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10 21:42:28

블러(밴드)/역사

1. 개요

1. 개요2. 밴드의 결성 (1988-1990)3. Leisure 시절(1990-1991)4. 미국 투어와 브릿팝 (1992-1995)5. 브릿팝 이후(1996-2000)6. 베스트 앨범과 휴식기, Think Tank (2000-2003)7. 잠정 해체 시기 (2004-2007)8. 재결합 이후 (2008-2014)9. The Magic Whip (2015)10. 웸블리 공연 발표와 The Ballad of Darren (202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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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영국 밴드 블러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다.

2. 밴드의 결성 (1988-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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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 멤버들의 어린 시절.[1]
우선 데이먼과 그레이엄의 첫 만남은 각기 데이먼이 12살, 그레이엄이 11살때 콜체스터[2]에 위치한 Stanway Comprehensive School에서 데이먼이 그레이엄에게 "어이 친구, 네 브로그 신발은 완전 X인데. 봐, 내 껀 제대로 된 거잖아(Your brogues are crap, mate. Look, mine are the proper sort: 이 대사는 그레이엄이 재현할때마다 조금씩 다른데..하여간 '니껀 가짜고 내껀 진짜'라는 의미는 한결같다)." 라며 자기 신발 자랑을 하며 시작되었다.(데이먼은 블러 다큐멘터리에서 그레이엄이 아직도 이 일로 삐쳐 있다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레이엄에게 모욕감을 준 첫 만남이었지만 음악을 좋아했던 소년들은 곧 유년시절의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다.

먼저 졸업한 데이먼이 연기자가 되기 위해 런던에 가고, 데이먼과 함께 음악을 하고 싶었던 그레이엄이 데이먼이 있는 런던으로 가기 위해 골드스미스 미대에 지원한다.

무사히 대학에 합격하고 런던으로 온 그레이엄은 데이먼과 재회하고 이 곳에서 같은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기숙사 아래층에서 살던 알렉스와 친해진다.

한편, 먼저 런던에 와 있던 데이먼은 자신이 연기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골드스미스 대학교에서 비정규 음악 수업을 듣던 중이었다. 또한, 당시 데이먼은 에디 디디건[3] 등과 서커스라는 밴드를 하고 있었다. 데이먼은 그레이엄이 일전에 소개해 준 데이브에게 서커스의 가입 의사를 타진했고, 데이브가 (블러 멤버 중에서) 2번째로 가입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BBC의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데이브는 주중엔 정규 학교에 다니고 주말에 음악 학교에 다니며 어렸을때부터 드럼을 배우고 있었는데, 이때 그레이엄의 아버지에게 토요일마다 재즈를 배웠다. 데이브는 학교 졸업 후 그리니치 대학교에서 컴퓨터를 전공하고 컴퓨터 엔지니어로 콜체스터 의회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밴드에 가입한 후 직장을 그만뒀다.

런던으로 온 그레이엄도 서커스에 합류하고 친구인 알렉스에게 데이먼과 데이브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해주면서 알렉스는 서커스라는 밴드와 데이먼, 데이브에 대해 알게된다. 그리고 알렉스는 데이브가 서커스 기존 멤버 두명을 내보내면서 생긴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

밴드의 매니저 일을 도맡아했던 데이브는 냉정하게 기존 멤버를 자르고 알렉스를 영입한 이유에 대해 비록 어렸을때부터 음악을 해 온 경험이 있는 나머지 멤버들에 비해 당시 알렉스는 연주 경험이 부족한 상태라 훌륭한 베이시스트는 아니었지만 사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얘가 너무 잘 생겨서 밴드 홍보에 도움이 될 거라 판단했다고 한다.

마침내 블러의 모든 멤버가 다 모이게 되고 이윽고 4명은 <호밀밭의 파수꾼>의 샐린저가 쓴 책 제목에서 따온 시모어(Seymour)를 밴드 이름으로 정하고, 1988년 12월 18일 4인으로써 최초의 연습을 시작했다.

이들은 1989년 11월 푸드 레코즈와 가계약을 맺은 뒤 1990년 3월 정식 계약을 맺었다. 계약의 유일한 조건은 밴드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는데 이는 푸드 레코즈에서 시모어라는 이름이 너무 범생이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4] 피자를 무제한으로 사주겠다는 꼬임 등이 먹혀 멤버들은 밴드 이름 교체에 동의한다.

