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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608년 탄핵으로 제명, 1623년 인조 시기 복권 [2] 유릉 저주 사건이 무고임을 알고도 시인한 혐의로 제명, 1635년 인조 시기 복권 [3] 인목대비를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던 혐의로 제명 [4]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제명 | }}}}}}}}} | ||||||
| 성명 | 심대 沈岱 | |
| 생몰년도 | 1546년경 ~ 1592년 9월 (향년 46세) | |
| 출생지 | 미상 | |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삭녕(현재 경기도 연천) | |
| 아버지 | 심의검(沈義儉) | |
| 어머니 | 고령 신씨 | |
| 형제 | 심륭, 심업, 심암, 심은 | |
| 배우자 | 전주 최씨 | |
| 자녀 | 심대복 | |
| 자 | 공망(公望) | |
| 호 | 서돈(西墩) | |
| 시호 | 충장(忠壯) | |
| 추증 | 이조판서 | |
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임진왜란 시기 경기감사로서 한양을 탈환하고자 한양 주민들과 내응하여 삭녕에서 때를 기다리다가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전사했다. 사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창원군(靑原君)에 봉해졌다.2. 생애
세종의 장인이자 영의정을 역임했으나 반역죄를 저지른 혐의로 처형당한 뒤 문종 대에 신원된 심온의 5대손이며, 심미(沈湄)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심광종(沈光宗)이고, 아버지는 경력(經歷) 심의검(沈義儉)이며, 어머니는 우참찬 신광한(申光漢)의 딸이다.# 형제로 심륭, 심업, 심암, 심은이 있었다. 1572년(선조 5년) 임신(壬申) 춘당대시(春塘臺試) 을과(乙科) 1위로 급제해 관직에 올랐다.#이후 홍문관 지평(持平)에 선임된 심대는 1584년(선조 17년) 양사가 심의겸이 붕당을 지었다고 탄핵할 때 참여했다.# 1588년(선조 21년) 1월 초, 조헌이 상소를 올려 동인 인사들을 비판했다. 이때 조헌은 심대를 서인원(徐仁元)과 함께 동인(東人) 중의 거벽(巨擘)으로 거론했고, 전라좌수사 심암이 일본 함선 18척이 흥양에 침범했을 때 녹도 권관 이대원이 분전하다가 끝내 전사할 때 구경하기만 할 뿐 끝내 구원해주지 않았는데도 죽음을 모면한 것은 심대가 그 아우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선조는 조헌을 인요[1]라고 지칭하고, 그의 상소로 수많은 사람이 화를 내릴 것이라 여겨 소각했다.#
1591년(선조 24년) 2월 13일 사간에 제수되었으며#, 그 해 6월 23일 사헌부가 집단 사직한 뒤 사헌부 수찬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일본군이 압도적인 기세로 한양을 향해 북상하자, 선조는 개성으로 파천했고, 당시 보덕(輔德)을 맡고 있던 심대도 왕을 따라갔다. 이때 전라도 관찰사 이광이 근왕병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공주에 이르러 한양이 벌써 함락되고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거둥했다는 소문을 듣고 군대를 철수하여 본진으로 돌아갔다.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 역시 오지 않아서 선조가 무척 답답해 했다.
이때 심대가 왕을 알현하여 자신이 남쪽으로 떠나 이광에게 명을 전달하겠다고 자청했다. 선조는 이에 매우 기뻐하며 심대에게 이렇게 말했다.
"경이 남쪽 군대를 불러온다면 국가를 경과 함께 하겠다."
그러면서 당상관으로 승직할 것을 명했지만, 심대는 울면서 굳이 사양했다. 이때 도로가 끊겨 사람들은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심대는 비분 강개하여 조강(祖江)을 거쳐 바다를 이용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마침내 이광을 만난 심대는 왕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는데 물러난 것을 질책했고, 결국 이광 등이 윤선각과 더불어 군대를 합쳐서 북상했다. 그 후 심대는 뱃길을 통해 이동하여 평양에서 선조와 재회했다.#
선조는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심대를 가상히 여겨 7월 2일 승정원 우승지에 제수했고#, 7월 17일 좌부승지에 제수했다.# 이후 7월 25일 경기 감사로 삼으면서, 가자(加資)하라고 전교했다.# 그 후 심대는 조경(趙儆)을 대장(大將)으로 삼고 최몽성(崔夢星)에게 동로 병마(東路兵馬)를 지휘하게 하고, 고언백(高彦伯)에게 서로 병마(西路兵馬)를 지휘하게 했다. 이때 조경은 전에 패배한 죄로 백의종군하는 중이어서 이 인사가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지만, 비변사는 "본도에 장사가 매우 모자라 이런 부득이한 조처를 하였을 것이니 반드시 뜻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며 수락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심대가 떠나기 전에 안주의 백상루(百祥樓)에서 자신과 대면한 일을 기술했다. 류성룡은 심대가 일본군의 침략에 비분강개하여 위험한 곳을 무릅쓰고 일본군과 맞서 싸울 뜻을 강하게 밝혔다. 류성룡은 이를 경계하여 그에게 경고했다.
