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18 02:16:42

멕시코 아요트시나파 사범대학교 학생 실종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attachment/멕시코 아요트시나파 사범대학교 학생 실종사건/listadelosnormalista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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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학생 실종 사건3. 확대된 집회와 동맹휴업4. 12월 이후5. 커진 파문6. 이괄라 시장의 뻔뻔한 행보7. 집회 상황
7.1. 게레로 주 상황
8. 한국에서는9. 그 이후10. 같이 보기

1. 개요

스페인어: La desaparición forzada de Iguala de 2014
영어: 2014 Iguala mass kidnapping

2014년 9월 26일 멕시코 게레로주 아요트시나파(Ayotzinapa)[* 93번 국도를 타고 동쪽으로 가야 있다.]에 있는 라울 이시드로 부르고스 농촌사범학교[2] 소속 학생들이 같은 주 이괄라 델 라 인데펜덴시아[3]에서 교사 임용 차별에 대항해 시위를 벌이던 중 6명이 숨지고 43명이 실종된 사건.

이들은 하루만 이괄라에서 시위한 뒤 학교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지금까지도 행방이 묘연하다.

2. 학생 실종 사건

이 항목이 작성된 이유는 이 학교에 다니던 43명의 학생들이 실종되었고 실종 동기나 이후 행적들이 석연치 않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지역 경찰이 마약 카르텔연관되어 있기도 하고 게레로 주 자체로도 이미 독자적인 조직폭력배들이 활개를 치면서 일대 치안을 불안정하게 만들며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벨트란 레이바 카르텔의 하위조직인 게레로스 우니도스가 이 사건에 상당히 관여했다고 추정된다.

26일 이괄라에서의 시위 중 지역 경찰과 복면을 쓴 괴한이 발포하면서 시위를 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6명이 숨지고 43명이 실종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엔리케 페냐 니에토[4] 대통령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연방 경찰을 이괄라에 보내 지방 경찰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10월 4일에는 정체 불명의 구덩이 6개가 발견되었고 시신 28구가 발견되었다. 현지 검찰에 의해 28명은 실종 학생 중 일부로 추정된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10월 15일 DNA 검사결과 이들은 실종 학생들과 무관하다는 발표가 나왔다. 따라서 이 43명은 아직도 실종 상태다.

이후 멕시코 곳곳에서 지방 경찰과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는데 이는 나중에 사회 정의와 안전을 되찾자는 구호로 굳혀졌다. 각 학교의 동맹휴업까지 발생하여 집회로 이어졌다.

10월 26일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은 폭력 진압을 규탄하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70여년 간 제도혁명당(PRI)의 일당정치가 이루어지고 그 기간 동안 멕시코가 워낙 막장화되는 바람에 멕시코 국민들은 그에 대한 신뢰를 주지 못했다.

10월 27일에는 이괄라에서 17km 떨어진 코쿨라(Cocula)에서 시신들을 새로 발견했다. 이전에 학생 실종과 관련된 게레로 우니도스 조직 범죄단 단원 4명을 체포했고 이들의 진술을 바탕으로 수색해서 시신을 찾은 건데 실종학생인지의 여부를 조사했다. 그런데 코쿨라로 들어가려는 기자들을 민간인 복장을 한 사람들이 막아섰다.

실종 학생에 대한 수색이 계속되던 가운데 다른 공동체가 겪었던 공포에 대한 사실도 드러났다.

10월 30일에는 실종 학생 사건과 관련 있는 조폭 조직원 4명을 구속했다. 멕시코 정부는 실종자들의 사진을 각 일간지에 게재했으며 실종자 가족들은 정부가 이 사건을 '국가폭력'으로 조사할 것을 요구했다.

로헬리오 오르테가 마르티네스[5] 신임 주지사는 "학생들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과 갱단에 쫓기자 두 그룹으로 나뉘어 근처 야산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고 말했지만 이런 추정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세한 근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가 사건 해결 의지를 보이지 않자 한 실종 대학생의 부모는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아이들이 살아 돌아올 때까지 대통령이 하는 말이나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으려 한다"고 말하기도 할 정도로 불신이 강해졌다.

11월 7일 멕시코 검찰은 실종된 교육대 학생 43명이 갱단에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다른 기사 멕시코 검찰청 발표 동영상 (스페인어) 경찰과 함께 불법으로 시위 진압에 개입한 지역 갱단의 조직원으로부터 학생들을 코쿨라로 끌고 가 살해한 뒤 시신을 불에 태워 강물에 던졌다는 진술을 확보한 뒤 나온 발표. 현재 DNA 검사중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을 빨리 덮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나왔다.

11월 12일 프란치스코 교황"법적으로는 실종된 것이나 사실상 피살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발언을 했다. 이어 "이번 사건이 마약과 납치범죄 등의 이면에 존재하는 범행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며, 멕시코 국민과 슬픔을 함께 나눈다"고 밝혔다.

유전자 감식 결과 발견된 시신들 중에서 실종되었던 학생인 모라의 DNA가 검출되면서 2015년 1월 멕시코 검찰은 아요트시나파의 학생들이 전부 살해되고 불에 태워진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6]## 실종자 가족들은 수사 진행상황에 의구심을 보이며 검찰이 사건을 빨리 덮으려고 하는 것 아니냐며 불신했으며 국제연합에서 정의가 실현되게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등 멕시코 정부에 더 철저한 수사를 요구했다.##

3. 확대된 집회와 동맹휴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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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26일에 소칼로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국민궐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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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국립대학교 광장에서 열린 대규모 학생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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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 도시철도 3호선 코필코역에서 열린 학생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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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레로 주 연방 법원 앞에서 벌어진 시위 도중 방패를 들고 지나가는 경찰들.

