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1d72e><colcolor=#000000> 박주봉 朴柱奉 | Park Joobong | |
출생 | 1964년 12월 5일 ([age(1964-12-05)]세) |
전라북도 임실군 (現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전주풍남초등학교 (졸업) 전주서중학교 (졸업) 전주농림고등학교 (졸업) 한국체육대학교 스포츠과학대학 (체육학 / 학사)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석사[1]) 순천향대학교 대학원 (체육학 / 박사[2]) |
종목 | 배드민턴 |
주종목 | 남자복식, 혼합복식 |
신체 | 182cm, 74kg |
소속 | 일본 배드민턴 국가대표팀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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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배드민턴 선수 겸 현 코치. 2001년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세계배드민턴연맹 선정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세계 배드민턴계에서도 특히 복식 분야 레전드 대우를 받는 선수였다.2. 선수 경력
2.1. 어린 시절
아버지의 권유로 라켓을 잡아 배드민턴에 입문해 두각을 나타내면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이 때 박주봉의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데, 한국과 일본의 배드민턴 단체전 시합에서 고교 1학년의 신인 선수가 1번으로 출전하자 일본 측에서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것이냐?" 라고 항의를 했다. 원래 배드민턴 단체전의 관례는 1번 단식 주자는 그 팀의 최고 에이스가 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하지만, 박주봉은 세트스코어 2-0의 완승으로 일본 대표팀을 가볍게 잠재우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사실, 당시 한국의 입장에서는 딱히 일본을 무시했다기보단 박주봉이 고교 1학년이면서도 에이스 선수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1번으로 출전시킨 것일 뿐이었는데 일본의 입장에서는 나이가 어린 선수를 내보냈으니 오해를 한 것이다.[3]
2.2. 1980년대
그리고 1982년 덴마크 오픈 복식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역대 최연소 국제대회 우승 기록을 세웠는데, 이는 이용대가 깨뜨렸다. 어쨌거나 그렇게 화려하게 등장한 박주봉은 그 뒤로 천하무적으로 군림하면서 그야말로 국내와 국제 무대를 가리지 않고, 전 세계 복식 무대를 씹어 먹었다. 남자 복식은 주로 김문수와, 혼합 복식은 처음에는 유상희, 나중에는 정명희와 짝을 이루면서 전 세계를 누비면서 각종 투어 대회를 섭렵했는데, 그 결과 총 72회의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장식하며, 1991년 기네스북에 배드민턴 최다 우승자로 이름이 올랐다.세계선수권에서 5번 우승(남자 복식 2회, 혼합 복식 3회), 아시안 게임 3회 우승, 전영오픈 9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세우면서 승승장구했다. 국내 무대에서는 한 술 더 떠서 만화라고 해도 믿기 힘든 106연승의 신화를 쓰면서 적수가 없는 존재로 부상했다. 세계적인 배드민턴 선수로 명성을 얻으면서 이미 신화가 된 것이다. 다만,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올림픽에는 정식 종목이 아니었던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특히 정말 강했던 정명희와의 혼합 복식은 불운하게도 올림픽 정식 종목 채택이 늦어지면서 결국 올림픽 데뷔는 하지 못 했다.
2.3.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배드민턴이 정식 종목이 되자 대표로 참가했고, 남자 복식에서 평생의 파트너인 김문수와 짝을 이뤄 아주 손쉽게 우승을 차지했다. 결승전 스코어는 15-11, 15-7로 큰 위기 없이 여유있게 승리했다. 이로서 배드민턴 역사상 최초의 남자 복식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박주봉의 뛰어난 공격력과 명석한 판단력이 강한 체력과 서비스를 가진 김문수와 잘 조화를 이룬 것이 컸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공격력은 최고 수준이었지만, 박주봉이 좀 더 강력했다는 평이다. 1993년까지 선수생활을 하고 은퇴하였고, 이후 학업에 매진하였다.2.4. 1996 애틀랜타 올림픽