"옛날 사람이 말하지 않았는가? '밭을 가는 일은 마땅히 종[農奴]에게 물으라.'고. 그대는 서생(書生)이므로 싸움터에 임하는 일은 결국 능숙하지 못할 것일세. 경기도에 양주목사 고언백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용맹스러워 잘 싸울 것이니, 그대는 다만 군병을 수습하여 주어 고언백으로 하여금 이를 거느리게만 한다면 가히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니, 스스로 삼가 군사를 거느리고 직접 덤비지는 말도록 하게."
그러나 심대는 "예, 예"라고만 할 뿐 매우 마땅치 않은 눈치를 보였다고 한다. 또한 류성룡은 군관이면서 활을 잘 쏘는 의주 사람 장모(張某)를 보내어 심대와 함께 가게 했다. 이후 심대가 어찌하고 있는지 걱정되어 항상 소식을 물었는데, 한 사람이 이렇게 밝혔다.
"전에는 감사와 수령 이하의 관원들은 모두 다 깊은 벽지에 몸을 피하고 그를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평복을 입고 몰래 다니고, 혹은 여기저기로 자주 옮겨 그 있는 곳을 정하지 않아서 왜적들의 환난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감사께서는 그와는 달리 왜적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늘 순행(巡行)하실 때마다 먼저 공문을 보내 알리기를 평일처럼 하시고 깃발을 세우고 나팔을 불며 다니십니다."
이 말을 들은 류성룡은 몹시 근심하여 심대에게 서신을 보내 조심하라고 당부했지만, 심대는 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년) 9월 12일, 심대는 양주목사 고언백이 한 달 사이에 3번 싸워 모두 이겨서 위엄스러움과 명성이 멀리까지 소문이 나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왕왕 멀리서 호응한다고 보고했다. 이에 조정은 고언백과 부하들에게 상을 내리기로 했다.# 또한 심대는 장단(長湍)과 삭령(朔寧)의 의병을 이정암의 지휘하에 두고, 이천(利川)·여주(驪州)·음죽(陰竹)·죽산(竹山)의 의병을 성영(成泳)의 지휘에 두고, 통진(通津)·양천(陽川)의 의병을 김천일의 지휘에 두고, 본인은 파주(坡州)·양주(楊州)·광주(廣州)의 의병을 직접 이끌어서 이정암, 성영, 김천일과 함께 힘을 합쳐서 한양을 탈환하겠다는 뜻을 조정에 보고했다.# 한편, 심대는 일본군이 중종의 능묘를 파헤쳤고 능묘의 재사(齋舍)를 불사르고서 묘 아래에 군대를 주둔시켰다고 보고했다.#
징비록에 따르면, 심대는 군사를 모아 모두 스스로 거느리고 "서울을 회복하련다."라고 소리쳐 소문을 퍼뜨리고, 날마다 사람을 보내 성 안으로 들어가서 군사를 불러 모아 안에서 호응하라고 약속하니, 사람들은 난리가 진정된 뒤에 왜적에게 붙었다며 죄받을까 두려워하여 연명(連名)하여 글을 써 가지고 나와 감사에게 가서 스스로 성안에서 내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니, 이런 사람이 날로 천백 명을 헤아렸다. 그들은 이름하기를 "약속을 받는 패[聽約束]니, 군기를 옮기는 패[軍器]니, 적정을 알리는 패[報賊情]니 하여 사람마다 왕래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군의 동정을 살펴 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심대는 이들 모두 한양을 수복하는 데 뜻을 함께 한다고 여기고 의심하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년) 9월, 심대는 삭령(朔寧)에서 군사를 모아 한양의 수복을 도모하던 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전사했다. 적이 그의 머리를 종가(鍾街)에 달았는데, 경성 사람이 그의 충성을 애처롭게 여겨 몰래 그의 머리를 구하여 강화(江華)로 보내었으므로 거두어 장사할 수 있었다.# 징비록에 따르면, 그가 처음 전사했을 때 경기도 사람들은 그의 시체를 거두어 임시로 삭녕군 안에 장사지냈다. 