2014년 10월 들어 멕시코 시티[7]를 포함한 각 시ㆍ주에서는 실종 학생들의 귀환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이후 시위 규모는 점점 더 커졌으며 2014년 10월 21일 사건과 연관된 아요트시나파에서는 실종 학생들의 귀환을 염원하는 집회가 열렸다.

10월 17일에는 멕시코에서 공부하던 외국인 유학생들이 자국 언어로 43명의 실종 사범대생 무사귀환을 바라는 비디오를 만들어 올렸다. 스페인, 볼리비아, 중국, 튀르키예, 네덜란드, 방글라데시, 그리스, 아일랜드, 프랑스, 보스니아, 태국과 영국 출신 학생들이 만들었다.

10월 22일에는 멕시코 국립 대학교의 각 학부에서 48시간 동맹휴업 찬반투표를 실시했는데 몇몇 학부는 가결된 반면 몇몇 학부는 부결되었다. 이날 오후와 저녁에는 레포르마대로와 소칼로광장에서 대규모 행진이 벌어졌으며 집회는 평화적으로 끝났다.

10월 23일부터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UNAM) 뿐 아니라 광역자치대학교(UAM), 멕시코시티시립자치대학교(UACM) 등 주요 국ㆍ공립 대학교 뿐 아니라 사립대학교, 그리고 누에보레온자치대학교(UANL), 몬테레이공과대학교(TEC) 등 주요 도시의 대학교까지 학생 시위가 확산되었다. 사실상 국공립 대학교는 모두 가담했다고 봐야 하며사립대학교까지도 가담하기 시작했다. 다만 국립과학기술학교(Instituto Politécnico Nacional, IPN 혹은 POLI)는 기존에 진행하던 학제개편 반대 운동의 여파로 인해 아요트시나파 사태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멕시코국립대학교 철학언어학부[8] 학생들은 멕시코시티의 간선도로인 남인수르헨테대로(Av. Insurgentes Sur)를 막았다.[9] 게다가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국립 인문계 고등학교 중 하나인 Prepa 5[10]와 과학인문학교라고 불리는 CCH[11][12]까지 동맹휴업에 가담했다는 풍문이 들렸다.

10월 26일에는 멕시코시티 소칼로광장에서 대국민 궐기대회가 열렸는데 43명의 실종자 이름과 나이, 출신지와 실종 전 행적이 각각 호명되었다. 예를 들면 "1. Jhosivani Guerrero de la Cruz, de 20 años, de Omeapa delgado, de cara espigada, de ojos rasgados apodado 'Coreano' camina 4 kilómetros de ida hasta la carretera para tomar el transporte y cuatro de regreso porque quiere ser maestro de primaria en su tierra Omeapa.[13]"라는 식으로 언급되었다.

멕시코 전역뿐 아니라 세계 곳곳으로 시위가 확대되었는데 미국 뉴욕, 영국 런던, 스페인 바르셀로나 등 주요도시에서는 43명의 실종학생들의 무사귀환과 사회정의구현을 요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일반적으로 각국 멕시코대사관 앞에서 열렸지만 한국에서는 체류하는 멕시코인이 적었는지 집회가 열리지 않았다. 심지어 주한멕시코대사관 앞에서도.

사실 멕시코 국립 대학교의 동맹휴업은 이전에도 한 번 있었는데 같은 이유에서였다.

10월 31일에는 아카풀코에서 또 한 번의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11월 3일에는 실종자 가족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다고 정부 당국을 비판했다. 다른 기사 이날 이괄라 주민들이 실종학생들의 귀환을 염원하며 멕시코시티로 행진중이라는 기사를 냈는데 아마쿠삭(Amacuzac), 알푸예카(Alpuyeca), 쿠에르나바카(Cuernavaca), 트레스 마리아스(Tres Marías)를 거쳐 멕시코시티 소칼로광장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전해졌다.