1995년에 대한배드민턴협회는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혼합복식 출전을 위해 박주봉에게 복귀를 요청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박주봉은 협회와 틀어지게 되는 데, 바로 출전 파트너 선정 과정에서 잡음이 빚어진 것이다. 협회는 심은정을 추천했지만, 박주봉은 자신의 제자인 라경민과의 호흡을 주장했다. 실제로 그 당시 대회 전적을 보면 라경민과의 전적이 좋았다. 제자일 뿐만 아니라 젊고 부상의 우려가 적다는 점이 박주봉이 라경민을 지목한 것으로 판단된다. 초반에는 심은정과 함께 여러 대회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결국 박주봉의 주장대로 라경민이 파트너가 되어 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갈등이 빚어지면서 한 때 출전이 불투명하기도 했다.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박주봉-라경민 조는 연승을 하며 결승전까지 올라갔는데, 결승전 상대는 또 다른 대표팀 동료인 김동문-길영아 조였다. 박주봉-라경민 조는 결승전에서 패하고 은메달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 때 출전을 못하면서 꼬인 심은정은 조기 은퇴했고, 결국 박주봉의 입지는 묘하게 되었다. 결국 한국체육대학교와의 관계도 멀어지게 되었다. 이후 순천향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받았으며, 코치도 해외에서 활동하게 되었다.[4]
2.5. 통산 성적
1989년부터 1996년까지 214승 12패(0.947)를 기록했으며, 특히 1989년 남자복식과 여자복식을 합쳐서 1번 진게 커리어 하이이다. 특히 1차 은퇴한 직후 복귀 후 성적이 대단한 것이, 34승 2패(그 중 1패가 올림픽 결승전이었다)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 점이 대단한게 여자 선수의 경우 복식에서는 통산 승률 9할이 넘었지만, 혼합 복식에선 8할대에 그쳤다. 가오 링, 찬드라 위자야, 토니 구나완 등 경우 둘 다 복식 파트너를 여러 번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률이 꽤 많이 차이 난다. 심지어 김동문-라경민 조도 8할대 후반이니 만큼 박주봉의 복식 커리어는 올타임 1위라고 무방하지 않을 커리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3. 은퇴 이후
3.1. 영국 유학 및 영국 국가대표팀 코치
1996년 선수 생활을 완전히 은퇴하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배드민턴 계의 스타를 그냥 보고 있을 타국 배드민턴 협회는 없었다. 사이가 묘해진 한국과의 관계를 비집고 먼저 들어온 쪽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유학 비용까지 다 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고, 결국 그를 코치로 영입했다. 그렇게 박주봉은 1997년부터 영국팀 코치로 활동했다.3.2. 말레이시아 국가대표 코치
1999년 영국과의 계약이 끝나자 이번에는 말레이시아가 그를 모셔갔다. 말레이시아에서는 2002년까지 지도자 생활을 하였다. 말레이시아 코치 생활 이후에는 2003년 한 해 동안 전 세계를 돌면서 배드민턴을 보급하는 인스트럭터로 활약했다. 그리고, 잠시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도 했다.3.3. 일본 국가대표 코치
2004년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이후 쭉 일본 대표팀 헤드코치를 맡아 일본 국가대표팀의 황금기를 이끌고 있다. 이 당시의 일본은 어떻게든 박주봉을 모셔가기 위해서 집은 물론이고 자녀들의 학비까지 모두 일본의 배드민턴 협회에서 지원해주면서 귀빈 대접을 했다는 카더라가 있다. 어떻게 보든 이례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박주봉은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당시만 해도 배드민턴 변방국이었던 일본의 선수 발굴 및 실력 향상에 엄청난 성과를 보여줬는데, 주요한 선수들만 추려도 아래와 같다.- 남자 단식 - 타고 켄이치[5], 켄토 모모타[6]가 있었지만 타고 켄이치는 도박파동 주범으로 은퇴했고, 켄토 모모타는 도박파동으로 2년간 자숙 후 복귀해 여전한 경기력을 선보였으나, 교통사고 후 폼이 하락했다.
- 여자 단식 - 아카네 야마구치[7], 노조미 오쿠하라[8]. 야마구치<오쿠하라 대표팀을 리딩하였으나 2020년대 들어선 야마구치>오쿠하라로 전환되었다.
- 남자 복식 - 전영오픈 2위의 켄이치와 히로유키, 카무라과 소노다, 전영오픈 1위의 히로유키와 유타, 타쿠토 이누-유키 카네코가 있다. 2022년 기준 약간 하강세인데, 특히 히로유키, 카무라, 소노다 선수가 은퇴한게 크다.
- 여자 복식 -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마츠모토와 타카하시, 후쿠시마와 히로타, 마츠모토와 나가하라, 전영오픈 1위 시다와 마츠모토가 최상위 성적을 내고 있다. 타카하시 선수가 은퇴하였고, 2022년 기준 시다와 마츠모토 선수가 상승세이다.
박주봉 감독은 일본 배드민턴 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한 뒤 멘탈, 피지컬, 훈련 시스템 개선으로 지도 방향을 설정했다. 승부에 패배하고 숙소에 돌아오는 길에 히히덕거리는 선수를 보면서 지도 방향을 바꾸자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는 2016년 일본 기자 클럽 주최 기자회견에서 본인이 직접 언급한 내용이다.
