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추어 파이터 시리즈 | ||||
버추어 파이터 | 버추어 파이터 2 | 버추어 파이터 3 | 버추어 파이터 4 | 버추어 파이터 5 (얼티밋 쇼다운 / R.E.V.O) |
バーチャファイター3
Virtua Fighter 3
1. 개요
1996년 9월 발매. 당시 엄청난 사양을 자랑하던 MODEL3 기판의 첫 게임으로 등장하며 전 세계 게임계에 큰 충격을 선사했다. 실시간으로 처리되는 사막, 물, 눈, 흩날리는 옷깃, 환경 맵핑 등 1990년대 중반 기술력으로 버추어 파이터 3 같은 그래픽을 내는 게임은 단연코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으며, 그래서 캐치프레이즈가 The New Standards(새로운 기준)인 이유이기도 하다. 덕분에 3편은 인류의 역사적인 발명품으로 인정되어서,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편은 링 환경의 다양화에 회피 버튼의 추가와 잡기 커맨드의 변화, 모든 커맨드 잡기가 풀기 가능해지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게임 진입 장벽이 전작들 보다 크게 높아졌으며, 구 유저와 신규 유저의 평이 엇갈렸다.
3편의 개발 단계 모습은, 2편의 개발 단계의 모습과 굉장히 유사하다. 우메노코지 아오이의 경우도 본래는 2편부터 등장할 예정이었으며, 게임 시스템과 그래픽도 2편의 개발 단계에서 쓰이던 것이다.
메인 프로그래머 및 디렉터: 카쿠 테츠야(加来徹也), 카타기리 다이치(片桐大智)
디렉터 디자이너: 이자키 카즈히로(伊崎和宏)
AI, 단위인정전: 마츠모토 코타(松本浩太)
캐릭터 모델링: 나고시 토시히로(名越稔洋)
백그라운드 그래픽 디자이너: 니시무라 나오타케(西村尚武)
사운드: 카와구치 히로시(川口博史), 미츠요시 타케노부(光吉猛修), 이토 후미오(伊藤二三雄), 쇼지 히데노리(庄司英徳)
종합감독 및 프로듀서: 스즈키 유(鈴木裕)
2. 시스템 특징
시리즈 중 유일하게 회피 버튼(횡 이동 버튼)을 추가한[1] 4버튼 체제로 제작되었고 기존의 사각의 링 형태에서 벗어나 다양한 스타일의 스테이지가 추가되었다. 이런 스테이지 변화에 기존의 평지에서 싸우는 것이 아닌 고저차와 벽 콤보, 바운드콤보를 처음 도입하여 게임상에서 여러가지 상황에 맞는 유연함을 강조했지만 2탄에 비해 대전의 속도감이 다소 저하되고 극한의 심리전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기에 시스템적인 변화에 비해서는 플레이 양상이 다소 고정적으로 정착되었다. 또한 각 캐릭터마다 몸무게를 게임상에 적용시켜놓아 게임의 플레이를 좀 더 심도있게 하게 만들었다. 여담이지만 게임라인의 철권빠였던 모 객원기자는 이런 것들을 하드웨어의 힘으로 게임성을 변화시켜간다는 독특한 컨셉이라는 개소리를 지껄이기도.해외판 한정으로 링 아웃의 음성이 유일하게 바뀐 시리즈이기도 한데 이 작품에서만 소울 엣지/소울 칼리버에서 쓰는 out of the ring 이라는 문구와 음성으로 바뀌어 나온다.
전작에서 기본잡기만 풀리던 것에서 후방잡기를 제외한 모든 잡기가 풀리게 되었다. 손만 빠르면 여러개의 잡기풀기를 동시에 입력할 수도 있다. 잡기 종류가 많은 만큼 풀리는 모션들 역시 일일이 대응되어 만들어져 있다. 보는 재미와 공방의 재미가 있지만 공방이 다양한 만큼 풀린 후의 손익 도 잡기별로 천차만별. 둘 다 큰 이득이나 손해가 없는 잡기풀기 모션에서부터 한쪽이 유리해지는 모션, 한쪽이 확정 추가타를 맞게 되는 모션, 큰 데미지를 입을 만큼 빈틈이 생기는 모션 등 편차가 매우 심한 면도 있다. 그래서인지 최신작으로 오면서 이런 다양한 잡기풀기 모션을 철권 잡기풀기처럼 거의 비슷하고 단순한 모션으로 통일화 하여 공방 을 비슷하게 맞추는 경향으로 가고 있다. 기상 하단공격이 전작까지는 히트하면 무조건 다운이었지만 3 부터는 다운되지 않게 변경되고 큰 이득 프레임을 얻게 변경되었다.
3편에서만 도입되고 폐기된 시스템은 일부 기술들이 가드 당하면 동작이 멈추고 경직이 생긴다. 대표적으로 회전계 기술(돌려차기류)들이 가드 당하면 멈칫하며 기술이 끊기고 경직으로 인한 빈틈이 생기게 된다. 리온의 섬전공각 같은 기술은 회전기는 아니지만 몸으로 찍어누르다가 가드 당하면 역시 경직이 생기고 주섬주섬 일어나며 빈틈을 보인다. 사실 기술이 상대 몸에 닿았을 때 저항 없이 몸을 뚫고 지나가듯이 지나가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바꾼 것이지만 기술이 툭툭 끊기는 느낌이 별로 좋지 않아서인지 다음 시리즈에서 다시 폐기되고 이전처럼 돌아갔다. 묘하게도 이러한 표현 역시 철권 태그 토너먼트부터 나락쓸기가 가드 당했을 때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각 라운드 개시 전부터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시리즈이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할 수 있다. 잭키의 경우 스위치스탭으로 발위치를 바꾸는 것도 가능. 이 시스템은 다음작에서 바로 폐기되었다.
그리고 3만의 새로운 시스템이 다시 유저의 의해 창안되기도 하였는데 바로 '스텝'이다.[2] 이를 통한 횡 이동이 강조되어 공간을 활용하는 플레이가 중요 시 되는 3편이지만 단순 활용을 넘어 스텝을 통한 거리조절 및 공간의 활용을 극단적으로 높이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 주인공은 2의 종결자였던 신의욱이었다. 하단 대시를 캔슬하여 단순 1회 이동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플레이 내내 위빙을 하면서 상대방의 간격과 거리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는 코리안 스텝을 창안하면서 회피 버튼의 활용폭이 커졌다.[3] 버추어 파이터 3는 회피 버튼이 매우 중요한 게임이라 어찌보면 생소하기도 하지만 스텝을 밟아 공격을 피하는 건 기본이고, 상대방을 눕혀놓고 다운 정역심리에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회피 버튼만의 재미를 본 유저들도 많이 있다.
