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BE6FC><colcolor=#000000> 바덴 대공국 레오폴트의 대공비 스웨덴의 소피아 공주 Prinsessan Sofia av Sverige | ||
이름 | 스웨덴어 | 소피아 빌헬미나 카타리나 마리아 로비사 샬로타 안나 (Sofia Wilhelmina Katarina Maria Lovisa Charlotta Anna) |
독일어 | 조피 빌헬미네 카타리나 마리 루이제 샤를로테 아네 (Sophie Wilhelmine Katharina Marie Luise Charlotte Anne) | |
출생 | 1801년 5월 21일 | |
스웨덴 왕국 스톡홀름 | ||
사망 | 1865년 7월 6일 (향년 64세) | |
독일 연방 바덴 대공국 카를스루에 | ||
배우자 | 바덴 대공 레오폴트 (1819년 결혼 / 1852년 사망) | |
자녀 | 알렉산드리네, 루트비히, 루트비히 2세,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 카를, 마리, 체칠리에 | |
아버지 | 구스타브 4세 아돌프 | |
어머니 | 바덴의 프리데리케 | |
형제 | 구스타브, 칼 구스타프, 아말리아, 세실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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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와 바덴의 프리데리케의 장녀.바덴 대공 레오폴트의 아내로 루트비히 2세, 프리드리히 1세,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의 어머니이다.
2. 생애
1801년에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와 바덴의 프리데리케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도중 벌어진 핀란드 전쟁 패전의 여파로 1809년 아버지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당하자 외가인 바덴 대공국에서 머물게 되었다. 한편 당시 바덴의 대공이었던 소피아의 외삼촌 카를 대공은 슬하에 아들이 없고[1] 자신의 숙부 루트비히 1세도 독신이었기에 체링겐 가문의 적자 계열 후손이 단절되고, 바덴 대공국이 바이에른 왕국에 합병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기 위해 귀천상혼으로 태어난 자신의 이복 숙부 레오폴트[2]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또한 레오폴트의 지위와 계승권을 더욱 더 확고히 하기 위해서, 소피아와의 결혼을 주선했고 1819년에 소피아는 11년 연상의 외종조부와 결혼했다. 이후 독일어식 이름인 조피로 개명했다.조피는 현명하고 성실하지만 엄격했다고 하며, 그녀는 늦은 시간을 지키고 아침 늦게 일어나 그 후에는 네글리제에서 유럽 전역의 여러 친척들에게 편지를 쓰며 몇 시간을 보냈다. 조피는 과학, 예술,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서신을 통해 그날의 모든 정치적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와 빈 궁정과의 관계는 특히 끈끈했는데, 조피의 아들들이 교육을 마치기 위해 빈로 보내졌다. 조피는 아버지의 폐위에 대해 어느 정도 반감을 품고 있었고, 오빠 구스타프가 스웨덴 왕자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했을 때 매우 분개했다고 한다.