일본 선수들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것, 예를 들자면 해변 합숙 훈련, 그립 바꾸기, 승부욕 고취, 네트 앞에서의 볼 처리 노하우 훈련을 시켰고 일본 배드민턴계의 시스템을 바꾸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보인다. 실업팀과 대표팀간 조율의 아쉬움을 나타낸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우버 컵이나 토마스 컵 우승, 준우승 등으로 점점 증명되어 간다.
3.3.1. 2016년
일본 여자 배드민턴이 전영 오픈에서 39년 만에 우승했을 때도 TV 보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메달을 딴 선수가 아닌 박주봉 감독이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여자복식 미사키 마츠토모-아야카 다카하시 조가 일본 최초의 배드민턴 금메달, 오쿠하라 노조미가 동메달을 획득하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았고, 2020 도쿄 올림픽까지 4년짜리 장기 계약을 맺으며 감독직이 연장되었다.3.3.2. 2017년
2017 세계선수권 여자 단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오쿠하라 노조미 선수는 일본 방송에 출연하여 본인의 우승 요인 중 하나를 박주봉 헤드 코치의 격려로 꼽으며, 힘들 때 박주봉 코치가 세계 정상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말해줬던 것이 큰 격려가 되었다고 한다. 몇 번이고 세계 정상에 섰던 분께 그런 말을 듣는 것 자체가 매우 무겁게 와닿았다고 한다. 오쿠하라 노조미는 배드민턴 경력을 쌓으면서 타이어를 메고 모래사장을 뛴 건 처음이었다고 할 정도로 굉장히 당황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박주봉이 체력 훈련의 중요성을 크게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간 일본 배드민턴계가 박주봉 부임 이전까지는 체력 훈련에 얼마나 무심했는지도 알 수 있는 일화다.[9]3.3.3. 2018년
2018 전영오픈 혼합 복식에서 유타 와타나베 & 아리사 히가시노가 1위, 여자단식에서 아카네 야마구치가 2위, 여자 복식에서 사야카 히로타 & 유키 후쿠시마조가 2위에 입상했다. 여자 복식 4강에 올라간 팀 중 일본 팀이 무려 3팀이였으며, 2위, 3위, 4위를 차지했다. 유타 와타나베 & 아리사 히가시노조는 상대적인 열세임에도 종종 세계랭킹 1위를 차지하였던 조였다. 일본의 열세 종목이라고 하면 혼합복식을 꼽을 수 있었는데 우승한 것이다. 실제로 혼합복식이 기대나 실력이 떨어지는건 현실이다. 파트너를 유지하기가 힘들고, 여성의 생리변수, 대게 여자 복식 혹은 남자 복식 두가지를 하기에 체력적 부담이 있다. 아카네 야마구치는 독일오픈에서 우승을 하고, 전영오픈에서 준우승을 하였다.2018 아시아선수권에서는 모모타가 우승하여 상금 2650달러를 획득하였다. 여자복식에서는 히로타와-후꾸시마조가 우승, 미사키-다카하시조가 준우승을 거두었다. 혼합 복식에서는 소노다-케이고조가 준우승을 차지하며 일본팀은 화려한 성적을 거두었다.
2018 우버컵에서는 여자 팀 결승전에서는 일본이 태국을 3-0으로 꺾고 우승했다. 토마스 컵에서는 남자 팀이 준우승을 차지했는데, 결승전에서 중국을 만나 3-1로 패배했다. 모모타는 세계랭킹 1위 및 각국 에이스를 잡으며 전승으로 분전했으나, 준우승으로 만족해야 했다.
