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urice Pialat
1925년 8월 21일 - 2003년 1월 11일
1. 개요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스 영화계에서 이질적이며 풍운아적인 삶을 살다 간 감독으로 꼽힌다.2. 이력
1920년 로베르 브레송처럼 퓌드돔 주 출신으로 [1] 자전적 영화인 벌거벗은 유년에서 밝혔듯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가정 따윈 신경 쓰지도 않는 술주정뱅이 난봉꾼이었고 어머니는 삶에 찌들어 있어서 그다지 사랑받지 못했다고. 벌어진 입은 어머니의 죽음을 다룬 자전적 영화다.원래는 화가였다.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했다고 하며 [2], 명문 미술대인 국립장식미술고등사범학교에 합격해 다녔을 정도로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인기 없는 화가로 지내다가 미술을 포기하고 한동안 막노동 생활을 했다고 한다. 피알라 특유의 거칠고 냉소적인 성향이 어디서 짐작되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세대를 보면 알겠지만, 누벨바그 세대랑 동갑이며 영화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다. 단편 영화도 몇 편 찍어 주목받기도 했고 클로드 베리 같은 누벨바그 영화계 인사랑 교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장편 영화를 찍은건 누벨바그 열풍이 다 지나간 1960년대 말이었다. 심지어 성향도 누벨바그랑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프랑소와 트뤼포가 데뷔작 프로듀싱을 해주긴 했지만, 정작 피알라는 트뤼포 영화를 싫어했다. 데뷔작 벌거벗은 유년을 만든 뒤 400번의 구타의 연출론을 디스하는 영화라고 자인하기도 했다. 되려 나중엔 트뤼포랑 사이가 안 좋았던 장 뤽 고다르랑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데뷔작 벌거벗은 유년을 찍은 후 독립 제작사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하는데 비슷하게 포스트 누벨바그 감독으로 꼽히는 장 외슈타스가 두 편을 남기고 자살했다면, 피알라는 힘들게 영화를 만들었다. 늦깎이로 데뷔한데다 만드는 속도도 느려서 영화는 그렇게 많지 않고 영화 흥행이 잘 안되었던 편. 80년대부터 흥행 성적은 나아지긴 했지만, 비평가들도 적대적이어서 사탄의 태양 아래서는 역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중 논쟁적인 수상작을 꼽으라면 항상 꼽힌다.
1995년 유작 르 가르슈를 찍은 뒤, 신부전증 투병을 하다가 2003년 타계했다.
3. 성격
불우한 유년 시절, 힘든 제작 과정 등을 이유로 자의식이 강하고 독불장군적인 성격으로 유명했다. 언론이나 비평가들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들에 대한 불만을 딱히 숨기지도 않았던 편. 사탄의 태양 아래서의 황금종려상 수상에 불만을 품은 관객들을 향해 주먹을 들어올리며 “당신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나 또한 당신들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했던 일화는 상당히 유명하다.[3] 사후엔 그나마 재평가가 이뤄진 편.이런 성격은 촬영장에서도 배우들과 자주 충돌을 일으켰는데, 소피 마르소가 경찰을 찍을때 있었던 정신적 학대가 가장 유명하다. 당시 소피 마르소는 거의 울뻔했다고.
여성 관계가 복잡했다. 룰루(영화)는 각본가와의 관계에서 비롯되었으며, 마지막 부인인 실비 피알라 [4]는 불륜 관계로 시작했다.
4. 작풍
데뷔전까지는 그렇게 많은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하며 독자적인 성향을 지녔던 걸로 유명하다. 서사 자체가 무덤덤하고 건조하게 진행되며, 엄격한 형식을 갖춘 자연주의 영화를 만들었다. 여기다 장식을 다 빼버린 밋밋한 미장센도 특징. 전반적으로 존 카사베츠의 영향이 강하지만 카사베츠랑 달리 회화적인 엄격함도 자주 보인다. [5] 몇몇 영화는 대놓고 미술사조를 인용해 영화를 만들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폴 세잔, 툴루즈 로트렉 등 당시 인상주의 화풍을 그대로 가져와 적용시킨 반 고흐가 대표적. [6]로베르 브레송 언급도 자주 되는 편. 실제로 둘은 퓌드돔 출신으로 화가에서 출발해 영화계에 입문했으며 과묵하고 비관적인 영화로 유명해졌으며, 조르주 베르나노스 소설로 영화를 만든 바 있다.[7]
내용면에서는 냉소적이고 현시창스러운 경향이 강하다. 도덕의 문제라던가 생로병사의 추함, 인간 욕망의 너저분함, 관계의 무용, 사랑에 대한 냉소 등 불편한 소재를 거리낌없이 사용했다.
한국으로 따지면 김기덕과 포지션이 유사하다. 김기덕과 달리 극단적인 폭력과 섹스를 등장시키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화가 출신, 하층 계급의 삶과 욕망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 냉소적이고 현시창적인 내용, 자의식 강한 성격, 고립적인 영화 스타일로 영화계에서 배척받았다는 점 등이 어느 정도 겹친다.
제라르 드파르디유와 상드린 보네르가 페르소나였다. 특히 보네르는 피알라가 발굴한 배우로 이후 몇번 협업을 하기도 했다.
[1] 후술하겠지만 브레송하고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2] 훗날 진짜로 반 고흐 전기 영화를 찍기도 한다.[3] 아이러니하게도 관객들 반응과는 정반대로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 수상이 결정됐다.[4] 결혼 전 성은 당통. 모리스 사후에도 여전히 영화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모리스 타계 이후로는 알랭 기로디랑 협업이 유명하다.[5] 카사베츠는 다큐멘터리의 영향을 받아 핸드헬드와 클로즈업을 이용한 생동감 넘치는 화면을 선보였다. 피알라는 반대로 주로 카메라를 세워서 찍었다.[6] 정작 고흐 화풍은 제한적으로 반영되어 있다는게 아이러니.[7] 브레송은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를 영화화했고, 피알라는 '사탄의 태양 아래에서'를 영화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