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6 11:33:55

서언왕

徐偃王

1. 소개2. 들어가기 전에3. 실제 역사 자료에서 나타나는 전승의 형성 : 전국 시대부터 사기까지4. 사실 기록을 떠나서 또 다른 신화의 인물로 : 한 대 이후의 기록 변화

1. 소개

춘추전국시대부터 등장하는 전설상의 인물이자, 서(徐)나라의 군주로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동이의 위대한 옛 군주인 것마냥 띄우지만 전혀 근거도 없고 애초에 당대 기준으로는 동이에 속하지도 않는다.

2. 들어가기 전에

우선 현재 각종 포털 사이트에 링크된 한국역대인물 종합시스템에 인용된 내용과 유사한 내용으로, 본 문서에 기록되어 있었던 내용 중 서언왕의 행적 파트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30세기에 양자강 북쪽 강소성(장쑤성)에 서국(大徐國)을 세운 뒤에 서언왕이 나타나 주나라를 쳐서 주나라 목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음과 동시에 주나라의 영토 일부를 할양받고 공물을 받았으며, 주위 50개 나라와 아홉 동이족의 나라에게서 상국으로 받들어지며 조공을 받는 등 실로 강대한 국력을 자랑했다. 동이족의 후손으로서 중원을 압박한 나라가 실로 몇 개 있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서나라의 성장이나 그 국왕이었던 언왕의 수완과 정치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전부 당대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 헛소리이다. 일단 주나라가 기원전 12세기 말 또는 11세기 초에 세워진 국가인데 어떻게 기원전 30세기에 주나라와 서나라가 대결할 수 있었겠는가? 심지어 하나라를 역사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중국조차도 기원전 20세기 경까지 올라가는 얼리터우 유적 등을 근거로 하는 것인데 황당하기 짝이 없는 기술이다. 원래는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고 그에 대한 이설을 비판, 검증하는 것이 많겠지만, 현재 주요 포털 사이트 등에도 왜곡된 정보가 퍼져 있는 상황이므로 이부터 기술한다.

3. 실제 역사 자료에서 나타나는 전승의 형성 : 전국 시대부터 사기까지

서언왕에 대한 기록은 전국시대의 기록인 <시자(尸子)>에 처음 등장하는데, 매우 설화적인 양상을 띤다.
徐偃王好怪,得怪魚、怪獸,多列于庭. 徐偃王有筋而無骨也.
서언왕이 괴상한 것을 좋아하여서 괴상한 물고기와 괴수를 뜰에 많이 늘어놓았다. 서언왕은 힘줄은 있었으나 뼈가 없었다.
- <시자> 하(下)권

이 기록은 언(偃 : 쓰러지다)왕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단서를 주지만, 사실성은 없는 기록이다. 더군다나 이 시기는 서(徐)가 기원전 512년 멸망한지 100년이 넘어가는 시점으로, 이 시점에서 서의 왕을 기록하는 것은 다소 뜬금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기록이 남게 되었는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전국시대에 주나라의 권위가 완전히 무너지고 각지에서 왕(王)을 칭하는 국가가 난립하는 한편 그 나라의 왕족이나 그 나라에 병합된 국가의 구 왕족들이 자신들의 씨족 기원을 창작해 나가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실제로 전국 시대는 삼황오제 전승에 대한 다양한 이설이 만들어진 시기로 알려져 있으며, 그 와중에 서언왕과 같은 이전까지의 역사서에 보이지도 않고 사실적인 인물로 볼 수도 없는 인물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1]

나아가 전국시대의 유세가들은 이러한 전승상의 인물, 나아가 실존 인물까지도 자신의 논설이나 저술에서 '~한 행위를 했는데, 이는 내 ~한 사상에 부합한다 / 내 ~한 사상을 따르지 않아서 실패했다'고 인용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역사적인 실존 인물인 공자자사 등을 인용하여 이들을 비틀어놓은 장자의 경우이다. 물론 장자에 등장하는 이러한 인물들의 행위는 일부 모티브가 된 부분을 제외하면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9만 리짜리 날개를 가진 새가 있다느니 하는 수준의 신뢰도를 갖는 기록이다. 이후 서언왕 또한 이와 같은 목적으로 전국 시대의 사상가에 의해 인용되었는데, 순자한비자의 기록이 남아 있다.
長短、大小、美惡形相,豈論也哉!且徐偃王之狀,目可瞻馬
(키가) 크고 작음, (덩치가) 크고 작음, 좋고 나쁜 모양새를 어떻게 논하겠는가! 또 서언왕의 모습은 눈이 겨우 말을 볼 정도였으며...
- 순자 비상편