2018 세계선수권에서 후쿠시마-히로타 조를 꺾고 우승한다. 타카하타-사쿠라모토, 마츠야마-쉬다, 푸쿠만에게도 중소 국제대회 경험을 지속적으로 쌓게 해주어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마츠토모-타카하시를 제외하면 대부분 20대 초반인 것을 보면 일본 여자 복식은 앞으로도 장기간 상위권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3.3.4. 2021년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 팀의 유일한 한국인 감독을 맡았다. 다만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과는 다르게 일본팀은 동메달 1개만 따내며 이전보다 부진했다. 올림픽이 1년 연기되고 일본 배드민턴 선수들 대부분이 코로나에 감염되어 실전 감각이 저하된 것도 원인으로 보인다. 올림픽의 부진 때문에 연임이 힘들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그동안의 공적을 인정받은 덕분인지 2024 파리 올림픽까지 계약이 연장되었다.4. 수상 기록
올림픽 | ||
금메달 | 1992 바르셀로나 | 남자 복식 |
은메달 | 1996 애틀랜타 | 혼합 복식 |
세계선수권 | ||
금메달 | 1985 캘거리 | 혼합 복식 |
금메달 | 1985 캘거리 | 남자 복식 |
금메달 | 1989 자카르타 | 혼합 복식 |
금메달 | 1991 코펜하겐 | 혼합 복식 |
금메달 | 1991 코펜하겐 | 남자 복식 |
동메달 | 1983 코펜하겐 | 남자 복식 |
동메달 | 1987 베이징 | 남자 복식 |
아시안 게임 | ||
금메달 | 1986 서울 | 혼합 복식 |
금메달 | 1986 서울 | 남자 복식 |
금메달 | 1990 베이징 | 혼합 복식 |
아시아선수권 | ||
금메달 | 1991 쿠알라룸푸르 | 혼합 복식 |
금메달 | 1991 쿠알라룸푸르 | 남자 복식 |
5. 기타
- 현역 시절 별명은 기린, 배드민턴의 교과서, 배드민턴의 신, 복식의 황제, 주봉신이었다.
- 말레이시아에서 경기를 할 때, 길거리 좌판에서 햄버거를 만들어서 이름을 '주봉 버거'라고 붙이고 이 버거를 먹어서(...) 박주봉이 잘 하는 거라고 선전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주봉 쥬스라는 브랜드는 정말로 나왔다고 한다. 참고로 말레이시아는 배드민턴이 거의 국기화되어 인기있는 스포츠이다. 이시기에 시덱 형제가 배드민턴의 영웅이었고, 이들을 박주봉/김문수 조가 좋은 경기 내용으로 이겨 말레이시아에서도 이들이 오늘날 한류 아이돌 스타 못지 않게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인기가 좋았다고. 그래서 은퇴 후 코치 제의가 있었고, 주봉식품들은 이런 과정에서 파생된 말로 추측할 수 있다.
- 농구에서 마이클 조던의 이름을 딴 에어조던이라는 브랜드가 있는 것처럼, 배드민턴에서도 박주봉의 이름을 딴 박주봉 스포츠(PJB Sports)라는 브랜드가 있으며, 이 브랜드의 모토는 Power of Legend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주봉'이라는 브랜드와 박주봉은 관련이 없다. 현재 프로스펙스에서 그의 시그니쳐 슈즈가 나오고 있다.
-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전격적인 컴백 복귀를 선언하자, 한창 연습 중이던 모든 선수들이 좌절했고, 특히 덴마크의 조는 아예 혼합복식 출전을 포기하고, 각자 남녀 복식으로 선회했다. 또 당시 전세계 배드민턴 계가 그의 현역 시절 비디오를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카더라. 우승 후보, 황제의 귀환인데 그 정도는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 허버트 스칠 상의 여덟번 째 수상자인데, 이 상이 무슨 상이냐면 세계 배드민턴 계가 역사적인 업적을 남겼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정기적으로 주는 상이 아니라, 그럴만한 공적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이 나타날 때만 주는 상이기 때문에 박주봉이 상당한 평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대개는 2년에 한 번 꼴로 수상하기는 한다.
[1] 석사 학위 논문 : 우리나라의 社會體育 發展을 위한 實踐方案 硏究(1989. 2)[2] 박사 학위 논문 : 배드민턴 선수의 완벽주의, 스트레스 대처 및 성취지향성의 구조모형 분석(2009)[3] 이후 후술되어있듯 일본 배드민턴 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일본 배드민턴계에 많은 영향력을 끼친 박주봉이라 더 묘한 부분.[4] 다만 2018년 11월에 가진 인터뷰에서 밝히길, 코치 생활을 오랫동안 해외에서만 하게 된 것은 대한배드민턴협회와 사이가 틀어져서 그런 건 아니라고 밝혔다. 오히려 대표팀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개인 사정으로 못 간 적도 있다고. 그러면서 2020 도쿄 올림픽이 끝나면 대한민국을 위해 일할 기회가 있지 않겠냐는 말로 자국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5] high 세계랭킹 2위.[6] high 세계랭킹 1위.[7] high 세계랭킹 1위.[8] high 세계랭킹 1위.[9] 박주봉 본인도 선수 시절에 모래사장에서 훈련을 주로 했었다고 한다. 실전 훈련도 모래사장에서 주로 했다고 하는데, 체력을 기르는 데에 도움이 상당히 되었다는 점도 있지만 모래사장은 몸을 던질 때 등의 충격을 쉽게 흡수해주기 때문에 부상 방지 목적도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