11월 5일에는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UNAM)와 광역자치대학교(UAM)이 또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이 말이 학생들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고 이것이 루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결국 실현되었다고 한다. 휴업기간은 학부마다 다른 것으로 알려졌으며 휴업기간은 다음과 같다.
  • 24시간: 멕시코국립대학교(UNAM) 의과대학(Medicina), 치과대학(Odontología), 화학과(Química), 수의대학(Medicina Veterinaria y Zootecnia), 심리학과(Psicología), 이스타칼라캠퍼스[14]와 제4ㆍ6 국립고등학교[15], 영화학교[16] 등.
  • 48시간: 멕시코국립대학교(UNAM) 공과대학(Ingeniería), 예술디자인(Arte y Diseño), 아카틀란 캠퍼스[17], 사라고사 캠퍼스[18]와 콰우티틀란 캠퍼스[19], 그리고 UAM[20]의 쿠아히말파캠퍼스[21], 사카테카스자치대학교[22] 등.
  • 72시간: 멕시코국립대학교(UNAM) 자연과학대(Ciencias), 철학언어학부(Filosofía y Letras), 경제학부(Economía), 정치사회과학부[23], 아라곤캠퍼스[24], 과학인문학교[25] 나우칼판(Naucalpan), 남부(Sur), 아스카포트살코(Azcapotzalco), 바예호(Vallejo), 국립음악학교(Escuela Nacional de Música), 제2ㆍ3ㆍ5ㆍ7ㆍ8 국립고등학교(Las preparatorias 2, 3, 5, 7 y 8), UAM의 이스타팔라파캠퍼스(Iztapalapa), 아스카포트살코캠퍼스(Azcapotzalco), 소치밀코캠퍼스(Xochimilco); 멕시코시티시립대학교[26]의 콰우테펙캠퍼스(Cuautepec), 델 발례캠퍼스(Del Valle), 역사지구캠퍼스(Centro Histórico), 베네베리타 국립사범학교[27], 베라크루스 베네메리타 국립사범학교[28], INBA 디자인학교[2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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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5일에는 멕시코 시티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이 사건에 항의하는 집회 및 시위가 열렸다. 레포르마대로의 독립기념탑에서 소칼로광장까지 가두집회가 열렸으며 도시고속도로인 외부순환도로(Anillo Periférico)를 막고 시위대들이 춤을 추는가 하면 멕시코시티 도시철도에서 선전활동을 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및 동영상. 이쪽은 별 불상사 없이 평화적으로 집회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폭력시위로 인한 불상사도 있었는데 이날 저녁 7시 반쯤에는 멕시코시티 메트로부스 1호선 시우다드 우니베르시타리아역(Ciudad Universitaria)에서 복면을 쓴 시위대들이 메트로부스에 타고 있던 승객을 강제하차시키고 화염병을 던져 역 전체와 버스 1대가 전소되었다. 그런데 대다수 멕시코인들, 특히 학생들의 의견은 방화범들은 학생이 아니라 UNAM대를 망치려는 프락치라고 한다.

11월 들어서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했으며 집회 현장에서 등장하기도 하고 관련 페이스북 페이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엔리케 페냐 니에토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글마다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해시태그인 #RenúnciaEPN라는 태그로 도배되었으며 7일에 열린 헤수스 무리요 카람(Jesús Murillo Karam) 검찰총장의 기자회견 중 "그만하자, 지쳤다"라는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처리를 제대로 안 한다고 멕시코 국민들에게 제대로 까였다.

11월 8일과 9일 사이에 대규모 집회가 열렸는데 이 과정에서 정부중앙청사 입구가 시위대에 의해 파손되기도 했다. 멕시코인들의 말에 의하면 시위는 평화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중간에 프락치들이 난입해서 폭력시위를 조장했다고 한다.

10일에는 아카풀코 국제공항시위대에 의해 4시간 동안 점거되었다. 게레로주 지역 대학생과 실종학생 가족 등으로 구성된 시위대 수 천명이 10일 오전 거리행진을 하면서 아카풀코 공항으로 몰려가 출입을 차단했다. 게다가 이 여파로 15일부터 17일까지가 멕시코 혁명 기념일[30]과 관련된 휴일에 아카풀코에 예약되어있던 140만 건의 예약이 취소되었다. 크리스마스에 예약된 사항까지 다 취소되었고 이 지역 일대의 관광산업이 휘청거렸다.

실종학생 가족들은 실종 학생들의 구명과 사건의 진상 파악을 정부와 수사 당국에 촉구하고자 버스를 타고 전국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2대의 버스에 나눠타고 각각 멕시코 북부와 남부를 돌았다.

15일부터 17일까지의 멕시코 혁명 관련 연휴를 다른 말로 "Buen Fin"이라고도 하는데 이 시기에 물건을 사지 말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몇몇 대형마트 입구에 시위대들이 도열하여 선전활동을 펼쳤다. 현재까지 확인된 게 광역자치대학교(UAM) 학생들이 멕시코 시티 이스타칼코(Iztacalco)에 위치한 동부쇼핑센터(Plaza Oriente) 입구를 막아서 농성을 벌인 것과 베니토 후아레스 구(Del. Benito Juárez)에 위치한 코요아칸 쇼핑센터 (Centro Coyoacán)에 들어가서 선전활동을 펼친 것이다. 사실 멕시코는 대체휴일제 시행으로 3일 연휴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아무 때나 "Buen Fin"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시기만 Buen Fin이다. "Buen Fin"의 유래가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인데 블랙 프라이데이가 미국 추수감사절 연휴 이후 첫 금요일을 뜻하는 말로, 1년 중 쇼핑센터에 손님이 가장 많은 날을 뜻한다. 이처럼 "Buen Fin"은 멕시코에서 쇼핑객들이 가장 많은 시기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대형마트와 쇼핑몰에서는 가격을 어느 정도 인하하고 구매 촉진을 위해 카드로 물건을 살 경우 무이자할부혜택 등 온갖 혜택을 내놓고 사람들 보고 물건 좀 사라고 선전한다. 일종의 경기부양을 위해서 실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과 관련해서 시위대들이 Buen Fin을 만끽하지 말자(= 이 시기에 꼭 필요한 생필품 외에는 사지 말자)고 여기저기서 선전했다. 사실 멕시코의 "Buen Fin"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따라서 몇 년 전에는 없던 현상이라는 것.

