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대한민국의 소설가. 1955년 4월 28일 대전광역시 출생.2. 생애
대전광역시에서 일란성 쌍둥이 중 동생으로 출생, 조실부모하고 6살 때 쌍둥이 형은 고아원에, 백동호는 아이없는 집에 양자로 들어간다. 백동호는 양부모에게 살아남은 것이 기적일 정도로 끔찍한 아동 학대에 시달리다가 13살 때 무작정 상경했다.5살 때 구구단을 2시간 만에 모두 외울 정도로 머리가 좋은 백동호였지만 부모가 있는 집 자식들도 영양실조로 누렇게 부황이 들던 그 시절에 혈혈단신 거리를 떠돌던 고아소년은 좀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가게 된다.
백동호는 인생을 살면서 고마운 사람들을 아주 많이 만나게 되는 데 그중의 첫번째가 소년원생(가위탁생) 재판을 담당하고 있던 가정법원 판사였다. 고아 백동호는 소년원에서 1년 이상 보내야 하는 보호처분을 받을 처지였다. 어릴 때부터 활자중독증 수준의 독서량과 상당한 필력이 있던 백동호는 판사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백동호의 증언에 의하면 50년 전에 쓴 긴 편지라서 기억에 한계가 있지만 중요한 내용은 이랬다.
'백성은 가난한 현실에 분노하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지 못함과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고 원망을 한다고 했습니다. 저보다 훨씬 죄질이 나쁜 성범죄나 강도죄를 저지른 가위탁생도 재판 때 부모가 데려가는데 단순히 생계형 절도죄를 저지른 저는 보호자가 없는 고아라는 이유로 소년원에 넘어가서 1년 이상 보내는 것은 매우 공평하지 못하며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판사님께서 관대한 처분을 해주셔서 풀려나도 또 다시 생계형 범죄로 잡혀 올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딱 한번쯤은 부모가 있는 아이들처럼 관대한 보호처분을 받고 싶습니다.그러면 앞으로 긴 인생을 살아가면서 판사님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을 것이며 누가 뭐래도 세상은 살아볼만한 곳이라는 저의 인생관과 신념이 더욱 굳어질 것입니다.'
저는 판사님께서 관대한 처분을 해주셔서 풀려나도 또 다시 생계형 범죄로 잡혀 올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딱 한번쯤은 부모가 있는 아이들처럼 관대한 보호처분을 받고 싶습니다.그러면 앞으로 긴 인생을 살아가면서 판사님의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을 것이며 누가 뭐래도 세상은 살아볼만한 곳이라는 저의 인생관과 신념이 더욱 굳어질 것입니다.'
백동호는 이 편지를 보낸 덕분에 풀려났는데 가위탁 선생은 판사가 전해주랬다며 봉투하나를 내밀었다. 봉투에는 1만 7천 원[1]이 들어 있었는데 '당분간이라도 끼니 거르지 말게'라는 짧은 편지가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백동호가 평생 잊지 못할 첫번째 고마운 사람이었다.
22살의 가난한 전과자 백동호는 첫사랑에 실패한 뒤, 부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백동호의 자전적 장편소설에 의하면 좁쌀이 백 바퀴 구르나 호박이 한 바퀴 구르나인데 비내리는 어둠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강아지 같은 인생 좀도둑이 아니라 금고털이가 되기로 했다.
백동호는 독학으로 금고털이 기술을 익혔고, 1970-1980년대 강남 32평 아파트가 1억 원이던 때 여러 금고를 털어 8년 동안 20억대의 돈을 절취한다. 공소장에는 9회 범행에 7억원, 신문(부산일보 1985년 11월 4일)에는 11억 원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8건의 범행에 20억이라고 한다.
백동호는 교도소에서 더 큰 범죄를 연구하던 중 어릴 때 헤어진 쌍둥이 형도 전과자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존재의 전환을 이룬다. 그리고 남은 인생동안 절대로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모범시민으로 살기로 결심하였고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어릴 적 아동학대를 당한 기억 때문인지 백동호는 정의 없는 포악한 힘, 갑질에 매우 민감하다. 훗날의 얘기지만 그가 집필한 모든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는 포악한 권력에 희생된 가난하고 힘없는 의붓국민들의 피맺힌 원한과 영혼을 위로해주는 것이다.
그는 하루 20시간씩 공부를 시작하여 고입 검정고시와 대입 검정고시를 합격했지만 아내와의 이혼으로 좌절이 찾아온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백동호의 인생에서 고마운 사람이 많았다.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앞, 법무법인 사명에 소속되어 있는 황순헌 변호사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들은 1992년 공주교도소에서 재소자와 교화의원으로 만났다. 그들이 만나게 된 사연은 이렇다.
백동호는 1990년 대전교도소로 이감, 검정고시반에서 들어간다. 청주교도소에서 제일 잘나가던 죄수였던 그는 대전교도소 신입이 되었는데 교무과 박주임에게 대학노트 3권을 부탁했다가 거절 당한다. 백동호는 협박성 경고를 했지만 레슬링 국가대표였다가 부상으로 그만두고 교무과에 특채된 젊고 정의감 넘치는 박주임은 백동호에게만 특혜를 줄 수 없다며 끄떡도 하지 않았다.
백동호는 죄수에게 보장된 유일한 권리인 법무부장관 청원권에 의해서 법무부장관에게 편지를 쓴다. 대전교도소 교무과는 검정고시반 운영에 대해서 법무부 정기감사를 받으며 제출한 내용과 실제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백동호가 법무부장관에게 쓴 편지의 발송을 요구하자 대전교도소가 발칵 뒤집혔다. 결국 편지를 발송하지 않는 조건으로 78명의 검정고시반이 그동안 개인의 영치금으로 구입해오던 9개 과목의 교과서, 참고서, 노트, 필기구 등을 한꺼번에 모두 지급하게 된다. 백동호가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노트 3권을 거절했다가 리어카 3대 분량을 지급하게 된 것이다. 그후 백동호는 첫번째 아내와 이혼을 한 뒤, 공주교도소로 이감을 가게 되는 데 그곳으로 전근을 와있는 대전교도소 교무과 박주임을 다시 만나게 된다. 박주임은 매우 반갑게 악수를 청하지만 얼굴은 똥 씹은 표정이었다.