푸드 레코즈에서는 The Shining Path, The Government, Sensitize, Whirlpool 등의 대안을 제시했고 이 중 Blur가 밴드의 이름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3. Leisure 시절(1990-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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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즈 레코드와 계약 한 뒤 블러는 펑크 밴드인 크램스의 투어에서 오프닝 밴드로 돌다가 첫 리허설때 만든 곡이었던 She's So High와 함께 I Know를 녹음해 싱글로 내놓았다. 이 싱글은 여성의 누드를 사용한 커버후방주의로 노이즈 마케팅을 하고 48위에 들었다. 이후 다음 싱글을 내야하는 상황에서 밴드의 데뷔 곡을 들은 스미스의 프로듀서인 스티븐 스트릿이 블러에게 같이 작업을 하자고 연락해왔고 그 결과 스티븐 스트릿이 프로듀싱을 맡아 새 싱글의 녹음 작업을 시작했다.

1991년 두번째 싱글인 There's No Other Way가 발매되었다. 이 싱글은 8위까지 찍으며 꽤 인기를 끌었고 블러는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슬로우다이브 등의 슈게이징 뮤지션들과 함께 The Scene That Celebrates Itself 라고 불리며 인디 씬에서 주목받는 밴드로 불려지기 시작한다. 알렉스가 다큐에 나와서 말하길 천하의 개쌍놈 매니저가 지금 푹 자는게 좋을거라고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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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 커버

2번째 싱글이 성공한 직후 블러는 1집 Leisure를 발매하고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1집 앨범은 평단으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은데다가 상업적으로도 기대치보다 한창 밑도는 판매고를 보였다. 이 당시 블러는 멤버들의 얼굴이 잘생겨서 여성팬들은 많았지만 정작 중요한 밴드의 음악성은 별볼일 없는 밴드로 취급받았다. 1집의 사운드는 당시 영국 음악씬에서 유행하는 장르들[5]을 단순히 혼합시켰을 뿐이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1집 발매 무렵 배기 씬이 무너져 내려버렸다.
톰 요크는 블러의 1집 앨범인 Leisure를 블러의 실수라고 평하기도 했다. 데이먼은 이 점을 인정한다는 듯이, "그렇다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이걸 수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라고 말했다. 그때는 후진 앨범을 내도 안 묻히던 시기라 좋았다는 깨알같은 자학드립까지!

그 뒤 밴드는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 다이노소어 주니어, 지저스 앤 메리 체인과 공동 헤드라이너로 투어를 다니기 시작했다. 1992년 3월 30일 밴드는 배기를 버리고 펑크 스타일로 갈아탄 새 싱글인 Popscene을 내놓았으나 32위라는 처참한 성적을 낸데다 설상가상으로 매니저가 돈을 먹튀해버리는 바람에 파산 위기까지 처하고 다음 앨범 계획까지 취소된다. 이후 밴드의 빚을 갚아 줄 테니 미국 투어를 하자는 티셔츠 회사[6]의 제안에 따라 미국 투어를 시작하였으나 오히려 매 순간마다 멤버들끼리 주먹다짐을 하는 등 멤버들의 불화만 심해진 채로 투어를 마무리한다.

4. 미국 투어와 브릿팝 (1992-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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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dern Life Is Rubbish

이후 블러는 유행을 쫓았던 Leisure 앨범과는 정반대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낯선 미국땅에서 원치않던 투어가 2달이나 지속되자, 향수병에 시달린 밴드 멤버들은 투어가 종료된 후 영국으로 돌아와서 영국적인 캐릭터와 풍경을 소재로 킹크스, XTC 등의 영향을 받아 Modern Life Is Rubbish 앨범을 제작한다. 레코드 회사에서는 레코딩을 하는 도중에도 이러한 블러의 시도에 대해 계속해서 반대의 입장을 표했지만, 블러는 자신들을 믿어달라며 꿋꿋이 밀고 나가며 레코딩을 지속했다. 그리고 영국적인 팝 멜로디를 정교하고 다채롭게 다듬어 낸 이 앨범은 평단으로부터 인정받게 된다.