덕분에 이 활용은 세가의 공식 버추어 파이터 3 가이드에 신의욱의 이름과 함께 가장 중요한 테크닉으로 등록. 그리고 신의욱은 스즈키 유를 비롯한 제작진 앞에서 직접 '코리안 스텝'을 시연하기도 했다. 이것을 본 스즈키 유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4]
이외에도 디아블로팀에서 창안한 디아블로 매직 스탭 등 다양한 스텝과 여러가지 횡 이동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었으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이 정도...
단급표
단위 | 해외판 명칭 |
6급 | 14급 |
5급 | 13급 |
4급 | 12급 |
3급 | 11급 |
2급 | 10급 |
1급 | 9급 |
초단 | 8급 |
2단 | 7급 |
3단 | 6급 |
4단 | 5급 |
5단 | 4급 |
6단 | 3급 |
7단 | 2급 |
8단 | 1급 |
명인(名人) | Master |
초인(超人) | Superman |
선인(仙人) | Wizard |
2.1. 문제점
전체적으로 캐릭터들의 모델링이 신체 등신대가 샤프하고 날렵하던 전작에 비해 뚱뚱하고 짱딸막해 보이게 바뀌고 엉성한 관절[5]을 비롯해 얼굴도 못생기게 만들어져 악평을 듣기도 했다. 다만 그 엉성한 관절부위나 못생긴 얼굴의 모델링조차도 시대를 생각하면 놀라울 수준이다. 전작이나 동시대 게임들의 굴곡 없이 평평한 얼굴에 텍스쳐로 그려진 눈 수준에서 광대뼈 등 얼굴도 좀 더 현실적인 굴곡이 생기고 눈동자 나 입 속까지 폴리곤 3D 로 표현되어서 기술적으로는 놀라운 표현이었지만 미적으로는 불쾌한 골짜기 마냥그다지 보기 좋지 않았던 셈.그 밖에도 전작까지는 승리한 바로 그 자리에서 승리 포즈를 취하기 때문에 쓰러진 상대도 같이 보이기도 하고 카메라 각도도 다양했어서 박진감과 현장감이 넘쳤으나, 3편부터는 무조건 링 가운데에서 승리 포즈를 잡고 용량 문제로 인해서 그런지 상대편도 사라졌고 무엇보다 카메라 시점이 항상 거의 동일해졌다.[6] 그래서 뭔가 썰렁하고 항상 같은 화면의 승리 포즈만 보는 느낌이 되어 보는 맛이 사라져 버렸다.
리플레이 시에도 카메라 워크가 전작에 비해 굉장히 심심해져서 썰렁하고 보는 맛도 부족해졌다. 이러한 변경점은 이후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 에서도 계속됐다.
발매 초기 버전들은 그래픽이 깨지는 계단 현상 버그가 있었고 대전에서 치명적인 버그들도 있었는데, 이는 철권 2보다도 심한 편이다.
대표적으로 알려져있는 치명적인 버그로는 왕초보자도 3코인 정도면 클리어할 수 있는 쉽고도 악명높기로 유명한 리온의 섬전공각 무한 다운 공격과 적을 띄운 후 바로 PK 버튼을 입력한 뒤 K를 킥캔슬 하면 넘어지던 적이 벌떡 일어나 얼어붙어버려 다시 두들겨 팰 수 있는 어이없고도 치명적인 버그가 있었다.
이런 수많은 문제점 때문인지 이전작들과는 다르게 여러 버전이 나왔는데 최종적으로는 버전 D까지 나왔다. 원래도 짠손 카운터 후 잡기 확정이 되는 등 밸런스 관련으로 욕을 먹었으나 버전 D에서는 한술 더 떠서 하단 짠발마저도 카운터 맞으면 잡기 확정이 되는 등 짠 기술들 의 성능이 너무 좋아져서 밸런스가 더욱 개판으로 흘러가는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버추어 파이터 3의 제대로 된 발매는 3tb 버전이 나온 1997년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으며 실제로 오리지널 3와 오리지널 3 A ~ D 버전이 나온 1996년은 거의 흑역사화로 아예 베타버전 취급이다.
3. 한국의 상황
그래픽이 엄청난 만큼 일본에서도 초기 가격이 300~500만엔일 정도로 기판 가격이 굉장히 비싸 보급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는 상당히 어려웠다.[7] 당시 중형차 두세대 값으로 영세한 오락실에서 그런 기계를 들여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도입 당시엔 플레이 가격이 대부분 300원이었다. 현재를 기준으로 해도 적은 돈은 아닌 마당에 이 게임이 한국에 발매된 것은 1997년 봄이라는 점에서 체감 가격은 현재보다 더욱 높았다. 지방으로 말하자면 군 지역은 물론 간신히 시 이름을 달고 있는 소도시는 도시에 하나도 없을 수 있었고, 중소 도시쯤 되어야 시내 오락실에 하나쯤 있을까 했다.[8][9]게임의 흐름은 대시 거리가 짧아진 것을 속도가 떨어진다고 느낀 사람이 많았던 탓인데 한국에서는 팀 배틀이 활성화된 곳 말고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었다. 때문에 오히려 2편으로 회귀하는 유저가 많았다.[10]
다만 2편 시절의 최상위 괴수들[11]은 3편으로 전환하였고 2편에 이어서 세계 최강의 수준을 여전히 유지할 수 있었지만 신규 유입 유저가 없었다는 점과 게임 난이도가 타 게임에 비해 높았던지라 결국 한국에서 버추어 파이터가 몰락하는데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게다가 신규 유저 뿐만이 아니라 기존 2편의 유저들 중에서도 3에 실망해 이탈한 유저도 많았다. 일례로 3 발매 직전까지도 2의 고수가 바글대고 끊임없는 플레이가 이루어지던 준 성지급 오락실들에서도 당연히 인기 열풍을 이을 것으로 예상한 오락실 업주가 3편을 입하했으나 즉시 파리만 날렸던 걸 보면 2편의 유저에서 많은 수가 즉시 외면하고 이탈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3편은 수입사의 부도까지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고 오락실 업주들에게도 큰 손해를 안겼으며 한국에서는 손에 꼽히는 몇 개의 오락실에만 소수의 유저가 모여 팀 배틀을 꾸려나갔다.
