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01 10:29:34

무사 알 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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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가족과 후사4. 안장지5. 기타6. 어록

1. 개요

مُوسَىٰ ٱبْن جَعْفَر ٱلْكَاظِم
무사 이븐 자파르 알-카짐[1]

이맘위: 765년 11월 8일 ~ 799년 8월 31일
생몰: 745년 ~ 799년 8월 31일

열두이맘파의 7대 이맘. 자파르 앗 사디크의 아들로, 총명하여 형들이 있었음에도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큰형 이스마일과 작은형 압둘라 알-파타를 지지하는 세력이 분리되어 각각 이스마일파와 파트히야로 자립했으나, 후자는 다시 주류 열두이맘파로 흡수된다. 자파르 대에 태동한 쉬아 지하 조직은 무사 대에 이르러 체계화되었고, 이라크 뿐만 아니라 이집트나 마그레브까지 확장되어 이맘의 재정적 안정을 확보하였다.

부친과 마찬가지로 압바스 왕조의 감시와 탄압을 받던 무사는 결국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에 의해 바그다드로 소환되어 799년 사망 시까지 감금되었다. 쉬아 전승에 따르면 사인은 독살이었고, 따라서 매년 그의 기일마다 신도들이 카지미야 영묘에서 애도 의식을 치른다. 무사는 역대 이맘 중 가장 많은 자녀를 두었고, 후세인계 사이드 중 대부분이 그의 후손이다. 사파비 왕조 역시 무사의 후손을 자처하였다.

2. 생애

자파르 앗 사디크의 삼남 혹은 사남으로, 베르베르인 노예 출신인 하미다 알-바르바리야[2]의 소생이다. 본래 큰형 이스마일이 후계자였지만, 760년경 그가 사망하자 작은형 압둘라를 제치고 부친 자파르에게서 후계자로 선정되었다. 765년 이맘 자파르가 사망하자 히자즈의 쉬아 세력은 세 파벌로 나뉘었다. 장손이자 이스마일의 아들 무함마드 빈 이스마일, 차남 압둘라 알-아프타, 삼남 무사 중에서 상당수의 무리는 연장자인 압둘라를 지지하였다. 하지만 766년, 압둘라가 70일 간의 임기 끝에 사망하자 그의 지지 세력 (파트히야) 중 대부분은 이제 연장자가 된 무사를 지지하게 되었다. 다만 일부는 이맘위의 형제 상속을 반대하며 존재 여부가 의심되는 압둘라의 아들 무함마드를 마흐디로 추종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자파르의 제자들 대부분이 무사를 지지했기에 결국 시간이 지나며 그의 지위는 공고해졌고, 자이드파이스마일파를 크게 상회하여 쉬아 세력의 주류를 이루었다.

무사는 이전 이맘들처럼 정치에 거리를 두고 메디나에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이전과 달리 이미 아바스 왕조가 자리를 잡은 상태였기에 무사는 부친과 달리 자유로이 설법하지 못했지만, 부친 이상으로 전도에 공을 들여 이라크 등지의 쉬아 공동체에 대리인들을 임명하여 조직화를 꾀하고 성금 (쿰스)을 거두었다. 762년 앗-나프스 앗-자키야의 반란 이후 쉬아 세력에 대한 경계를 강화한 아바스 당국은 메디나에 첩자를 심어 이맘을 감시하였고, 780년경 무사는 칼리파 알 마하디에 의해 바그다드로 소환되어 감금되었다. 다만 그동안 무사를 감시한 경찰총감 알-무사야브 빈 주하이르 앗-다비는 후일 쉬아 무슬림이 되었고, 알 마하디는 꿈에서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질책을 듣고는 무사에게서 정치 불참 의사를 확인한 후 3천 디나르를 주며 그를 석방하였다. 따라서 무사는 786년 하산 이븐 알리의 고손자 후세인 빈 알리 알-아비드가 메디나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동참하지 않았다.[3]

반란을 진압하고 즉위한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 때에 이르러 압바스 조의 쉬아 박해는 고조되었다. 하룬은 무사와 함께 성지 순례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무사가 카으바에서 가계를 언급한 것에 분노하여 그를 바그다드로 소환한 후 처형하려 했으나 결국 석방하였다. 한편 하룬의 재상 야흐야 빈 칼리드 알-바르마키는 세자 알 아민의 후견인이 된 자파르 빈 무함마드와 권력 다툼을 하였는데, 후자가 비밀리에 쉬아 무슬림인 것을 알게 되자 이를 하룬에게 고하고 무사의 친척을 매수하여 제국 전역의 쉬아 공동체가 이맘에게 엄청난 후원금을 보낸다는 것을 증언하게 하였다. 동시에 무사의 대리인 히샴 이븐 알-하캄이 점차 신도 수를 확보한다는 첩보까지 접수되자 793년 하룬은 재차 무사를 소환하여 바스라에 감금하였다. 다만 하룬의 사촌인 총독 이사 빈 자파르는 무사의 경건함에 감탄하여 처형하라는 칼리파의 명을 어기고 무사를 바그다드로 이송하였다. (794년)

