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3 00:14:17

아르군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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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칸국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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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몽골 아르군 (2).png
아르군 칸과 왕비 쿠틀루그 하툰

1. 개요2. 생애
2.1. 계승 전쟁2.2. 즉위2.3. 부카 숙청과 나우루즈의 난2.4. 대외 정책2.5. 말년2.6. 사망

1. 개요

페르시아어, 아랍어 أرغون خان
몽골어 Аргун хан / ᠠᠷᠭᠤᠨ
영어 Arghun Khan

생몰 1258년 3월 8일 ~ 1291년 3월 12일
재위 1284년 8월 11일 ~ 1291년 3월 12일

일 칸국의 4대 칸. 아바카 칸의 아들로, 숙부 테쿠데르에 반란을 일으켜 그를 처형하고 칸이 되었다. 부왕처럼 독실한 불교도이면서 기독교권에 친화적이었던 아르군은 서유럽에 4차례 사절을 보내어 맘루크 왕조에 대한 군사 동맹을 모색하였고, 따라서 서방에 가장 잘 알려진 일 칸이었다. 다만 제대로 된 공동 군사 작전은 이루이지기 전에, 불로장생을 위한 연금술에 빠져 있던 아르군 칸은 그렇게 만든 약을 먹고 요절해버렸다. 그의 두 아들 가잔올제이투가 후일 칸이 되었다. 또한 16세기 신드 지방에는 그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아르군 왕조가 세워졌다.

2. 생애

아바카 칸과 옹구트 부족 출신 기독교도 카이트미쉬 에게치 사이의 아들로, 1258 혹은 1259년 아제르바이잔의 바이라간에서 태어나 호라산의 잘라이르 부족 출신 장군 사르타크 노얀에 위탁되어 길러졌다. 20세에 카라우나 (네구다르) 부족 토벌을 시작으로 전장에 나섰고, 1279년 7월에는 시스탄으로 출정하여 전 차가타이 칸 무바라크샤의 아들 올제이 부카를 사로잡았다. 1282년 부왕의 사후 벌어진 쿠릴타이에서 아르군은 숙부 아흐마드 테구데르에 밀렸고, 후자는 (칸보다는)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2.1. 계승 전쟁

파일:몽골 아르군 아흐마드 (2).jpg
16세기 사파비 왕조 대에 그려진 아르군과 테쿠데르의 대결

아흐마드 테쿠데르는 일전에 횡령 혐의로 고발된 적이 있는 페르시아계 주바이니 가문을 중용하였는데, 아르군은 주바이니 가문이 부왕의 독살에 가담했다 여겨 혐오하였다. 1282-83년 바그다드에서 월동한 아르군은 주바이니 가문의 횡령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하였고, 그들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소문에 증오심은 더욱 커졌다. 나쁘지 않던 테쿠데르와의 관계도 그가 일전에 아르군이 임명한 라이 총독 말리크 파크르 웃딘을 체포하며 악화되었다. 테구데르 역시 항상 이복동생 콘쿠르타이가 조카 아르군과 동맹하지 않을까 의심하였고, 디야르바크르에 직속 부대를 배치하여 두 숙질의 연결을 차단하였다. 그것도 못미더웠는지 1284년 1월 테쿠데르의 사위이자 조지아 총독인 알리나크가 콘쿠르타이를 반역 혐의로 체포해 처형하였다. 동시에 여러 아미르들의 체포가 뒤따랐다.

이후 자지라로 군대가 파병되자 위협을 느낀 (각각 아르군의 동생과 사촌인) 가이하투와 바이두는 호라산의 아르군에게 망명하였다. 1283년 말엽 호라산으로 돌아온 아르군은 아미르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테쿠데르는 1284년 1월 알리나크 휘하의 1만 5천 선발대를 파견한 후 자신은 아르메니아 & 조지아 동맹군을 포함한 대군을 편성하여 4월 말엽 출정하였다. 그해 5월 카즈빈 남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아르군은 알리나크의 선발대를 격파하였다.[1] 다만 칸의 본대가 다가오자 호라산으로 철수한 아르군은 숙부에게 휴전을 제안하였는데, 셈난에 주둔하던 테쿠데르는 참모들의 조언에도 이를 거절하였다. 다만 아르군의 아들 가잔이 이끄는 2차 사절단이 당도하자 이번에는 가이하투를 인질로 삼는 대가로 휴전을 수용하였고, 아르군 역시 조건을 받아들여 가이하투를 아미르 나우루즈와 함께 보내었다.