게다가 같은 시기 철권 3가 대히트를 치면서 유저들이 그쪽으로 이탈한 영향도 있다. 철권 3 외에도 더 킹 오브 파이터즈 '96,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2, 사무라이 쇼다운 4 등도 인기가 있었다. 그리고 바람의 나라가 1996년 출시되면서 PC방과 온라인 게임의 서막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원래 RTS 장르들도 한국에서 상당히 인기가 있었는데 특히 버추어 파이터 3 후반부에는 스타크래프트가 출시되기도 했다. 이런 게임들이 버추어 파이터보다 신규 유저들을 쭉 끌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발전시킨 팀 배틀 문화는 3편에서 완벽하게 정착되어 타 게임의 유저에게도 정착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한국 최초의 전국 단위 팀 배틀이었던 '메가 배틀'[12]을 주최하여 배틀 문화의 기점이 되었다. 특히 PC통신을 기반으로 하여 전국 각지의 고수들이 연결되면서 '지역 버추어 파이터'를 고수하던 환경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폭넓은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 강한 한국세의 원동력이 되었다.
4. 일본의 상황
일본 버추어 파이터에서 세대교체는 크게 2와 2.1사이, 2.1에서 3, 3에서 3tb, 3tb에서 4 , 그리고 5 R 전후로 나뉜다.(유입은 없고 관두는 유저만 늘었다고 한다.) 2 당시 6대 철인(세가 공식 철인은 모두 6명이고 활동 시기도 겹친다) 의 세대교체는 2에서 2.1로 이어진 버추어 파이터 초기에 이미 이루어져 버추어 파이터대회로 유명한 아테나컵이 전국대회로 범위를 넓힌 3회를 끝으로 사회인에서 진성 겜돌이들이 주역이 바뀌었다. 실제로 2당시 맥시멈 배틀 성적을 이유로 이미 3명의 철인이 칭호를 반납을 표명했다. 당시 유명 플레이어들 사이에선 실력차가 분명함에도 tv나 언론등에서 철인을 띄워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 역시 만만치 않았다 한다. 캬사오는 현재까지도 현역으로 활약중이고 카시와는 3때 다시 한 번 부활하기도 한다. 1997년 말 9회 아테나컵의 우승과 MVP가 카시와 제프리다.오스는 버추어 파이터 2 초기부터 나고야에서 홈스테이와 함께 활약했고 전국 대회로 진화한 아테나 5회부터 참가해 왔다. 홈스테이는 일본에서는 당시 한국에서는 천발로 불려진 기후 콤보의 창시자로 유명했고 3에서는 달라진 게임성에 슈팅으로 플레이 하지 않고 돌아가 스코어러로 현재까지도 활동. 치비타는 버추어 파이터 2 극초기부터 활동하고 철인들과 친분을 만들고 활동한 정도가 아니라 수십번 대회 우승 경력으로 유명세를 떨쳤다. 당시 별명이 꼬마 아키라로 한국의 아키라 꼬마와 비슷하다. 3에 와서 리온으로 캐릭터 변경. 2.1말기에는 라우 유저이기도 했다.
3에서 이름을 알린 유명 플레이어로는 스코어로 출신으로 최초의 타카아라시 우승을 한 쿠리타와 게릴라, 일본의 이게라우인 스켈톤, 야미요다레, 울프로서는 일가를 이룬 세가루와 한국에는 일본 버추어 파이터씬에서 반응 속도로 유명한 고리라카게 등이 있다. 현재 중계로 유명한 쿠미초는 버추어 파이터 2부터 열심히 했고 3에서는 버추어 파이터 기판까지 구매해 지금도 나름 유명한 타이코 베야를 시작했으나 이름을 한국에까지 알린건 버추어 파이터 5 Final Showdown 이후가 아닐까 싶다.
쿠리타의 경우 맥시멈 배틀 이후로 한국선수 초대가 없는상태에서 우승인지라 한국서는 여러가지 말이 나왔으나(심지어 당시 약캐인 타카가...) 당시로는 일본 네임드를 전원 만나는 최악의 대진에서 우승한거라 필요이상으로 평가절하된 면이 적지 않다. 야나가의 경우 이게라우에게 너무나도 처참하게 패배 후 썩은 표정으로 한국에는 유명하나 실은 이게 당시 야나가 평판을 생각하면 매우 예의가 바른 축에 속한 태도였다. 원래 인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일본의 버추어 파이터씬에서도 나름 지위를 가질 만큼 빌런의 위치를 가지게 된다. 재밌는건 이후 이게라우도 게임잡지 기자 야나가도 게임잡지에서 각종 버추어 파이터 관련 분석을 담당하고 버추어 파이터 5 Final Showdown까지도 굉장히 수준높은 시스템 분석을 내놓았다. 나이를 먹어서 지금은 예의바르다고 한다.
5. 맥시멈 배틀
버추어 파이터 3 MAXIMUM BATTLE 모리나가 엔젤 컵
(1997년 1월 ~ 2월 16일)
2편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한 신의욱, 3편에서도 마찬가지. 2편에서 비해서는 조금은 포스가 줄어든 느낌이 있지만 어차피 의미가 없는지라 여전히 극강의 실력자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세가에서는 3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계대회를 주최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맥시멈 배틀'이다. 개최국인 일본을 포함한 7개국[14]에서 12명의 선수가 선발되어 참가했으며 일본내 최강의 파이이자 여성 유저인 챤네와 재키유저 야나가사라와 붕붕마루 카사오가 출전했다.
한국의 대표로 선발된 이는 리플레이즈의 신의욱과 사시미팀의 조학동. 신의욱의 경우 당시에 압도적인 피지컬과 동체시력을 가진 한국 최강자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였고 조학동[15]의 역시 특유의 심리전과 라우의 사상장 러쉬로 명성을 날리는 유저였다는 점에서 한국의 무난한 우승을 예상했다.[16]
대회는 예상대로 신의욱은 조도 비교적 약체나라[17]가 배치되어 있던 행운과 더불어 화려한 플레이로 일본 관객들에게 환호를 받으며 순조롭게 결승까지 올라갔었다. 특히 아키라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에서는 정석이었던 타격, 잡기, 가드 해체의 삼지선다 및 순보번과에 의한 가드 해체에서 연결되는 콤보 라인, 잡기 타이밍에 붕격운신쌍호장 심어두기 등의 플레이에 완전히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반격기도 잘 썼다. 아키라 다운 아키라를 처음 본 셈. 당시 상대하는 유저들의 발언은 하나같이 '지나치게 강하다'라고 언급할 정도였다.[18] [19]
대회에서도 신의욱이 유일한 사용자였는데 실제로도 3에선 아키라보다 강한 캐릭터들이 널렸기에 우승을 위해서는 굳이 그다지 성능이 강하지 않은 아키라로 플레이 할 필요는 없었으나[20] 아키라로 플레이 해 더욱 큰 임팩트를 준 셈.
