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발레리 치칼로프 Вале́рий Чка́лов | Valery Chkalov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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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발레리 파블로비치 치칼로프 Вале́рий Па́влович Чка́лов Valery Pavlovich Chkalov | ||
출생 | 1904년 2월 2일[1] | ||
러시아 제국 니즈니노브고로드현 바실레바 (現 러시아 볼가 연방관구 니즈니노브고로드주 치칼롭스키구 치칼롭스크)[2] | |||
사망 | 1938년 12월 15일 (향년 34세) |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크렘린 벽 묘지 | ||
복무 | 노농적군 비행대[3] | ||
1919년 ~ 1924년 | |||
붉은 공군[4] | |||
1924년 ~ 1938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부모 | 친부 파벨 그리고리예비치 치칼로프[5] 친모 이리나 이바노브나 치칼로바 계모 나탈리아 게오르기예브나 치칼로바 | |
배우자 | 올가 에라스모브나 치칼로바[6] | ||
자녀 | 장남 이고르[7] 장녀 발레리아 차녀 올가 | ||
최종 계급 | 여단 사령관 (붉은 공군) | ||
주요 서훈 | 레닌훈장 (2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적기훈장 | }}}}}}}}} |
1. 개요
소련의 군인, 항공기 조종사.2. 생애
1911년에 입학한 바실렙스카야 초등학교를 1916년 졸업했다. 학업 능력과 기억력, 성격이 좋아 인기가 많았으며 수영을 좋아해 맨몸으로 볼가강을 건너기도 했다. 그림 재주도 훌륭해 미술 관련 교육을 받길 원했으나 미술학교의 폐교와 가정 환경 때문에 일찍이 포기하고 아버지를 도와 증기선 내 소방관으로 근무했다.1919년, 항공기에 흥미를 가진 치칼로프는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 항공기 조립공장 감독이로 근무했던 블라디미르 프롤리셰프를 만났다. 프롤리셰프는 자원입대 후 항공기 관련 병과를 담당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다. 15세의 치칼로프는 견습 조립공으로 복무하기 시작했다. 재능이 뛰어났던 덕에 그는 2년 후 아브로 504를 단독으로 조종할 수 있었다. 유능한 조종사로 이름을 날리려고 할 때 음주비행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받게 됐다.[8]
2.1. 첫 번째 사고
고멜에서 브랸스크로 가는 항공기에서 부기장을 맡은 치칼로프는 당시 주변 구조물을 피하기 위해 고도를 3~5미터 가량 올렸다가 가공전차선을 들이받아 체포됐다. 결국 1928년 10월 30일 벨로루시 군관구 군사재판의 판결에 따라 계급 박탈과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인명피해는 없었기 때문인지 야코프 알크스니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에 의해 16일 후 석방됐다.2.2. 복귀
1930년 11월, 다시 군복을 입고 적군 공군과학시험연구소에 파견돼 테스트 파일럿으로 복무했다.연구소에서 2년 동안 일하면서 치칼로프는 800회 이상의 시험 비행을 완수하고 30여 종의 항공기 조종 기술을 습득했다. 주로 폴리카르포프 설계국의 시험 비행에 참여하며 1930년대 최신 전투기였던 I-15 복엽기와 I-16 단엽기를 시험 비행했다. 최고의 전투기를 만든 공로로 1935년에 폴리카르포프와 함께 레닌 훈장을 수여받았다.