하지만 그후 테쿠데르는 휴전을 무시한 채로 진격을 재개하였는데, 그의 대장군인 부카마저 실망하고 아르군에 동정을 느낄 정도였다. 동시에 테쿠데르가 잘라이르 부족 출신의 아크 부카를 더욱 신뢰하게 되자 부카는 변절을 결심하였다. 한편 칼라트 인근의 험준한 나데리 성채에서 불과 1백의 병력과 농성하던 아르군은 4일만에 알리나크에게 항복했는데, 승리에 만족한 테쿠데르는 아르군을 포로 상태로 두고 자신은 칼푸쉬의 본영으로 돌아갔다. 그때 부카가 알리나크 진영을 기습해 그를 죽이고 아르군을 풀어주었다. 놀란 테쿠데르는 서쪽으로 피신하며 보복으로 솔터니예 인근 부카의 야영지를 약탈하였다. 7월 중순, 여름 수도인 타크테 솔레이만에 다다른 테쿠데르는 데르벤트를 거쳐 킵차크 칸국에 망명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는 부카가 파견한 카라우나 부족에 의해 사로잡혀 마라게 인근 아비 슈르 초원에 주둔하던 아르군에게 압송되었다.

2.2. 즉위

약 보름 후 아르군은 테쿠데르를 처형하고 칸에 올랐다. (1284년 8월) 그후 관례에 따라 분봉이 이어졌다. 아르군의 사촌 주쉬캅과 바이두는 부카의 동생 아루크의 후견 하에 바그다드에 봉해졌고, 동생 가이하투는 아나톨리아 총독에, 아들 가잔은 나우루즈의 후견 하에 호라산에 봉해졌다. 공신 부카는 사힙 디반 (재상)과 아미르 알 우마라 (대장군)에 봉해져 군정과 민정을 모두 맡게 되었다. 아르군이 아바카 칸의 암살자로 여기던 샴스 앗딘 주바이니 등은 처형되었다. 1286년 2월에는 원나라쿠빌라이 칸으로부터 신임장이 당도했고, 대칸의 책봉을 받은 아르군은 그해 4월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다만 아르군과 권신인 부카, 아루크 형제 간의 대립이 점차 본격화되었다.

2.3. 부카 숙청과 나우루즈의 난

특히 아루크는 바그다드를 자신의 사유지로 여겨 칸에게 세금을 바치지 않았고, 자신을 비판하는 자들을 살해하였다. 부카 역시 1284년 말엽 살구르 왕조의 아비쉬 하툰이 경쟁자 사이드 이맘 웃딘 알라비를 살해하자 그녀를 소환하여 감금하고 쉬라즈를 직할지로 삼았다. 이에 아르군은 부카를 반대하는 아미르들과 함께 파르스 일대에서 미납된 세금을 수사하였고, 1287년 부카가 와병하자 아루크의 체납된 세금에 대해서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아루크는 해임되었고 오르도 키야가 바그다드 아미르가 되었다. 또한 부카의 동맹인 알리 탐가차이가 타브리즈 총독에서 해임되었다. 부카 역시 자신의 사돈인 조지아 국왕 데메트레 2세와 음모를 기획하였다.