2집 Modern Life Is Rubbish 부터 4집 The Great Escape 까지가 사람들이 '브릿팝'이라 여기는 성향을 보여주는 앨범이라 할 수 있다. 블러의 앨범 중 비교적 가장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에 이 세 앨범을 묶어 블러의 'Life 3부작'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본인들이 3부작으로 계획한건 아니라고..
Life Tri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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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집 Modern Life Is Rubbish 3집 Parklife 4집 The Great Escape
비록 Modern Life Is Rubbish는 대중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인디씬에서는 호응을 얻었고 블러는 때 마침 영국에 불어닥친 너바나를 위시한 미국의 그런지 열풍에 대항할 밴드를 찾던 영국 음악계의 분위기와 맞물려서 큰 주목을 받게 된다. 당시 영국의 언론들은 미국의 그런지 사운드와는 차별화 되는 이들 영국 밴드들의 음악을 브릿팝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띄어주었다.[7]

브릿팝은 새로운 유행이 됐고, 블러는 브릿팝 열풍에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1994년 발표한 3집 Parklife는 블러의 포텐이 본격적으로 터지면서 90년대를 대표하는 명반이라는 평이 대다수일 정도로 이러한 브릿팝 열풍을 제대로 담아냈다는 호평을 받는다. 평단으로부터 사랑 받았지만 대중적으로는 실패한 Modern Life Is Rubbish와 달리 Parklife 앨범은 평단의 호평은 물론 판매량 부분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덕분에 밴드는 그동안 가지고 있던 막대한 빚을 전부 갚을 수 있게 됐고, 1994년 브릿어워드에서 최우수 밴드, 최우수 비디오, 최우수 싱글, 올해의 앨범의 4관왕을 이루며 자신들의 해로 만든다.

== 브릿팝 전쟁 ===
하지만 브릿팝 열풍이 결국 영국 음악계의 마케팅을 위한 수작임을 깨닫고 있던 블러는 이 열풍을 달가워하지만은 않았고, 브릿팝이라는 단어와 자신들의 브릿어워드 4관왕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알렉스는" 우리가 브릿 아워드에서 상을 받은 것은 단지 영국 음악 마케팅을 위한 몰아주기식 수상이었을 뿐" 이라는 식으로 발언하기도. 이후 블러는 이에 대한 항의로 The Great Escape 앨범을 영국 사회의 계급과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태도가 두드러지는 내용으로 만들었다.

한편, 블러와 오아시스를 라이벌 구도로 만들어서 화제거리로 삼아 판매량을 올리고 싶었던 블러의 음반사 푸드 레코드는 오아시스의 리드 싱글 Roll With It 발매일보다 먼저 발표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블러 4집의 첫 싱글 Country House의 발매일을 동일한 날로 옮기기를 원했다. 그리고 데이먼 알반은 매스컴의 장단을 맞춰준다는 기분으로 이를 허락해버린다.

오아시스는 블러가 일부러 싱글의 발매일을 바꾼 사실을 알고는 몹시 불쾌해했으며 오아시스의 리더 노엘 갤러거는 이 일을 주도한 것으로 의심되는 NME의 전 편집장을 비난했고, 블러와 데이먼 알반에 대해 험악한 말들을 하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것이 오아시스 입장에서 싱글 동시 발매란 자신들을 만만하게 보고 명백히 먼저 시비를 걸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을 리가.

이렇게 시작된 두 밴드의 대립은 브릿팝 남북전쟁이라 불리며 BBC의 9시 뉴스에까지 나오는 등 격렬해진다.

블러는 싱글 판매량 대결에서는 승리해 Country House는 싱글차트 1위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블러와 대립중이던 오아시스가 새로운 노동계급의 영웅으로 여겨지면서 과거에는 모드족 노동계급 사람들의 영웅이었던 블러가 얼굴만 잘생긴 중산층 출신의 날라리 밴드라고 인식되어 안티들의 수가 급증하게 된다. 당시 블러는 최정상 밴드였고 오아시스는 떠오르는 밴드였으므로 사람들의 응원이 오아시스로 향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였고 게다가 오아시스의 서민적이고 거침없는 태도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여기에 오아시스는 당대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손꼽히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까지 내놓으며 앨범 차트 대결에서 완승한다. 반면 블러의 새 앨범 The Great Escape는 영국 사회와 계급에 대한 신랄한 태도가 두드러졌던 앨범이었기에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힘들었다.

