 보았다. 동시에 우승. 당연하지만 이런 전략은 세나니까 수행 가능했던 전략이다. 이 외에도 브라질과 모나코, 일본 그랑프리등에서 우승하는등 커리어에 남을 만한 경기를 해냈다. 그리고 시즌 최종전인 호주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며 자신의 전성기를 보냈던 맥라렌에서의 커리어는 막을 내렸다. 양쪽 모두에게 아쉬운 이별이었지만 챔피언쉽에 대한 세나의 열망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세나는 시즌 중 꾸준하게 윌리엄스와 계약 협상 중이었다.[24] 결국 프로스트가 가져간 챔피언쉽은 승리하지 못했다. 최종성적 73포인트로 종합 2위.
시즌 중후반부터 세나는 맥라렌과 재계약을 하지 않고 그랑프리별로 계약을 하며 레이스에 나왔다. 바로 윌리엄스와 계약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세나를 데려오지 않는 조건으로 프로스트를 데려왔기 때문에 쉽지 않은 계약협상이었다.[25]
호주 그랑프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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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디움 | 포스트 레이스 인터뷰 |
1.4.7. 알랭 프로스트와의 경쟁
1988, 1989 시즌 동안 세나와 프로스트가 펼쳤던 경쟁은 F1 역사상 최고의 경쟁으로 여겨진다. 세나와 프로스트 모두 역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되는 기량을 가졌지만 그와 동시에 서로 대비되는 기질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 두 드라이버가 한 팀에서 동등한 차[28]로 경쟁했던 것이다.차량의 성능을 최대한으로 끌어내 이상적인 주행을 보여야 하는 퀄리파잉에선 세나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안정적인 운영으로 포인트 관리가 중요했던 본선 레이스에선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다. 두 사람이 경쟁했던 두 시즌 동안 우승 횟수에선 세나가 앞섰지만 포인트에선 프로스트가 앞서는 양상을 보였다.
세나 | vs | 프로스트 |
17 | 레이스 승리 | 13 |
28 | 퀄리파잉 승리 | 4 |
14 | 그랑프리 우승 | 11 |
26 | 폴 포지션 | 4 |
154 | 포인트 | 186 |
1.5. 로스만스 윌리엄스 르노
1.5.1. 1994시즌
1993년, 세나를 놓칠 수 없었던 윌리엄스는 알랭 프로스트에게 전화를 걸어 이전처럼 같이 세나와 팀을 이룰 수 없냐고 설득했다. 시즌 도중 휴가를 보내고 있었던 프로스트는 이에 당연히 불쾌해했고, 세나를 영입하지 않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본인을 퍼스트로 대접할 것 중 하나를 택하라고 윌리엄스에게 전했다. 윌리엄스는 세나를 무조건 영입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프로스트가 내건 후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가는 세나가 난리를 칠 게 뻔하므로 프로스트에게 1994년까지의 연봉을 미리 지불하는 대신 은퇴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했고 프로스트는 이에 합의했다. 그렇게 프로스트는 1993시즌에 네 번째 월드 타이틀을 획득하고 F1에서 은퇴하게 되고, 동시에 윌리엄스는 세나를 영입해 데이먼 힐과 함께 팀을 이루게 한다.
그런데 1994시즌부터 액티브 서스펜션이 전면 금지되면서 세나가 윌리엄스에 가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액티브 서스펜션이 없어진 후 FW16은 밸런스가 엉망진창이 되어[29] 코너를 돌 때 언더스티어가 나다가 갑자기 오버스티어가 나는 등 성향을 종잡을 수 없는 괴물같은 레이스 카가 되고 말았다. 당연히 세나는 극도의 불편함을 느꼈으며, 그 여파였는지 1라운드 브라질 그랑프리와 2라운드 태평양 그랑프리에서는 레이스에서 모두 리타이어하고 만다.[30]
그 와중에 세나는 브라질 그랑프리와 태평양 그랑프리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한 미하엘 슈마허의 소속팀 베네통의 레이스 카에 불법 전자 장치가 달려있다고 의심했고[31], 세나는 그런 상황이 암암리에 묵인되고 있다고 생각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32] 그리고 이어진 3라운드 산마리노 그랑프리에서는 퀄리파잉에서 브라질 후배 드라이버인 루벤스 바리첼로가 사고를 당하게 된다. 고속으로 주행하던 도중 코너 출구에서 레이스 카가 붕 떠서 그대로 날아올랐고 베리어에 정면 충돌해 빠른 속도로 굴러버린 것이다. 다행히 바리첼로는 큰 부상은 없었지만 세나는 직접 메디컬 센터에 찾아가는 등 그랑프리는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이어졌다.