11월 15일 멕시코 정부는 4명의 수사관을 학교에 들여보냈다. "도난된 핸드폰을 확인하러 왔다"는 게 이유였는데 사실 그 핸드폰은 3일 전에 도난당했고 멕시코의 치안을 감안하면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다. 이 수사관들은 학생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학생들이 거부감을 드러내자 결국 수사관 중 1명이 공중으로 발포했다. 총탄은 다시 땅으로 떨어져 학생 1명과 개 1마리가 부상을 당했으며[31] 다른 학생 1명은 그냥 스치기만 했다. 당연히 학생들은 날뛰었고 이날 저녁 시위가 격화되어 학생들은 근처 극장에 부숴진 가구들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숨었다. 사실 멕시코국립자치대학교(UNAM)은 말 그대로 "자치"라는 말이 있는 만큼 정부가 설립한 학교이기는 하지만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학교이며[32][33] 당연히 당시 우남대 총장이었던 호세 라몬 나로 로벨레스[34]도 이 사태에 대해 엄청 격분하고 날뛰었다.

멕시코 혁명 기념일인 11월 20일에는 멕시코시티 소칼로광장 등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실종 학생들의 귀환과 안전한 멕시코 건설을 염원하는 집회가 열렸는데 이를 두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제2의 멕시코 혁명"이라는 말이 흘러나왔을 정도다. 소칼로광장에서는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의 인형을 불태우고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으며 푸에르토 아에레오(Puerto Aéreo) 지역에서는 멕시코시티 국제공항(AICM) 점거를 시도했고 주변 도시고속도로가 통제되었다. 한편 멕시코 정부는 멕시코 독립기념일인 이날 수도 멕시코시티 중심부에서 대규모 시위가 예상되자 매년 해 오던 독립 기념 퍼레이드 행사를 취소했다.

멕시코 축구리그인 리가 MX에서는 11월 26일 클루브 아메리카UNAM-PUMAS 경기에서 양팀 응원단들이 아요트시나파 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피켓을 펼치면서 응원전을 실시했다. 한 관중이 피켓이 찍히도록 펼치자 사실에 대해 은폐하기로 유명한 텔레비사 방송국이 이 피켓에 대한 내용을 내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4. 12월 이후

11월 20일 멕시코 혁명 집회 이후 산발적으로 집회가 열리고 있지만 아요트시나파 사태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점점 잊혀져 나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장 큰 이유는 12월에서 1월 초까지 널린 축제기간과 겨울휴가 때문이며 텔레비사 등 주요 방송국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을 멀어지게 하기 위해 온갖 술책을 사용했다.

체스피리토(Chespirito)라고 불리는 로베르토 고메스 볼라뇨스(Roberto Gómez Bolaños)가 11월 28일 향년 85세의 일기로 킨타나 로오칸쿤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멕시코 출신 코미디언으로 멕시코는 물론 중남미 전체에서 유명했다. 문제가 된 것은 그의 장례식이다.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배우인 그를 기리기 위한 무슨 행사가 필요하긴 한데 멕시코 제1의 방송사인 텔레비사에서 그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11월 30일 톨루카 국제공항을 통해 멕시코주의 주도인 톨루카에 도착한 뒤 멕시코 시티에 있는 아스테카 운동장까지 퍼레이드하고 아스테카 운동장에서 영결식을 한 뒤 외부순환도로를 통해 텔레비사 산앙헬 스튜디오까지 그를 운구했으며 그가 운구될 때마다 주변 주민들이 나와서 그의 넋을 기렸다. 텔레비사에서 그의 장례식을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해 그의 장례식과 관련해서 말이 많았는데 카를로스 푸엔테스 등 멕시코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 세상을 뜰 때도 그렇게 성대하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톨루카를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멕시코시티 - 톨루카 고속도로[35] 멕시코시티 주요 간선도로가 통제되어 시민들이 불편을 겪은 건 두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 모자라 텔레비사는 그를 기리는 특별 페이지까지 만들었으며 다른 방송과 신문사들이 가만히 있었는데도 텔레비사는 계속해서 체스피리토와 관련된 소식을 내보냈다. 그는 12월 1일에 비밀리에 안장되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안 수많은 명절들로 놓였다. 12월 16일부터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까지는 Posada 주간으로, 예전에는 종교적 색채를 띈 날이었으나 지금은 사실상 송년회를 이 시기에 한다. 하루 날잡아서 파티하고 피냐타(Piñata) 터뜨리는 게 주요 내용이다.

크리스마스부터 2015년 첫째주까지는 겨울휴가 기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카풀코칸쿤 등지로 놀러갔다. 그 기간 동안 대규모 집회가 열리지 않았고 관광지들도 나름 활기를 되찾았으나 12월 26일 칸쿤 호텔 존에서 집회를 하던 시민이 경찰에 체포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른 동영상 칸쿤이 세계적 관광지인 만큼 멕시코의 어두운 면을 감추고 싶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동영상을 보면 경찰이 불법 체포를 시도하고 있고 주변을 지나던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경찰에 항의하고 있다.

1월 둘째주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일상으로 복귀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거나 아요트시나파 사태를 재조명한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지만 2015년 1월 26일에는 사태가 벌어진 지 4개월 만에 한 번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이후 잠잠해지는 듯 싶다가 비센테 폭스 전 대통령이 2015년 3월 17일에 유가족들을 향해 "자녀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좋지만, 현실을 받아들여라. (Qué bueno que extrañen a sus hijos, pero acepten la realidad)"라고 말해 파문이 일었다. 이어 3월 15일 부로 노티시아스 MVS에서 해고된 카르멘 아리스테기까지 비난하여 빈축을 샀다.

3월 18일에는 일부 실종 학생들의 가족들이 유엔을 방문했으며 [36] 3월 26일에는 사건 6개월을 맞아 대검찰청 앞에서 집회가 열렸다.