순자의 기록은 맥락상 서언왕이 신체에 장애가 있는 기괴한 인물이라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는데, 이 글의 맥락은 그렇게 외모가 못난 인물이라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역시 구체적인 업적이 있는 인물로 보기 어렵다.
翟人有獻豐狐、玄豹之皮於晉文公,文公受客皮而歎曰:「此以皮之美自為罪。」夫治國者以名號為罪,徐偃王是也。以城與地為罪,虞、虢是也。故曰:「罪莫大於可欲。」
적인(翟人)이 풍호(豐狐)와 검은 표범의 가죽을 진문공에게 마치니 문공이 손님의 가죽을 받으면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는 가죽이 아름다우니 스스로 죄를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면서 명호(名號)로 죄를 지은 것은 서언왕(徐偃王)이다. 성과 땅으로 죄를 지은 것은 우(虞)와 괵(虢)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낼 만했던 죄가 막심하다."고 한다.
- 한비자 유로편
古者文王處豐、鎬之間,地方百里,行仁義而懷西戎,遂王天下。徐偃王處漢東,地方五百里,行仁義,割地而朝者三十有六國,荊文王恐其害己也,舉兵伐徐,遂滅之。故文王行仁義而王天下,偃王行仁義而喪其國,是仁義用於古不用於今也。故曰:世異則事異.
옛날 문왕이 풍(豐)과 호(鎬)라는 땅 사이에 있을 때 땅 넓이가 100리였는데 인의(仁義)로 서융(西戎)을 품으니 드디어 천하에서 왕이 되었다. 서언왕이 한수 동쪽에 있으면서 땅 넓이가 500리였는데 인의를 행하여 땅을 나누어 조회하러 온 36개 국에게 나누어 주니 형(초나라) 문왕이 (서언왕이) 그 자신(의 땅)을 나누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병력을 내어 서나라를 정벌하니 드디어 멸망하였다. 그러므로 문왕이 인의를 실행하여 천하에서 왕이 되고 언왕이 인의를 실행하여 그 나라를 잃은 것은 옛날에는 인의를 썼지만 지금에는 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달라졌으니 일 처리하는 것도 달라졌다고들 한다.
- 한비자 오대편

반면에 <한비자>에 등장하는 서언왕은 행실에 대한 기록이 생겨났다. 당연하지만 문헌학적으로 이전의 기록에 없던 기록이 생겨난 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일단 이 점은 미뤄두고 문헌을 살펴보면 여기서 서언왕은 명성은 높았지만 내실은 없는 인물로 등장하며, 한비자는 이 인물은 인의는 있었지만 그 행실이 죄나 다를 바 없는 인물이라고 하였다. 이는 한비자의 성향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인데, 한비자는 익히 알려져 있듯 법가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유가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제도적으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그것이 당시 중국의 일반적인 상황이기도 하였다. 당연하지만 초문왕의 행적 중에 서와 같은 초나라 동쪽의 나라를 공격한 행동은 있을지언정 그 상대가 땅 넓이 500리에 달하는 36국 연합이었다는 이야기 따위는 없다.[2] 게다가 서나라가 멸망한 것은 기원전 512년으로, 초문왕과는 역시 100년 넘는 차이가 있는 데도 서나라가 이 때 멸망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한비자는 서나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인물임이 분명한 것이다.