교도소는 영치금이 절실하게 필요한 곳인데 백동호는 아내와 이혼을 하게 되자 면회를 오는 사람이 없었다. 한편, 불교 기독교 등 종교단체에서는 10여 명 씩 그룹별로 자매결연을 맺은 무의탁 장기수에게 매월 5천 원씩 영치금을 후원해주고 있었다. 백동호는 공주교도소 교무과 박주임과 담판을 짓는다. 출소할 때까지 교도소 그 어떤 업무도 터치않을 테니 1대 1로 나를 후원해줄 화끈한 교화위원을 소개해달라. 그래서 인연이 된 사람이 당시 공주에서 개업을 하고 있던 황순헌 변호사였다. 황순헌 변호사는 백동호가 출소할 때까지 당시 적지 않은 액수였던 10만 원을 매월 영치금으로 넣어 주었으며 그 외에도 책, 테니스 라켓 등 필요한 물품을 풍족하게 지원했다.
백동호는 출소 후 첫 자전적 장편소설인 대도 1,2를 발표해서 큰 성공을 거둔다. 베스트셀러 작가로 타이틀을 얻은 백동호를 취재하던 방송국 기자가 황순헌 변호사에게 물었다.
기자 : 백동호 선생님이 갱생을 할 수 있도록 많은 후원을 하셨는데 많은 전과자들이 옛 버릇을 끊지 못하고 교도소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약 백동호 선생님이 또 범죄를 저지르면 그때도 후원을 하실 겁니까?
황순헌 : 매우 실례 되는 질문이네요. 저는 후원이 아니라 친구로서 우정을 나눈 것이며 백선생이 다시 교도소에 간다면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우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황순헌 : 매우 실례 되는 질문이네요. 저는 후원이 아니라 친구로서 우정을 나눈 것이며 백선생이 다시 교도소에 간다면 그럴만한 사정이 있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우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백동호의 세번째 작품인 영화 실미도 원작소설은 작가로서 위치를 탄탄히 해주었다. 그는 교도소에서 실미도 사건의 생존 훈련병 강인찬과 친분을 쌓았다고 하며, 해당 인물의 회고와 많은 취재, 현장답사를 거쳐 발표했다. 영화가 대박을 치자 원작소설의 주인공 강인찬(가명)이 실존인물인가에 대한 논란이 생겼다.
이 때문에 백동호와 실미도 기간병(훈련조교) 사이에 다툼이 있었는데 실미도 난동사건 당시 이미 제대한 기간병, 또는 휴가 중이었거나 훈련병들의 집중사격에도 요행히 살아 남은 기간병(실미도 전우회 14명)들이 청와대를 비롯해서 각계에 백동호를 비난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이에 분노한 백동호는 기간병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인터넷과 각 언론사에 보냈다.
그렇게 백동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범죄에서 손 씻은 뒤 히트작가이자 가장으로서 행복한 삶을 사나 했지만, 스토커에 한바탕 시달리는 걸로도 모자라서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두개골이 함몰되는 등[2] 온갖 병마에 시달리며 생활고가 찾아온다. 그는 15년 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광주광역시 시골마을의 사찰(1층 주택, 2층 법당)을 구입했으며 2층 법당을 집필실로 개조, 가족과 함께 살며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2.1. 실미도전우회에 보내는 공개서한
실미도 생존기간병들의 모임인 실미도전우회(회장 김양구)가 최근 청와대, 국무총리실, 국방부, 공군본부,국가인권위원회 등에 제출한 탄원서와 각 언론기관에 배포한 보도자료의 내용에 대하여 영화 실미도의 원작소설가 백동호의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 전우회가“백씨를 찾아가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책을 쓰면 실미도에서 죽은 동료들(여기서 죽은 동료라 함은 훈련병이 아니라 오직 기간병들 만을 칭하는 것이다)과 생존해 있는 전우회원들을 농락하는 것으로 즉각 시정을 요구했다”면서 "백씨는 이에 대해 ‘그냥 소설로 읽어 달라. 교도소에서 나와 먹고 살려니까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나는 전우회로부터 소설 실미도의 내용에 대한 즉각 시정요구를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또한 기간병들에게 "교도소에서 나와 먹고 살려니까 할 수 없었다."는 비굴한 변명 따위는 절대로 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막말로 그렇게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마른 모래밭에 혀를 빼물고 죽고 말 것입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혹시 생존기간병들과 어떤 문제로 대립될 경우 실미도전우회에서 이렇게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때문에 이미 1년 전(2003년 3월 4일)에 실미도전우회 회장에게 내용증명(서울 강서구 화곡우체국 제02011213호)을 보낸 사실이 있습니다. 나는 그 내용증명에서 [소설 실미도는 부득이한 변경과 픽션이 좀 있지만 진실을 쓰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국회속기록을 비롯하여 김이태씨의 수기등 국내 외의 어느 언론이나 문서에도 나와 있지 않은 소설 속의 실미도 내용을 거론하며 그것들은 강인찬의 모델이 된 탈출훈련병에게 들은 증언]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또한 그 내용증명에서 [내가 소설의 모델이 된 훈련병 말고도 국가의 1급 기밀에 속하는 실미도 훈련병들의 실명과 그 유가족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밝혔습니다. 만약 실미도전우회 회장에게 대표로 보낸 그 내용증명을 못 본 실미도전우회 회원들이나 언론에서 내용증명 전체를 궁금해 하면 언제라도 공개할 용의가 있습니다.