며칠 뒤 일본군이 다시 찾아와서 그 머리를 베어 가져다가 서울의 종루(鐘樓) 거리 위에 매달았는데, 5, 60일이 지나도 그 얼굴빛이 산 사람과 같았다. 경기도 사람들은 그의 충의를 애석하게 여겨 서로 재물을 모아 가지고 파수 보는 일본군에게 뇌물을 주고 그 머리를 찾아내어 함에 넣어 강화도로 보냈다고 한다.# 사관은 이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때 경기에는 적들이 마음대로 횡행하여 길이 막혀 끊겼고 벼슬아치들은 모두 산중으로 도망쳐 숨어버렸다. 심대는 기백(畿伯)에 임명되자 즉일 부임길에 올라 비분 강개, 어렵고 험한 일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군병을 모집하고 병기를 나누어 주면서 적을 토벌하는 데 뜻을 두었지만 재략이 없는 데다가 성품마저 오활하여 뜻을 펴지 못한 채 적의 손에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아까워하였다.
선조실록 31권, 선조 25년 10월 29일자 기사.#
선조실록 31권, 선조 25년 10월 29일자 기사.#
3. 사후
선조는 어려운 시기에 한양을 회복하고자 홀몸으로 경기도에 내려가 군대를 모으고자 애쓰다가 끝내 피살당한 심대를 무척 애석하게 여겼다. 1592년(선조 25년) 11월 12일 심대의 가속 및 자식들이 있는 곳에 각별히 호휼(護恤)하라고 전교했으며#, 11월 14일 심대를 이조판서에 추증했다.# 또한 삭령 수령 장지성(張志誠)이 군사를 거느리고서 10리 밖에서 변고에 대비하고 있었는데도 심대를 구원하지 않아 화를 입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사간원의 탄핵을 따라 그를 정죄했다.#1593년(선조 26년) 10월 28일, 선조는 심대가 위급한 상황에 분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아 적에게 살해되었다며, 관원을 보내 제사지내주도록 하고, 만약 장사하지 않았으면 관곽(棺槨)과 석회(石灰) 등 장사지낼 자재를 주고, 또 그의 처자를 돌보아 주라고 지시했다.#
1604년(선조 37년) 6월 25일, 조정에서 대대적으로 공신을 봉했을 때, 심대는 호성 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또한 그의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관작과 품계를 두 자급 초천하며, 부모와 처자도 두자급을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한 자급 초천하도록 했다. 여기에 반당 6인, 노비 9구, 구사 4명, 전지 80결, 은자 7냥, 내구마 1필이 그의 집안에 수여되었다.#
1606년(선조 39년) 3월 27일, 전 양성 현감(陽城縣監) 심대복(沈大復)이 상소를 올려 자신의 아버지 심대가 전사한 뒤 삭령 땅에 가매장되었는데, 그 지방에 사는 이몽린이 일본군을 인도하여 무덤을 파게 했다면서, 그를 처벌해달라고 청원했다. 이에 대해 사관이 논평했다.
사신은 논한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은 《예기(禮記)》에 보인 대의(大義)이다. 심대가 죽었을 적에 그의 아들이 된 자가 어떤 고생도 무릅쓰고 원수를 갚기로 맹세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15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법부의 풍문으로 인하여 몽린을 원수로 지적하여 상소까지 하였다. 복수의 의리가 어찌 이처럼 오활할 수 있겠는가. 아! 심대를 죽인 자는 왜인이요 몽린이 아닌데도 대복(大復)의 거조가 이같이 경망하니 그 또한 《예기》의 죄인인 것이다.
선조실록 197권, 선조 39년 3월 27일자 기사.#
선조실록 197권, 선조 39년 3월 27일자 기사.#
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처인성로 827번길 11605(남사읍)에 매장된 심대장군묘는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 人妖, 정상에서 어긋난 짓을 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