1.5.1.1. 사망
그리고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고 마는데, 심텍 소속의 롤랜드 라첸버거가 퀄리파잉 도중 충돌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라첸베르거는 시속 200km가 넘는 상태로 코너에 진입했으나, 프론트 윙이 부러져 있던 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코너에 진입해 부러진 프론트 윙이 레이스 카 밑으로 들어가 트랙션을 잃고 콘크리트 베리어에 정면 충돌하고 말았다. 라첸베르거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고[33], 구급차가 투입되어 현장에서 응급 처치를 하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을 타게 되었다. 세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불안해했고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라첸베르거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해 있었고, 레이스 컨트롤의 발표가 이어지자 그랑프리가 진행되던 이몰라 서킷은 패닉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
세나의 사고 몇 시간 전 세나의 담당 사진기사였던 코이케 노리오가 찍은, 라첸베르거의 사고를 피트의 TV에서 시청하고 있는 세나 |
그렇게 다시 시작된 레이스에서 세나는 전속력으로 달리며 뒤에서 압박을 가하는 미하엘 슈마허를 상대하고 있었다.[37] 그런데 6랩째 선두를 유지하던 세나의 레이스 카가 완만한 곡선 코너인 탐부렐로에 진입했을 때, 레이스 카가 순간적으로 그립을 잃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더니 그대로 트랙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돌진해 방호벽과 부딪히고 말았다. 곧바로 옐로우 플래그가 발동되었고 마샬들이 달려갔지만 세나는 머리가 축 늘어진 채 의식이 없는 것 같았다. 구급차가 바로 투입되어 세나에게 응급 조치를 실시했고, 그때까지는 세나가 단지 기절했을 뿐 큰 부상은 없을 거라고 예상되었고 레이스는 속행되었다.
2년 전 나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준 남자의 바로 옆에 내가 서있었다는 사실에 몸이 잠깐 동안 마비됐다. 그 순간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 기분은 정말 끔찍했다.
에릭 코마스[38]
에릭 코마스[38]
그는 평온해 보였다. 나는 그의 눈꺼풀을 들어 올렸고, 그의 동공을 보았을 때 심각한 뇌 손상을 입었다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그를 운전석에서 들어 올려 땅에 눕혔다. 그 순간, 그는 한숨을 쉬었고, 나는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지만, 그의 영혼이 그때 떠나는 것을 느꼈다.
시드 왓킨스
시드 왓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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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로 박살난 세나의 FW16 |
세나의 레이스 카가 왜 갑자기 그 코너에서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며 충돌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40] 당시 세나의 소속팀이었던 윌리엄스는 FIA의 조사를 받았고, 여러 관계자가 처벌받거나 F1을 떠났지만 정확히 무엇 때문에 세나가 거기서 그립을 잃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텔레메트리도 모두 정상으로 나왔기 때문.
사고 전 온보드 영상을 바탕으로 한 분석 영상 스티어링 휠이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다. |
한편 순간적인 다운포스 상실로 그립을 상실해서 코너 바깥으로 밀려나갔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설득력 있는 가설 중 하나인데, 실제로 앞뒤에 장착되어 있는 윙보다 다운포스를 많이 제공하는 것이 레이스 카 밑에 장착되는 디퓨저 등의 언더바디 패널이다. 관내 유동에서 관의 직경이 작아지면 압력이 낮아지고 유동의 속도가 빨라지는데, 레이스 카의 아랫면을 낮추게 되면 관의 직경이 작아지듯 공기가 흘러가는 통로의 크기를 줄일 수 있다. 이 원리를 이용한 다운포스 생성에는 일반 자동차로는 상상할 수 없는 단점이지만 F1 레이스 카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단점이 있는데, 바로 레이스 카의 바닥이 서킷의 바닥에 닿아버릴 때 일어나는 순간적인 다운포스의 급감이다. 실제로 이 사고가 일어날 당시 F1 레이스 카들을 보면 달리는 도중 바닥에서 불꽃이 굉장히 많이 튀는데, 이는 F1 레이스 카가 가능한 최대한 낮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몰라 서킷의 열악한 노면 상황 때문에 플로어가 바닥에 닿았고, 레이스 카 하부에서 나오는 다운포스가 일시적으로 사라지며 순간적으로 그립이 금감하여 그대로 코너 바깥으로 밀려나갔다는 가설이다.[43] 실제로 이 사건 이후 F1 레이스 카의 지상고와 플로어 설계 등에 대한 규정이 많이 바뀌었다. 1994시즌 이전과 이후의 F1 레이스 카의 디퓨저와 하부 디자인을 보면 거의 완전한 평면에서 굴곡진 형태로 바뀌는 등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데이먼 힐과 패트릭 헤드 경은 세나가 탐부렐로에서 실수해 사고가 일어났다는 설를 지지했고, 당시 윌리엄스의 엔지니어였던 애드리언 뉴이는 타이어 펑크로 인한 사고라는 설을 지지했다.