사실이 이러한데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꾸며서 탄원서나 언론에 흘리는 것은 너무 야비한 짓 아닙니까?저는 지금 실미전우회의 행태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기에 항목마다 합당한 해명과 정중한 사과가 없으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할까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중입니다.
둘째 : 전우회의 “백씨가 ‘감옥에서 실미도 훈련병을 만나 소설을 쓰게 됐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라며 “백씨는 지난 93년 실미도 소대장 출신인 김이태씨가 월간‘신동아’4월호에 밝힌 내용을 토대로 소설을 구성, 사실인 양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나는 하늘에 맹세코 지난 5년 동안 전우회나 김이태씨에게 소설 실미도가 김이태씨의 수기를 토대로 쓰여졌다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헌데 어째서 갑자기 이제서 그런 주장이 나오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그동안 내가 실미도전우회 특별회원으로서 훈련병 편을 들어 생존기간병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결국 왕따 당하는 분위기 때문에 전우회를 자진탈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자진탈퇴한 뒤의 전우회 첫 모임(2004년 2월 초순)에서 사무국장을 비롯한 여러 기간병들이 논의 끝에 이런 얘기가 꾸며진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중상모략입니다. 1993년 김이태씨의 짧은 수기가 신동아에 나오기 4년 전(1989년)부터 내가 강인찬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실미도를 쓰려 했다는 확실하고 결정적인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은 현재 피랍.탈북 인권연대 대표 도희윤씨입니다. 도희윤씨는 1989년 당시 청주대학교 운동권의 핵심간부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었고 청주교도소 1사(독거사동)에서 저와 함께 징역을 살았습니다. 이들과의 만남은 1994년 출간한 저의 자전소설 대도에 실명으로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당시 도희윤씨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감옥을 선택한 양심범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후 15년 동안 오로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돈 안 되는 옳은 일만 묵묵히 해오고 있습니다. 절대로 불의와 타협을 하지 않고 올곧게 살아온 그가 거짓증언을 할리가 없다고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나는 1989년 당시 문제수들의 집합소인 청주교도소 독거사동에서도 소문난 꼴통으로 거칠 것 없이 자유롭게 수형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운동시간을 비롯하여 평상시에도 도희윤을 비롯한 운동권 학생들과 자주 어울려 놀았습니다.
그때 나는 도희윤씨에게 [출소후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첫 작품은 강인찬(가명)이란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실미도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한 적이 여러번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확인이 필요한 언론이나 실미도전우회가 도희윤씨의 연락처를 요구하면 즉시 밝혀드리겠으니 내게 메일을 보내십시오. 물론 그런 목적이 아니고 단순하게 강인찬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 도희윤씨를 만날 생각은 마십시오. 나는 도희윤씨에게도 강인찬의 신상정보는 알려주지 않았으니까요.
셋째 : 전우회가 “실미도 훈련병 31명의 신상기록(이름, 나이, 죽은 장소)을 현재 전우회측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추후 공개를 검토중”이라면서 “지금 당장이라도 백씨의 거짓을 폭로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국가를 위해 일했던 군인으로서 사회에 미치는 파장과 국익 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도대체 백동호의 무슨 거짓을 어떻게 폭로하겠다는 것인지 분노를 넘어 황당할 뿐입니다. 영화 실미도로 인해서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리게 되자 나는 국방부나 국정원이 실미도 훈련병의 유가족을 찾아주고 진상을 밝혀주기를 기다렸지만 그것은 정말 희망사항이더군요. 지난 2월 15일에는 실미도전우회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훈련병 31명의 명단을 발표해서 유가족을 찾아주자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사무국장은 국방부와 교감이 있어야 발표할 수 있다며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나는 이제 어쩔 수 없다는 판단으로 2004년 2월 16일 제가 간직하고 있던 훈련병 20여 명의 실명을 인터넷에 공개하며 남은 훈련병의 명단공개를 국방부, 국정원, 공군본부, 실미전우회에 촉구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2월 16일자 인터넷 조선일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날(2월 17일) 열린우리당 김성호 국회의원이 국방부자료에서 훈련병 명단을 확인했다는 뉴스가 나오더군요. 하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훈련병의 명단이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옥천의 유가족명단 등을 추가하여 훈련병 26명의 실명을 저의 팬클럽(다음카페 : 실미도의 모든것)에 공개해두고 있습니다]
실미전우회는 내가 발표한 국가의 1급 비밀었던 훈련병의 명단이 거짓이라고 폭로하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위에서 말한 대로 모든 면에서 떳떳한 실미도 소설에 대하여 거짓이라고 폭로할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까. 훈련병들의 죽은 시체를 모두 확인했으니 탈출한 사람은 절대로 없다고 무조건 우기면 장땡입니까?
소설의 모델이 된 훈련병의 공개거부로 나는 그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나의 글 "훈련병 강인찬의 생존설"을 곰곰히 읽어보고 거기에 드러난 객관적 증거들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을 해보십시오. 그렇다면 나도 언제든지 그 부분에 대하여 성실하게 공개토론을 할 용의가 있습니다. 아니 그 부분만이 아니고 실미도의 모든 것에 대해서 공개토론을 할 용의가 있습니다.
[실미도 생존기간병들이 확인한 훈련병 31명의 시체 중에는 면도칼로 잘라낸 것처럼 말끔하게 목이 잘린 시체가 3구나 있었다는 것은 이제 공인된 사실입니다]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이 두개골인데 수류탄 한두발로 시체가 세구나 목 부분부터 산산조각이 나서 흔적도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됩니까. 훈련병들이 버스에서 자폭을 하면 수류탄을 입속에 넣고 합니까? 목이 없는 시체는 신고 있던 신발에 쓰여진 이름을 보고 죽은 훈련병의 신원을 확인을 했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넷째 : 전우회의 "당시 기간병들도 훈련병들과 같이 고된 훈련과 고통을 겪었으며 영화와 소설에서처럼 난폭하게 비쳐진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에 대하여....