다만, 앨범에 대한 평론가들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 The Great Escape 앨범 발매 당시 가디언, Q매거진, 셀렉트, NME, LA타임즈 등은 앨범에 만점 혹은 그에 가까운 높은 점수를 주었으며 멜로디 메이커는 아예 10점 만점에 12점이라는 점수를 부여했다. 셀렉트의 데이비드 카바나(David Cavanagh)는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has everything you could want)이라며 극찬했고 NME의 조니 시가레츠(Johnny Cigarettes)는 아이디어, 감정, 곡들이 당대 밴드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utterly beyond contemporary compare)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멜로디 메이커, Raw, Q, NME, 셀렉트에선 앨범을 1995년 10대 명반 안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혹평도 생겼고 결국 앨범 판매량은 오아시스에 크게 뒤쳐졌다. 사실 판매량 면에서도 비교 대상이 됐던 Morning Glory가 엄청나게 팔렸을 뿐, 망한 것은 아니었다. 데이먼 알반 또한 자신이 만들었던 최악의 앨범으로 Leisure 와 함께 이 앨범을 꼽았었지만, 후에 이 앨범의 가치를 재발견했는지 2012년에는 "앨범의 곡들로 뮤지컬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5. 브릿팝 이후(199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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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집 커버[8]
결국, 영국 언론과 안티팬들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한 블러는 The Great Escape 활동 도중이었던 1996년 상반기에 일시적으로 밴드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활동 중단시기, 데이먼 알반은 알코올 중독에 걸렸고 헤로인까지 손을 댔으며, 그레이엄 콕슨은 속해있던 밴드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업적인 의도가 짙은 퍼포먼스에 연루된 것에 대한 반발심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알렉스는 친구 찰리 블로어[9], 듀란 듀란의 초기 멤버이자 Tin Tin, The Lilac Time으로 알려진 스티븐 더피, 엘라스티카의 청일점 드러머인 저스틴 웰치와 훈남 밴드 Me Me Me를 결성해 싱글 Hanging Around를 냈다.

한편, 블러의 멤버들은 각자 개인 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여러 스튜디오를 전전하면서 새 앨범을 작업하였고 마침내 1997년 브릿팝은 죽었다라는 충격 발언을 터트리면서 5집 Blur를 발표한다. 활동 중단 기간동안 미국 인디록 사운드에 매료된 블러는 소닉 유스페이브먼트같은 미국 중심의 노이즈 기타 록을 대대로 받아들여 음악적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블러의 발랄함과 쾌활함을 좋아했던 기존의 10대 팬들을 충격에 빠트렸으나, 일반 대중과 평단으로부터는 앨범 내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노이지한 기타의 아름다운 연주와 로우 파이식 레코딩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러한 블러의 사운드적 변화에는 미국 인디씬으로 관심을 돌린 기타리스트 그레이엄 콕슨의 공이 컸다. 이 앨범에 실린 'You’re So Great’ 는 처음으로 블러 앨범에 실린 그레이엄 작사,작곡,보컬의 곡이다. 앨범 활동 중 블러는 리믹스/라이브 앨범인 Bustin'+Dronin'을 발매하기도 했다.
특히 게임 FIFA 98에 OST로 실려서 블러의 곡 중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Song 2역시 이 앨범의 2번 트랙 수록곡이다. 강렬한 질주감과 사운드, 짧고 간단하면서 머리속에 쉽게 기억되는 임팩트한 멜로디와 가사 덕분에 발매된 지 30년이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히트곡이다.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그 뭐냐 오프닝에 나오는 '우후~'하는 곡 이름 뭐냐?'라는 질문이 쇄도하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이 곡 이름이 'Woo Hoo Song'라는 괴 이름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FIFA 98 OST 외에도 한국에서는 이요원이 나온 염색약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쓰이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메이저리그의 몇몇 선수들이 'Song 2'를 등장음악으로 써서 히트를 쳤다.