당시 세나의 바로 뒤에서 달리고 있었던 슈마허는 세나의 사망 이후 세나를 무리하게 압박했다는 등의 비합리적인 비난과 세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많은 질타를 받았다.[44] 때문에 슈마허는 수 년 동안 죄책감과 심적 고통을 겪었는데, 그로부터 6년 뒤인 2000년에 슈마허는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우승해 세나의 통산 승수와 타이를 이루게 되었음을 레이스 직후 기자회견에서 축하받자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인터뷰 영상 같이 포디움에 오른 미카 하키넨 역시 당시 세나와 같이 달렸기 때문에 울먹이며 인터뷰를 넘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45]
세나가 충돌하기 전의 영상은 남아있지만 충돌하던 순간의 영상은 남아있지 않아 부분적으로 로스트 미디어이다. 또한 세나의 친구이자 사진작가인 안젤로 오르시(Angelo Orsi)가 관계자들이 시야를 가리기 전 핼멧이 벗겨진 후 차량에 있는 세나 사진과 치료를 받고 있는 세나 사진을 찍었다 밝혔으나 수많은 제의에도 불구하고, 본인과 세나의 가족들만 사진을 보았고, 오르시가 그 사진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영원히 공개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1954년 처음으로 시작된 레이스. 전세계 F3 레이스 챔피언들이 모여 시가지서킷에서 경주를 치르는데 도로 포장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모나코를 씹어먹을 정도의 극악의 시가지 서킷 레이스이다. 여기서 우승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F3 세계 챔피언임을 의미한다. 지금은 위상이 많이 떨어졌지만 이 시기 마카오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F1에 데뷔한다는 것을 의미할 정도였다.[2] 레이스가 중단된 상황에서는 중단된 랩의 전 랩 상황을 경기 결과로 사용한다는 규정 때문이다.[3] 현재는 알핀 F1 팀이다.[4] 나이젤 만셀이 로터스에 있을 때도 탐탁치 않아 했다.[5] 15랩째[6] 기록을 보면 알 수 있 듯이 80년대 초부터 90년대 초까지 이 4명이서 끊임 없이 경쟁하며 챔피언쉽을 사이 좋게 나눠가졌다. 루이스 해밀턴과 제레미 클락슨이 말한 위대한 시대란 보통 이들의 전성기 시절인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를 말한다.[7] 후에 맥라렌 F1의 설계를 맡게 된다.[8] 22라운드 중 21라운드 우승, 승률 95.45%. 헌데 이팀 역시 페라리에 의해 시즌 전승에 실패했다.[9] 16라운드 중 15라운드 우승, 승률 93.8%[10] 공교롭게도 엔초 페라리가 죽은 날은 이탈리아 그랑프리가 열리기 약 한달 전인 1988년 8월 14일이었다.[11] 이때의 FISA의 행동이 비판받는 이유는 실격 그 자체보다도 실격을 시킨 사유에 있다. 세나가 레이트 브레이킹을 걸어 자리를 억지로 차지했다거나, 사고 이후에 세나 자신이 혼자서 출발한 것이 아닌 마셜들이 밀어주면서 출발했다는 것 등의 실격 사유로 인정될 만한 것들이 있었음이 분명하나 FISA는 굳이 애꿎은 런오프에 빠지지 말고 트랙에 복귀하라고 만들어 놓은 이스케이프 로드를 이용했다는 이유로 실격을 시켜 버려서 억지스러움을 가중시켰다는 것.[12] F1 대회를 운영하는 현 FIA의 전신[13] 9-6-4-3-2-1[14]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땐 썩 마음에 들어하진 않았던 것 같다. 프로스트는 좋은 조건이 주어저야 경쟁할 의향이 생기는 겁쟁이라고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고 1994 시즌에 자신도 윌리엄스로 이적하였다.[15] 1991년 프로스트는 우승을 한 번도 하지 못했고 포디움에도 4회밖에 오르지 못했다. 프로스트는 부족한 차량 성능에 대한 불만감을 전혀 숨기지 않았고 페라리도 특유의 자존심(...) 때문에??: Shitbox! 