기간병들이 훈련병들에게 소름끼치도록 끔찍하고 잔혹했었다는 객관적인 증거 하나 : 1970년 10월 훈련병 3명이 무의초등학교 숙직실에서 10여 명을 인질로 잡고 강간난동을 부렸을 때 훈련병은 기간병 소대장에게 이런 말들을 처절하게 내뱉고 자살했습니다. [구타가 너무 심하다] [우리는 거짓약속에 속아서 이곳에 왔고 너무 억울하다] [내(훈련병)가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너희들(기간병)만은 꼭 갈아마신 뒤 지옥에 가겠다]
물론 이것은 나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당시 인질로 잡혀 있던 무의도 마을주민들에게 직접 들었으며 현재 그 녹취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원한이 사무쳤으면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기간병들을 갈아마신 뒤에야 지옥에 가겠다고 했을까요? 그때 훈련병의 처절한 절규는 3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귀에 생생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기간병이 훈련병에게 잔혹했었다는 객관적인 증거 둘 : 중앙일보 1971년 8월 26일자 신문에 실미도 사건의 참상에 대한 후일담이 실려있습니다. 당시 실미도 기간병 중 가장 선임자 Y중사(사망 뒤 준위로 추서)의 시체는 기간병들에게 원한에 사무쳤던 훈련병들이 얼마나 대검으로 난자질을 했는지 인간의 형체를 찾아볼 수가 없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Y중사는 비교적 선량한 사람이었다는데 이 지경이었으니 훈련병들이 다른 기간병들에게 품은 원한은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훈련병이 기간병을 한대 때리고(하극상) 또 성욕을 못 참아 계간을 했다고 해서 분노한 소대장이 마음대로 즉결처단을 한다면 도대체 이 나라의 법(군법)은 무엇에 쓰려고 만든 것입니까?소대장은 당연히 그 훈련병을 감금해두고 상부(공군본부)에 보고해서 군법회의나 민간 재판을 받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즉결처단을 했다면 그런 행위를 법률에서는 [살인] 이라고 합니다.
훈련병이 아니라 기간병도 무의도 처녀를 강간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병도 훈련병처럼 즉결처형 당했습니까? 절대로 절대로 그럴리가 없지요. 훈련병의 목숨은 파리목숨 취급을 했지만 끝발 좋은 기간병이 민간인 강간 같은 사소한(?) 실수를 했기로서니....
그 기간병은 처벌은 커녕 소대장에게 뺨 한대 맞지 않았고 무사히 군대생활을 마쳤으며 지금은 실미도전우회원으로서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더군요. 허기야 그 시절은 얼마나 기세등등했던지 실미도 기간병이 권총을 차고 나가서 헌병대 초소 천장에 마구 방아쇠를 당겼어도 군법에 회부되기는 커녕 헌병이 쩔쩔 매며 달래더라는 무용담이 아직도 전설처럼 흘러다니고 있는데...
아무튼 기간병의 그 강간사건 이후로 무의도 주민은 기간병들이 무서워서 딸들을 서둘러 육지에 나가 살게 했다더군요. 그리고 지금 나이가 5-60대인 무의도 주민 남자들 중 당시 실미도 기간병에게 건방지다며 얻어맞지 않은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 모든 무의도 주민들의 공통된 증언입니다. 하물며 무인도(실미도)에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기간병의 시선으로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훈련병이 잘못을 범했을 때 어떠했을까요.
[실미도에서 훈련 중 죽은 조석구씨를 비롯 즉결처분이 두려워 자살한 2명, 실제로 즉결처분을 당한 4명 등 모두 7명이나 억울하게 죽어가는 동료를 바라보아야 했던 훈련병들의 심정을 아직도 그렇게 모르겠습니까?]
나는 실미도 기간병들이 이렇게 훈련병들에게 잔혹했던 비극의 원인을 몇가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당시 훈련병들은 평균 연령이 30대였습니다. 사회에서 나름대로 골목 하나씩은 지키던 대장들이었고 전과자였습니다(옥천 출신의 청년 7명은 예외) 반면 기간병들은 거의 다 스물 한두 살의 앳띤 청년들이었고요. 쓰라린 인생의 백전노장 훈련병의 입장에서는 기간병들이 도무지 젖비린내도 안가신 꼬맹이로 보였던 것은 당연합니다. 자신들이 어둠의 뒷골목 거친 세상에서 깃발을 흔들고 다녔을 때 기간병들은 아직 초등학교의 코흘리개를 못 벗어나고 있었으니까요.
헌데 그런 기간병을 상급자로 모시며 존댓말을 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대들면 몽둥이로 맞아죽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간병을 존경하고 진심으로 명령에 복종하는 훈련병이 있을리가 없지요. 아마 겉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을 정말 이라고 믿었다면 그야말로 착각은 커드라인도 없는 것이겠지요.
실미도의 비극은 또 있습니다. 기간병들은 훈련병에게 상관으로서의 우월감 말고도 도덕적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사회의 쓰레기였고 나는 그렇지 않다는 자부심. 요컨대 그들은 서로 동류의식이 없었습니다. .
다섯째 : 실미전우회의 정관에 이미 순직한 기간병 훈련병들의 위령탑 건립을 추진한다는 조항에 대하여....
이 대목에서는 한마디로 웃음이 나오는군요. 도대체 언제부터 생존 기간병들이 죽은 훈련병들의 이름을 위령탑에 새겨 넣으려할 정도로 인간대접을 해주었습니까?
1999년 12월 초순 MBC TV 이제는 말할 수 있다(실미도 특수부대)의 촬영을 위해서 김동철 PD를 비롯한 제작팀 10여명, 실미도출신 생존기간병 10여 명, 소설 실미도 작가(백동호) 동아일보 성기영 기자 등이 모여 실미도를 방문했습니다. 촬영이 무사히 끝나고 우리는 저녁식사를 하려고 무의도 선착장의 식당에 둘러앉았습니다.