부카는 아르군의 사촌 주쉬캅에게 자신을 나입 (섭정)으로 임명하는 대가로 칸에 추대하겠다고 제안했는데, 주쉬캅은 이를 칸에게 일러바쳤다. 1288년 아르군은 아미르 콘쿠크발을 보내어 부카를 체포하게 하였고, 그와 공모한 데메트레 2세 역시 타브리즈로 소환되어 투옥되었다. 얼마 간의 저항 끝에 사로잡힌 부카는 1289년 1월 처형되었고, 데메트레 2세 역시 같은해 3월 처형되었다. 부카 숙청 후 아르군은 친족들에 대한 의심이 커졌다. 우선 그해 5월 숙부 훌라추와 요쉬무트의 아들 카라 노카이가 체포되어 이듬해 10월 처형되었다. 부카의 모반을 밀고했던 주쉬캅 역시 의심을 받은 끝에 거병을 준비하다 사로잡혀 1289년 6월 처형되었다.[2]

연이은 숙청에 불안해하던 호라산의 나우루즈는 칸의 군대가 다가온다는 소식에 (감금된) 훌라추를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왕자 가잔은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패하여 마잔다란으로 축출되었고, 이에 아르군은 이라크의 에미르 누린 아카와 바이두를 파견하여 반군을 격파하였다. 패배한 나우루즈는 토르바테 잠에 웅거하며 청야 전술에 나섰고, 겨울 추위를 이기지 못한 토벌군은 1290년 초엽 철수하였다. 그틈에 나우루즈는 아무다리야를 건너 카이두에 합류, 그로부터 3만 병력과 함께 바다흐샨 총독에 봉해졌다. 세력을 키운 나우루즈는 이듬해부터 줄곧 호라산을 침공하였고, 나우루즈의 난은 1294년 호라산의 가잔이 그를 복속시키며 겨우 진압되었다.

2.4. 대외 정책

파일:몽골 십자군 (2).jpg
1289년 아르군 칸이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 보낸 서신
몽골어와 몽골문자로 적혀있다.

부왕과 마찬가지로 아르군 역시 킵차크 칸국과 대립하였다. 1288년 5월 그는 샤마키로 남하한 킵차크 칸국군을 격퇴하였고, 이듬해 3월에는 데르벤트에 대한 공격도 아미르 타가차르가 막아내었다. 2년 가량 아제르바이잔 북부에 머물던 아르군은 1290년 5월 빌라사부르로 남하하였다. 아르군이 킵차크 칸국과 싸우고 내전에 대처하는 동안 맘루크 조는 라타키아, 트리폴리를 연달아 점령하며 십자군을 압박하였다. 아르군은 즉위 직후인 1285년 교황 호노리오 4세에게 사절을 파견한[3] 이래로 4차례 서방에 서신을 보내어 맘루크령 시리아에 대한 공동 군사 작전을 제안하였다. 교황의 답장이 없자 아르군은 1287년 옹구트계 네스토리우스파 수사인 랍반 바르 사우마를 재차 파견하였다. 해당 사절단은 1288년까지 교황을 비롯하여 필리프 4세, 에드워드 1세 등을 접견하고 호의적인 답변을 가져왔으나 구체적인 실행은 논의되지 않았다.

1289년 아르군은 제노바 출신 신하인 부스카렐로 디 기졸피를 파견해 구체적인 협공 시기를 논의하고자 하였다. 1290년 초까지 로마-파리-런던을 연달아 방문한 그는 1290-91년 겨울에 협공하여 예루살렘을 넘겨주겠다는 아르군의 제안을 전하였다. 또한 아르군은 3만 필의 말을 포함한 보급품을 조달할 것을 약속하였다. 비록 확답을 얻지는 못했지만 아르군은 홍해의 맘루크측 무역을 교란하기 위해 바그다드에서 함대 건조에 나섰고, 이에 제노바 공화국은 8백명의 목수와 선원들과 석궁병들을 보내 도왔다. 하지만 이내 바스라에서 제노바 인들이 서로 구엘프 (교황파)와 기벨린 (황제파) 파벌로 나뉘어 내분을 벌이며 선박 건조는 결국 무산되었다. 1290년 말엽 아르군은 4번째로 부스카렐로를 포함한 기독교도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보내었다. 당시 아크레에 대한 맘루크 조의 압박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기에 서방도 절실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듬해 1월 교황 니콜라오 4세는 에드워드 1세를 중심으로 아르군, 아르메니아 국왕 하이톤 2세, 야곱파, 에티오피아, 조지아 등과 연대한 새로운 십자군을 제창하였다. 그해 5월 아크레 함락 후 8월 니콜라오 4세는 아르군에게 에드워드 1세를 주축으로 한 십자군 계획을 알리며 지원을 청하였고, 동시에 아르군에게 세례를 받으라 권하였다. 하지만 서신이 도착했을 무렵 아르군은 이미 사망한지 수개월이 지난 후였고, 니콜라오 4세 역시 1292년 3월 사망하였다. 이로써 서유럽과 일칸국 간의 공동 군사 작전은 6년간의 활발한 서신 교류에도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1292년 에드워드 1세는 아르군의 후임 칸인 가이하투에게 서신을 보냈으나 호응이 저조했고, 가잔 칸의 등극 후에야 협공 논의가 재개된다. 아르군의 대서방 외교는 제대로된 결실을 얻지는 못했지만, 이탈리아에서 아르고네 (Argone)란 이름이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2.5. 말년