5월 26일에도 경찰에게 화염병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으며 비슷한 시기 우버 논란으로 택시기사들까지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시위가 계속해서 일어나서 제도혁명당의 지지율이 급속히 떨어졌음에도 6월 중간선거에서는 제도혁명당(PRI)이 의석을 다소 잃고 득표율도 30%에 그치는 낮은 수준에 머물렀지만 연립정당[37]을 합쳐 과반을 넘어서는 승리를 거두고 말았다. 이유는 야당이었던 국민행동당(PAN)과 민주혁명당(PRD)이 알아서 나가떨어졌고[38][39] 국민행동당(PAN)과 민주혁명당(PRD)을 제외한 타 정당들과 무소속 후보들은 전국적인 조직력을 갖추지 못한지라 제도혁명당(PRI)에 맞서기에 세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최초의 무소속 주지사가 탄생한 것 정도가 성과다.

2016년 2월 11일, 2월 12일부터 17일까지 멕시코를 방문할 예정인 교황 프란치스코가 피해자 부모들과의 면담 일정을 취소했다. 교황이 더 많은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해명이 나오기는 했으나 교황의 신뢰도에 대한 타격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되기도 했다.

2020년 6월 당시 지방정부 공무원 등 46명에 대해 강제실종과 조직범죄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영장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9월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군 관계자와 연방경찰 등 25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2021년 1월에 군인 개입이 있었다는 증언이 인정되었다.#

국제 전문가들은 멕시코 당국이 사건 관련 증거를 조작하거나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실종된 43명 중 6명이 나흘간 생존한 채 창고에 갇혀 있었다는 정보를 확인했다며 "이후 6명은 육군 대령 명령에 따라 목숨을 잃었다"고 말했다.$

사건에 연루된 퇴역 군인들을 체포되었다.# 그러나 군 관련 인사들의 체포가 연거푸 불발됐다며 조사 절차에 의구심이 제기되었다.#

5. 커진 파문

멕시코가 워낙 막장인 까닭에 학생 실종 사건이 터지고 이에 대한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 등 정치권의 대응이 미온적이었으며 지방 정치권까지 마약 카르텔과 연결된 정황까지 나온 데다 멕시코시티 - 케레타로 고속철도 관련 비리까지 터져나오는 상황에 처하자 그동안 감춰져 있었던 비리가 파문이 되기도 했으며 일부 몇몇 사람들이 처신을 잘못하는 바람에 정치권까지 불똥이 튀었다.

11월 7일에는 상술한 대로 헤수스 무리요 카람[40] 멕시코 검찰총장이 기자회견 중 "그만하자, 지쳤다"라는 발언으로 영구까임권을 획득했다.

멕시코시티 서차풀테펙[41]에 위치한 멕시코 대통령 사저와 관련된 파문이 확산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멕시코시티 - 케레타로 고속철도 건설 컨소시엄에 참가한 한 회사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이것이 고속철도 입찰과 연관이 생기면서 파문이 커진 것이다. 이 집은 텔레비사(Televisa) 소속 드라마 배우이자 멕시코 영부인인 앙헬리카 리베라 우르타도 데 페냐(Angélica Rivera Hurtado de Peña)[42] 소유이며 파문이 커지자 멕시코 주요 방송사인 텔레비사(Televisa)에 넘겨진 것으로 밝혀졌다.

11월 11일 텔레비사 드라마 배우이자 앙헬리카 리베라의 딸인 소피아 카스트로(Sofía Castro)[43]"지금은 아요트시나파 사태에 대해 말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해 빈축을 샀다. 이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라틴 그래미 시상식에 참석했는데 이전 발언과 덧붙여 미국에 주재중인 멕시코 국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그는 시상식에 참석한 후 일절의 인터뷰도 거절한 채 현장을 급히 빠져나왔다.

한편 앙헬리카 리베라 영부인은 논란이 된 자신의 사저를 매각하겠다고 밝혔다. 동영상에서는 "25년간 배우 등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떳떳하게 돈을 모았고 이를 바탕으로 집을 샀다"고 밝혔는데 멕시코의 저명한 언론인인 카르멘 아리스테기(Carmen Aristegui)는 "컨소시엄에 이가그룹이라는 멕시코 기업의 계열사인 테야건설이 참여했고, 또 다른 계열사인 센트로 엔지니어링이 리베라 여사에게 금융 대출까지 해주면서 이 집을 지어줬다"고 폭로했다.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은 자신의 웹사이트에 재산을 공개했는데 재산이 37억원에 달했다.

6. 이괄라 시장의 뻔뻔한 행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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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이괄라 시장인 호세 루이스 아바르카 벨라스케스[44]와 그의 부인인 마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피네다 비야.[45]

전 이괄라 시장이 호세 루이스 아바르카 벨라스케스[46]인데 그가 왜 문제가 되었냐면 이 사건이 이괄라 시장의 지시가 발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장은 학생들의 시위에 자기 부인의 연설이 방해받을까 봐 경찰에 진압 명령을 내린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건 해결에 앞장서야 할 시장이 느긋하게 파티를 즐기면서 저녁식사를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는 증언이 있었다. 이들은 불리한 증언을 담은 기사가 본격적으로 쏟아져나오기도 전에 벌써 잠적에 들어갔다. 참고로 그의 부인인 마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피네다 비야[47]는 이전부터 부패 시장으로 알려져 있었다. 형제 중 일부는 마약 카르텔의 조직원이었다가 경쟁 조직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본인도 카르텔에서 크게 한 자리를 해먹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끝도 없이 불거져 나오던 상황이었다. 예를 들어 멕시코 진보 계열 일간지인 La Jornada에서는 시장 부인의 가족들이 마약 조직에 연루되어 있다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게레로 주는 전반적으로 낙후된 도시가 많으며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닫힌 사회의 나쁜 전형을 그대로 보여 준다. 그나마 나은 도시가 관광지로 유명한 탁스코, 아카풀코와 익스타파-시와타네호 정도이며 나머지는 멕시코인들 사이에서도 인지도가 낮다. 특히 아유틀라(Ayutla)나 틀라파(Tlapa) 쪽은 인지도가 더더욱 낮다.