비록 정략결혼인데다 4촌간 결혼이었지만 레오폴트와 조피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고, 두 사람은 5남 3녀를 낳았으며 남편과 달리 조피는 보수적인 정책을 지지했다. 이후 1830년에 레오폴트가 바덴의 대공이 되면서 조피 역시 바덴의 대공비가 되었다. 그러나 카스파 하우저의 등장으로 레오폴트의 계승권을 위협하는 소란이 일어나자 조피가 하우저의 암살을 1833년에 명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로 인해 부부 사이가 나빠졌고 소피아는 바람을 피운 것으로 알려졌다. 막내딸인 체칠리에의 아버지는 하버라는 이름의 유대인 은행가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 주장을 확인할 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1852년 남편 레오폴트가 사망해 조피는 미망인이 되었고, 아들 프리드리히를 설득하여 그의 연인인 슈테파니 폰 겐사우 여남작과의 결혼이 아닌 통치 가문의 공주를 결혼시켰다.[3] 1852년, 스웨덴 왕실은 폐위된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일가와 화해를 이루기를 원했고, 오스카르 1세와 요세피나 왕비는 만남을 주선하려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1863년, 조피는 오스카르 1세의 차남이었던 오스카르 왕자와 그의 배우자인 나사우의 조피아 공녀를 만났다. 조피는 어린 시절의 스톡홀름이 어떻게 변했는지 물었고, 오스카르 왕자 부부가 스웨덴으로 돌아갈때 조피는 왕자 부부 아들 구스타프 왕자에게 "G"라는 글자와 스웨덴 왕세자의 왕관이 새겨진 메달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훗날 친손녀 바덴의 빅토리아는 할머니 소피아가 스웨덴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의 공주였다는 점 덕분에[4]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의 국왕 구스타프 5세의 왕비가 되었다.[5]
3. 가족관계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알렉산드리네 (Alexandrine, Duchess of Saxe-Coburg and Gotha) | 1820년 6월 20일 | 1904년 12월 20일 | 에른스트 2세 |
1남 | 루트비히 공자 (Prince Louis) | 1822년 | 1822년 | |
2남 | 루트비히 2세 (Louis II, Grand Duke of Baden) | 1824년 8월 15일 | 1858년 1월 22일 | |
3남 | 프리드리히 1세 (Frederick I, Grand Duke of Baden) | 1826년 9월 9일 | 1907년 9월 28일 |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 슬하 2남 1녀[6] |
4남 | 빌헬름 공자 (Prince William) | 1829년 12월 18일 | 1897년 4월 27일 | 로이히텐베르크의 마리아 막시밀리아노브나 공녀[7] 슬하 1남 1녀[8] |
5남 | 카를 공자 (Princess Charles) | 1832년 3월 9일 | 1906년 12월 3일 | 로잘리 폰 보이스트 여남작 슬하 1남 |
2녀 | 라이닝겐 공비 마리 (Marie, Princess of Leiningen) | 1834년 11월 20일 | 1899년 11월 21일 | 라이닝겐 공 에른스트 레오폴트 슬하 1남 1녀 |
3녀 | 러시아의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 (Grand Duchess Olga Feodorovna of Russia) | 1839년 9월 20일 | 1891년 4월 12일 | 러시아의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9] 슬하 6남 1녀[10] |
[1]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와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낳았지만 장남과 차남 모두 요절했다. 이중 장남이 카스파 하우저라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은 없다.[2] 바덴의 초대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와 귀천상혼한 후처 호흐베르크의 루이제 카롤리네 여백작의 장남으로, 소피아에겐 외할아버지인 바덴의 대공세자 카를 루트비히의 이복 남동생으로 외종조부가 된다. 다만 레오폴트가 후처 소생의 엄청난 늦둥이 아들이였던지라 이복 형제들보다 무려 30살 이상이나 어렸고, 명색에 조카인 바덴 대공 카를보다 4살이나 어렸으며 조카 손녀인 소피아보다 고작 11살 연상이었다.[3] 프리드리히는 독일 제국의 황제였던 빌헬름 1세의 딸인 프로이센의 루이제 공주와 결혼했다.[4] 당시 스웨덴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는 남계 후손이 죄다 단절되고 여계 후손만 남아있었는데 그중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장녀 소피아의 후손이 가장 서열이 높았다.[5] 베르나도테 왕조의 시조인 칼 14세 요한은 프랑스 출신 평민이었고 쿠데타로 집권했기에 왕조의 권위와 정통성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빅토리아와의 결혼으로 부족한 정통성을 채울 수 있었다.[6] 프리드리히 2세, 스웨덴의 빅토리아 왕비 등[7] 니콜라이 1세의 외손녀(장녀 마리야 니콜라예브나의 딸)이다. 아래에 서술된 체칠리에의 남편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외조카이기도 하다.[8] 막시밀리안 폰 바덴 등.[9] 니콜라이 1세의 막내아들. 체칠리에의 손위올케 마리야 막시밀리아노브나의 막내 외삼촌이기도 하다.[10]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비 아나스타시아,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