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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령 아메리카 독립 전쟁중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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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 그림 | ||
| 날짜 | ||
| 1810년 5월 18일 ~ 1818년 4월 5일 | ||
| 장소 | ||
|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파라과이, 볼리비아 | ||
| 원인 | ||
| 스페인의 착취 반대 크리오요의 불만 | ||
| 교전국 | | |
| 지휘관 | | |
| 결과 | ||
| 아르헨티나의 독립 | ||
1. 개요
1810년 5월 18일에서 1818년 4월 5일까지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이 전쟁에 승리한 독립군은 아르헨티나의 독립을 공고히 하였고 다른 남미 국가들의 독립에 협력한 독립 투사들의 승리로 끝났다.2. 배경
미국의 독립 선언은 스페인 통치 하에 있던 크리오요들에게 혁명과 독립이 가능하다는 예시가 되었으며, 이는 프랑스 혁명과 그 선언인 인권 선언의 영향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형제애를 외쳤고, 이러한 사상은 크리오요 부르주아의 젊은 층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영국은 산업 혁명에 따른 증가한 생산물의 새로운 시장을 찾기 위해 스페인의 식민지 상업 독점을 깨려 했고, 이를 위해 식민지 독립을 지지하거나 침략을 시도했다. 스페인에서는 나폴레옹 전쟁 중에 나폴레옹이 스페인 왕실을 압박하며 왕위에 그의 형 호세 1세를 앉히는 등 혼란이 일었다. 스페인 내에서 왕정에 대한 불만은 부르봉 왕조 개혁을 통해 강화되었고, 이는 식민지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특히,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은 스페인의 독점 상업에 저항하며 밀거래가 확산되었고, 부르봉 개혁은 지역 엘리트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또한, 1806년과 1807년 두 차례의 영국 침공을 통해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독립적인 군사력을 확인했고, 이로 인해 독립적인 성향이 강화되었다.영국의 침공을 물리친 후, 부에노스아이레스 주민들은 라파엘 데 소브레몬테 총독을 폐위시키고, 그의 대리인으로 산티아고 데 리니에르를 임명했다. 그러나 리니에르의 프랑스 출신 배경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그의 리더십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특히, 몬테비데오의 총독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엘리오는 리니에르를 인정하지 않고 독립적인 정부를 구성했으며, 이러한 정치적 갈등은 크리오요과 스페인 본토 출신 사이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1809년, 스페인 왕정은 리니에르를 교체하고 발타사르 이달고 데 시스네로스를 새로운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로 인해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시스네로스는 독립을 지지하는 크리오요들을 억압하려 했다. 한편, 1809년의 추키사카 혁명과 7월의 라파스 혁명은 스페인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으며, 이 혁명들은 스페인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억압은 크리올들 사이에서 독립 의식을 키웠고, 마리아노 모레노의 자유무역 정책은 경제적 자유를 촉진하려 했으나, 총독은 이를 취소하거나 유예하기도 했다.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혁명 분위기는 커져갔다.