게다가 시 경찰들의 부패상은 말 그대로 막장을 달리기 때문에 더 큰 문제가 불거졌다. 이런 곳에서는 마약 카르텔과 지역 경찰, 지역 정부와의 유착이 상당히 심하다. 따라서 경찰 병력들은 카르텔의 유혹 또는 협박에 넘어가는 경우가 있으며 정직한 경찰이 이들을 진압하려 들면 조폭들과 결탁된 경찰 프락치가 밀고하여 카르텔이 이들을 살해해 버리는 일도 부지기수다. 경찰의 봉급이 박봉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카르텔의 사업에 대한 거부감이 의외로 낮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세 루이스 아바르카 벨라스케스는 잠적함으로서 시장직을 상실했으며 후임으로 오스카 안토니오 차베스 피네다(Óscar Antonio Chávez Pineda)가 선출되었다.

10월 23일에는 게레로 주 주지사인 앙헬 아기레 리베로[48]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전격 사퇴했다. 그도 부정부패가 드러나면서 민심을 잃고 있었으며 실종 학생들에 대한 수색이 지연되면서 책임론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의회 표결을 거쳐 로헬리오 오르테가 마르티네스(Rogelio Ortega Martínez)가 임시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11월 4일 이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던 전 이괄라 시장 부부가 멕시코 시티 이스타팔라파(Iztapalapa)에서[49] 연방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한국어 기사, 스페인어 기사 게다가 이괄라 시장이 PRD 소속인데 멕시코에서 이미지가 좋지 않던 PRD의 이미지에 더 큰 타격을 입혔다.

PRI멕시코 혁명 이후부터 71년+α 동안의 장기집권으로 유명했던 정당이었고 잠시 자리를 PAN에게 빼앗겼지만[50] 2012년 대선에서 페냐 니에토 덕분에 왕좌를 다시 가져왔다. 물론 멕시코의 막장 정치답게 포퓰리즘의 끝판왕을 보여주는 선심성 공약을 남발해대고 깔끔한 이미지를 이용한 무차별적 홍보에 부정선거 의혹도 상당하다.

7. 집회 상황

이 사건으로 멕시코에 주재하는 한국인들도 많이 분노해 집회에 참가할 의사를 보였으나 당시 멕시코 법에 외국인은 어떤 방식으로도 국가의 정치 문제에 간섭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은 집회에 참가할 수 없어 결국 여러 국가에서 온 멕시코 교민들은 현장에 나가는 대신 SNS를 이용해 해시태그 #EPNBringThemBack, #Ayotzinapa#43ConVidaYa, #YaMeCanse[51] 등을 사용하면서 규탄하는 글을 업로드했다.

7.1. 게레로 주 상황

멕시코의 시위는 대한민국 같은 촛불시위를 생각하면 안 된다. 아주 잘해도 정부청사 하나는 에워싸고 그날 업무를 망치는 것은 기본이요, 심하면 군대도 출동한다. 평화 시위를 하는 곳도 있지만 워낙 정부가 말을 안 들어먹고 사람들 성격이 불같은지라 폭력사태가 일어나기도 한다. 아무리 멕시코 법률이 개정되어 외국인도 집회에 참가할 수 있다고 하지만 자기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곳에는 가지 않는 것이 좋다.

이렇기 때문이 이 사건이 터지자 주도인 칠판싱고와 사건이 일어난 이괄라는 완전 헬게이트가 열렸다.

이괄라 전 시장이 소유한 마트는 헬게이트가 되었으며 칠판싱고의 주청사는 싸그리 불에 타 잿더미가 됐다. 게다가 주청사뿐만 아니라 그냥 정부에서 운영하는 캠페인(게레로 쿰플레) 사무실에도 방화하는 등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물론 사건이 벌어진 아요트시나파, 이괄라에 여행객이 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52] 주재원이나 유학생 등 장기체류자들이 그 지역에 사는 친구나 친구의 가족을 보기 위해서 가는 경우만 가끔 있지만 당시에는 여행객이 게레로 주를 육로로 방문하는 것은 위험했다.[53] 멕시코 시티케레타로, 과달라하라에서 아카풀코로 가기 위해서는 멕시코 95D번 고속도로를 거쳐야 하는데 고속도로를 시위대가 점거하거나 메가 마르차(Mega Marcha)라며 수천명이 대로를 에워싸는 시위를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만 익스타파-시와타네호는 시위대 자체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경우 직통노선을 이용하지 않고 모렐리아나 케레타로를 경유해서 가는 것은 괜찮긴 한데 서쪽이나 북쪽으로 빙 둘러서 가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환승대기시간도 있어야 하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푸에르토 에스콘디도(Puerto Escondido)나 와툴코(Huatulco) 등 오아하카주 해안지역을 육로로 방문하는 경우에도 대부분 칠판싱고를 경유한 뒤 200번 국도를 타는 경우가 많은데[54] 이쪽으로 가려고 하면 ADO 계열을 이용해서 베라크루스 - 살리나크루스 쪽으로 돌아가면 된다. 와툴코까지는 알타마르나 ADO나 비슷하게 걸리더라도 푸에르토 에스콘디도는 ADO가 시간이 더 많이 걸리니 참고 바람.