한비자는 전국시대 화북 지역의 (韓)과 (秦)에서 활동했을 뿐 초나라 땅은 밟아본 적도 없는 인물이다. 따라서 한비자의 이 기록은 서언왕에 대해 당시 떠돌던 소문을 '법가와 어긋나는 행동을 해서 나라를 말아먹은 인물'로 가공하여 내놓은, 사실상 창작에 가까운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이후 서언왕이 문헌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사기에서이다.
造父以善御幸於周繆王, 得驥、溫驪、驊騮、騄耳之駟, 西巡狩, 樂而忘歸. 徐偃王作亂, 造父爲繆王御, 長驅歸周, 一日千里以救亂. 繆王以趙城封造父, 造父族由此爲趙氏.
조보(造父)는 말을 잘 몰아 주 목왕의 총애를 받았다. 목왕은 기(驥), 온려(溫驪), 화류(驊駵), 녹이(騄耳)라는 네 필의 말을 얻어 서쪽으로 순수를 떠났는데 너무 즐거워 돌아오는 것을 잊었다. 서언왕(徐偃王)이 난을 일으키자 조보는 목왕을 위하여 수레를 몰아 하루에 천리를 달려 주로 돌아와 난을 다스렸다. 목왕은 조성(趙城)을 조보에게 봉읍으로 내리니 이때부터 조보의 집안은 조씨(趙氏)가 되었다.
- <사기> 진본기
趙氏之先, 與秦共祖. … 造父取驥之乗匹, 與桃林盗驪、驊騮、綠耳, 献之繆王. 繆王使造父御, 西巡狩, 見西王母,樂之忘帰. 而徐偃王反,繆王日馳千里馬, 攻徐偃王,大破之. 乃賜造父以趙城,由此為趙氏.
조씨(趙氏)의 선조는 진(秦)나라의 선조와 같다. … 조보는 도림(桃林)에서 도려(盜驪), 화류(驊騮), 녹이(綠耳) 등 여덟 필의 준마를 취하여 목왕에게 바쳤다. 목왕은 조보에게 수레를 몰게 하여 서쪽을 순시하여 서왕모(西王母)를 만나 즐겁게 놀다가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이 때 서왕(徐王)이 반란을 일으키자, 목왕은 하루에 천 리를 달려와 서왕을 공격하여 대파했다. 이에 조보에게 조성(趙城)을 내리니 이로써 조씨가 되었다.
- <사기> 조세가

이 기록은 앞서 전국 시대의 기록물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면서 말했던 현상, 즉 씨족 기원의 창작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우선 목왕이 전설상의 인물인 서왕모와 놀았다는 조세가의 기록은 애초에 역사적 사실성을 스스로 깎어먹고 있다. 덧붙여 <사기> 주 본기에 따르면 이때 목왕이 서쪽에 행차한 것은 즐겁게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주에서 동주로 시대가 옮겨가는 계기를 만든 견융을 토벌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역시 사실성이 떨어진다. 물론 <사기> 주본기에는 이 반란 자체에 대한 기록도 없다. 뭔 놈의 인간이 확인만 해보면 기록이 없나 정말 많이 억지로 말도 안 되는 것을 감수하고 양보하여 서언왕이 이 때 반란을 일으킨 것 자체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곧 목왕에 의해 진압된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 기록이 작성된 것은 진 왕실(후에 황실)과 조 왕실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과장과 가공을 섞어라도 자신들이 주나라로부터 공인받은 씨족의 후예였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서언왕은 거기서 나타나는 마타도어일 뿐으로, 오히려 한비자의 기록보다도 행적에 대한 기록은 소략하다. 더군다나 이 기록에는 큰 문제가 있는데, 한비자는 서언왕이 기원전 7세기의 인물인 초 문왕 시대 인물로 초 문왕이 제압했다고 한 반면, 사기에서는 기원전 10세기 인물인 주 목왕 시대의 인물이며 조보의 도움을 받아 목왕이 토벌했다고 했다는 점이다. 지금 서언왕에 대한 기록 중 하나도 사실이라고 확정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연대와 행적가 마음대로 뛰노는 인물에 대해서 가장 논리적으로 빠른 판단은 서언왕에 대한 기록이 이름만 따와서 다양하게 위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종합하면 전한 시기까지 서언왕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신체적 특성을 지닌 전승상의 인물이며, 한비자는 인의를 지키려다 망한 예로 인용하여 유가를 욕하기 위해 서언왕의 우둔한 행동을 비난했고, <사기>의 기록 또한 <사기> 주본기의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 신뢰하기 어렵다. 아울러 기록을 종합할 때, 서언왕에 대한 기록들은 서로 기초적인 연대와 사실 관계조차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언왕은, 전국 시대에 창작된 신화적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굳이 첨언하자면 서언왕의 활동 지역에 대해서도 애초에 서(徐)라고 하면 강소성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고, 한수 동쪽이라고 해서 초나라 동쪽에 있는 국가라고 했을 뿐 동이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인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애초에 실존 인물인지 불분명하기도 하고.