조학동 역시 상대의 타이밍을 뺏는 특유의 사상장 러쉬와 카운터 잡기를 비롯, 8강에서는 일본 최강 파이였던 찬네를 상대로 라우가 뽑을 수 있는 최대한의 데미지 콤보(사상장카운터-쌍호열파-비연전신장-전신사하장-연환전신소각)를 일본에서 선보이며 압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학동 역시 순조롭게 이겨나가면서 4강전에서 야나가사라와 격돌. 이때 야나가사라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4강전. 야나가사라를 특유의 사상장 러쉬로 4라운드 퍼펙트 승으로 몰아붙이는 명장면을 유감없이 선보이며 결승까지 진출,[21] 결국 한국대표 두 명이 1위를 다투는 상황이 왔고 신의욱이 2:0으로 리드하다가 자리를 바꾸고 조학동이 연달아 두 세트를 가져가며[22] 역전의 기회를 노렸지만 결국에는 신의욱이 조학동을 잡아내면서 우승하는 거로 세계대회는 마무리되었다. 이 때문인지 공식발매된 대회 비디오를 보면 결승에서는 해설 자체도 거의 없다.[23]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당시 이들 모두 일본의 4각 스틱을 대회에 참가하고 나서 처음 만져봤다는 점이다. 연습조차 하지 못하고 곧바로 한 번의 패배도 용납되지 않는 실전에서 4각 스틱을 사용하는 극악한 조건이었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우승한 것이다. 특히 조학동의 경우 손이 커서 굉장히 치명적으로 작용했는데 그 덕에 대회 초반부는 기본 잡기와 한두 가지 기술만 다루며 심리전에 집중하는 식으로만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조금 적응이 된 이후로는 앞서 언급하다시피 특유의 플레이 스타일을 발휘하며 일본 대표 챤네와 야나가사라를 관광 보내게 된다. 그것도 4각 스틱에 완벽하게 적응된 모습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5.1. 맥시멈 배틀 이후
한국인 두 사람의 결승은 일본 플레이어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로 남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생각 외로 컸다. 일본의 우승을 생각했던 세가는 이런 결과에 당혹했는지 공식 비디오에는 60분 가량을 일본 대표 선발전을 위주로 채워버리고 세계 대회를 20분으로만 채우는 짓을 저지른다. 또한 대회 당시 신의욱과 조학동의 인터뷰를 모두 삭제한 행동까지 선보인다.그리고 우승 직후 신의욱, 조학동 두 명은 일본의 최강 플레이어들 상대로 다시 한 번 일전을 벌이는데 결과는 당연히 처참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첫날 무패로 압살한 조학동은 먼저 귀국. 홀로 남은 신의욱과 일본 대표 게이머들[24]의 대전은 모든 격투 게임을 통틀어 벌어진 한일전에서 가장 잔인하고 냉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결과로 말하면 10X승 6~7패 가량. 6~7패로 인해 철권의 장익수의 100연승 무패 신화 비교할 수 없다는 유저들이 간혹 있었지만 실상 내용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시 신의욱은 2일간의 일전(조학동은 1일차 무패 연승 이후 먼저 귀국) 속에서 한판당 9전 5선승제라는 압박스러운 룰로 진행됐다.[25] 그리고 신의욱의 플레이방식 역시 철저히 일본 유저들을 농락하는 형태로 진행됐는데 자신의 주력 캐릭터는 배제한 채 상대방의 캐릭터와 동일하게 선택하여 플레이 했다. 쉽게 말해 일본의 사라 최강자가 나오면 신의욱도 사라를 선택하는 식으로 대응하여 플레이, 일본의 잭키 최강자가 나오면 잭키로 대응하여 대놓고 압살해버리는 형태로 진행. 즉, 자신의 주력은 제외한 채 전 캐릭터를 사용하여 능욕하는 사상 유례없는 안드로메다 관광을 진행했다.
그리고 한가지 첨언하자면 버추어 파이터 3에서 신의욱의 주 캐릭터는 대회에서 우승한 아키라 유키가 아니었다. 3편 당시 주력 캐릭터는 잭키였으며 이후 리온 라파엘 같은 캐릭터로 대활약한 전적이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당시 한국의 최고 대회였던 제2회 메가배틀 신의욱이 소속된 리플레이즈와 디아블로의 결승전이였다. 당시 리플레이즈는 10~11점 정도까지 뒤진 최악의 상황에서 신의욱은 갑자기 리온을 꺼내들면서 기적적인 연승으로 1점~2점차까지 추격하던 명장면을 연출했었다.
이후 아쉽게 나머지 1승~2승을 하지 못해 준우승으로 대회를 마쳤지만 당시 이 시기의 신의욱을 아는 사람들은 맥시멈 배틀의 우승의 모습보다는 이런 기적적인 장면들이 신의욱이라는 플레이어의 수준을 확실하게 보여준 장면으로 기억하고 있다. 참고로 당시 상대팀이었던 디아블로 팀 역시 세계 최강이라고 할수 있는 한국에서 파이널 4에서 반드시 거론되는 강팀이며 디아블로 매직 스탭이라는 테크닉을 고안하여 명성을 떨치던 팀이다. 대표적인 플레이어는 팀장 권오민, 하창훈 리온 등이 명성을 떨쳤다.
이후 메이저 대회에서는 카게마루를 주력 캐릭터로 내세워 우승을 차지한바가 있으며 신의욱의 이런 아키라 유키에 관한 이미지는 버추어 파이터 2 시기의 아키라로 보여준 초월적인 실력으로 보여준 시기와[26] 맥시멈 배틀의 아키라 유키로 우승하고 임팩트를 남기면서 인해 아키라가 주 캐릭터로 많은 이들이 착각하곤 했지만 버추어 파이터 3에서 만큼 사실 잘못 알려진 경우다.[27]
이 때문인지는 불명이나 당초 우승자는 다음 대회에 초청하기로 정해져 있었음에도, 이후로는 아예 대회 자체를 열지 않아 한국 유저들 사이에서는 한국인 플레이어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냐며 논란이 되었다.
세계 대회 우승 상품 자체도 버추어 파이터 3 기판이었지만 한국 대표가 결승에서 맞붙자 상품을 바꾸었다라는 말도 나왔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게임라인 인터뷰에서 신의욱이 "우승 상품은 버추어 파이터 3 기판이라도 주는줄 알았는데 기판은커녕 맥빠지는 상품이라 실망했다."라는 인터뷰가 와전된 것이다. 일본은 2016년 e스포츠협회가 출범하기 전까지 경품표시법 상 게임 대회에 10만엔 이상의 상금이나 경품을 거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기판은 상품으로 걸 수 없었다.