식사가 나오기 전 생존기간병들은 앞으로 정기적인 모임을 갖자는 얘기에서부터 실미도에 위령탑을 세우자는 것까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더군요. 옆에서 멀건이 앉아 하는 말만 듣고 있던 나는 울컥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실미도에는 훈련병들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오직 죽은 기간병들만을 위한 위령탑 건립을 논의하는 것이었습니다.
백동호 : (너무 화가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아니 지금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거요? 당연히 실미도 위령탑에는 훈련병들의 이름이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기간병 : (누구인지 다 아니까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걔네들은 어차피 죄수들이었고 또 반란을 일으켜 우리(기간병들)에게 총을 겨누었는데 뭐 잘한것이 있다고 위령탑에 이름을 새겨넣어?
백동호 : 이런 니미 씨팔, 나는 지금 작가로서 이자리에 참석한 것이 아니고 소설 속의 강인찬을 대신해서 온 거요. 나는 실미도의 주인은 당신들 기간병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훈련병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들의 원한맺힌 영혼을 등뒤에 지고 있으며 강인찬씨도 내게 그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합디다.
기간병 : 이 사람이 말을 막하네.
백동호 : 말을 막하면 어쩔건데?
나는 그 순간 여차하면 혼자서 생존기간병 13명과 한판 붙을 작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당신들도 젊을 때 모두 한가락했던 사람들이지만 분노가 앞을 가린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고, 그야말로 살기등등했습니다. 아무튼 나의 그런 분기탱천한 모습에 기간병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일제히 침묵이었습니다. 소대장출신의 김이태씨는 입장이 곤란했던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더군요. 만약 MBC TV의 김동철 PD가 중간에 끼어들어 말리지 않았으면 나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때의 장면은 MBC 제작진들과 동아일보 성기영기자 등 목격자가 많으니 부인할래야 부인 할 건덕지가 없을 겁니다.
그 뒤로도 모든 언론기관의 기자들이 실미도 기간병들을 취재 할 때 또는 무슨 말을 할 때 10중의 8,9는 훈련병들을 일컬어 [걔네들]이라는 호칭을 쓰더군요. [걔네들은 그 아이들의 줄인 말입니다.]
실미전우회에서 걔네들을 공작원, 교육생, 훈련병으로 격상시켜서 호칭을 해준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습니다. 만약 실미전우회의 특별회원으로 제가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세상의 여론도 훈련병들을 비난하는 분위기였다면 정말로 훈련병들의 이름을 위령탑에 넣고 사람대접을 해주었을까요? 나는 그 문제를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100% 부정적인 답을 얻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전 나는 실미전우회 사무국장과 신사협정을 맺었습니다. 백동호는 더 이상 기간요원의 잔혹상이나 훈련병의 억울함이 어떻고 하는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할 것이며 실미전우회 역시 생존훈련병(강인찬)이 없으며 소설 실미도가 어쩌구 하는 비난을 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물론 나는 기간병들에게 손톱만큼이라도 꿇릴 것이 있다거나 비난이 두려워서 신사협정을 맺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실미도사건의 뚜껑을 연 사람으로서 모양새 좋게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는 기간병과 훈련병이 영혼의 화해를 하며 훈련병의 유가족들을 찾아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실미도사건의 일차적인 책임은 박정희 대통령,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비롯한 공군정보부대에 있습니다. 국가의 명령으로 실미도에서 근무한 기간병들 역시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기간병들은 피해자이면서 가장 끔찍하고 잔혹한 가해자이기도 했습니다.
전우회가 아직도 과거 젊은 혈기로 저질렀던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과연 실미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진상을 파헤쳐 법과 국민의 심판을 받아봅시다. 합당한 사과를 받지 못할 경우 내가 먼저 실미전우회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 실미전우회에서도 맞고소를 하겠지요. 그야말로 대환영입니다.
한마디 더하겠습니다. 국가의 명령이라는 미명하에 온갖 악행을 저지른 당신들이 이제와서 보상을 요구하다니 도대체 말이 됩니까? 만약 국가에서 기간병들에게 보상을 해준다고 하면 나는 세금을 내는 국민의 자격으로 그 부당함을 헌법재판소에 제기하고 범국민반대 서명운동을 벌이겠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둡니다.
실미전우회 여러분! 당신들도 피해자라며 국가에 보상을 요구 하기전에 먼저 과거의 악행에 대해서 속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2004년 3월 8일 소설 실미도 작가 백동호.
첫째 : 전우회가“백씨를 찾아가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책을 쓰면 실미도에서 죽은 동료들(여기서 죽은 동료라 함은 훈련병이 아니라 오직 기간병들 만을 칭하는 것이다)과 생존해 있는 전우회원들을 농락하는 것으로 즉각 시정을 요구했다”면서 "백씨는 이에 대해 ‘그냥 소설로 읽어 달라. 교도소에서 나와 먹고 살려니까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나는 전우회로부터 소설 실미도의 내용에 대한 즉각 시정요구를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또한 기간병들에게 "교도소에서 나와 먹고 살려니까 할 수 없었다."는 비굴한 변명 따위는 절대로 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막말로 그렇게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마른 모래밭에 혀를 빼물고 죽고 말 것입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혹시 생존기간병들과 어떤 문제로 대립될 경우 실미도전우회에서 이렇게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때문에 이미 1년 전(2003년 3월 4일)에 실미도전우회 회장에게 내용증명(서울 강서구 화곡우체국 제02011213호)을 보낸 사실이 있습니다. 나는 그 내용증명에서 [소설 실미도는 부득이한 변경과 픽션이 좀 있지만 진실을 쓰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국회속기록을 비롯하여 김이태씨의 수기등 국내 외의 어느 언론이나 문서에도 나와 있지 않은 소설 속의 실미도 내용을 거론하며 그것들은 강인찬의 모델이 된 탈출훈련병에게 들은 증언]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또한 그 내용증명에서 [내가 소설의 모델이 된 훈련병 말고도 국가의 1급 기밀에 속하는 실미도 훈련병들의 실명과 그 유가족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밝혔습니다. 만약 실미도전우회 회장에게 대표로 보낸 그 내용증명을 못 본 실미도전우회 회원들이나 언론에서 내용증명 전체를 궁금해 하면 언제라도 공개할 용의가 있습니다.