4. 사실 기록을 떠나서 또 다른 신화의 인물로 : 한 대 이후의 기록 변화

이러한 서언왕에 대한 시각이 바뀌는 것은 후한 대 이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비자에서 세상 물정 모르고 인의를 좋아하던 인물이었던 서언왕은 사회의 지도적인 정치 사상이 유가로 바뀐 이 시기에 평가가 나름대로 좋아졌다.

먼저 관련 문헌 중 앞선 전한 시기의 기록인 회남자 인간훈편과 설원 지무편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여전히 서언왕은 인의는 있을지언정 미련한 인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서언왕의 '인의'에 대해서는 기록이 조금 더 상세해졌다. 물론 이는 모두 사실이 아니며, 이미 또 왕이 초장왕으로 바뀌는 설정오류는 딱히 오류 축에도 못 끼게 되었다(...).
昔徐偃王好行仁義,陸地之朝者三十二國。王孫厲謂楚莊王曰:「王不伐徐,必反朝徐。」王曰:「偃王,有道之君也,好行仁義,不可伐。」王孫厲曰:「臣聞之,大之與小,強之與弱也,猶石之投卵,虎之啗豚,又何疑焉!且夫為文而不能達其德,為武而不能任其力,亂莫大焉。」楚王曰:「善!」乃舉兵而伐徐,遂滅之。知仁義而不知世變者也。
옛날 서언왕이 인의를 행하는 것을 좋아하여 육지로 조회하는 자가 32개 국이었다. 왕손(王孫) 여(厲)가 초장왕에게 말하기를 "왕이 서나라를 정벌하지 않으면 반드시 거꾸로 서나라에 조공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언왕은 도리가 있는 군주로 인의를 행하기 좋아하니 정벌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왕손 여가 말하기를 "제가 듣기로 큰 것이 작은 것을 합치고 강한 것이 약한 것을 합치는 것은 함께 하는 것은 돌이 던져진 계란에게 하는 것과 같고 호랑이가 돼지를 먹는 것과 같으니 또 무슨 의심을 하겠습니까! 또 무릇 글월로는 그 덕에 통달하지 못하고 무예는 그 힘을 맡아내지 못하니 어지러움이 막대합니다."라고 하였다. 초왕이 말하기를 "좋다."라고 하고 병사를 보내어 서나라를 정벌하니 마침내 멸망하였다. (서언왕이) 인의는 알았으나 세상의 변화는 몰랐기 때문이다.
- <회남자> 인간훈편
昔吳王夫差好戰而亡,徐偃王無武亦滅。故明王之制國也,上不玩兵,下不廢武
옛날 오왕(昔吳) 부차는 전쟁을 좋아해서 망했고, 서언왕은 무술을 몰라서 또한 멸망했다. 그러므로 명석한 왕이 나라를 제어할 때는 상한선으로는 병사를 가지고 놀지 않고, 하한선으로는 무술을 폐지하지 않는다
王孫厲謂楚文王曰:「徐偃王好行仁義之道,漢東諸侯三十二國盡服矣!王若不伐,楚必事徐。」王曰:「若信有道,不可伐也。」對曰:「大之伐小,強之伐弱,猶大魚之吞小魚也,若虎之食豚也,惡有其不得理?」文王興師伐徐,殘之。徐偃王將死,曰:「吾賴於文德而不明武備,好行仁義之道而不知詐人之心,以至於此。」
왕손 여가 초문왕에게 말하기를 "서언왕이 인의의 도리를 행하는 것을 좋아하여 한수 동쪽의 제후 32국이 모두 복속하였습니다. 왕께서 만약 정벌하지 않으면 초나라가 반드시 서나라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만약 그 말대로 도리가 있다면, 정벌할 수 없다."라고 하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큰 것이 작은 것을 정벌하고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정벌하는 것은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삼키는 것과 같고 호랑이가 돼지를 먹는 것과 같으니 어째서 이치에 맞지 않겠습니까?"라고 하니 문왕이 군사를 일으켜 서나라를 정벌하고 멸망시켰다. 서언왕이 죽으려 할 때 말하기를 "내가 문덕(文德)에 의존하여 무기를 갖추는 데는 밝지 못했으니 인의의 도리를 실행하기 좋아하였으나 사람의 마음을 속이는 법은 알지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 <설원> 지무편