이후 데이먼 알반은 그의 개인 스튜디오인 Studio 13을 세웠으며[10] 범죄 영화인 Face에 출연해 꿈에 그리던 연기활동도 하였다. 그레이엄은 자신의 레이블인 Transcopic을 세워 솔로로 데뷔하였고 알렉스는 코미디언 키스 앨런, 예술가 데이미언 허스트[11]와 함께 프랑스 월드컵시즌에서 응원가 그룹인 Fat Les를 결성해 Vindaloo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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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집 커버
1999년 밴드는 이전까지 블러의 앨범을 프로듀싱한 스티븐 스트릿 대신 상술한 Bustin'+Dronin'에서 리믹스를 맡은 인연으로 마돈나의 프로듀서로도 잘 알려진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윌리암 오빗을 새 프로듀서로 기용해서 6집 13을 발표했다. 전자음을 도입해서 기존의 기타 중심의 구조를 깨버리고 음울한 성향으로 돌아선 이 앨범은 전체적으로 그레이엄의 실험적인 기타 사운드가 도입되고 데이먼의 흑인음악에 대한 관심이 Tender에서 드러나는 등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가사 역시 개인적인 면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특히 사랑스러운 우유곽 밀키가 나오는 그레이엄 보컬의 Coffee & TV Cigarettes & Alcohol의 검열삭제 버전이다가 히트하기도 했다.

6. 베스트 앨범과 휴식기, Think Tank (200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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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발표 이후, 블러는 신곡 Music Is My Radar가 수록된 베스트 앨범을 발표하고 휴식기를 갖는다. 데이먼은 이웃집에 사는 만화가 제이미 휴렛과 고릴라즈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다른 멤버들도 각자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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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집 커버
그리고 2002년에 다시 모여 Music Is My Radar를 프로듀싱한 벤 힐러와 노먼 쿡 (a.k.a. 팻 보이 슬림), 전작의 윌리암 오빗과 7집 Think Tank를 작업하나 데이먼의 성향이 일렉트로니카로 변해버려 기타가 별로 필요 없어졌다는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데이먼과 그레이엄의 불화가 심해져 결국 그레이엄이 밴드를 떠났다. 당시에 타블로이드의 추측성 기사나 왜곡 기사가 많아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재결합 이후 블러 다큐에서 모든 멤버들이 직접 코멘트 한 당시 상황은 그레이엄의 알콜 중독이 심해져 재활원을 갔고, 멤버들은 이 상황을 모르거나 오해하면서 그레이엄이 스튜디오에 나오지 않았던것에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레이엄은 그걸 밴드를 나가라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 그래도 네 명이서 4곡[12]을 녹음했기 때문에 앨범에서 그레이엄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이 시기에 녹음되었던 Don't Bomb When You're The Bomb는 이라크 전쟁 참전 반대를 위해 한정반으로 발매 되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발매한 Think Tank 앨범[13]은 데이먼의 월드 뮤직에 대한 관심과 일렉트로니카나 힙합의 강한 영향을 보여주며 기존의 블러와는 크게 다른 사운드를 보여주었고 가사 또한 사랑과 정치적 문제들을 주제로 쓰여졌다. 이 앨범은 평단의 지지를 이끌어내긴 했지만 싱글 발매된 곡들을 제외하면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13에 비하면 팝적인 성향을 띄었는데도 대중적으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으며 지금까지도 별 존재감이 없다(...). 심지어 그 다음 해 블러의 리즈시절 프로듀서이던 스티븐 스트릿과 제작하여 그레이엄의 솔로 커리어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앨범 Happiness In Magazine과 비교당하기도 했다. 당시 투어에서는 그레이엄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기타세션에 버브의 Urban Hymns 활동 시절의 기타리스트인 사이먼 통이 참가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앨범에 수록된 Sweet Song이라는 노래는 그 당시 그레이엄의 사진을 보고 떠올라 쓴 곡이라고 한다. 정작 그레이엄은 2014년까지 이런 노래가 있는 줄도 몰랐다고...

7. 잠정 해체 시기 (2004-2007)

그 뒤 나머지 멤버들도 각자의 일을 하였으며 데이먼은 '그레이엄은 언젠간 올거임! 그러니 새 기타리스트 안받고 셋이서 쭉 할거임!선견지명' 이라고 했고 기타를 못쳐도 할 수 있는(...) 펑크 록 스타일의 앨범이 나올 것#이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거나 크리스마스 전까지 공격적인 성향의 EP를 내겠다#고 하기도 했으나, 결국은 잠정 해체 상태가 되고 말았다. 결국 팬클럽도 마지막 잡지와 싱글 Some Glad Morning을 마지막으로 리뉴얼 하겠다며 활동 중단. 재결합 하고 싱글도 두장이나 낸 현재까지 소식이 없다(...).이게 다 고릴라즈가 대박 쳤기 때문이다?