바그다드에서 무사는 우선 알-파들 이븐 알-라비에 이어 알-파들 이븐 야흐야 알-바르마키의 저택에 연금되었다. 다만 가택 연금에도 불구하고 무사는 현지 쉬아 당원들과 소통하는 등 전도 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이러한 상대적으로 편안한 감금 생활을 보고받은 하룬은 알 파들에게 처형을 명하였으다. 다만 알 파들이 거부하고 대신 1백회의 채찍질을 받자, 무사는 바그다드 경찰감 앗-신디 빈 샤히크에게 넘겨졌다. 하룬은 796년 바그다드를 떠나 라카로 조정을 옮겨버릴 정도로 이맘의 존재를 껄끄럽게 여긴 듯하다.[4] 수년간 여러 감옥을 전전하던 무사는 799년 8월 말엽 사망하였다. 그후 하룬은 저명한 인사들을 불러 무사의 시신을 살피게 한 후, 사인이 자연사라 선포하였다. 그럼에도 쉬아 측에서는 앗-신디가 라카를 방문했을 때에 하룬이 독살을 명한 것이라 여겼다.[5] 사후 무사는 바그다드 북서부의 쿠라이쉬 묘원에 안장되었고, 장남 알리 알 릿다가 이맘위를 계승하였다.

3. 가족과 후사

여러 해방 노예 여성들과 결혼한 무사는 역대 이맘들 중 가장 많은 자손을 남겼는데, 최소 33명에서 최대 60명에 달한다 한다. 따라서 이란의 사이드 중 70% 가량이 무사의 후손이고, 후일 사파비 왕조 역시 자신들이 무사의 후손이라 주장하였다.

무사의 사후, 이번에는 다른 아들들이 이맘위를 주장하지 않아 후계자 알리 알 릿다는 별탈 없이 계승할 수 있었다. 다만 일부 추종자들은 무사의 죽음을 불신하고, 그가 마흐디로 재림할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와키피야 세력은 압바스 조의 권위에 도전하다 결국 알리가 무사의 후임 이맘이라 인정하고 주류 쉬아 세력으로 돌아왔다. 다만 쿠파의 무함마드 빈 바쉬르는 자신이 무사의 재림 시까지 임시 이맘을 맡았다며 부샤리야 세력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러한 분파는 이맘의 대리인들이 현지에서 모은 쿰스 (후원금)와 자카트를 자신이 착복하려는 의도에서 생겨난 것이라 한다.[6]

한편 비록 이맘위를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무사의 여러 아들들 중 자이드와 이브라힘은 4차 피트나를 틈타 압바스 조에 반란을 일으킨 아불 사라야 앗-사리 앗-샤이바니의 반란에 동참하였고, 각각 바스라와 예멘 (이후에는 메카)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다른 아들 아흐마드는 810년대 형 알리 알 릿다를 만나기 위해 쉬라즈를 지나던 중 암살당하였고, 그의 무덤은 이란의 주요 성지 중 하나인 샤 체라그가 되었다. 무사의 딸 파티마 알-마수마 역시 친족들과 지지자들을 이끌고 알리 알 릿다와 합류하기 위해 사베흐를 지나던 중 압바스 군대의 습격을 받아 친족들 대부분을 잃었고, 그녀 또한 독살되어 에 안장되었다. 쿰의 파티마 메수메 영묘는 이란에서 (알리 알 릿다가 매장된) 마슈하드 다음 가는 성지가 되었다.

아흐다드와 파티마 외에도 무사의 다른 아들들인 살라흐 (살레)는 테헤란 동북쪽의 셰미란, 함자는 타브리즈, 이브라힘 아스가르 및 함자 알-함자는 카슈마르에 매장되어 작은 성지인 이맘자데가 세워졌다. 사베흐 인근에 매장된 압둘라 등의 아들들 역시 크고 작은 영묘가 있다.

4. 안장지

파일:카지미야 1.jpg
바그다드 북부 카지미야의 무사와 그의 손자 무함마드 알 자와드의 영묘. 7대[7] 쉬아 성지 중 하나이다.

카짐은 '인내하는 자'란 뜻인데, 압바스 조의 탄압을 견디다 순교한 두 이맘이 안장되었기에 카지미야의 쌍수형인 카지메인으로도 불린다. 성지 자체는 10세기 후반 부와이 왕조 대에 처음 세워졌고, 현재의 건물은 16세기 사파비 왕조이스마일 1세가 세운 것이다. 두 이맘 외에도 무사의 아들들 중 4차 피트나 당시 반란을 일으킨 이브라힘 알-무르타다, 14세기의 대학자 나시르 앗 딘 앗-투시 등이 안장되어 있다.