여담이지만 시위대가 근처의 가장 대도시 아카풀코에 왔던 날 도시의 호텔 예약이 70%나 취소되었다고 그런데 10월 31일에 또 집회가 열렸다.

그나마 다행으로 게레로 주에는 한국인이 거의 살지 않는다.[55]

8. 한국에서는

멕시코가 마약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 일상적이라 일부 스페인어ㆍ중남미 전공자들 외에는 초반에는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11월 들어서 사건의 전말이 하나하나씩 밝혀지고 전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자 국제 면을 중심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하고 한국 누리꾼들의 분노가 싹트기 시작했다.

11월 11일에는 노컷뉴스에서 멕시코 한인신문 발행인을 연결하여 현지 상황을 생생히 전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이렇다 할 집회가 열리지 않았으나 11월 18일 인권연대와 노동자연대 회원들이 서울 한남동 주한멕시코대사관 앞에서 대학생 43명 실종 및 피살사건 진상규명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2021년 10월 31일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기사

9. 그 이후

이 사건의 영향은 10주기가 넘어서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회적 파장으로만 보면 멕시코판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에 준하거나 그 이상이다.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언론인이나 시민운동가, 성직자(특히 게레로 주 거주자)는 지금도 카르텔로부터 살해위협을 받고 있다.

이후 민주혁명당의 이미지가 매우 나빠져 AMLO콰우테목 카르데나스가 동반 탈당, 이 중 AMLO는 국가재건운동울 창당, AMLO와 그의 정치적 동지인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파르도가 연달아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10주기인 2024년 3월에는 진상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멕시코시티 대통령궁의 문으로 돌진할 정도로 시위가 격렬했었다. 특히 2024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 때는 PRD가 참패하여 존폐를 걱정할 기로에 놓여버렸으며, 결국 전국단위 정당 등록이 취소되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10. 같이 보기



