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22:04:05

아고스티노 디바르톨로메이

아고스티노 디바르톨로메이의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AS 로마 주장
세르지오 산타리니
(1976~1980)
파일:AS 로마 로고.svg 아고스티노 디바르톨로메이
(1980~1984)
파일:AS 로마 로고.svg 카를로 안첼로티
(1984~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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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스티노 디바르톨로메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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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logo_asr_hall_of_fame.png
AS Roma Hall Of F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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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1ianztwdtnp0gpu1zep.jpg
추가연도 등록인물
2012 프랑코 탕크레디 (GK), 카푸, 자코모 로시, 아우다이르, 프란체스코 로카 (DF)
풀비오 베르나르디니, 아고스티노 디바르톨로메이, 호베르투 파우캉, 브루노 콘티 (MF)
로베르토 프루초, 아메데오 아마데이 (FW)
2013 아틸리오 페라리스 (MF), 세바스티아노 넬라 (DF), 주세페 잔니니 (MF), 빈첸초 몬텔라 (FW)
2014 알시데스 기지아 (MF), 뱅상 캉델라 (DF), 카를로 안첼로티 (MF), 루디 푈러 (FW)
2015 귀도 마제티 (GK), 세르조 산타리니 (DF), 다미아노 톰마지 (MF),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FW)
2016 조르조 카르피[1] (MF), 토니뉴 세레주 (MF), 잔카를로 데시스티 (MF), 아르카디오 벤투리 (MF)
2017 프란체스코 토티 (FW)
2018 마리오 데미켈리[2] (DF), 줄리아노 타콜라 (FW), 로돌포 폴크 (FW)


[1] 통합 전 클럽인 FBC 로만 출신이다.[2] 통합 전 클럽인 포르티투도 로마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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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로마 명예의 전당
Associazione Sportiva Roma S.p.A.
파일:Agostino Di Bartolomei.jpg
이름 <colbgcolor=#fff> 아고스티노 디바르톨로메이
Agostino Di Bartolomei[1]
출생 1955년 4월 8일
라치오로마
사망 1994년 5월 30일 (향년 39세)
캄파니아주 카스텔라바테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직업 축구선수(중앙 미드필더 / 은퇴)
번호 AS 로마 - 10번[2]
AC 밀란 - 5번
AC 체세나 - 10번
소속 선수 AS 로마(유스)
AS 로마 (1972~1984)
비첸차 칼초 (1975~1976 / 임대)
AC 밀란 (1984~1987)
AC 체세나 (1987~1988)
US 살레르니타나 1919 (1988~1990)
{{{#fbba00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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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발 오른발
종교 카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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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클럽 경력3. 은퇴 후 삶과 죽음4.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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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고스티노 디바르톨로메이는 내 축구의 부활이다."
- 풀비오 베르나르디니[3]
이탈리아 국적의 전 축구선수.

2. 클럽 경력

2.1. AS 로마

비극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로마의 비운의 레전드

9~10세때부터 축구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던 아고스티노는 AS 로마에 스카웃되어 14세 로마 유스팀에 들어가고 2번의 프리마베라 우승을 이끈다. 프리마베라와 1군을 오고 가던 아고스티노는 73년 4월에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과의 경기에서 데뷔하게 되고 아고스티노는 경험을 위해 비첸차 칼초로 임대를 간다.

비첸차 임대 후 디 바르톨로메이는 닐스 리드홀름 감독 지휘아래에서 로마의 핵심 선수가 되어 팀을 이끌었다. 볼은 배급하고 경기를 조율하는 등 로마의 공격을 책임지며 레지스타로서 역할을 다했다. 1977/78시즌에는 득점력까지 높아져 중앙미드필더로 13골이나 넣으면서 활약했지만 로마는 그의 활약이 무색하게 중위권과 하위권을 맴돌았다. 이에 로마는 주장이었던 디 바르톨로메이와 다시 선임한 리드홀름 감독을 중심으로 제노아 CFC에 임대 갔던 브루노 콘티를 불러들이고 카를로 안첼로티를 영입하면서 부활을 예고한다. 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디 바르톨로메이는 느린발을 가진 단점이 있었기에 레지스타에서 좀더 수비적인 리베로로 역할을 변경하고 브루노 콘티, 카를로 안첼로티, 호베르투 팔캉과 함께 유벤투스를 제치고 40년만에 스쿠데토를 차지한다.
파일:Agostino Di Bartolomei Liverpool.jpg
리버풀 FC와의 유로피언컵 결승전