5. 기타

몇몇 쉬아 전승에 의하면 무사는 자신을 희생하여 신에게서 추종자들의 죄[8] 사함을 받기 위하여 죽은 것이라 한다. 예수

쉬아 전승에 따르면 무사는 형 압둘라의 권능에 도전하기 위해 여러 기적 (카라마트)을 행하였다. 예를 들어 (기존 이맘들처럼) 모든 언어를 섭렵하고 동물들과 소통한다던지 파셀통그, 고사한 나무를 만지면 다시 싹이 돋는다던지, 불 속에 들어갔다 나온다던지 하는 것이다.[9] 또한 한 모자가 유일한 생계 수단인 암소가 죽어 슬퍼하자, 무사가 이를 부활시켰고 이에 그들은 '마리얌의 아들 이사 (예수)이시다'라 했다 한다.

무사는 쉬아 기치에 맞는다면 신도들이 압바스 당국에 협조하도록 허가하였다. 대표적인 예시로 쉬아 간부 알리 빈 야크틴은 정의와 사회 복지를 증진한다는 조건 하에 압바스 조정에 출사하였고, 타키야 교리에 따라 순니 의례를 행하며 감시를 피하였다.

무사의 이맘위에 쉬아 세력이 불어나며 일부 추종자들은 그를 지나치게 신성시하고, 카이사니야 및 하쉬미야 교리를 모방하여 무사를 마흐디로 모시기도 하였다. 무사는 이러한 급진 세력인 굴라트 및 무파위자를 경계하고 배격하며 정통 교리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6. 어록

무사는 여러 어록을 남겼는데, 그중 일부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신께서는 인간에게 두 증표를 남기셨는데, 바로 외면와 내면의 증표이다. 외면의 증표로는 선지자들, 사도들, 이맘들이 있고, 내면의 증표는 이성이 바로 그것이다.
(신께 있어) 지성의 학자는 작은 일도 배로 수용되고, 무지의 인간이 행한 일은 많을 지라도 거부된다.
시간을 보냄에 있어 네가지를 따르라. 첫째는 신께 기도하는 것이고, 둘째는 생업을 위하는 것이며, 셋째로는 밖으론 네 허물을 알려주고 내면으론 너에게 충실한 동료들을 위한 것이며, 마지막은 혼자서 스스로를 수양하는 것이니, 마지막을 통해 나머지 셋을 통제하리라.
가난과 장수를 논하지 말라. 스스로 가난하다 하는 자는 비참해질 것이고, 자신의 장수를 말하는 자는 교만해질 것이다.
자비롭고 예의 바른 자는 신의 보호 하에 있느니, 신께서는 그자가 천국에 들 때까지 떠나지 않으신다. 신께서는 자비로운 자가 아니면 선지자로 보내시지 않으신다.
불행은 인내하는 자에게 하나이며, 인내하지 않는 자에게 둘이노라.
좋은 이웃은 악행을 참는 자가 아니라, 악행에 대해 인내하는 자이다.
신께서 즐거움을 주지 않으면 어찌 세상이 인간의 거처일 것이고, 신께서 노하지 않으시면 이 생은 얼마나 위대할 것인가.
신과 함께하는 굴욕은 다른 어떤 이와 누리는 명예보다 더 신의 사랑을 받는다.
신을 경배함에 있어 이성보다 좋은 것은 없다.


[1] 칭호인 알 카짐은 '인내하는 자'란 뜻이다[2] 비록 노예 출신이었지만 품행이 발라 존경받았고, 학식이 높아 메디나의 여성들에게 신학 강연을 할 정도였다 한다[3] 후세인과 그를 따르는 3백여 무리는 메카로 도주하다 전멸하였다. 이때 살아남은 무함마드 앗 나프스 앗 자키야의 동생 이드리스 후일 마그레브에 이드리스 왕조를 세운다.[4] 물론 표면적인 천도의 이유는 동로마 제국 정복이었다[5] 다른 기록에 의하면 무사가 죽지 않았고, 마흐디로 재림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하룬은 무사의 시신을 공공 장소에 전시했다고도 한다[6] 이맘이 죽은 후 그를 마흐디로, 자신을 '대리 이맘'으로 선포하면 결국 그 자신이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기 때문이다[7] 쿠파-나자프, 카르발라, 카지미야, 사마라, 마슈하드, 쿰, 쉬라즈[8] 불충하거나 배교한 죄. 또한 그로 인해 이맘의 행적을 드러내어 그를 감금에 이르게 한 죄[9] 후자의 경우 무사는 압둘라에게도 해보라며 도전장을 던졌지만, 후자는 거부하고 떠났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