[1] 2017년 3월 28일 아침 8시 47분 고시 기준으로 KEB하나은행 현찰 살 때 1MXN 61원 23전으로 100만 페소는 6123만원이다. 우대율은 얼마냐에 따라 다르다.[2] Escuela Normal Rural "Raúl Isidro Burgos"[3] Iguala de la Independencia, 이하 이괄라[4] Enrique Peña Nieto[5] Rogelio Ortega Martínez[6] 1명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DNA 훼손이 너무 심해서 감식이 불가능했다고 한다.[7] Distrito Federal[8] Facultad de Filosofía y Letra[9] 이들 학생이 주로 맡은 이유를 분석하면 멕시코국립대학교 본교(Ciudad Universitaria)는 남인수르헨테대로에 붙어 있는데 이 도로와 가장 가까운 학부가 심리학부와 철학언어학부다. 건축학부도 가까이 있긴 하지만 철학언어학부가 더 가까운 데다 철학언어학부와 심리학과의 위치가 메트로버스 독토르 갈베스(Dr. Gálvez)역과 가까이 있는 데다 EJE 10 SUR와도 교차하는 지점이라 건축학부의 위치에 비하면 교통의 요지다.[10] Preparatoria를 줄인 말로, UNAM 산하에는 Prepa 1부터 Prepa 8까지 있으며 모두 멕시코시티에 있다.[11] Colegio de Ciencias y Humanidades[12] Prepa 1~8과 더불어 UNAM에서 운영하는 국립고등학교. 멕시코시티에는 Sur, Oriente, Azcapotzalco, Vallejo 등 총 4개가 있으며 멕시코주에는 Naucalpan에 1개가 있어 이를 합하면 총 5개가 있다.[13] 1. 호시바니 게레로 델 라 크루스, 20세, 오메아파 출신, 마르고 갸름한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인들처럼 눈이 찢어진 모양을 하고 있으며,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위해 국도까지 4km를 걸어갔으며, 그는 그의 고향인 오메아파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14] Estudios Superiores Iztacala de la UNAM[15] Las preparatorias 4 y 6[16] Centro Universitario de Estudios Cinematográficos[17] Estudios Superiores Acatlán[18] Estudios Superiores Zaragoza[19] Estudios Superiores Cuautitlán[20] Universidad Autónoma Metropolitana[21] La unidad Cuajimalpa[22] Universidad Autónoma de Zacatecas[23] Ciencias Políticas y Sociales[24] Estudios Superiores Aragón[25] Colegio de Ciencias y Humanidades, CCH[26] Universidad Autónoma de la Ciudad de México[27] Benemérita Escuela Nacional de Maestros[28] Benemérita Escuela Normal Veracruzana[29] Escuela de Diseño del INBA[30] 원래 11월 20일이나 대체휴일을 적용하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월요일인 17일에 쉬는 걸로 했다.[31] 여기서 개 1마리가 부상을 당했다는데 주말만 되면 우남대 캠퍼스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바뀐다. 우남대 정원(학교에서는 Isla로 불린다.)에는 평일에는 학생들로 가득 차지만 주말에는 개들을 데리고 산책나오는 시민들이 많다.[32] 사실 멕시코에 있는 대부분의 국공립 대학교들은 "자치권이 있는(Autónoma)"이라는 말이 붙는데 이는 설립 주체인 연방정부 혹은 주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운영하는 학교를 뜻한다. 과달라하라자치대학교(Universidad Autónoma de Guadalajara, UAG), 누에보레온자치대학교(Universidad Autónoma de Nuevo León, UANL), 유카탄자치대학교(Universidad Autónoma de Yucatán, UADY)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다만 과나후아토대학교(Universidad de Guanajuato, UGTO), 킨타나루대학교(Universidad de Quintana Roo, UQROO) 등 일부 공립대학교는 주정부에서 설립한 대학이기는 하지만 UNAM, UNAL처럼 자치대학은 아니다.[33] 명사화된 "자치"는 스페인어로 autonomía(여성명사)라고 한다.[34] José Ramón Narro Robles[35] 과달라하라, 모렐리아 등지에서 멕시코시티로 들어갈 때 15D번 고속도로를 타고 들어오게 되어 있는데 이 도로가 통제되었으니 행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거나 저 멀리 케레타로 쪽으로 57D번을 타고 내려와야된다. 아니면 134번 국도를 타고 나우칼판을 통해서 간다거나. 15D번밖에 없는 라 마르케사는 그대로 고립되었다.[36] 비센테 폭스 전 대통령이 트집잡은 것도 이 사건이었다.[37] 멕시코 환경주의 녹색당(Partido Verde Ecologista de México, PVEM) 등이 대표적이다.[38] 국민행동당(PAN)은 집권기에 마약과의 전쟁에서 무능한 대처를 보인점과 함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관련한 전적이 있고 전술한 문제의 발언을 한 바센테 폭스 케사다 전 대통령도 국민행동당 소속이다. 게다가 2009년에 신종플루 (당시 돼지독감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가 돌았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않아 전세계로 퍼져나가게 한 원흉이기도 하다. 애초에 PAN은 구성원들이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중산층 이상의 보수세력으로 이루어졌다.[39] 민주혁명당은 사건의 원흉인 이괄라 시장과 게레로 주지사가 민주혁명당(PRD) 소속이라는 점 때문에 자당 단속도 제대로 못 하냐면서 지지층이 급속히 떨어져 나간 데다 고질적인 노선투쟁으로 인한 당내 분쟁까지 겹쳐서 상당수 계파가 탈당하여 따로 당을 차리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이런 판이라 선거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게 당연했고, 결국 사건이 발생했던 게레로 주에서는 제도혁명당으로 주 정권이 교체되었다.[40] Jesús Murillo Karam[41] 정확히는 Paseo de las Palmas 쪽에 있으며, 멕시코주 나우칼판 데 후아레스와 경계지점이다.[42] "앙헬리카"가 이름, "리베라"가 아버지 성, "우르타도"가 어머니 성이며 "데 페냐"는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과 결혼하면서 얻은 성이다.[43] 원래 이름은 앙헬리카 소피아 사인스 리베라(Angélica Sofía Sáinz Rivera). 앙헬리카가 첫번째 이름, 소피아가 두번째 이름이며 사인스가 아버지 성, 리베라가 어머니 성이다. 엔리케 페냐 니에토와 결혼했으므로 아버지 성이 페냐가 아니라는 것에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그의 어머니인 앙헬리카 리베라는 호세 알베르토 사인스 카스트로(José Alberto Sáinz Castro)와 부부의 연을 맺다가 이혼한 뒤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과 재혼했기 때문이다.[44] José Luis Abarca Velázquez, 오른쪽[45] María de los Ángeles Pineda Villa, 왼쪽[46] José Luis Abarca Velázquez[47] María de los Ángeles Pineda Villa[48] Ángel Aguirre Rivero[49] 체포된 곳의 동네가 Santa María Aztahuacán인데 겔라타오만큼은 아니지만 이스타팔라파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 중 하나인 메예왈코 근처에 있다. 인근에 IPN의 CECyT 7 (Voca 7) 학교가 있으며, 멕시코시티 버스 14멕시코시티 버스 112가 근처를 지난다.[50] "마약과의 전쟁"으로 유명한 칼데론 정부가 이쪽 소속이다.[51] 원래 Ya me cansé(나는 지쳤다.)라는 뜻이지만 멕시코 검찰총장이 이 말을 꺼낸 직후 멕시코 시민들이 여기에 항의하는 뜻으로 멕시코의 치안불안, 부정부패에 지쳤다는 뜻이 되었다.[52] 한국인이 게레로 주에 가는 일 자체가 별로 없다. 기껏해야 탁스코, 아카풀코 쪽만 간다.[53] 비행기로 아카풀코 정도를 방문하는 일은 괜찮았다. 아카풀코는 당시의 상황이랑 아무런 연관이 없기 때문에 시위대도 잘 안 온다.[54] 당장 알타마르를 이용하더라도 그쪽으로 간다. 사실 그쪽으로 가는 게 더 가깝다.[55] 탁스코 제외. 탁스코에는 한인상점이 아예 없는 반면 멕시코국립대학교 언어교육원(UNAM-CEPE) 탁스코캠퍼스가 있기 때문에 탁스코에 사는 대부분 한인들은 유학생들이다. 그런데 탁스코에는 시위대가 안 갔다.