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0000 코차밤바 Cochabamb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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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 문장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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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c35>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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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 코차밤바주 | ||
면적 | 170㎢ | ||
인구 | 1,430,688명 (2024년) | ||
해발 | 2,574M | ||
시간대 | UTC -4 | ||
시장 | Manfred Reyes Villa |
1. 개요
볼리비아 코차밤바주의 주도이자 볼리비아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다. 일 년 내내 봄과 같은 기온 때문에 영원한 봄의 도시, 정원 도시라는 별명이 있다.2. 어원
코차밤바의 어원은 케추아어로 호수와 개활한 평원을 합친 단어에서 유래했다.3. 역사
코차밤바는 비옥한 토양과 온화한 기후로 수천 년 동안 사람이 거주했다. 잉카 제국이 강성해지자 사파 잉카인 토파 잉카 유팡키가 코차밤바를 정복하였다. 잉카의 지배 하에 코차밤바는 현지인들을 강제로 이주시키고 본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잉카 제국은 높고 추운 고산 지대에서 재배할 수 없는 옥수수를 코차밤바에 재배하였고 2,400개의 창고에 보관되어, 봄이 되면 잉카 제국 각지로 운송하였다.그러나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자 가르시 루이스 데 오렐라나라는 스페인인은 이 지역의 부족장인 아키타와 콘사바나로부터 땅을 매입한 뒤 도시를 만들었다. 빌라 데 오로페사라고 불리는 이 도시는 포토시에 식량과 목재를 공급하기 위한 농업 중심지였다. 포토시의 은광 산업이 흥하면 흥할 수록 빌라 데 오로페사의 경제는 잘 나갔다. 하지만 18세기 은 채굴이 쇠퇴하자 빌라 데 오로페사의 경제는 쇠퇴하였다. 이 때 쯤 스페인의 국왕인 카를로스 3세의 명령으로 코차밤바로 도시 이름이 바뀌었다. 그 이유는 오루로에서 일어난 원주민 반란을 진압하는데 이 지역 원주민들이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페인 본국이 프랑스에 점령당하자 중남미에 있던 스페인 식민지는 독립의 움직임을 보였다. 1812년 코차밤바의 시민들은 스페인군을 향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우아키 전투에서 이긴 스페인군은 라파스에서 코차밤바를 향해 새로운 공세를 시작하였다. 그러자 도시의 남성 병력은 대부분 철수하거나 항복을 하였다. 그 때 시작장애를 지닌 마누엘라 간다리야스(Manuela Gandarillas)라는 할머니를 중심으로 "남자들이 없다면, 우리가 싸우자"는 외침으로 여성들을 독려하며 전투를 이끌었다. 비록 이들은 패배하였지만 볼리비아에서는 5월 27일을 어머니의 날로 지정해 이를 기념하고 있다.[1]
이후 볼리비아는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하고 코차밤바는 볼리비아의 도시가 되었다.
4. 경제
비록 도시화로 쇠퇴하였지만 농업은 여전히 코차밤바의 주요 산업이다. 주로 바나나, 오렌지, 파인애플, 완두콩, 양파, 감자, 사탕수수, 코코아. 파파야 등을 재배한다. 또한 최근 몇 년 동안 상당한 양의 천연가스가 발견되어서 볼리비아의 주요 천연가스 생산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니다. 이로인해 코차밤바에는 볼리비아 전역으로 전력을 송출하는 발전소가 만들어졌다.5. 관광
- 크리스토 데 라 콘코르디아 (Cristo de la Concordia) : 볼리비아 코차밤바 동쪽 산페드로 언덕 꼭대기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 상으로 케이블카를 타거나 2,000개의 계단을 오르면 접근할 수 있=다. 이 동상=높이는 39.68미터로 중남미에서 가장 큰 예수 그리스도 상이다. 참고로 리우 데 자네이루에 있는 거대 예수상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6. 자매도시
7. 여담
- 코차밤바의 수도가 민영화되어서 수도 요금이 폭등하자 이에 반발해 시위가 열렸다. 자세한 사항은 코차밤바 물 전쟁 참조.
- 코차밤바는 1983년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 스카페이스에서 이야기 속 장소로 등장했\다. 강력한 마약왕 알레한드로 소사는 그곳에 거주하며 대규모 코카 농장을 관리하고 코카인 연구소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 후 더 많은 정제 과정을 거쳐 플로리다의 토니 몬타나에게 운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