당시 인터뷰에서 데이먼은 '밴드의 나머지 멤버들이 날 증오하고 있어요'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레이엄과 화해했다는 기사와 멀쩡히 재결합한 걸 보면 그냥 개드립인듯. 원래 데이먼이 생각 없이 말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기질이 있다...[14]

그레이엄이 직접 데이먼의 아프리카 익스프레스 공연 리허설 현장에 찾아가고, 모르는 사람 집 앞에서 에클스 케익을 나눠먹으며(...) 화해를 한 뒤 멤버들이 재결합하고 2007년 8월에 녹음을 시작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으나 10월로 미뤄지더니 10월에 멤버들이 모이는 모습이 보였을 때 공홈에서 그냥 점심 약속이고 블러 활동은 계획에 없다고 밝히며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 뒤..

8. 재결합 이후 (2008-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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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하이드 파크(Hyde Park) 라이브 앨범
2008년 데이먼과 그레이엄이 화해를 하면서 2009년 7월에 재결합 공연이 있을 것이라 발표. 원 멤버로 재결합을 했고 투어를 돌았다. 다만 앨범 발표는 하지 않았고 2009년 여름 스코틀랜드 공연을 끝으로 다시 활동 중지 상태다. 그레이엄이 개인적으로도 2009년에 신보를 발표하고 투어를 돌고 있는데다, 데이먼도 2010년 발표한 고릴라즈 신보 때문에 당분간 블러 활동은 보기 힘들 듯 싶다. 그래도 녹음한 곡이 있었는지 2003년 이후 7년만에 2010년 4월 17일 신곡으로 'Fool's Day'를 싱글로 내놓았다. 레코드점의 날(Record Store Day)을 위한 곡이라고.[15]

2011년 말, 알렉스 제임스가 '블러는 성탄절 이후에나 녹음을 재개할 것'이라며 뭇 블러팬들을 설래게 했다.

2월 19일. War Child 공연에서 데이먼과 그레이엄이 같이 나와서 신곡 Under The Westway를 연주하고 The Great Escape과 Blur에 들어 있던 두 곡(He Thought Of Cars, Strange News From Another Star)도 공연했다. 그리고 2월 21일 2012 브릿 어워즈에서 공로상을 받게 되었다

모두들 블러가 다시 예전처럼 돌아올거라 기대만발 이였으나... 데이먼이 더 이상의 블러 활동은 없다는 식으로 말해 팬들을 패닉으로 몰아넣었다가, 곧 그게 꼭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고 누군가 해명을 하는 일을 반복하며 전세계 팬들을 낚고 있다.
데이먼은 멤버들이 오랫동안 각각의 솔로 활동을 하며 음악색, 성향이 너무 진하게 달라졌기 때문에 멤버들이 함께 음악을 만들 때 합의점을 찾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이며, 그레이엄과 자신과는 달리 나머지 두명이 풀 타임 뮤지션이 아니라는 블러 활동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실제로 정치인으로 활동 중 인 데이브는 예정 된 런던 올림픽 폐막식 공연 등 블러 활동을 위해 휴가를 모두 써야했다.

데이먼이 호로비츠가 주관하는 런던 시낭송 대회에서 블러의 신곡 The Puritan 을 처음 발표, 전에 그레이엄과 라이브 공연으로 들려줬던 Under The Westway 와 함께 7월 3일, 블러의 옥상 라이브를 라이브 스트림으로 생중계하고 트위터에서 팬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받는 시간도 가진다. 두 곡은 7인치 싱글이 한정반으로 발매됐고 아이튠즈에서 다운 받을 수 있다.