2.1. 5월 혁명
5월 18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크리오요의 주요 지도자들인 코르넬리오 사베드라가 스페인 총독 발타사르 이달고 드 시스네로스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혁명은 시작되었다. 5월 22일, 시스네로스에게 권력을 넘기고 현지 정부를 수립하라는 요구가 담긴 회의가 카빌도(시청)에서 열렸다. 5월 25일, 혁명 세력은 군사적 지휘관인 사베드라와 다른 주요 인물들인 마누엘 벨그라노와 후안 호세 카스텔리가 이끄는 군대를 동원해 카빌도를 둘러싸고 결정적인 행동에 나섰다. 몇 시간의 긴장 끝에, 군대와 현지 엘리트들의 충성심을 유지할 수 없었던 시스네로스는 물러나야 했고, 그 자리를 대신할 임시 정부인 프리메라 훌렌다가 수립되었다. 이 새로운 정부는 주로 크리오요 지도자들로 구성되었으며, 사베드라는 그 대통령직을 맡고 벨그라노와 카스텔리가 그 멤버들 중 일부였다. 훌렌다의 창설은 스페인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고 아르헨티나 독립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초기에는 스페인 왕 페르난도 7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려 했지만, 새로운 정부는 점차 독자적인 권력을 확립하고 독립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 혁명은 보편적으로 지지를 받지 않았으며, 부에노스아이레스와 그 주변 지역의 많은 왕당파들이 새 정부에 저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월 혁명은 독립 운동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고, 1816년에 독립된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의 연방이 수립되기까지 이어지는 과정의 시작을 알렸다.3. 전개
3.1. 초기
1810년 5월 25일, 혁명의 결과로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에 첫 번째 정부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이 위원회는 부왕의 후계자로서 권위를 행사하려 했다. 정부는 5월 27일, 부왕령 주요 도시들에 원정군 파견과 함께 순응을 요구하며, 각각의 도시와 마을에서 대표자를 보낼 것을 요청했다. 당시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으며, 스페인의 왕위가 공백 상태였고, 이에 따라 정부 위원회는 스페인의 통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위원회의 지도는 특히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치적 이해를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켰고, 군사적으로도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1811년 중반, 알토 페루에서의 참패 이후 보다 신중한 태도로 전환했으며, 그 후 제1삼두정치가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1810년 5월 25일, 첫 정부 위원회는 내륙의 혁명적인 군대 설립을 요구하며, 병력 500명을 보내기로 했고, 이로 인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밀리시아를 중심으로 여러 군대가 형성되었다. 초기에 군대는 전투 경험이 부족했고, 병력의 훈련도 미흡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부대는 혁명군의 핵심이 되었다. 군의 주력은 보병, 기병, 포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초기에는 보병이 주로 활동했다. 기병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그들은 대개 유목민과 농민 출신이었으나, 후에 그들의 명성은 커졌다. 무기는 당시로서는 오래된 기술이었고, 보병은 총을 사용했으나 속도나 정확성에서 제한이 있었다. 기병은 주로 칼이나 창을 사용하며, 독특한 전술을 구사한 이들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5월 27일, 정부 위원회는 부왕령의 모든 도시와 마을에 원정군을 파견하며 순응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고, 현재 아르헨티나 내륙의 도시들은 이를 따랐다. 하지만 코르도바는 이를 거부했고, 그로 인해 혁명 정부는 군사적 강제력을 동원하여 독립 전쟁을 시작했다. 알토 페루 지역의 대부분은 정부의 순응을 거부했으나, 타리하만은 초기에 정부를 인정하고 대표를 보냈다. 몬테비데오는 5월 31일 첫 번째로 서한을 받았고, 이틀 후 정부를 인정했으나, 카디스에서 설정된 왕정 회의 소식을 전해 들은 후 정부를 거부하고 왕정 회의의 권위를 인정했다. 이에 정부는 몬테비데오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적대적인 조치를 취했다. 몬테비데오는 강력한 해군력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위협했으며, 후에 이를 차단할 가능성을 지녔다.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은 정부의 사절을 거부했으나, 혁명군의 지원을 받으면 합류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졌다. 