사실이 이러한데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꾸며서 탄원서나 언론에 흘리는 것은 너무 야비한 짓 아닙니까?저는 지금 실미전우회의 행태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기에 항목마다 합당한 해명과 정중한 사과가 없으면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할까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 중입니다.
둘째 : 전우회의 “백씨가 ‘감옥에서 실미도 훈련병을 만나 소설을 쓰게 됐다’는 것 자체가 거짓”이라며 “백씨는 지난 93년 실미도 소대장 출신인 김이태씨가 월간‘신동아’4월호에 밝힌 내용을 토대로 소설을 구성, 사실인 양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나는 하늘에 맹세코 지난 5년 동안 전우회나 김이태씨에게 소설 실미도가 김이태씨의 수기를 토대로 쓰여졌다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헌데 어째서 갑자기 이제서 그런 주장이 나오게 되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그동안 내가 실미도전우회 특별회원으로서 훈련병 편을 들어 생존기간병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결국 왕따 당하는 분위기 때문에 전우회를 자진탈퇴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자진탈퇴한 뒤의 전우회 첫 모임(2004년 2월 초순)에서 사무국장을 비롯한 여러 기간병들이 논의 끝에 이런 얘기가 꾸며진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중상모략입니다. 1993년 김이태씨의 짧은 수기가 신동아에 나오기 4년 전(1989년)부터 내가 강인찬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실미도를 쓰려 했다는 확실하고 결정적인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은 현재 피랍.탈북 인권연대 대표 도희윤씨입니다. 도희윤씨는 1989년 당시 청주대학교 운동권의 핵심간부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었고 청주교도소 1사(독거사동)에서 저와 함께 징역을 살았습니다. 이들과의 만남은 1994년 출간한 저의 자전소설 대도에 실명으로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당시 도희윤씨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감옥을 선택한 양심범이었습니다. 그리고 그후 15년 동안 오로지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돈 안 되는 옳은 일만 묵묵히 해오고 있습니다. 절대로 불의와 타협을 하지 않고 올곧게 살아온 그가 거짓증언을 할리가 없다고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나는 1989년 당시 문제수들의 집합소인 청주교도소 독거사동에서도 소문난 꼴통으로 거칠 것 없이 자유롭게 수형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운동시간을 비롯하여 평상시에도 도희윤을 비롯한 운동권 학생들과 자주 어울려 놀았습니다.
그때 나는 도희윤씨에게 [출소후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있으며 첫 작품은 강인찬(가명)이란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실미도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한 적이 여러번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 확인이 필요한 언론이나 실미도전우회가 도희윤씨의 연락처를 요구하면 즉시 밝혀드리겠으니 내게 메일을 보내십시오. 물론 그런 목적이 아니고 단순하게 강인찬의 정보를 얻기 위해서 도희윤씨를 만날 생각은 마십시오. 나는 도희윤씨에게도 강인찬의 신상정보는 알려주지 않았으니까요.
셋째 : 전우회가 “실미도 훈련병 31명의 신상기록(이름, 나이, 죽은 장소)을 현재 전우회측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추후 공개를 검토중”이라면서 “지금 당장이라도 백씨의 거짓을 폭로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국가를 위해 일했던 군인으로서 사회에 미치는 파장과 국익 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도대체 백동호의 무슨 거짓을 어떻게 폭로하겠다는 것인지 분노를 넘어 황당할 뿐입니다. 영화 실미도로 인해서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리게 되자 나는 국방부나 국정원이 실미도 훈련병의 유가족을 찾아주고 진상을 밝혀주기를 기다렸지만 그것은 정말 희망사항이더군요. 지난 2월 15일에는 실미도전우회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훈련병 31명의 명단을 발표해서 유가족을 찾아주자고 간곡하게 부탁했습니다. 사무국장은 국방부와 교감이 있어야 발표할 수 있다며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나는 이제 어쩔 수 없다는 판단으로 2004년 2월 16일 제가 간직하고 있던 훈련병 20여 명의 실명을 인터넷에 공개하며 남은 훈련병의 명단공개를 국방부, 국정원, 공군본부, 실미전우회에 촉구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2월 16일자 인터넷 조선일보에 대문짝만하게 보도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날(2월 17일) 열린우리당 김성호 국회의원이 국방부자료에서 훈련병 명단을 확인했다는 뉴스가 나오더군요. 하지만 아직까지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훈련병의 명단이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옥천의 유가족명단 등을 추가하여 훈련병 26명의 실명을 저의 팬클럽(다음카페 : 실미도의 모든것)에 공개해두고 있습니다]
실미전우회는 내가 발표한 국가의 1급 비밀었던 훈련병의 명단이 거짓이라고 폭로하겠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위에서 말한 대로 모든 면에서 떳떳한 실미도 소설에 대하여 거짓이라고 폭로할 무엇이 있다는 말입니까. 훈련병들의 죽은 시체를 모두 확인했으니 탈출한 사람은 절대로 없다고 무조건 우기면 장땡입니까?