다만 한국 플레이어에 대한 홀대 부분에 대해선 일정 부분 반론도 있는데, 먼저 맥시멈배틀의 형식을 보면 일본 전국예선을 돌파한 96명 참가자 해외 선수 9명 초대 , 첫날은 베스트4까지를 뽑고 둘째날 언더20 오버20 레이디부분 챔피언을 선출한뒤 이 3명을 다시 대결시켜 일본 1위를 정하고 다시 일본 각부분 3명의 챔피언을 초대 9명과 대결해 세계1위를 결정하는 형태였다. 다시 말해 세계대회 예선이 아니라 일본내 예선을 거처 올라온 각 부분별 결승이기 때문에 세계대회 쪽이 규모 자체는 훨씬 작았다.
또한 일정에서 알수 있듯이 세계대회가 메인 이벤트라기보단 그냥 일본 1등이 세계대회도 적당히 3명 넣으면 알아서 우승하겠지란 안일한 생각에서 짜여진 대회라서, 한국 플레이어 우승 여부를 떠나 대회 자체가 그런 구도로 짜여진 일정이다보니 세계대회 비중이 적다는 지적은 일정부분 타당하나, 맥시멈배틀 영상물의 분량으로 지적한다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먼저 분량. 세계대회는 고작 20분이라는데 12명이 겨루는 시합이 20분인데 96명이 이틀간 치른 대회가 한시간이다. 한시간동안의 분량에 96명의 본선 진출자들의 언더20과 오버20과 레이디즈 까지 3개의 대회를(4개지 부분) 담았는데 세계대회를 홀대했다는 평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다소 무리가 있다.
사실 맥시멈배틀은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한국대표가 출전한 버추어파이터 대회로는 처음이지만, 실은 버파2때 대만대표등을 초대해 당시에도 코리안 스텝과 같은 타이완 스텝이라는 화제가 있었다. 세가로서는 적당히 불러 모양새만 갖추면 알아서 일본 선수들이 우승할 거란 예측은 할 수 있었겠으나, 이걸 분량으로 지적하는건 설득력이 부족하다. 차라리 모처럼 세계대회인데 12명으로 토너먼트를 진행했다는 것 자체가 세가가 대충 생각없이 만든 이벤트성 대회란 것에 더 가깝다. 비디오에서는 세계대회 1라운드가 끝나고 붕붕마루의 [세계대회 치고는 수준이 낮다] 라는 코멘트에서 알수 있듯이 우월감을 가진건 사실이다.(아직 신즈 시합 전) 결국 이대회는 일본 1위로 진출한 야나가가 대만대표에게도 지면서 1,2,3위를 모두 외국선수가 차지한다.
문제제기가 된 승리 인터뷰 통편집 부분은 그렇다고 일본 선수들의 인터뷰가 충분히 수록되었냐면 그것 또한 아닌게, 언더 20의 3위 세가루 2위 오스 1위 야나가의 인터뷰가 모두 5초에서 10초이내로 편집을 , 오버20의 챔피언 캬사오의 인터뷰는 5초로 편집. 2위와 3위가 각 10초 분량으로 애초에 근본이 없는 편집이었다. 영상 자체가 이런쪽으로 무성의하단걸 지적하면 몰라도, 실제 통편집 자체를 문제로 삼는다면 맥시멈 배틀 영상보다는 버추어파이터 10주년 영상이 더 심각하다. 3 대회는 앞서 설명한 배틀코시엔 하나만 나오고, 맥시멈배틀이 아예 삭제되었다. 3에서 유일한 세계대회이자 몇안되는 공식 대회임에도 영상이 정말 말 그대로 통편집되어 아예 수록되지 않았다.
모리나가 맥시멈 배틀은 이 대회를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3이후 세가의 공식대회가 이전 만큼 열리지 않은건 사실이나 이후 두번다시 열지 않은건 또 아니다. 맥시멈 배틀 이후 열린 공식 대회로는 자바티 배틀 코시엔으로 어느정도 공식으로 봐도 무방한 대회로 이때의 승자가 약캐평인 타카아라시의 쿠리타이다 보니 얼마나 수준이 낮으면 타카가 우승을 하냐는 이야기가 국내 통신에서는 한동안 돌았었다. 실제 쿠리타는 대회 유일의 타카아라시 유저이나 버파 이전에 스코어러 출신이란 점에서 인간 성능으로 무시할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일본 자국내 유저만 우대했다고 하기엔 3때 세가 '공식' 대회 우승자 내지 순위권으로 유명한 플레이어 자체가 존재감이 미미하다. 비공식인 아테나와 비트라이브라면 얘기가 달라지나 이는 세가가 여는 대회가 아니라 세가가 여는 공식대회에 대항?하고자 개인점포들 연합에서 여는 대회였다. 버추어파이터 대회가 세가 공식에서 비공식으로 옮겨가는 시기가 이때쯤으로, 세가는 이때부터 자국내 대회보다 해외 홍보에 더 열을 올렸다. 지금도 유투브에서 볼 수 있는 캬사오의 영국방송 녹화분이나 쿠리타 등 유명 플레이어를 모아 호주 세가 이벤트에 초청하는등 일본보다는 해외에 더 힘을 쏟았다. 다만 이 시기는 이걸 대회로 볼 수 있냐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세가의 유명 플레이어 투어에서도 호주와 대만 영국등을 방문해도 정작 옆나라인 한국은 한번도 오질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의 세가가 의도적으로 한국을 배제했다는 설에는 신빙성이 있다. 캬사오나 일본 유명 플레이어의 한국 방문은 세가의 초청이 아닌 모두 자비로 방문이다. 그나마도 일본 점프를 통한 일반 신청자 모집으로 호주 어뮤즈 먼트 오픈 기념으로 참가한 쿠리타의 소감은 "그냥 여행가고 하루 대충 이벤트 여는 형식"이었다 하니 실상 대회라고 하기도 민망한 수준이다.