코르도바에서는 전직 부왕 시스네로스가 저항 운동을 지시하며, 리니에르는 정부를 거부하고 저항을 준비했다. 코르도바의 군은 대규모로 모였고, 이후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충돌을 예고했다. 멘도사에서는 정부의 서한을 받고 순응을 선언했으나, 파우스티노 안사이의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그는 패배하고 정부를 인정했다. 산후안, 라리오하, 산루이스 등의 도시는 각기 다른 시점에 정부를 인정했으며, 일부 도시는 군사적 지원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자 정부 위원회는 코르도바의 반혁명에 즉각 대응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라고 결정했다. 오르티스 데 오캄포는 군대를 준비하여 코르도바로 향했고, 훈타는 지도자들을 포로로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투는 없었다. 리니어스가 모은 병력은 모두 탈영하거나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홀로 남았다. 그는 북쪽으로 도망쳐 니에토와 고예네체 군대에 합류하려 했지만, 오캄포는 그와 다른 지도자들을 붙잡은 뒤 포로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보냈다. 그 후 라니에르는 포로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3.2. 1차 알토 페루[1] 전역
카스텔리는 코르도바에서 환영받지 못했지만, 산미겔데투쿠만에서는 잘 받아들여졌다. 살타에서는 공식적인 환영에도 불구하고 군대, 말, 음식, 돈, 무기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원정대의 정치적 리더십을 맡으며, 이폴리토 비에이테스를 대체하고 오캄포를 대령 안토니오 곤살레스 발카르세로 교체했다. 코차밤바에서 정부를 지지하는 반란이 일어났지만, 라파스의 왕당파군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 카스텔리는 니에토의 편지를 가로채 코르도바의 군주 기예르레스 드 라 콘차에게 전해졌다. 발카르세는 코타가이타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카스텔리가 지원군을 보내 승리하여 수이파차 전투에서 승리하며 알토 페루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후에 포토시에서 카스텔리는 왕당파 장군들을 처형하고, 툴시카카에서 인디언 족장들과 함께 혁명 1주년을 기념했다. 그는 또한 알토 페루에서 원주민 노예제를 폐지하고, 원주민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는 등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카스텔리의 정책은 교회와 일부 엘리트들의 반발을 샀고, 그에 대한 지지율은 급격히 하락했다. 1810년 11월, 카스텔리는 페루를 정복할 계획을 보냈지만, 이는 거부되었다. 그 후 카스텔리는 하와키 전투에서 왕당파군에게 패배하고, 북부 군대의 지휘권이 사베드라에게 넘어갔다. 카스텔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재판을 받게 되었으며, 재판 중 구강암으로 고통을 겪다 1812년 10월에 사망했다.3.3. 파라과이 전역
181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정권은 아순시온의 왕당파 정부에 대한 대응으로 몬테비데오와 파라과이 간의 강을 통한 교통을 차단하고, 코리엔테스에서 여러 선박을 압수했다. 파라과이의 벨라스코 총독은 혁명파 인사를 체포하고 군을 조직해 미시오네스를 공격했다. 같은 해 9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주도 하에, 마누엘 벨그라노가 파라과이 원정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250명의 병력으로 출발해 미시오네스를 거쳐 파라과이로 향했다. 그들은 파라과이로 진입하고 12월에 첫 번째 전투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벨그라노의 군대는 자주 병력 부족과 열악한 지형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1811년 1월 파라과이에서 벨라스코와 마주쳤으나, 결국 2월에는 파라과이 군의 반격을 받았다. 3월 9일, 타쿠아리 전투에서 벨그라노는 파라과이 군에게 패배하고, 3월 말에는 군을 철수하게 되었다. 이후, 벨그라노는 평화 협상에 나섰고, 이로 인해 파라과이의 독립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5월, 파라과이에서 혁명이 일어나 벨라스코가 축출되었고, 가스파르 로드리게스 드 프란시아가 실질적인 권력을 쥐게 되었다. 6월, 파라과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의 관계를 중단하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벨그라노는 파라과이와 협약을 체결했으나, 프란시아는 파라과이를 외부와 완전히 격리시키며 독립적인 길을 걷게 했다.3.4. 1차 반다 오리엔탈[2] 전역