소설의 모델이 된 훈련병의 공개거부로 나는 그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나의 글 "훈련병 강인찬의 생존설"을 곰곰히 읽어보고 거기에 드러난 객관적 증거들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을 해보십시오. 그렇다면 나도 언제든지 그 부분에 대하여 성실하게 공개토론을 할 용의가 있습니다. 아니 그 부분만이 아니고 실미도의 모든 것에 대해서 공개토론을 할 용의가 있습니다.
[실미도 생존기간병들이 확인한 훈련병 31명의 시체 중에는 면도칼로 잘라낸 것처럼 말끔하게 목이 잘린 시체가 3구나 있었다는 것은 이제 공인된 사실입니다]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이 두개골인데 수류탄 한두발로 시체가 세구나 목 부분부터 산산조각이 나서 흔적도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됩니까. 훈련병들이 버스에서 자폭을 하면 수류탄을 입속에 넣고 합니까? 목이 없는 시체는 신고 있던 신발에 쓰여진 이름을 보고 죽은 훈련병의 신원을 확인을 했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시오....
넷째 : 전우회의 "당시 기간병들도 훈련병들과 같이 고된 훈련과 고통을 겪었으며 영화와 소설에서처럼 난폭하게 비쳐진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에 대하여....
기간병들이 훈련병들에게 소름끼치도록 끔찍하고 잔혹했었다는 객관적인 증거 하나 : 1970년 10월 훈련병 3명이 무의초등학교 숙직실에서 10여 명을 인질로 잡고 강간난동을 부렸을 때 훈련병은 기간병 소대장에게 이런 말들을 처절하게 내뱉고 자살했습니다. [구타가 너무 심하다] [우리는 거짓약속에 속아서 이곳에 왔고 너무 억울하다] [내(훈련병)가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너희들(기간병)만은 꼭 갈아마신 뒤 지옥에 가겠다]
물론 이것은 나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당시 인질로 잡혀 있던 무의도 마을주민들에게 직접 들었으며 현재 그 녹취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고 원한이 사무쳤으면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기간병들을 갈아마신 뒤에야 지옥에 가겠다고 했을까요? 그때 훈련병의 처절한 절규는 3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귀에 생생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기간병이 훈련병에게 잔혹했었다는 객관적인 증거 둘 : 중앙일보 1971년 8월 26일자 신문에 실미도 사건의 참상에 대한 후일담이 실려있습니다. 당시 실미도 기간병 중 가장 선임자 Y중사(사망 뒤 준위로 추서)의 시체는 기간병들에게 원한에 사무쳤던 훈련병들이 얼마나 대검으로 난자질을 했는지 인간의 형체를 찾아볼 수가 없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Y중사는 비교적 선량한 사람이었다는데 이 지경이었으니 훈련병들이 다른 기간병들에게 품은 원한은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훈련병이 기간병을 한대 때리고(하극상) 또 성욕을 못 참아 계간을 했다고 해서 분노한 소대장이 마음대로 즉결처단을 한다면 도대체 이 나라의 법(군법)은 무엇에 쓰려고 만든 것입니까?소대장은 당연히 그 훈련병을 감금해두고 상부(공군본부)에 보고해서 군법회의나 민간 재판을 받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즉결처단을 했다면 그런 행위를 법률에서는 [살인] 이라고 합니다.
훈련병이 아니라 기간병도 무의도 처녀를 강간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병도 훈련병처럼 즉결처형 당했습니까? 절대로 절대로 그럴리가 없지요. 훈련병의 목숨은 파리목숨 취급을 했지만 끝발 좋은 기간병이 민간인 강간 같은 사소한(?) 실수를 했기로서니....
그 기간병은 처벌은 커녕 소대장에게 뺨 한대 맞지 않았고 무사히 군대생활을 마쳤으며 지금은 실미도전우회원으로서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더군요. 허기야 그 시절은 얼마나 기세등등했던지 실미도 기간병이 권총을 차고 나가서 헌병대 초소 천장에 마구 방아쇠를 당겼어도 군법에 회부되기는 커녕 헌병이 쩔쩔 매며 달래더라는 무용담이 아직도 전설처럼 흘러다니고 있는데...
아무튼 기간병의 그 강간사건 이후로 무의도 주민은 기간병들이 무서워서 딸들을 서둘러 육지에 나가 살게 했다더군요. 그리고 지금 나이가 5-60대인 무의도 주민 남자들 중 당시 실미도 기간병에게 건방지다며 얻어맞지 않은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이 모든 무의도 주민들의 공통된 증언입니다. 하물며 무인도(실미도)에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기간병의 시선으로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훈련병이 잘못을 범했을 때 어떠했을까요.
[실미도에서 훈련 중 죽은 조석구씨를 비롯 즉결처분이 두려워 자살한 2명, 실제로 즉결처분을 당한 4명 등 모두 7명이나 억울하게 죽어가는 동료를 바라보아야 했던 훈련병들의 심정을 아직도 그렇게 모르겠습니까?]
나는 실미도 기간병들이 이렇게 훈련병들에게 잔혹했던 비극의 원인을 몇가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당시 훈련병들은 평균 연령이 30대였습니다. 사회에서 나름대로 골목 하나씩은 지키던 대장들이었고 전과자였습니다(옥천 출신의 청년 7명은 예외) 반면 기간병들은 거의 다 스물 한두 살의 앳띤 청년들이었고요. 쓰라린 인생의 백전노장 훈련병의 입장에서는 기간병들이 도무지 젖비린내도 안가신 꼬맹이로 보였던 것은 당연합니다. 자신들이 어둠의 뒷골목 거친 세상에서 깃발을 흔들고 다녔을 때 기간병들은 아직 초등학교의 코흘리개를 못 벗어나고 있었으니까요.
헌데 그런 기간병을 상급자로 모시며 존댓말을 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대들면 몽둥이로 맞아죽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간병을 존경하고 진심으로 명령에 복종하는 훈련병이 있을리가 없지요. 아마 겉으로 그렇게 보이는 것을 정말 이라고 믿었다면 그야말로 착각은 커드라인도 없는 것이겠지요.