6. 확장판
6.1. 버추어 파이터 3tb
3편 발매 이후 1년후인 1997년 9월에 발매된 게임. tb라는 제목 그대로 3 VS 3를 지원하는 팀 배틀의 방식을 지원하는 확장판. 기존의 버추어 파이터 3가 A~D 버전까지 4가지가 정리되지 못하고 난립하면서 문제가 계속 발생하자 4개의 버전을 하나로 통합하는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한국에서도 찾아보기 쉬웠고 팀 배틀도 버추어 파이터 3tb로 계속 이어졌다. 일본에서는 버추어 파이터 2의 인기에 근접 할 정도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버추어 파이터 3tb에서는 또한 고수급 플레이어들의 실력이 농익어서 절정 고수급 레벨이 다수 등장, 더이상 신의욱을 단독 최강자라 부를 수 없는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버추어 파이터 3tb 발매 이후에는 일본 중수급 이상 유저들에게도 한국 스텝은 필수적인 것 중 하나가 되었다.3 VS 3만을 지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밸런스 측면에서도 D버전을 기반으로 재조정되었고, 알게 모르게 수정사항이 많다. 다운 판정인 기술을 맞아도 다운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타카아라시의 다운 조건은 다른 캐릭터와 동일하게 조정되었다.(물론 뜨지는 않기 때문에 콤보 전략이 일반 캐릭터와 상당히 다르다.) 아키라의 순신번과 등 일부 캐릭터에 신기술이 추가 되기도 해서 이래저래 3와는 다른 감각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또 한가지 쓸데없는 기능으로 1인 플레이 때에 한해 플레이 도중 스타트 버튼을 누르면 자신이 조작하는 플레이어의 1인칭 시점으로 플레이 할 수 있다. 가정용 이식버전 철권 2 에도 있던 비기와 같은 것으로 한두번 쯤 재미로 해보는 정도의 기능.
환영받은 한국 분위기와 다르게 일본내에서 평은 버추어 파이터 5 Final Showdown와 함께 호불호가 갈리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킹오파 시리즈처럼 3:3 팀배틀이 기본 시스템이라 기존 1:1 대전방식을 선호하는 유저들의 불호가 컸다.[28] 예를 들어 버추어 파이터 3과 4 사이에 전성기를 누린후 필자로도 활동한 야나가 인터뷰나 2021년에 버추어 파이터가 가동 중인 몇 안 되는 일본의 오락실 중 유명점인 미카도와 뉴튼의 작년 코로나 지원 모금 방송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왜 내가 3명이나 고르면 안되나'라는 반응이 일반적이었다고. 이때가 가장 많은 인원이 버추어 파이터에서 떨어져 나가 새로운 유입도 거의 없다시피 이당시 오스 아키라 등이 활동한 나고야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유저가 이탈해 대전 상대를 구하기도 힘들어 다른 격투 게임에 손을 대는 계기였다고 한다. 지방은 거의 전멸에 가까웠다고. 버추어 파이터 3에 이어 버추어 파이터 3tb로의 이동이 자연스러운 한국에서는 납득하기 힘든 평가일 수 있으나 버추어 파이터 10주년 기념 비디오에 수록된 당시 철인이자 패미통등 게임잡지 집필진의 인터뷰, 이케부쿠로 사라, 2020년에 방송된 뉴튼의 모금행사 방송에서 언급되었듯이 떨어져간 플레이어가 다수였고 세가 공식 대회 역시 열리지 않았다.
6.2. 3tb 온라인(아케이드)
2023년 11월 28일부터 ALL.Net P-ras MULT용으로 3tb에 온라인 플레이 기능이 추가되어 다시 아케이드 게임으로 서비스된다. 와이드 스크린이지만 게임 자체의 화면비는 기존과 마찬가지로 4:3 비율 고정이며, 양 옆의 남는 화면에선 플레이어의 승패수와 인사말, 커맨드 등 각종 정보나 스테이터스가 표시된다. 후술할 용과 같이 8에서 쓴 에뮬레이터 버전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일본 내수용 이므로 해외에서는 플레이가 불기하다.
7. 이식
7.1. 세가 새턴(취소)
아케이드판이 출시되고 얼마 후 새턴으로의 이식이 정식으로 발표되었다. 당시 스즈키 유는 "3개월에 걸쳐 검증을 해봤으며 새턴으로 모든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다고 판단해 이식을 결정했다"며, "가능하지 않은 것을 가능하다고 말할 순 없다. AM2와 내가 책임을 지고 이식을 시킨다. 믿고 기다려 주시기 바란다."라는 발언으로 당대 세가빠들의 열렬한 환호는 물론 모든 게이머들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만해도 거의 불가능으로 여겨졌던 버추어 파이터 2의 새턴판 이식을 훌륭하게 해 낸 AM2였기에 더욱 그러했다.[29]실제로 새턴판 이식이 진행중이었고 AM2와 스즈키 유도 굉장히 고심했던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식 발표 이후 2년여간 제대로 된 정보 하나 공개되지 않고 새턴에 사각 폴리곤이니 2D를 구부리는 기술이 있느니 하며 이를 이용하면 가능하다는 식의 언론 플레이만 하는 등[30] 새턴용 버추어 파이터 3에 대한 희망고문만 주다가 결국 드림캐스트판 3tb의 이식이 발표되면서 새턴판 발매는 취소되었다.
그나마 파이터즈 메가믹스의 버추어 파이터 캐릭터들 모션이 3를 기준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커맨드 연습이나 겨우 할 수 있는 수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나마도 아키라 등 소수를 제외하면 없는 기술까지 있는 상황. 그 와중에 3의 울프 스테이지 배경이 수록되어 있고# 배경음악도 3의 오프닝 음악이 나오므로 이 스테이지에서 대전을 펼치면 캐릭터 모션이 3 기반인 점과 맞물려 부분적으로나마 3의 기분을 느낄 수는 있지만 딱 거기까지다.
어쨌거나 새턴판이 취소되면서 스즈키 유는 새턴판의 발매를 취소하는 대신 새턴판 이식에 들어가는 인력과 자금을 드림캐스트판으로 집중할 수 있으므로 드림캐스트판으로 더욱 충실한 완성도로 아쉬움을 달래드리겠다고 했지만, 드림캐스트판 역시 아쉬운 형태로 발매되는 바람에 스즈키 유를 점박이 구라쟁이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픽만 보더라도 새턴의 폴리곤 활용능력으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고 이식이 가능하다는 스즈키 유의 발언은 허장성세에 가까웠다.