그리고 이것이 잡학 사전인 <박물지>에 이르러서는 난생 설화와 결합해서 인자함을 강조하는 서술로 바뀌게 된다.[3] 귀족 사회의 정치 이념이 법가에서 멀어지고 문장을 잘 쓰는 데 역량이 집중되면서, 서언왕에 대한 기록도 바뀐 것이다.
徐偃,《王志》雲:徐君,宮人娠而生卵,以爲不祥,棄之水濱。獨孤母有犬,名鹄蒼,獵于水濱,得所棄卵,銜以東歸。獨狐母以爲異,覆暖之,遂沸成兒。生時正偃,故以爲名徐君。宮中聞之,乃更錄取。長而仁智,襲君徐國。後鹄蒼臨死,生角而九尾,實黃龍也。偃王乃葬之徐界中,今見雲狗壟。
偃王既主其國,仁義著聞。欲舟行三國,乃通溝陳蔡之間,得朱弓矢,以已得天瑞,遂因名爲弓,自稱徐偃王。江淮諸侯皆服從偃,從者三十六國。周王聞之,遣使乘驿,一日至楚,使伐之。偃王仁,不忍鬥害其民,爲楚所敗,逃走彭城武原縣東山下,百姓隨之者以萬數,後遂名其山爲徐山,山上立石室,有神靈,民人祈禱。今皆見存
서언(徐偃)은 《왕지(王志)》에서 말하기를 "서나라 임금이 궁녀가 임신하여 알을 낳자 상서롭지 않다고 하여 물가에 버렸다. 독고모(獨孤母)에게 개가 있었는데 이름이 곡창(鹄蒼)으로 물가에서 사냥하다가 버린 알을 얻어 알을 물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독고모에게 신이가 있어 (알이) 따뜻하게 덮여서 마참내 (알이 깨어져) 튀면서 아이가 태어났다. 태어날 때 똑바로 누워 있었으며 그것을 서나라 임금의 이름으로 삼았다. 궁중에서 이를 듣고 다시 기록하여 취하였다. 자라서 인자롭고 지혜로워 서나라를 물려받았다. 이후 곡창이 죽을 때가 되자 뿔과 아홉 꼬리가 생겨났으니 사실은 황룡(黃龍)이었다. 언왕은 이에 곧 서나라 경계 가운데 묻었으니 지금 보는 운구(雲狗)의 언덕이다.
언왕이 드디어 그 나라의 군주가 되어서 인의가 널라 알려졌다. 배를 타고 세 나라를 가면서 진(陳)과 채(蔡) 사이의 물길을 가면서 활과 화살을 잃었는데 얻게 되는 하늘의 서상을 누렸으므로 이름을 궁(弓)이라고 하고 서언왕을 자칭하였다. 강회(江淮)의 제후가 언에게 복종하여 따르는 자가 36국이었다.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 <박물지>