페라리와 프로스트의 관계는 악화되기만 했고 마지막에서 두 번째 라운드인 일본 그랑프리의 인터뷰에서 프로스트가 당시 페라리의 개떡같은 성능에 대해 "끔찍한 트럭을 모는 것 같다"라고 말한 것을 구실로 시즌도 끝나지 않았는데 프로스트를 다짜고짜 쫓아내버렸다. 근데 페라리는 다음 해에는 더 떡락해서 침체기에 들어섰고 프로스트는 윌리엄스로 이적해서 챔피언을 한 번 더 했으니 결과적으론 이득 본 거다[16] 2위와 2.9초 차이로 간신히 우승.[17] 발전한 에어로 기술로 인해 견뎌내야 하는 다운포스가 상상을 초월하는 현행 F1 차량에는 파워 스티어링이 탑재된다. 물론 이 당시에도 다운포스를 매우 많이 받았지만 파워 스티어링은 탑재되지 않았어서 쩍쩍 달라붙는 타이어를 장착하고 엄청난 토크를 내뿜는 괴물을 맨손으로 다뤄야 했던 1990년대까지의 드라이버들에게는 상체 근력이 굉장히 중요시됐다.[18] 그 와중에 마샬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고 세나의 핼멧을 들어올리며 환호했다.[19] 가장 유명한 모나코 그랑프리. 세나는 닳아버린 타이어로 새 타이어의 만셀을 20랩 넘게 막아냈다.[20] 코마스의 차는 반파된 채로 스트레이트 한가운데에 있었고, 코마스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서킷에 먼지까지 나부껴 자칫하면 뒤에서 달려오던 차와 정면 충돌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세나는 여기다 차를 세우고 직접 뛰어가 코마스를 구출한 것이다.[21] F1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에 의하면 코마스가 의식을 잃고도 계속 액셀을 밟고 있었는지 엔진 소리가 크게 나서 세나가 차를 멈춰세우고 코마스를 구하러 갔다고 한다.[22]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모터스포츠 무대에서 2006년까지 활동, 2011년과 2012년에는 전기차 레이스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현재는 레이싱 활동을 은퇴.[23] 당시 맥라렌의 타이틀 스폰서였던 말보로의 주선으로 역시 말보로가 타이틀 스폰서였던 펜스키팀의 차량을 테스트했다.[24] 이때 세나의 후임으로 영입했던 드라이버가 앞서 언급했던 마틴 브런들이다. 다만 1994 시즌만 출전하고 그 전 소속팀이었던 리지에로 돌아갔다.[25] 물론 이 때까지도 알랭 프로스트의 세나 거부 조항은 유효했다. 때문에 윌리엄스는 프로스트에게 방출 의사를 내비쳤고 프로스트는 다음 시즌 연봉을 받는 조건으로 은퇴했다.[26] 물론 프로스트는 1988-89 시즌 맥라렌 시절처럼 세나와 같은 팀에서 경쟁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어림도 없는 말이었다.[번역] 우리 소중한 친구 알랭에게 특별 안부 전해. 우리 다 널 그리워해, 알랭.[28] F1 드라이버 최고의 라이벌은 팀 동료다. 다른 팀 드라이버에게 졌을 땐 차량과 팀을 탓할 수 있겠지만 동료에게 진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자신의 실력 탓이기 때문이다.[29] 현재 F1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인데, 외계의 기술력을 탑재한 레이스 카는 매우 좋은 퍼포먼스를 보인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레이스 카는 전체적으로 그 기술력 하나를 중점으로 밸런스를 맞추어 설계한 것이므로 중심이 되는 기술이 금지당하는 순간 대부분 나락으로 떨어지기 마련이다. 2010년대 초반에도 블로운 디퓨저를 이용한 레드불이 블로운 디퓨저가 금지되자 레이스 카의 밸런스가 무너져 우승권에서 바로 멀어지는 사례가 나왔다.[30] 폴 포지션은 3라운드 산마리노 그랑프리까지 모두 획득했다. 차는 굉장히 빨랐지만 그와 동시에 굉장히 불안정했다는 것이다.[31] 실제로 1994시즌에 출전했던 베네통 B194에서는 규정으로 금지된 트랙션 컨트롤 시스템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베네통 측에선 레이스 도중 사용을 부인했다.