2.3. 기록적인 횡단 비행
1935년 가을 조종사 게오르기 바이두코프는 치칼로프에게 북극을 지나 소련에서 미국까지 비행하자고 제안한다. 1936년 봄 바이두코프, 치칼로프, 알렉산드르 벨랴코프가 모여 정부에 횡단 비행 제안서를 제출하지만 앞서 이미 북극 경로로 횡단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례가 있었기에 스탈린은 북극말고 모스크바-캄차카 경로를 시도하라고 지시한다. 1936년 7월 20일 치칼로프 일행은 하는수없이 모스크바-캄차카 노선으로 56시간이 걸려 9,375km 비행에 성공하고 이 노선엔 '스탈린 경로'라는 이름이 붙는다. 스탈린은 이 횡단 비행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치칼로프 일행을 직접 마중나가고, 조종사들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과 레닌 훈장을 수여했다. 치칼로프는 또한 Po-2 비행기를 개인용으로 선물받고 전국적인 명성도 얻게 된다. 3명 중에 치칼로프가 두드러진 이유는 치칼로프가 비행대장이었기 때문. |
1936년 8월 10일 극동에서 돌아온 치칼로프를 맞이하는 스탈린 |
이후 치칼로프는 포기하지않고 미국행 비행 허가를 계속해서 요청했고 결국 1937년 5월에 허가를 받게 된다. ANT-25를 탄 치칼로프 일행은 마침내 1937년 6월 18일에 미국을 향해 출발하게 된다. 출발 후 하루가 지나 북극에 진입했을 때 쯤 내내 운전하던 치칼로프는 피로를 호소하며 바이두코프와 조종을 교대하고 잠에 들게 된다. 그리고 푹 잠들어버린 치칼로프는 북극점을 못보고 지나쳐버린다.
"이 사기꾼들, 나쁜 놈들! 악마같으니, 왜 날 깨우지 않았어! 세상의 꼭대기를 꼭 보고 싶었단 말이야!"
북극점을 지났다는 소식에 잠에서 깬 치칼로프가 비명을 질렀다.
"볼 건 아무것도 없던데! 녹슨 축 하나가 땅에 삐죽 튀어나와있는 게 끝이더라!"
바이두코프와 벨랴코프가 웃으면서 말했다.
험난한 북극을 우여곡절 끝에 지난 치칼로프 일행은 8,582km 960m를 건너 6월 20일 미국 워싱턴주의 밴쿠버 시에 무사히 착륙에 성공한다. 이는 비행기로 유럽과 북아메리카 사이를 횡단한 최초의 비행이었다. 그렇기에 이 비행은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이들을 맞이한 미국 환영단 인사 중엔 조지 마셜도 있었으며 나중에 따로 치칼로프 일행을 집에 초대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백악관에 초대되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 대담하기도 했으며 루즈벨트는 예정된 15분을 넘어 1시간 40분 동안 치칼로프 일행과 대화했다. 이 비행으로 일행 전원 적기훈장을 수여받았다.북극점을 지났다는 소식에 잠에서 깬 치칼로프가 비명을 질렀다.
"볼 건 아무것도 없던데! 녹슨 축 하나가 땅에 삐죽 튀어나와있는 게 끝이더라!"
바이두코프와 벨랴코프가 웃으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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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칼로프 일행과 모스크바-북극점-미국 루트 |
2.4. 두 번째 사고
1938년 12월 15일, 호딘스코예 중앙비행장에서 I-180 테스트 비행 당시 사망했다. 2주 전부터 기체엔 190여 개의 결함이 발견됐으며,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체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다 시가지 뒤편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기체는 목재 폐기물 더미에 추락했으며, 치칼로프는 조종석에서 튕겨나와 사고현장 10~15미터 근처에서 발견됐다. 머리를 크게 다친 듯한 상태였는데 기체 보강용 금속에 부딪힌 것으로 추정된다. 비행장 내 화물 트럭 뒤에 치칼로프를 태운 뒤 보트킨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오후 4시 45분 사망선고가 내려졌다.2.5. 사후
해당 I-180 정비 관련 직원들이 체포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치칼로프의 시신은 돈스코이 화장터에서 화장돼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됐다. 스탈린과 소련 정부가 아끼던 조종사인만큼 장례 비용도 정부가 다 대주었다.이후 수많은 후배 조종사들이 소련에서 가장 위대한 조종사로 자리매김한 치칼로프를 존경하며 자랐는데 그 중엔 유리 가가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