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6:18:24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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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쿠라 막부 제2대 정이대장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源賴家
파일:external/dthumb.phinf.naver.net/File:Minamoto_no_Yoriie.jpg
출생 1182년 9월 11일
사망 1204년 8월 14일 (향년 21세)
재임기간 제2대 정이대장군
1202년 ~ 1203년
1. 개요2. 생애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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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마쿠라 막부의 제2대 쇼군. 부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롤모델로 삼아 강력한 쇼군 권력을 행사하려 하였으나, 유력 고케닌들의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1203년에 이르러 쇼군 자리에서 내쫓기고 슈젠사에 유폐되었다. 이듬해 외삼촌들이 보낸 자객들에게 암살됐다.

2. 생애

어린 시절부터 차기 쇼군으로서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요리이에는 시종일관 강력한 쇼군으로 군림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1180년대의 내란기를 거치며 잔뼈가 굵은 유력 고케닌[1]들은 혈기왕성한 청년 쇼군의 독주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호조 도키마사를 비롯한 유력 고케닌 13인은 요리이에가 가장권인 가독을 승계한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쇼군의 독재를 부정하는 합의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이를 13인의 합의제(十三人の合議制)[2]라고 한다.

이에 대해 요리이에는 '오가사와라 나가츠네(小笠原長経), 히키 무네카즈(比企宗員), 히키 토키카즈(比企時員), 나카노 요시나리(中野能成)등의 무리는 카마쿠라에서 만약 행패를 벌였다고 하더라도 갑을인(甲乙人)이 감히 적대하지 말 것. 만약 위법한 일을 한 무리에게는 죄과를 묻기 위해 필시 교명(交名)을 검사하여 제출하도록 촌리(村里)에 알려라. 이 5명의 외에 특별한 명령이 없다면 섣불리 [장군을] 찾아뵈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는 령을 내렸다. 학계는 이 명령이 요리이에가 13인 합의체에 대항해 측근정치를 하고자 한 것으로 본다.[3] 막부가 기존의 어가인들과 요리이에의 측근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두 세력 간의 균형이 무너지게 되는 일이 벌어진다. 그 원인은 다름아닌 요리이에 자신에 의한 것이었는데, 요리이에는 유력 고케닌이었던 아다치 모리나가의 첩과 바람을(...) 피웠다. 아다치가 이를 알게 되면서 크게 분노하자, 요리이에는 아다치를 죽이려고 들었다. 이에 가마쿠라에서 두 군대가 충돌하는 사태까지 갈 뻔했으나 호죠 마사코가 아다치의 편을 들며 요리이에를 질책함으로서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사태로 인해 아다치 가문이 돌아서게 되었고, 싸움을 중재한 마사코의 입지도 강화되었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남녀관계에 놀랄만큼 자유로웠던 교토의 귀족문화와, 그렇지 못했던 간토 지역간의 문화차이로 이해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얼마 후에는 설상가상으로 카지와라 카게토키가 유키 토모미츠를 참언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더욱 궁지에 몰린다. 카지와라는 요리토모 시대부터 많은 공을 세우고 쇼군을 보필하는 중신이었는데, 그의 직위는 다름아닌 인물들을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유키 토모미츠가 쇼군과 어가인들 사이에 갈등이 커져가는 것에 한탄해 '충신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한 것에 대해 카지와라가 쇼군에 대한 모독이라고 몰아세우며 규탄하자 격분한 유키는 주변 귀족들을 모아 요리이에에게 카지와라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한다. 이에 어쩔수 없이 요리이에는 카지와라에게 해명을 요구하는데, 카지와라는 해명 없이 영지로 내려가 버렸다. 결국 카지와라가 얼마 후 교토 상경 도중 모반 혐의로 토벌당하면서 요리이에는 중요한 측근 한명을 잃게 된다.

그러나 요리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자신의 정책을 밀고나갔다. 무엇보다도, 토지조사 문제가 관건이었다. 요리이에는 어가인들의 토지를 조사하여서 일정한 크기 이상의 토지는 몰수하여서 경제적으로 궁핍한 무사들에게 분배하고자 했다. 그러나 어가인들이 이를 순순히 용납할 리 없었고, 요리토모 시대부터 막부를 위해 싸워온 자신들을 모욕하는 처사로 느꼈다. 결국 토지조사는 시행이 연기되고 만다.

그러자 요리이에의 최대 지지자였던 히키 가문은 특단의 조치를 취해, 요리이에의 동생 센만과 그 후견인인 아노 젠죠[4]을 반역죄로 체포하고는 호죠 가문에 찾아가 젠죠의 아내이자 호죠 토키마사의 딸인 아와츠보네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마사코가 아와츠보네의 무죄를 강변함으로서 호죠 가문이 반역죄에 말려드는 것은 피하게 된다. 그러나 이 일로 아노 젠죠와 그 아들이 처형당한다.

그러던 중 1203년, 요리이에는 돌연 중태에 빠지고 만다. 이에 막부 내에서는 요리이에가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 생각해 미리 쇼군 가문의 외척인 호조 가문과 히키 가문을 중심으로 쇼군 가독의 승계와 가산의 분배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히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요리이에의 적자 이치만이 가독 및 쇼군직, 동국 28개국에 대한 지두직을 승계하고, 그리고 요리이에의 친동생인 센만(훗날의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이 서국 38개국에 대한 지두직을 승계함으로서 양분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호조 도키마사는 히키 가문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유력 고케닌과 막부 관료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결과 히키씨 일문이 사실상 멸문당하고, 히키씨가 차기 쇼군으로 내정한 이치만은 어머니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지만 얼마안가 발각되어 처형당한다. 이후 호죠 가문은 교토로 사절을 보내 쇼군이 죽었다고 알리고 센만을 쇼군에 봉해 달라고 요청한다. 여기까지 가면 호죠 가문이 순조롭게 차기 쇼군직을 둔 싸움에서 승리하나 했지만...얼마 안가 요리이에가 죽음의 문턱에서 되돌아왔다. 호조 가문의 쿠데타 소식을 접한 요리이에는 와다 요시모리 등에게 진압을 명하지만, 쇼군으로서의 권력과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진 상태. 요리이에는 쇼군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윽고 슈젠지(修禪寺)에 유폐되었다가 1204년 호조 요시토키에 의해 살해된다. 호죠 가문으로서는 자신들의 핏줄인 센만을 쇼군으로 세우려 쿠데타를 벌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또다른 핏줄인 요리이에를 죽이게 된 셈이었다.

3. 사후

요리이에에게는 후지와라노 요리츠네[5]에게 시집간 딸 다케노 고쇼(竹御所)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난산으로 세상을 떠났다.

요리이에의 아들이며 승려로 출가했던 구교는 자신의 삼촌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암살하는 사건을 일으키고 처형당했고(다른 아들들도 차례대로 제거되었다) 사네토모에게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네토모를 끝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직계 후손은 단절되고 말았다.


[1] 쇼군과 주종관계에 있던 무사.[2] 다만 최근에는 이 합의제의 실제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결국 최종 결정권은 요리이에에게 있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3] 다만 여기 나오는 갑을인이라는 명칭이 일반 평민을 말하는 만큼 정말 13인 합의체에 대항한 것이 맞느냐는 지적이 있다.[4] 요리토모의 동생[5] 4대 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