13의 윌리엄 오빗이 말하길 재결합 이후 2012년 즈음에 레코딩 세션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데이먼이 중지 시켰다고... 꽤나 화가난건지 다시는 데이먼하고 작업하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블러 21주년 기념으로 블러 리마스터링 앨범과 LP앨범, DVD 등 박스 세트를 내놓았다. 우리 돈으로 35만원. 개별적으로도 발매되는 앨범들은 본 앨범과 함께 B사이드, 라이브 세션, 일부 팬클럽 싱글을 모아서 Disc 2로 정리했고[16] Rairities 1-4 디스크는 시모어 시절부터 재결합 이후까지의 자료들이 수록되어있으며 라이브 영상 Showtimes, The Singles Night, Live 13가 DVD에 수록되어있으며 시모어 시절의 곡인 Superman의 라이브가 7인치 싱글로 발매되었다. 하지만 Rairties나 라이브 영상들이 유튜브에 이미 많이 퍼져서인지 앨범을 각각 따로 사는 쪽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다. 박스셋을 비추천하는 이유

9. The Magic Whip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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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집 커버
무려 12년만에 발매된 정규앨범. 블러에게 있어 두 음반 사이에 가장 긴 공백을 가진 음반이기도하다.

데이먼 알반은 2013년 홍콩 투어 도중에 15곡 정도를 녹음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알렉스는 괜찮은 곡들이었지만 데이먼이 가사를 쓰지 않아서 발매하기는 힘들다고 밝힌 바 있다.

신보 공개 이후 신보 발매를 2주 앞둔 노엘 갤러거와 함께 묶여 브릿팝 전쟁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는 반응이 줄을 이뤘다. 햇수로도 딱 20년. 그러나 이들의 스타일 변화등으로 브릿팝 전쟁으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다.[17]링크

그러다가 2015년 NME 매거진에서 "독점 공개되는 유명 밴드의 신보 커버"라면서 중국어로 된 한 사진을 공개했다. 몇 시간 되지 않아 팬들은 표지의 중국어 '模糊'가 '흐린'이라는 뜻임을 알아내고 이것이 블러의 신보라고 추측했고, 이후 2월 19일 블러는 공식적으로 신보 'Magic Whip'의 발매를 발표했다. 신보 발매 기념으로 BST Hyde Park에서 헤드라이너로 공연할 예정. 또한 이 시기 즈음하여 유튜브에 이전 앨범들의 싱글 컷 되지않은 곡이 업로드 되었다. 선공개된 트랙리스트 중 'Pyongyang'이라는 곡이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3월 20일에 런던의 클럽 MODE에서 앨범 발표 이후 첫 공연을 가졌다. 비츠의 스폰을 받아 하게되며 홈페이지에서 추첨한 200명[18]+초대된 100명으로 300명의 관객이 모였다.[19] 같은 날 There Are Too Many Of Us가 공개되었다. 25일 영국 기준 저녁 8시(한국 시간으로는 26일 새벽 5시)및 태평양 표준시 기준 저녁 8시 (한국 시간으로는 낮 12시)에 비츠사의 유튜브에서 스트리밍 하였다.

4월 14일 Later... with Jools Holland에 출연[20]을 시작으로 활동을 이어간다.

그리고 영국 차트에 데뷔하지마자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빌보드 차트에서도 역대 블러 앨범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고.

2015년 6월 9일에 공식 코믹북인 Travel Hong Kong With Blur를 내놓을 것임을 발표했다. 홍콩의 만화가 Kongkee의 작품이라고 한다. 인터뷰 영상

The Magic Whip 투어가 끝나고 다시 멤버들이 개인활동에 집중했지만, 2019년 깜짝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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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웸블리 공연 발표와 The Ballad of Darren (2023-2024)

2022년 11월 14일에 2023년 7월 열릴 웸블리 스타디움과 더블린 콘서트를 발표하며 활동 재개를 알렸다. 7월 8일 웸블리 공연은 티켓 오픈을 하자마자 바로 매진되었고, 그로 인해 7월 9일 웸블리에서 하루 더 공연을 하게 되었다. 게스트 라인업으로는 족스트랩, 슬리퍼드 모즈[21], 셀프 이스팀이 공연했다.

2023년 1월 25일, 2023 SUMMER SONIC에 헤드라이너로 서는 것이 발표되었고, 그 외 유럽 유수의 페스티벌에 헤드라이너로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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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집 커버
5월에는 새 앨범 발매 소식이 갑작스레 발표되었다. 8년만의 정규앨범이며 앨범 타이틀은 The Ballad of Darren. 2023년 7월 21일 발매되었다.

7번째 트랙 "The Narcissist"가 첫 싱글로 공개되었다. 음원

2023년 6월 29일 두 번째 싱글 "St. Charles Square" 가 공개되었다.