여기서 멈추지 않고 1년 뒤 로마의 홈 구장인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로피언컵 결승전을 치르는데 이때 상대가 당시 최고의 팀 중 하나였던 리버풀 FC였다. 리퍼풀이 우세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말을 깨고 1:1로 대등한 경기를 했지만 승부는 승부차기까지 간다. 디 바르톨로메이는 1번 키커로 나와 페널티킥을 성공하였지만 브루노 콘티 등이 실축하면서 리버풀에게 우승을 내주게 된다. 경기 패배 후 페널티킥을 거부했던 호베르투 팔캉과 라커룸에서 다퉜다고 한다. 이때의 패배는 디 바르톨로메이에게 큰 상처로 남고 불면증까지 앓았다고 한다. 이후 기량이 조금씩 떨어지던 디 바르톨로메이는 주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던 로마와 재계약을 하지 않고 자유계약으로 풀린다. AS 로마에서 301경기 68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였다.

자유계약으로 풀린 디 바르톨로메이는 은사 리드홀름이 부임한 AC 밀란이었다. 이때 나이가 만 29세였다. 하지만 폼이 많이 떨어진 디 바르톨로메이는 AC 체세나로 이적하고 이곳에서 1시즌을 보낸 뒤 세리에 C에 속해있던 살레르니타나로 이적한다. 이후 살레르니타나에서 2시즌을 보내면서 세리에 B로 승격시킨 뒤 디 바르톨로메이는 은퇴를 발표한다.

3. 은퇴 후 삶과 죽음

"난 빠져나갈 길이 없어."
- 아고스티노 디바르톨로메이의 유서 일부분
축구선수를 은퇴하고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해설도 맡고 보험업계에 종사해보고 축구교실을 만들려고도 했지만 실패하고 항상 축구계를 그리워했다. 축구계를 떠난 그는 우울증에 시달렸고 살레르노의 자신의 빌라 발코니에서 가슴에 총을 쏘아 자살했다. 이때 그의 나이 만 39세였다.

놀랍게도 그가 자살은 날짜는 유로피언 컵에서 승부차기로 리버풀에게 패한지 딱 10년이 되던 날이었다.[4] 이게 우연의 일치인지 디 바르톨로메이가 그날에 맞춰 자살한것인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의 장례식에는 83년도 우승멤버들과 구단부회장, 2,000여명의 사람들이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기렸다. 더욱 슬픈 것은 현역 AS 로마 선수 중에 조문을 온 사람은 주세페 잔니니가 유일했다.

팀의 레전드이고 주장이었던 디 바르톨로메이는 헤어스타일이나 외관에 신경쓰지 않고 축구만을 생각했던 조용했던 천재였다고 지인들은 말한다.

4. 국가대표 경력

로마에서 주장을 맡고 역대급 선수였던 디 바르톨로메이는 한번도 아주리 국가대표로 뛰지 못했다. 경기를 조율하는 레지스타와 수비적인 리베로 역할을 수행할 줄 알고 경기를 조율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디 바르톨레메이었지만 당시 아주리 감독이었던 엔초 베아르초트가 디 바르톨로메이보다 더 수비적인 성향이 강했던 가브리엘레 오리알리와 마르코 타르델리를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우승과 유로피언컵을 결승으로 이끌었던 선수로써는 안타까운 일다.


[1] 영어를 제외한 로망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여기서는 di)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로마에서 쓰던 번호가 워낙 많아 마지막 시즌에 쓰던 번호로 기재함.[3] AS 로마의 전설적인 선수[4] 유로피언컵 결승 1984년 5월 30일, 디 바르톨레메이가 자살한 날짜는 1994년 5월 30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