몬테비데오를 장악한 가스파르 비고데트 장군은 내륙 마을들을 차례로 점령하며 몬테비데오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같은 해 10월, 비고데트는 후안 앙헬 미첼레나를 보내 우루과이 강의 해안을 점령하고, 11월에는 고알레과이추와 고알레과이를 차지했다. 그러나 왕당파의 공격에 저항한 지역 주민들이 주도한 저항 운동이 성공을 거두었다. 1811년 3월, 혁명군은 우루과이 강의 서쪽에서 승리를 거두며 지역을 장악했다. 9월 3일, 호세 마리아 살라사르 총독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봉쇄했지만, 영국 해군의 압박으로 봉쇄는 해제되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해군을 조직해 제반 작전을 진행했다. 3척의 함선이 준비되었고, 3월 2일 상 니콜라스 전투에서 스페인 해군과 교전했으나 패배했다. 같은 해 1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엘리오는 몬테비데오에서 신임 리오 데 라 플라타 총독으로 부임하여 혁명군과 전쟁을 선포했고, 2월 28일 아센시오에서 페드로 호세 비에라가 군사를 일으켜 엘리오의 군대에 맞섰다. 이후 아르티가스가 4월 9일 반다 오리엔탈로 상륙하여 혁명군을 이끌었고, 5월 18일 라스 피에드라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후 리오 데 라 플라타 회의는 벨그라노에게 전투 지원을 보내는 한편, 몬테비데오를 포위하는 작전을 시작했다. 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혁명군은 몬테비데오와 콜로니아를 포위하고, 이 지역에서의 실질적인 승리가 이뤄졌다. 7월 15일, 스페인 해군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엘리오는 포르투갈 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포르투갈은 리오 데 라 플라타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3000명의 군대를 보내 반다 오리엔탈을 점령했고, 10월에는 말도나도에 군사 본부를 설치했다.3.5. 2차 알토 페루 전역
알토 페루에서 카스텔리와 그의 고문 베르나르도 몬테아구도는 급진적인 조치를 취하면서 부유한 계층들과 교회로부터 적대감을 샀다. 1811년 4월, 카스텔리의 군대는 라자에 주둔했고, 4월 17일에는 포토시에서 반란을 진압했다. 하지만 그 후 고이네체는 정치적 실수를 이용해 페루 사람들을 모아 8000명의 군대를 조직하고, 5월 16일 카스텔리와 휴전을 맺었다. 카스텔리는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5월 25일, 카스텔리는 티아우아나코에서 원주민 지도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했다. 6월 6일, 카스텔리와 고이네체는 첫 번째 교전을 벌였고, 6월 20일에는 훼키 전투에서 대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카스텔리의 군대는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고이네체는 대승을 거두었으며, 혁명군은 대규모 탈주와 함께 군사 장비를 잃었다. 이후 고이네체는 오루로와 라 파즈를 점령하고, 카스텔리는 8월 3일 징계를 받았다. 8월 13일, 아미라야 전투에서 리베로는 패배하고, 코차밤바가 고이네체에게 평화롭게 점령되었다. 고이네체의 승리와 함께, 알토 페루에서의 반란은 급격히 진압되었고, 카스텔리의 군대는 포토시로 후퇴했다. 같은 날, 타크나에서 반란이 일어나 있었으나 지원군이 없었고, 6월 29일에는 오마수요스, 파카헤스, 라레카하 지역의 원주민들이 라 파즈를 포위하고, 8월 초에는 후안 마누엘 카세레스의 지도 아래 도시를 점령하고, 군을 학살했다.3.6. 2차 반다 오리엔탈 전역
1812년 초,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몬테비데오 간의 휴전이 끝났고, 마누엘 데 사라테아는 군을 이끌고 반다 오리엔탈로 향했으나 곧 호세 론도에게 교체되었고, 론도는 몬테비데오에 대한 두 번째 포위를 시작했다. 왕당파의 가스파르 데 비고데트는 포위를 풀기 위해 시도했으나, 세리토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 후 스페인 해군은 육상 봉쇄를 피하기 위해 우루과이 강의 서쪽에 있는 인근 마을을 공격했다. 1813년 1월 31일, 몬테비데오에서 온 스페인 군대가 산로렌소 마을 근처에 상륙했으나, 2월 3일 산 마르틴이 이끄는 그라나다로스 부대에 의해 완전히 패배했다. 산로렌소 전투는 파라나 강의 서쪽에서의 스페인군의 추가적인 공격을 막았고, 삼두정치 정부는 산 마르틴에게 장군 직위를 수여했다. 그라나다로스 부대는 1812년 10월 8일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정부를 전복시키고 독립에 더 헌신적인 삼두정치 정부를 설치했다. 실제로 이 두 번째 삼두정치 정부는 독립을 선언할 국민 의회를 소집하려 했으나, 의회는 먼저 삼두정치 정부를 해체하고 단일 행정직인 연합된 라플라타강 유역의 최고 지도자 직위를 새롭게 창설하기로 결정하고, 그로 바스티오 안토니오 데 포사다스를 그 자리에 선출했다.포사다스의 첫 번째 조치는 해군을 처음부터 다시 창설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후안 라레아가 자금을 지원하고, 1814년 3월 1일 윌리엄 브라운을 중령이자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예상 밖에도 1814년 5월 14일, 즉흥적으로 구성된 애국 해군은 스페인 해군과 싸워 3일 만에 승리했다. 이 승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의 안전을 확보했으며, 결국 몬테비데오는 더 이상 포위를 견딜 수 없었고, 1814년 6월 20일 함락되었다.