실미도의 비극은 또 있습니다. 기간병들은 훈련병에게 상관으로서의 우월감 말고도 도덕적 우월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는 사회의 쓰레기였고 나는 그렇지 않다는 자부심. 요컨대 그들은 서로 동류의식이 없었습니다. .
다섯째 : 실미전우회의 정관에 이미 순직한 기간병 훈련병들의 위령탑 건립을 추진한다는 조항에 대하여....
이 대목에서는 한마디로 웃음이 나오는군요. 도대체 언제부터 생존 기간병들이 죽은 훈련병들의 이름을 위령탑에 새겨 넣으려할 정도로 인간대접을 해주었습니까?
1999년 12월 초순 MBC TV 이제는 말할 수 있다(실미도 특수부대)의 촬영을 위해서 김동철 PD를 비롯한 제작팀 10여명, 실미도출신 생존기간병 10여 명, 소설 실미도 작가(백동호) 동아일보 성기영 기자 등이 모여 실미도를 방문했습니다. 촬영이 무사히 끝나고 우리는 저녁식사를 하려고 무의도 선착장의 식당에 둘러앉았습니다.
식사가 나오기 전 생존기간병들은 앞으로 정기적인 모임을 갖자는 얘기에서부터 실미도에 위령탑을 세우자는 것까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더군요. 옆에서 멀건이 앉아 하는 말만 듣고 있던 나는 울컥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실미도에는 훈련병들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오직 죽은 기간병들만을 위한 위령탑 건립을 논의하는 것이었습니다.
백동호 : (너무 화가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아니 지금 무슨 말들을 하고 있는거요? 당연히 실미도 위령탑에는 훈련병들의 이름이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기간병 : (누구인지 다 아니까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걔네들은 어차피 죄수들이었고 또 반란을 일으켜 우리(기간병들)에게 총을 겨누었는데 뭐 잘한것이 있다고 위령탑에 이름을 새겨넣어?
백동호 : 이런 니미 씨팔, 나는 지금 작가로서 이자리에 참석한 것이 아니고 소설 속의 강인찬을 대신해서 온 거요. 나는 실미도의 주인은 당신들 기간병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훈련병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들의 원한맺힌 영혼을 등뒤에 지고 있으며 강인찬씨도 내게 그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부탁합디다.
기간병 : 이 사람이 말을 막하네.
백동호 : 말을 막하면 어쩔건데?
나는 그 순간 여차하면 혼자서 생존기간병 13명과 한판 붙을 작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당신들도 젊을 때 모두 한가락했던 사람들이지만 분노가 앞을 가린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고, 그야말로 살기등등했습니다. 아무튼 나의 그런 분기탱천한 모습에 기간병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일제히 침묵이었습니다. 소대장출신의 김이태씨는 입장이 곤란했던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더군요. 만약 MBC TV의 김동철 PD가 중간에 끼어들어 말리지 않았으면 나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절대로 물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때의 장면은 MBC 제작진들과 동아일보 성기영기자 등 목격자가 많으니 부인할래야 부인 할 건덕지가 없을 겁니다.
그 뒤로도 모든 언론기관의 기자들이 실미도 기간병들을 취재 할 때 또는 무슨 말을 할 때 10중의 8,9는 훈련병들을 일컬어 [걔네들]이라는 호칭을 쓰더군요. [걔네들은 그 아이들의 줄인 말입니다.]
실미전우회에서 걔네들을 공작원, 교육생, 훈련병으로 격상시켜서 호칭을 해준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습니다. 만약 실미전우회의 특별회원으로 제가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세상의 여론도 훈련병들을 비난하는 분위기였다면 정말로 훈련병들의 이름을 위령탑에 넣고 사람대접을 해주었을까요? 나는 그 문제를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100% 부정적인 답을 얻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전 나는 실미전우회 사무국장과 신사협정을 맺었습니다. 백동호는 더 이상 기간요원의 잔혹상이나 훈련병의 억울함이 어떻고 하는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할 것이며 실미전우회 역시 생존훈련병(강인찬)이 없으며 소설 실미도가 어쩌구 하는 비난을 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물론 나는 기간병들에게 손톱만큼이라도 꿇릴 것이 있다거나 비난이 두려워서 신사협정을 맺은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실미도사건의 뚜껑을 연 사람으로서 모양새 좋게 마무리를 하기 위해서는 기간병과 훈련병이 영혼의 화해를 하며 훈련병의 유가족들을 찾아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실미도사건의 일차적인 책임은 박정희 대통령,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비롯한 공군정보부대에 있습니다. 국가의 명령으로 실미도에서 근무한 기간병들 역시 그런 의미에서 피해자라고 할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기간병들은 피해자이면서 가장 끔찍하고 잔혹한 가해자이기도 했습니다.
전우회가 아직도 과거 젊은 혈기로 저질렀던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과연 실미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진상을 파헤쳐 법과 국민의 심판을 받아봅시다. 합당한 사과를 받지 못할 경우 내가 먼저 실미전우회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 실미전우회에서도 맞고소를 하겠지요. 그야말로 대환영입니다.
한마디 더하겠습니다. 국가의 명령이라는 미명하에 온갖 악행을 저지른 당신들이 이제와서 보상을 요구하다니 도대체 말이 됩니까? 만약 국가에서 기간병들에게 보상을 해준다고 하면 나는 세금을 내는 국민의 자격으로 그 부당함을 헌법재판소에 제기하고 범국민반대 서명운동을 벌이겠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혀둡니다.
실미전우회 여러분! 당신들도 피해자라며 국가에 보상을 요구 하기전에 먼저 과거의 악행에 대해서 속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 2004년 3월 8일 소설 실미도 작가 백동호.
3. 작품
- 대도
- 유서
- 실미도(소설)
- 보리 밭에 달 뜨면
- 연두빛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