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30 18:00:02

신두식

파일: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장.svg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지방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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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신두식 최동오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신두식
申斗湜[1]으로 표기한 문헌도 있다.]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신두창(申斗昌)·황학명(黃鶴明)
출생 1896년 2월 12일
평양부 숙천군 우상방 통덕리[2][3]
(현 평안남도 숙천군 용덕리)
사망 미상
사망지 미상
본관 평산 신씨[4]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896년 2월 12일 평양부 숙천군 우상방 통덕리(현 평안남도 숙천군 용덕리)에서 태어났다.

1918년 8월 중화민국 동삼성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펑톈성 난루다오(南路道) 선양현(瀋陽縣)에 '십간방물산도매상(十間房物産都賣商)'이라는 상점으로 위장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를 연결하는 연락기관을 설치한 뒤 연락업무를 수행하였다. 1919년 9월에는 서로군정서 의용대장 이준용(李濬鏞)과 동지 전일과 함께 선양현에서 사제 폭탄 수백 개를 제조하였다.

그 뒤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여 일본인 관리 및 일본 제국 관청을 습격하는 등의 의열투쟁을 지원하려고 계획하던 중, 그해 9월 15일 밤에 심양현 옛 성징청(盛京城) 샤오난먼(小南門)[5] 내 톈청여관(天成旅館)에서 그곳에 숨겨 두었던 폭탄 1개가 땅에 떨어져 불이 타올랐고, 전일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따라서 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상하이시로 피신하여 1920년 3월 4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지방국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20년 5월 20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부 비서국장으로 취임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상하이시 대한적십자회에서 적십자병원의 설치 등을 위해서 4대(隊)의 행동대를 설치하게 되자 3·1대에 속하여 모금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이후 그의 행적 및 최후에 대해서는 자료가 미비하여 알 수 없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2] 1896년 평안남도 숙천군 우상면 통덕리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평원군 숙천면 통덕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숙천군 용덕리[3] 인근의 도덕리·백로리·미남리와 함께 평산 신씨 집성촌이다.[4] 34세 식(湜) 철(澈) 순(淳) 영(泳) 항렬.[5] 옛 성징청의 아홉개 문 중 하나로, 톈여우먼(天佑門)이라고도 하였다. 현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선허구 샤오난제(小南街)에 있었으나, 1950년대 초에 교통망 개선을 위해 철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