3.7. 3차 알토 페루 전역
1814년 5월 7일, 산 마르틴이 병으로 휴가를 받자, 최고 지도자 가르바시오 안토니오 데 포사다스는 호세 론도에게 산 마르틴의 자리를 대신 맡을 것을 명령했다. 론도는 그 후 고립된 몬테비데오 포위를 마친 후, 제3차 알토 페루 캠페인을 준비하면서 군을 재편성하고 새로운 병력을 모집했다. 페수엘라는 산타페, 살타, 후후이, 타리하 지역을 버리고 알토 페루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쿠타가이타로 군을 옮겼다. 한편, 군에 대한 명령을 내리던 중, 구에메스는 론도와 갈등을 겪으며 자신의 지휘권을 인정받고, 이후 독립적인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다. 1815년 1월, 론도는 군을 이끌고 야비와 푸에스토 델 마르케스를 공격해 승리했으나, 페수엘라는 군을 철수시키고 오루로로 후퇴했다. 동시에, 구에메스는 군과 함께 후퇴하며 살타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독립적인 주지사로 취임했다. 1815년 2월, 론도의 군은 테하르 전투에서 패배하고, 같은 해 4월 3일에는 평화 협상 시도도 무산되었다. 이후 론도는 다시 전투를 이어갔으며, 1815년 5월, 구에메스의 공격으로 페수엘라는 코차밤바를 철수했다. 론도는 다시 군을 진군시키며 지역을 점령하고, 군 사령관으로의 권한을 강화해 갔다. 10월에는 벤타와 메디아에서 군을 조직했으나, 패배 후 다시 군을 철수시키고 공격에 실패했다.1815년 11월 1일, 페수엘라는 날씨로 지연되었지만 차얀타 지역으로 군을 이동시켰고, 11월 29일, 시페-시페 전투에서 론도우의 군을 공격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론도우의 군은 3,500명이었고 페수엘라는 5,1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승리했다. 패배한 론도우는 추격을 피하기 위해 칸티와 투피자, 후마와카로 철수했다. 1816년 초, 론도우는 1,000명의 증원병을 얻었으나, 우타랑고 전투에서 패배하고, 결국 후마와카로 후퇴했다. 같은 해 1월, 페수엘라는 코차밤바를 떠나 포토시로 이동하고, 람리레즈는 추키사카로 향했다. 2월 9일, 파딜라는 추키사카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 1월, 그레고리오 아라오스 데 라마드리드는 산 마르틴과 함께 세운 저항군과 결합하여 리얼리스트를 공격했고, 1월 31일, 추피나 전투에서 아베레스를 물리친 후 2월 2일, 우타랑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2월 12일, 라마드리드는 올라네타에게 패배했으며, 4월 13일, 타리하에서 올라네타가 승리했다. 론도우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보낸 2,000명의 지원을 받아 후퇴하고, 1816년 1월, 페수엘라는 코차밤바를 떠나 포토시로 이동했다. 3월 12일, 시나와에서 올라네타는 카마르고를 처치했고, 4월 3일에는 다시 승리를 거두었으며, 결국 카마르고는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이 시점에서, 페수엘라는 타리하와 포토시를 점령하고, 론도우는 북쪽으로 후퇴하여 튀쿠만에 도달했다. 그 후 1816년 7월, 론도우는 툴랄라 전투에서 패배하고, 벨그라노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벨그레노는 튀쿠만에서 군을 재편성하고, 1815년 10월 14일, 페수엘라는 페루 총독직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후임으로 호세 드 라 세르나가 임명되었다.
3.8. 칠레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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