한편 부카 숙청 후 아르군은 압하르 출신의 유대인 주치의 사드 앗 다울라 알-압하리를 재상으로 선임하였다. 사드 앗 다울라는 뛰어난 재정 관리 능력과 몽골-튀르크계 언어 구사 능력으로 칸의 환심을 샀고, 지방의 세금을 규정대로 받아내며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몽골 귀족들의 자치권을 약화시키고, 유대인과 기독교도 관료만 채용하여 몽골인과 무슬림들의 분노를 야기하던 사드 앗 다울라는 아르군이 몸져눕자 곧바로 그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 살해된 후 재산이 몰수되었다. (1291년 3월) 동시에 유대인들도 전반적인 박해를 받게 되었다. 무력하게 이를 지켜보던 아르군은 얼마후 사망하였고, 동생 가이하투가 계승하였다.

2.6. 사망

집사의 편찬자 라시드 앗딘에 의하면 아르군은 1289년 9월 마라게 천문대를 방문한 이후 아편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반란이 이어지던 1290년 5월 차남 예수 테무르가 사망하자 정무에 실증을 느끼게 되어 타브리즈 외곽에 신도시 아르구니야를 세우고 거처하였다. 그곳에는 아르군을 모델로 세워진 불교 사원도 있었다. 그는 또한 샤루야즈란 도시도 세웠는데, 이는 올제이투 칸의 치세에야 완성되었다. 한편 아편 중독과 함께 아르군은 티베트 불교의 라마들에 의지하였고, 연금술에도 흥미를 보여 당대인 중 가장 오래 살았다고 자처하며 불사의 약을 지을 줄 안다고 하던 요기 (요가승)와 친해졌다.

그리고 아르군은 그가 건낸 황과 수은의 혼합물[4]을 먹고 8개월 후 몸져 눕게 되었다. '불사약'이 원인임을 부정한 아르군은 텡그리 샤먼들이 테쿠데르의 과부 토가차크 하툰이 마술을 부린 것이라 주장하자 1291년 1월 그녀를 강에 던져 죽였다. 하지만 그러고 8일 후 아르군의 건강은 악화되어 결국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그렇게 목숨만 연명하던 그는 3월 7일 혹은 10일 아침에 아란에서 사망하였고, 며칠 후 소자스 산의 비밀 장소에 매장되었다. 4월 초엽 타가차르 등의 아미르들은 재상 사드 앗 다울라와 그 일당을 학살하였다.


[1] 당시 미래의 수피 쿠브라위야 종단을 이끌게 될 알라 웃딘 심나니가 아르군 편에 참전했다 한다[2] 그외에 아르군은 재상 사드 앗 다울라로 하여금 전 재상 샴스 앗딘 주바이니의 자녀들과 추종자들을 처형하게 하였다[3] 당시 편지의 라틴어 사본은 바티칸에 보관되어 있다. 서신에서 아르군은 자신의 가문과 기독교와의 연관성을 강조하였다.[4] 이는 마르코 폴로가 인도 여정 중 묘사한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