[32] 사실 세나는 데뷔 때부터 F1 특유의 정치적인 상황에 대해 불편해했고, 커리어 내내 그런 상황에 시달리고 FISA와의 관계가 무척 안 좋았기 때문에 그런 의혹에 큰 절망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33] 충돌의 충격으로 타이어가 콕핏을 뚫고 라첸베르거를 강타했고, 갑작스러운 속도 감소로 라첸베르거는 대동맥이 파열되었으며 두개골이 골절되었다.[34] 이때 세나와 친했던 F1 메디컬 닥터 시드 왓킨스는 세나에게 이제 그만 F1에서 은퇴하고 낚시나 하면서 여생을 보내자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나의 대답은 "그럴 수 없다"였다고.[35] 속력이 느릴수록 타이어가 느리게 예열되고, 위빙을 하며 타이어의 마찰력을 높이기가 어려워진다.[36] 우습게도 당시 이몰라 서킷은 돈이 없어서 고성능 스포츠카가 아닌 일반 승용 세단 복스홀 벡트라를 세이프티 카로 투입했다. 한국으로 치면 현대 쏘나타를 세이프티 카로 투입한 격이다.[37] 세나는 만약 레이스에서 우승하면 라첸베르거를 위해 라첸베르거의 조국 오스트리아의 국기를 흔들 예정이었다. 라첸베르거의 죽음은 바로 다음 날에 벌어진 세나의 죽음에 묻혀버리고 말았으나, 정작 세나는 누구보다 라첸베르거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38] 상술한 1992시즌에 세나가 구출한 드라이버로, 레이스에서 투텔 라루세 F1 팀 소속으로서 18위로 시작한 상태였다. 옐로우 플래그가 나왔을 때 피트인하여 레이스 카의 진동 문제를 고치고 나왔는데, 그게 팀과 소통이 안 되는 바람에 나오는 타이밍이 레드 플래그가 나오고 세나를 실을 헬기가 막 트랙에 착륙했을 즈음이 되어버렸고 레이스에 다시 참여하기 위해 풀 스로틀을 밟았던 코마스는 하마터면 헬기와 충돌할 뻔했다. 공교롭게도 코마스가 멈춘 곳의 상황은 본인의 은인이 실려가는 참상이었고, 2년 전 세나가 레이스 카에서 뛰쳐나와 자신을 구해줬던 것과 달리 코마스는 마샬들의 통제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39] 당시 중계 영상과 사고 당시 사진을 보면 현장에서 세나가 대량의 피를 흘려 바닥에 피웅덩이가 생긴 걸 볼 수 있다.[40] 사고 지점이었던 탐부렐로 코너는 문제가 굉장히 많았으며, 심지어 이미 세나의 사고와 유사한 유형의 정체불명의 원인으로 인한 사고들이 벌어진 적이 많이 있는 상황이었다. 1987시즌에 일어난 넬슨 피케의 사고나 세나의 사고와 많은 유사성을 지닌 1989시즌에 일어난 게르하르트 베르거의 사고가 대표적인 예였다. 또 탐부렐로 코너는 메인 스트레이트 직후에 나오는 풀악셀 초고속 코너임에도 노면이 좋지 않고 런오프도 매우 좁았으며, 충격을 흡수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방벽도 일반적인 타이어 방벽 같은 게 아닌 콘크리트 방벽이었다. 미국의 오벌 코스에서도 훗날 SAFER 방벽(#)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원시적인 콘크리트 방벽을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큰 사고가 나열도 하지 못할 정도로 굉장히 많이 터졌음을 생각해 보자. 이런 안전하지 못한 코너는 큰 사고를 예방하기는 커녕 사고의 충격과 부서져 튕겨지는 부품 잔해들을 흡수할 가능성조차 만무했고 결국 사고의 규모를 가중시키는 셈이었다. 즉 언젠가는 터질 시한폭탄이었다는 것이다.[41] 온보드 캠을 보면 스티어링 휠의 중심축이 틀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42] 다만 이탈리아에서 과실치사 혐의는 공소시효가 7년 6개월이기에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43] 노면이 조금만 안 좋아도, 심지어 그냥 직선 주로만 달려도 불꽃이 많이 튀는 것이 당대의 F1 레이스 카였으며, 실제로 F1 레이스 카의 이몰라 서킷 주행 영상을 보면 탐부렐로 코너에서도 불꽃이 자주 튄다.[44] 물론 슈마허와 세나의 경쟁이 세나의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절대 아니다.[45] 당시 산마리노 그랑프리 레이스 우승은 슈마허, 3위는 하키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