7.2. 드림캐스트
드림캐스트 동시 발매작. 베이스는 버추어 파이터 3tb이고[31] 이식 작업은 겐키가 담당하였다.[32] VGA-BOX박스에 대응해 업소용(496×384) 해상도를 능가했는데, 당시 VGA 박스를 이용해 모니터에서 출력되는 그래픽은 많은 게이머들을 놀래키기에 충분했다. 최신 3D 아케이드 게임을 약 2년 지난 시점에서 비슷한 그래픽 수준으로 집에서 즐긴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케이드 발매 당시 3편의 그래픽 충격이 워낙 컸고 이전작들 조차 그래픽 면에선 비슷하게 흉내내는 정도의 가정용 이식이라도 감지덕지 하던 차에, 가정용 게임기에 거의 위화감 없이 그대로 이식해 낸 것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 덕에 당시 게임관련 매체들의 평가도 매우 좋았다. 패미통 리뷰만 봐도 너무 완벽해서 만점은 못주겠다라는 등의 평가와 함께 40점 만점에 36점으로 플래티넘 획득. 게임 리뷰를 장단점 항목으로 나눠 단점 항목에선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까고보는게 특징이었던 한국 게임잡지 게임라인의 평가조차도 '동시 발매작으로는 완벽하다. 이 이상을 바라면 도둑놈이다'라는 식이었다. 잡지사 평가만 좋고 유저들 평가는 나빴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어서 당시 유저들의 평가도 좋았고, 용산에서 버추어 파이터 3tb의 드림캐스트 실기 데모가 돌아가는걸 보고 눈이 휘둥그래져 바가지를 감수하고 드림캐스트와 버추어 파이터 3tb를 함께 구매하는 유저들도 많았다.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드림캐스트의 초기 발매 게임의 부족으로 버추어 파이터 3tb만 붙잡고 있던 유저들은 폴리곤이 미묘하게 줄어든 점, 캐릭터 관절 처리의 미흡함(특히 슌의 끔찍하게 엉성한 허리 모양)도 그렇고 아오이의 도복 바지나 잭키의 상의가 펄럭이는 연출도 삭제되었고, 배경과 텍스처 해상도가 떨어지는 등[33] 눈에 보이는 여러 단점들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로 당시에는 버추어 파이터 3 매니아가 아니면 잘 모르는 이야기라 언급이 거의 없었던 이야기지만, 여성 캐릭터의 경우 게임상의 적용된 몸무게를 아오이 기준으로 하나로 동일하게 만들어[34] 게임플레이 이식마저 완전하지 않았다는게 드러났다. 당시 남코가 주도한 철권 시리즈 초월이식 붐과는 달리 정교한 트레이닝 모드는 둘째치고[35] VS 모드조차 없는 무성의함 역시 지적을 많이 받았다. 이는 북미판 발매 때 개선된다.
게다가 여기에 추가타를 가한 것이 남코의 드림캐스트판 소울칼리버이다. 당시만 해도 충실한 아케이드 이식성과 풍부한 추가 요소로 명성이 높았던 남코는 드림캐스트용 소울칼리버를 패미통 크로스 리뷰 만점에 빛날 정도로 초월이식했다. 이후 드림캐스트판 버추어 파이터 3tb는 무성의한 이식을 거론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세가는 버추어 파이터 3tb를 드림캐스트와 동시 발매하기 위해 겐키에 이식 기한을 6개월 정도로 촉박하게 줬을 뿐만 아니라 준 개발 도구마저 베타 버전으로 드림캐스트의 GPU인 PowerVR2의 성능을 반 정도밖에 사용할 수 없는 미완성품이었다고 한다. 겐키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악조건하에서 분투하며 이식한 작품인 셈. 그러나 애시당초 게임기 동시 발매 게임을 이런 식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세가는 비판받을만 하다.
버추어 파이터 3는 유일하게 드림캐스트로만 출시되었기 때문에 버추어 파이터 2가 아케이드 출시 후 오랜 세월이 지나 플레이스테이션 3와 엑스박스 360에 완벽하게 이식해 출시한 것처럼, 언젠가는 버추어 파이터 3이 출시되길 고대하는 유저들이 있다.[36] 한때 드림캐스트 콜렉션이 발매되어 희망이 보이기도 했지만 끝내 나오지 않았고 모델 2 기판의 유명작들이 상당수 훗날 7세대 게임기에 이르러 완벽하게 이식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아직 모델 3 기판의 작품들은 게임기에 이식된 적이 없다. 버추어 파이터 3의 완벽 이식판이 등장할 날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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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일본 초회판의 경우 별도 디스크로 쉔무(당시 타이틀은 '프로젝트 버클리')의 예고 및 메이킹 필름이 보너스로 들어있다. 그래서 디스크 2장 사양으로 발매되었다. 물론 게임 본편만 수록된 디스크 1장 사양의 일반판도 초회판 소진 후 발매되긴 했는데, 애초에 초회판이 워낙 많이 풀린지라 현재는 일반판이 훨씬 희귀하고 가격도 높다.
7.3. 용과 같이 8 - PS4/PS5/XB1/XSS/XSX/Windows
단독 발매는 아니지만 2024년 1월 8~9세대 콘솔 및 PC로 발매되는 용과 같이 8에 오락실 미니게임으로 버추어 파이터 3 TB가 수록된다. 드레곤 엔진에서 구동되는 MODEL3 기판 에뮬레이터를 기반으로 이식했다. 드림캐스트 이후 2번째 콘솔 이식판이자 21세기에 처음으로 콘솔로 이식되는 버파3가 되었다.[1] 2편에서도 몇몇 캐릭터에 한해 횡 이동이 있었지만 실제로 공격을 회피하는 성능은 거의 없었다.[2] 2에서도 하단 대시를 이용한 기초적인 스텝이 있으며 G캔슬을 이용하는 방법도 존재.[3] 일본의 4대 철인 중 하나였던 붕붕마루가 코리안 스텝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굳어졌다.[4] 하단 캔슬 자체는 스즈키 유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을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 그대로 출시하였다.[5] 특히 손가락[6] 조금씩 카메라의 각도가 다르다. 그러나 그렇게 까지는 티가 나지 않는다.[7] 그런데 버추어 파이터 2의 한국 가격은 버추어 파이터 3보다 더 높았다고 한다. 어떻게 보자면 버추어 파이터 3가 1996년 타 게임은 범접조차 못할 엄청난 그래픽 수준에도 불구하고 버추어 파이터 2만큼의 충격을 가져다 주지는 못했던 셈이다.[8] 중소 도시라도 버추어 파이터 3가 몇 개씩 도입된 도시가 있기도 하다. 결국 이런 것은 오락실 사장의 운영 의지나 손님층의 선호도도 많이 달렸기 때문이다. PC방 초기 시절에는 지역마다 선호 게임이 다르기도 했다.[9] 그리고 몇달 뒤 철권 3가 출시되었는데 일부 오락실을 제외하고 거의다 철권 3로 바뀌었다.