이후 프리마베라, 코로나 캐피탈, 로스킬데 등과 같은 페스티벌에서 헤드라이너를 장식했으며, 2024년 코첼라 공연을 마지막으로 다시금 휴식기에 들어갔다.

2023년 웸블리에서 열렸던 재결합 공연 실황이 "Live at Wembley Stadium"이라는 제목으로 스트리밍 사이트와 블루레이 등의 플랫폼을 통해 2024년 7월 26일 발매되었다.

The Ballad of Darren의 작업기를 다룬 다큐 "To the End"는 2024년 7월 19일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개봉하며 2025년에 한국 개봉이 예정되어 있다.


[1]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데이먼 알반, 그레이엄 콕슨, 알렉스 제임스, 데이브 로운트리.[2] 콜체스터는 데이브의 고향이기도 하다. 데이먼, 그레이엄, 데이브는 지역적 연고가 같은 셈이다.[3] Random Gender라는 밴드의 기타리스트 출신.[4] 사실 한 가지 조건이 더 있었다고 한다. 데이브가 공연 때 파자마를 입고 드럼을 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5] 매드체스터슈게이징 등.[6] 이 회사가 바로 데이먼과 데이브가 지금까지도 즐겨입는 브랜드인 프레드 페리이다. 한국 프레드 페리 블로그에서는 자신들이 블러의 투어를 지원해줬다고 홍보(?)하기도. 그리고 2021년에는 20주년을 맞은 데이먼의 밴드 고릴라즈와도 콜라보레이션을 했다.[7] 애초에 큰 관계가 없던 영국 밴드들을, 미국 음악에 의해 음악시장이 잠식된 상황에 대항할 인기를 얻고 있다는 공통점만으로 묶은 것이기 때문에 브릿팝이라는 장르는 그 어떤 장르보다 모호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언론에 의해 브릿팝과 대립각을 세운 것처럼 묘사되었던 미국의 그런지 또한 밴드들의 고향이 시에틀 출신이라는 점만으로 묶인 것은 마찬가지였다.[8]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표현하는 커버 이미지에 타이틀또한 'Blur' 셀프타이틀이다. 전작과는 달리 blur 자신들에 대한 앨범. 좀 더 감정적이고, 개인적이며, 거칠다.[9] 싱글 제작에만 참여하고 실제로 공연에 나타나지는 않았다.[10] 앨범 13의 이름의 유래가 된 그 스튜디오 맞다. 스튜디오가 완성된 이후 블러의 노래 뿐만 아니라 고릴라즈 등 데이먼의 솔로 프로젝트의 곡은 대부분 이곳에서 작업되었다. 데이먼이 프로듀싱한 바비 워맥의 The Bravest Man In The Universe와 The Best Is Yet To Come 등 다른 뮤지션의 앨범들도 Studio 13에서 작업되었다.[11] 알렉스, 그레이엄과는 같은 골드스미스 미대 출신이다. Country House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하기도 했다.[12] 앨범에 실린 것은 1곡 뿐이다. 2곡은 B사이드가 되었고 나머지 1곡이 마지막 팬클럽 싱글인 Some Glad Morning.[13] 앨범커버는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뱅크시의 작품이다.[14] 네이버 기사들을 잘 뒤지다 보면 블러 멤버들이 법정 싸움으로 갔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멤버간의 갈등이 아니라 공연 스폰서와의 갈등으로 빚어진 해프닝이다.[15] 레코드점의 날 기념이라 특이하게도 앨범 자체는 7인치 축음기 음반으로만 1000장 한정판으로 발매했다. 그리고 팬들이 질 떨어지는 불법 복제된 앨범을 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앨범 발매일 다음 날 MP3 형식의 파일로도 무료 다운로드를 할 수 있도록 하였다.[16] 개별적으로 발매되는 버전은 각각 4장의 사진과 인터뷰집이 동봉된다.[17] 여담으로 위키피디아에서는 8집을 브릿팝으로 분류하고 있었다.[18] 공식 샵과 달리 국가 선택에 남북한 모두 가능했었다..[19] 데이먼이 공연장에 아이스크림 차를 타고 왔다고 한다..[20] 재결합 이후 첫 TV출연이라고 한다.[21] 원래는 슬리퍼드 모즈가 아닌 슬로우타이가 게스트 라인업에 있었으나, 성폭행 루머로 인해 라인업에서 제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