이 서언왕에 대한 창작문예(...)가 정점에 달하는 것은 정사인 후한서에 관련 언급이 포함되면서이다. 문제는 후한서 동이열전의 이 기록은 앞서 이야기한 이 기록들의 모순을 전혀 해결하지 않은 채 기초적인 사실 관계조차 맞지 않는 기록을 늘어놓았고, 그것을 '한수 동쪽'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동이' 지역(당시 기준으로 만주~한반도~일본 열도 및 인근 일부 지역)과 연결시켜 놓았다는 점이다.
後徐夷僭號, 乃率九夷以伐宗周, 西至河上. 穆王畏其方熾, 乃分東方諸侯, 命徐偃王主之. 偃王處潢池東, 地方五百里, 行仁義, 陸地而朝者三十有六國. 穆王後得驥騄之乘, 乃使造父御以告楚, 令伐徐, 一日而至. 於是楚 文王大擧兵而滅之. 偃王仁而無權, 不忍鬪其人, 故致於敗. 乃北走彭城 武原縣 東山下, 百姓隨之者以萬數, 因名其山爲徐山.
그(주강왕) 후에 서이(徐夷)가 참람되어 왕호(王號)를 칭하며 구이(九夷)를 거느리고 종주국인 주나라를 쳐서 서쪽으로 황하의 상류까지 이르렀다. 목왕(穆王)은 그 세력이 한창 떨침을 두려워하여 동방 제후를 분리시켜 서언왕에게 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언왕(偃王)은 황지(潢池) 동쪽에 살았는데 국토가 500리였으며, 인의(仁義)를 행하니 육로로 와서 조회하는 나라가 36국이나 되었다. 목왕이 후에 적기(赤驥)·녹이(騄耳) 등의 말을 얻어서 조보(造父)로 하여금 그 말을 몰고 초나라에 알려서 서국(徐國)을 치게 하니 하루만에 도착하므로 초문왕이 큰 병사를 일으켜 서국을 멸망시켰다.
언왕이 어질기만 하고 권도(權道)가 없어서 차마 그 백성을 데리고 싸우지 못하였으므로 패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리하여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났는데, 따라간 백성이 1만 명이나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하였다.
- <후한서> 동이열전

앞서 쓴 내용들을 확인하고 이 내용을 다시 본 사람이라면 느끼겠지만 기본적인 팩트 체크부터 개판이다(...). 목왕과 초문왕은 앞서 언급했듯 200년이나 시기가 차이가 나는 인물인데 목왕이 초문왕에게 명령을 내린 것처럼 기술해 놓았고 서쪽으로 떠날 때 얻어던 말이 초나라로 가는 파발마가 되어버리는 등. 졸지에 원문에도 없는 구이(九夷)가 생겨났으며 팽성 무원현이라고 강소 지역의 지명까지 써놓았으면서 이걸 또 이미 요하 방면을 가리키는 동이열전 앞에 넣어놓았다. 때문에 이 기록은 후한서가 작성되던 5세기 문벌귀족들의 사상관념으로서의 가치는 있겠으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지표로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후 태평환우기를 비롯한 각종 지리지에 실리면서 이야기가 계속 부풀려지지만, 앞서 언급했듯 뒤로 갈 수록 관련 기록이 늘어간다는 것은 관련 기록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 신화와 전설을 찾고자 한다면 도움이 되겠으나 역사를 찾고자 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서 물고기를 찾는 꼴이 되겠다.

결국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는 인물이 부풀려지다가 뜬금없이 동이열전에 실리고 이웃나라 한국의 사이비 역사학에서 동이=한민족의 역사왜곡으로 급기야 상고 한국의 위인으로까지 추앙받게 된 출세한(?) 사례. 역사적으로는 사실로 연구할 가치가 없고, 고대 바이럴 마케팅의 사례로 연구하면 가치 있을 지도 모른다(...).


[1] 예를 들어 의 덕을 알아보고 선양하였다는 오경 계통의 기록은 이후 사기 등에 편입되어 현재까지 정사로 자리잡아 있지만, 순이 요를 감금하였다는 정반대 성향의 기록도 기원전 3세기에 유통되었다. 죽서기년 항목을 참고. 이는 이 당시의 역사서로 상고할 수 없었던(공화 항목 참고) 시대에 대한 전설적 전승이 다양하게 작성되고 유통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2]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운(隕), 수(隨), 교(絞), 주(州), 요(蓼) 등의 나라가 연합해 초에 대응했다든가, 신(申)이나 등(鄧)과 같은 국가를 공격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서(徐)에서 무슨 걸출한 인물이 초에 대항했다든가 하는 식의 이야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3] 당연하지만 이 때는 서언왕에 대한 기록이 나온지 5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때이고 1세기 <논형>에 등장한 부여의 난생 설화도 잘 알려져 있던 때로, 이 때 추가된 신화의 요소를 가지고 동이의 공통점이니 하는 것은 멍청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수신기>에 등장하는 간장, 막야의 주춧돌과 소나무 이야기가 <삼국사기>의 유리왕 설화와 비슷한 것은 서로 문화 교류가 진행되면서 공통된 이야기의 요소가 생겨난 것이라고 보아야지 이걸 놓고 '유리왕이 중국인 혈통이라서 그렇다'고 하면 한국인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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