[10] 실제로는 프레임 자체가 확 느려지거나 그런 문제는 없었고 모션과 속도 조절이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시의 경우는 캔슬 대시로 중급자 이상은 날라다닐 수 있었지만 이건 동네 오락실에 모든 플레이어가 웨이브 대시로 다가가 초풍으로 똥침 넣는 세상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다.[11] 대표적으로 아키라꼬마 신의욱과 이게라우 조학동.[12] 서울 서초구 양재동 메가존에서 열렸으며 만화 선녀강림, 하우스키퍼의 작가이자 날아라 슈퍼보드 -환상서유기-의 일러스트를 담당했던 유현이 대회 로고 및 일러스트를 맡았다.[13] 당시 동행했던 천창욱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당시 비디오라고 한다![14] 나머지는 대만,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영국, 대한민국.[15] 현 게임동아에서 활동하는 기자.[16] 다만 당시엔 인터넷이 발달 안되어 아직 본고장 일본의 실력을 잘 몰라서 반신반의였고 대회 당일 일본 호텔에서 한국 유통사는 이 두 명에게 달랑 차비만 던져주고 알아서 찾아가라는 만행도 있었다. 일단 대회 장소까지는 무사히 도착, 다행히 현장에 동행한 한국인(=현 프로레슬링 해설가로 유명한 천창욱)이 있어서 순조롭게 대회 참가.[17] 한일을 제외하고 남은 5개국 유저들.[18] 이때 결승 직전 대만의 라우 유저와 붙었을 때 기상 중단 타격을 맞으면 잡기 확정이라고 알고 있던 당시 유저들(한국과 대만도 동일했다고 한다)에게 아니라고 말하듯 바로 붕격운신쌍호장으로 카운터를 날리는 장면에서 모두가 술렁일 정도였다. 참고로 저 사실은 신의욱 본인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같은 리플레이즈 팀원들도 모르고 있다가 대회 이후에 내용 보고 물어봐서야 알려줬다고 한다.[19] G식백과 등을 통해 아키라가 강캐가 아니었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버추어 파이터 2 후기부터 3후반까지 아키라는 강캐로 당시 네임드로 인정받은 플레이어들도 다수 있다. 맥시멈 배틀이 1997년 2월 개최로 3가 나오고 이 대회 전후로 열렸던 일본내 전국대회인 아테나컵 우승팀에는 재키보다 아키라가 더 많았다. 버추어 파이터 자체가 캐릭터보다는 개인차가 큰 게임이고 시리즈 내내 재키가 평이 좋았던 건 사실이나, 아키라가 강캐가 아니거나 평가가 나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신의욱의 아키라가 유별나게 강한 거지 당시 아키라가 강캐가 아니란 건 다른 이야기다. 참고로 여기서 설명하는 맥시멈 배틀 본선진출 4강 구성을 보면 언더20에서는 2울프 1잭키 1아키라 오버 20에서는 2재키 1사라 1카게다.[20] 한국에서도 이 시절 신의욱의 주캐는 재키였다. 재키가 아키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하고 쓰기도 쉬웠기 때문.[21] 이때 해설진은 야나가사라가 이 날 예선전 포함한 경기를 많이 치러서 피로가 쌓인게 아니냐면서 질 때를 대비한 보험 언플을 시전했다...[22] 자리를 바꿀 때 조학동이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무언의 압력을 넣은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있었지만, G식백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런 건 없었다고 한다. 물론 신의욱 본인이 이 세트에서 봐줬다고.[23] 여담으로, 신의욱과 조학동은 대회 시작 전에 결승에서 만나자고 이야기했고, 보기 좋게 결승에서 만났다고.[24] 일본내에선 이 일본 고수들이 '철인'이라고 불렸는데 이 '철인'이라고 불린 고수들은 고수들이 많은 오락실에서도 100전을 하면 95% 이상의 승률을 자랑하던 굇수들이라고 한다.[25] 게다가 당시 동행했던 천창욱의 말에 따르면 기판 자체도 캐릭터의 체력을 높게 설정해놓은 버전이었다고 한다. 즉,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장기전이었던 셈.[26] 같이 세계대회를 참가했던 이게라우 조학동조차 이 시기의 신의욱을 언급하길 10판 중 1판조차 이기는게 어려웠다고 한 바가 있다. 당시 이게라우 조학동은 버추어 파이터 2 시절 한국에서 8강권이었던 사시미팀을 이끌고 있었음에도 저렇게 회고할 정도...[27] 당대 세계 최강의 아키라 유키 플레이어는 신의욱이 아닌 부산 지역의 전설적인 플레이어 주씨 아키라를 언급하는 이들이 많은 편이다.[28] 심지어 킹오파와 달리 한 플레이어가 동 캐릭터를 셀렉트 하는게 가능해서 세 명을 모두 한 캐릭터로 채울수도 있었는데, 이러면 팀배틀이라는 의미가 사실상 없는 수준이다.[29] 참고로 새턴판 버추어 파이터 2는 패미통 점수 40점 만점에 39점으로 역대 최고득점 타이기록을 찍을 만큼 훌륭한 이식으로 극찬받았었다. 하지만 버추어 파이터 2와 3는 그야말로 그래픽 차이가 엄청났던지라 정말 그 품질이 새턴으로 이식할 수 있긴 한건가라는 회의론도 소수 있긴 했다.[30] 심지어 당시 새턴의 확장 카트리지 슬롯을 이용한 성능 업그레이드 키트를 동봉해 출시한다는 루머까지 있었다. 그만큼 당시 새턴 본체만으로는 이식이 힘들어 보였다는 얘기. 1998년 초 더 하우스 오브 더 데드의 새턴판 이식작이 모델2와 새턴의 성능 차이 때문에 이식도가 떨어지자 게임라인에서 ''새턴으로 왜 버추어 파이터 3가 안 나오고 있는지 알 수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31] 팀 배틀 모드와 1:1 모드가 둘다 있다. 사실 아케이드판 3tb도 설정에 따라 이전 게임 3처럼 1:1 대전을 할 수도 있었다.[32] 당시 AM2팀은 쉔무를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식 작업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33] 특히 배경의 원거리 부분을 부현한 2D 배경의 품질이 아케이드판에 비해 눈에 띄게 떨어진다.[34] 아케이드판의 경우 사라, 파이, 아오이 순으로 몸무게가 무겁게 적용되어 있는데, 아오이가 가장 가벼운 관계로 아오이 전용 콤보가 꽤 있었다. 다시 말하면 드림캐스트판은 아케이드판과 다르게 이 콤보들이 사라, 파이에게도 그냥 들어간다.[35] 트레이닝 모드랍시고 있긴 있는데 샌드백 역할인 듀랄이 랜덤으로 플레이어를 공격한다. 트레이닝 모드가 어디까지나 초심자를 위한건데 이런 상황이니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다.[36] 이는 가정용으로 플레이스테이션 2로만 출시된 4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